[블루레이] 인셉션 (2disc)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조셉 고든 래빗, 마리온 꼬띠아르, 와타나베 켄, 킬리언 머피

 

 

영화는 '익스트랙션-추출'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는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생각-아이디어(기업 기밀 같은)를 탈취하는/추출하는 개념이다.

 

익스트랙션-추출에 반대되는 개념이 '인셉션-기입(주입)' 개념이다. 이것은 어떤 이의 꿈으로 침투하여 어떤 생각-아이디어를 기입(주입)하는 것이다. 추출에 비할 때 기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주인공 돔 코브는 인셉션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돔 코브는 사이토가 이끄는 대기업의 유일한 경쟁 기업인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의 후계자 피셔 2세에게 어떤 생각을 인셉트-기입/주입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피셔 2세에게 각인시켜야 하는 생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해체하라는 것이다. 사이토는 코브 일당에게 일을 의뢰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분'을 덧붙인다. 즉 만약 피셔 2세가 회사를 해체하지 않는다면 피셔-모로우 에너지 회사는 조만간 전지구적 차원에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이토의 이러한 언급은 곧바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지구적 규모의 독점과 착취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집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만약 피셔-모로우라는 독점 기업이 해체된다면, 그 자리에 대신 사이토의 기업이 들어서 에너지 산업을 독점하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어쨌든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생각(회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직접 주입하기보다는 아버지-아들 간의 관계에 착안하여, "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겠다"(1단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는 생각을 차례로 주입시키려 한다. 

 

이 계획을 이끄는 돔 코브 자신은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소중히 지니고 있다. 그의 아내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죽었으나 돔은 자신의 기억 내밀한 곳에 아내를 가둬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기억 속에 축조된 공간에서 "아내와 함께 늙어가기"라는 생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는 돔이 지닌 이상적 가족에 대한 관념인데, 동시에 전통적이고 낭만화된 미국의 가족 관념이기도 하다. 

 

돔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오해' 때문에 아이들이 있는 미국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다. 꿈 속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그에게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가 보이는데, 이러한 광경 및 이 광경에 뒤이어 나타나는 아내가 그 자신 및 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을 방해한다. 즉 아내는 그의 투사체로서 꿈-세계에 나타나 임무를 꼬이게 만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돔의 투사체인 아내-아이들이 암시하는 바,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가 돔에게 (또한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이미 오래전에 주입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미국의 가족 이데올로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 "홈 스위트 홈"의 이미지는 아이들의 행복한 한 때로 표현된다. 이것은 아버지 돔의 꿈 속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그는 아이들의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으며, 그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도 아이들은 반응이 없다. 또한 "홈 스위트 홈" 아이디어는 "아내와 함께 늙어가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과 (림보에서) "회한에 빠져 외로이 늙어가는 것"의 차이는 사실상 없어보이기도 한다. (한편 극장 관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는 미국인 관객들이 보기에는 돔 코브라는 인물 자체가 일종의 투사체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와 연동되고 공명하는 아이디어로서 돔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켜야 하는 아이디어인 "대기업을 해체시켜야 한다"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국가의 역량과 범위를 초월한 초거대기업(또는 금융기업)은 내수시장을 파괴하고 지역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으며, 고용을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정'을 해체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난받고 있음을 염두에 둘 때 그러하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에서 세계화-대기업 vs. 가족주의(& 그것을 보강, 장려하는 국가) 구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요사이 국가의 역할이 새삼 재고되고 있으며, 국가의 '제' 역할에 대한 요청이 제고되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

 

즉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심각하게 와해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강력한 위협에 노출되어갈 오늘날 미국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와해된 가족 이데올로기를 회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또는 가족의 와해가 오늘날 필연적이라면 그에 대해 우리 각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가족주의의 오랜 동반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진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인셉션>은 이 질문에 꽤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으며, 이 문제를 어느 정도는 색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돔의 방식은 눈여겨볼 필요 있을 것 같다. 돔의 방식을 따른다면, (실제적인 복원은 아닐지라도) 가족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온전히 기능하고 있는 하나의 상상적, 가상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은 가능하다. 

 

자신의 내밀한 기억 속에 아내를 가둬 두는 돔의 모습은 현실의 인간 관계는 단절되었지만 게임 속에서는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고, 그 커뮤니티 안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확고한 정체성과 역할을 부여받은 게임 중독자나 (중독까지는 아니라해도) 싸이월드 트위터 블로그 등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는(동시에 거기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다른 한편 이는 "홈 스위트 홈"과 관련된 일종의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를 마음 속에 언제나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일련의 '향수영화' 등 복고 대중 문화상품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노후 대비 보험 광고가 보여주곤 하는 전형적인 목가적 이상향의 이미지들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사실, 즉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시키려는 생각들("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보겠다"(2단계), "아버지는 내가 자기처럼 되지 않길 원한다."(3단계))이 다름 아닌 가족 이데올로기가 상대적으로 공고히 자리잡고 있던 시절(그래서 마음놓고 그 억압적 측면을 비난할 수 있었던 시절) 미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인셉션> 역시 일종의 향수영화로 볼 수 있다. 다만 많은 미국인 영화 관객들이 오랜 시간 극장에서 주입받아온 "홈 스위트 홈"의 아이디어(가족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서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차이, 외화시켰다(밖으로 드러냈다)는 차이는 있고, 그런 면에서 지적이고 도전적인 영화라는 평을 받을만하다.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이 영화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와해와 그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으로 인한 위기감, 불안감에 충만해 있는 만큼, "내 생각을 누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조작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두려움 역시 도드라진다. 영화에서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조작하는) 생각이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어라. 너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임을 감안하면 이것은 묘한 충돌, 갈등을 발생시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폐쇄 무한(closed loop) 미로와 같은 모순과 역설을 발생시킨다.

 

 

 

 

 

즉 "나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스스로의 결심이 누군가에 의해 주입된 것이자 조작된 것이라면? 실제로 영화에서는 돔 코브 일당은 피셔 2세에게 이 아이디어를 '주입'시키는 데 성공하는데, 이러한 '가치관의 주입'이라는 설정이 영화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사회에서 가족 이데올로기와 함께 개인주의, 자율주의적 가치관들 역시 심각하게 와해되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건 꼭 미국사회만의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특징적인 사회적 현상은 소위 '멘토'로 지칭되는 글로벌 리더, 소셜 리더들(이들은 실제로 젊은이들의 아버지 세대다!)이 문화자본과 결탁하여 만든, '자기계발서'를 비롯한 뉴에이지 문화 상품들이 널리 팔리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치관을 바꾸라' '삶을 통째로 바꾸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라'는 식의 가르침이 실제로 젊은 층들을 대상으로 '주입'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인셉션>의 설정은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늘날 청춘들이 품고 있는 꿈--개인주의와 자율주의의 이상--이 요새 유행하는 각종 '자기계발' 관련 상품들과 프로그램들에 의해 '주입'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요컨대 코브 일당이 피셔 2세에게 주입하려는 생각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여러 자기계발 상품들을 통해 자발적으로(!) 주입받고 있는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 더. 나로서는 영화의 맨 첫 장면 돔이 림보에 빠져 회한에 차 늙어가는 사이토와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곧바로 드는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왜 림보 공간에 빠져 회한에 차 외롭게 늙어가면 안 되는가? 영화에서 왜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인 것처럼 묘사되는가? 오늘날 사회는 늙음의 문제, 즉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기업'과 엮인 일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각종 보험회사, 상조회사 등) 즉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극에 달한, 일상의 전면에 파고든 오늘날의 사화란 '돈' 없이는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조차 하나의 사치이자 행복인 사회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돈이 있다면 자신의 프라이버시 영역을 고수하면서(다르게 표현하면 '외롭게') 늙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림보라는 공간이 매우 아늑하게 느껴졌고, (아무 걱정 없이 그저 늙어가기만 하면 되는) 사이토가 부러웠다. 나는 이 첫 장면--그리고 이 장면은 (이후 밝혀지게 되는) 림보에서 돔과 그의 아내가 그들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함께 늙어갔던" 장면과 공명하기도 하는데--이 이 시대가 주조해낸 대중들의 기묘한 희망 내지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 시대의 대중들은 외부 세계와 차단된, 생계 걱정이나 파산 걱정 없이, 모험도 도전도 하지 않고, 그리하여 생존을 위협하는 어떠한 위험들에도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늙어갈 수 있는' 림보 공간을 열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로또나 연금 복권에 당첨된다면 그것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차라리 아무 생각도 없이 나만의 아늑한 공간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그저 존재하는 것(‘동물화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바로 그것이 폐쇄 무한 미로에서 탈출하는 유일한--유일한 건 아닐지라도 여러 선택지 중 '가장 매력적인'--방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 점을 ‘림보’의 개념 및 이미지가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이 시대에 '림보'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대중들이 품고 있는 특정한 형태의 유토피아적 열망이 투사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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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문학동네



 

 

 

 

 

 

 

위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ephigraph)이다. 서너 차례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는데, 그렇게 읽고 난 한참 후에서야 책의 맨 앞머리에 위의 제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출처는 <로마서>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서 구절의 출처는 <신명기>(32장 35절)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를 펭귄클래식판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민음사판에서는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인데 별 차이는 없다. 문학동네판 번역과는 뉘앙스가 좀 다르다. '내가 갚아주겠다'와 '내가 갚으리라'의 차이.

 

('복수는 나의 것'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때문에 가장 친숙한 문구여서 즉각 와닿는 데가 있다. 해서, 이 글의 제목을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라 붙여보았다.)


읽었을 때 위안이 되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내가 갚아주겠다'이다. 누군가, 그러니까 신과 같은 절대자가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복수심에 시달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복수심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자기 자신의 가장 어둡고 교활한 면을, '내 안의 괴물(!)'을 밖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결국 복수심을 극복하지 못한다. '내가 갚겠다'는 태도로 나서다가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하나인 <복수는 나의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Mr. Vengeance이다. 한편 또 다른 복수 3부작 <친절한 금자씨>의 영어 제목은 Sympathy for Lady Vengeance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는데, 그건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서 가문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무슈'의 대사다. 조상신들로부터 호출을 받고 소환된 '무슈'는 이렇게 말한다. Anybody's who's foolish enough to threaten our family, vengeance will be mine! 마지막 말을 해석하면, 곧 "복수는 나의 것!"이다.


Vengeance will be MINE...!!! GRRRRRRR......!!!


그런가 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복수심에 시달리는, 아니 단순히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복수심의 충족에 존재의 모든 것을 건 한 사내의 마음 상태를 잘 묘사한 바 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복수를 완벽하게 마치고 귀가했다."
- 도스토옙스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 93.


 

 

 

 

 

 

 

 

 

 

복수심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복수심 같은 것과는 엮이지 않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심은 부지불식간에 우리 마음 속에 찾아들어온다. 뿌리를 내리고 급속도로 자라난다.


<안나 카레니나>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같은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복수심이야 말로 무기력한 상태, 불활성의 상태에 반대되는,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게 해주는 어떤 '활력', 또는 '인간 의지'의 원천이 아닌가? '평정심'을 추구하는 레빈의 모습은 별반 매력이 없고 뭔가 현실감도 떨어져서 공감이 가지 않지만, 주체할 수 없는 복수심에 불타는 '안나 카레니나'의 모습은 정녕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
오늘날의 세계는 모두가 매일 밤 복수심에 불타는 세계다. 그러는 게 자연화된 세계, 당연시되는 세계다. 억울함, 모멸감의 정서가 우리의 마음을 매일 매일 갉아먹고 있다. 도토리들이 서로에게 품은 원한의 양과 질을 따지고 누가 원인제공자인지를 따진다. 그렇게 복수심에 시달리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정도의 일로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죽일 놈이)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복수심이 싹트면 일단 그 복수심을, 복수심의 그 불타는 갈증을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충족시켜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간혹,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이들이, 지식인과 논객들이 말한다. 진짜 복수심을 품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고. 하지만 그 대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공고한 결속을 자랑하고 있어서--게다가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그 공고한 결속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결국 다시금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성서는 경전이다. 경전은 한 사회의 윤리 감각을, 그것과 연관된 사법 제도의 실제(적어도 지향점)를 반영한다. 바울이 저 말을 인용했을 때, 바울은 신에게 무턱대고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한 것이 아니라, 즉 복수심을 내려놓고 신을 의지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정을 찾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대신 갚아주는 어떤 실제적인 권위(권위의 체계, 이를테면 공정한 사법 제도 같은 것)가 예전 유대인 사회에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권위를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형태로 회복해야할 필요성을 역설한 게 아니었을까.


권위가 사라진 세계에서는 '복수는 나의 것'이다. (박찬욱은 성서 구절을 앞뒤 맥락을 빼고 인용함으로서 복수를 인간의 것으로 제시해놓았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직접 나서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것의 극단적 양상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보여주고 있다) 만약 복수의 과업이 내 역량을 초과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갚아줄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톨스토이는 '복수는 나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의 맨 첫머리에 로마서에서 따온 문구를 제사로 집어넣은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복수는 나의 것'으로 당연히 인식되고 있는 세계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우리는 성서 구절 따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개인적으로야 경건한 마음으로 읽고 '마음 수양'을 할 수 있겠지만, 성서의 권위는 (이런저런 이유들, 굳이 시시콜콜 언급해봤자 피로감만 가중되는 이유들로 인해) 이 땅에서 떨어진지 오래다. 경전이 개인적인 힐링에만 기여하는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경전은 한 사회의 도덕적 지향점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경전 읽기는 그와 관련한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서는 그러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줍잖은 TV 프로그램조차 하는 '힐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괴물이 되어야 할까? '괴물'로 전락하는 게 싫다면, 안나를 모범 삼아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를 지향해야 할까? 이건 뭐 하나마나 한 말일 수도 있다. 복수 자체가 쉽지 않으며, '아름다운 복수의 화신'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복수심을 억누르고, 참고 또 참는 가운데, 서서히 (영혼 없는) 괴물-기계 혹은 (살아 있는 시체인) 좀비로 변해가는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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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초판본 완역판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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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늠들Houyhnhnms의 언어에는 사악한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는데, 다만 야후들의 추한 모습이나 못된 성질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인들의 어리석음, 어린 자녀의 게으름, 자기 다리에 상처를 낸 날카로운 돌, 사나운 날씨나 이상기후 같은 것들을 표현할 때 ‘야후 같은’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흐늠 야후hhnm Yahoo 우흐나홀름 야후wh-naholm Yahoo 이늘흐믄드위흘르마 야후ynlhmndwihlma Yahoo라고 하고, 설계가 잘못된 집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한다.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느낌이있는책, 2011.

 

 

 

* 문예출판사본(2008)에서는 후이늠들의 말을 '흐은 야후', '흐나홀름 야후', '은름나윌마 야후', '은홀믄론 야후’라고 표기했다. 

 

 

스위프트는 분절되지 않은 소리인 말 울음소리를(책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아닌 말들의 ‘언어'이지만)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표기하는 데는 난점이 있음을 위 두 번역을 통해 알 수 있다. 스위프트는 h와 n을 많이 사용하면서 후이늠들의 말을 길게 늘여 표기했지만(이럴 경우, 후이늠도 후이흐느흠으로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h와 n, (w)를 묵음으로 간주하면 한국어 표기는 훨씬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스위프트의 알파벳 표기가 가져다주는 시각적 호소력이 반감된다. 

 

발음이야 h와 n을 묵음으로 간주하고 '은홀믄론 야후'라고 하더라도 표기는 '인흘름흐늠로흘른누 야후ynholmhnmrohlnw Yahoo'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후이늠들이 야후라는 존재에 대해 품고 있는 착잡한 경멸감--그것은 스위프트가 인간 존재 전반에 대해 품고 있는 경멸감이기도 한데--은 '인흘름흐늠로흘른누'라 표기할 때 더 잘 표현된다는 생각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쓴다. "단지 언어를 사용하고 벌거벗고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만 빼고는 후이늠 나라에 사는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무수히 많다." 

 

또 걸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타락한 야후의 왕국에서 그들을 개선하려는 어리석은 짓은 처음부터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실현 불가능한 시도는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실망과 절망감이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개선될 여지가 없음을 단언하며 책을 끝맺는다. 

 

야후들과 구별되지 않을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아니 실은 매일같이) 만난다. 스스로에게서 야후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도 일도 별로 없다. 다만 흐늠hhnm 이라거나, 우흐나홀름wh-naholm이라거나, 이늘흐믄드위흘르마ynlhmndwihlma라거나, 인흘름흐늠로흘른누ynholmhnmrohlnw라는 식으로 뜻모를 신음을 흐느끼듯 내뱉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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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로 필립 K. 딕 걸작선 2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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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없이 종사했던 별 볼 일 없는 직업들 중 즐거웠던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당시의 일을 곰곰이 반추해보곤 한다. 2105년, 데네브 항성계로 향하는 거대한 식민 우주선에서 배경음악 시스템을 맡아 운영했을 때의 일이다. 벤은 테이프 창고를 뒤지다가 <카르멘>의 현악 중주나 들리브의 가극 사이에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가장 좋아하는 5번 교향곡을 골라 우주선의 작업 칸막이나 작업 구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수없이 반복해서 흘려보냈다.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틀었다. 7번에 마음을 내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고, 여정의 마지막 몇 달에 이르러서야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 충성의 대상을 9번으로 옮겼다. 이후 그는 꿋꿋이 지조를 지켰다.

 

아마 내게 정말로 필요한 건 잠일지도 모르겠군. 벤은 중얼거렸다. 일종의 황혼 같은 삶에 침잠하는 것이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베토벤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아냐.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어! 행동에 나서서, 뭔가를 달성하고 싶어. 그런 욕구는 매년 더 절실해졌다. 그리고 매년 희망은 점점 멀어져가기만 했다.

 

[...]

 

신이시여. 벤은 생각했다.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우주적인 견지에서 본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마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그 부분은 이해해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 필립 K. 딕, <죽음의 미로>, 18-19.

 

 
소설 속의 벤처럼 나도 5번 교향곡으로 베토벤을 듣기 시작했다. 시작은 같지만 그 이후 순서는 좀 차이가 있다. 5번에서 3번으로, 그리고 6번으로 갔다가 9번으로 옮겨 갔다(간간이 7번과 4번을 들으면서. 1번과 2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적이 없다). 9번을 들을 때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졌던 건 비슷하다. 내 경우, 이 흥분 상태는 꽤 오랫동안(거의 한 달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그 후로는 (영화 <마지막 4중주>의 영향으로) 현악 4중주 14번을 듣다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고 있다.

 

클래식 라디오 채널을 듣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누구의 무슨 음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듣는다는 걸, 음악에 집중하지 않고 (당연히 발작적인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bgm으로 듣는다는 걸 뜻한다. 그런데 베토벤 교향곡에는 이러한 감상 태도가 통하지 않는다. 베토벤은 아주 단호하게 청자의 집중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 착안한다면, <죽음의 미로>의 인물 벤이 베토벤 교향곡을 스피커 시스템을 통해 작업 공간 곳곳에 흘려보냈는데 "묘하게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서술은, 그 '묘한 불평 없음'은 소설의 전체 구성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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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기쁨 1 - 음악의 요소들 음악의 기쁨 1
롤랑 마뉘엘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음악의 기쁨>이란 책을 조금씩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1권을 거의 다 읽은 이 시점에서, 내가 느끼고 파악한 몇 가지 점을 정리해두면 좋을 것 같아 적어놓는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리스너의 입장에서의 정리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기를.)

 

<음악의 기쁨>을 죽 읽다가 발견한 사실은 음악의 핵심 요소가 다음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1) 목소리, 2) 춤, 3) 악기.

(교과서에서 배운 멜로디, 리듬, 화성과 얼추 들어맞는다)

 

일단 이 세 핵심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나란히 세워보면 대강의 음악사를 그려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오직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다. '춤'과 '악기'는 배제되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며 춤을 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혹시 몰래 리듬 타나?)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16-17세기에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발레와 각종 춤곡이 유행하기 시작한다. (춤곡의 명칭은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방드, 지그, 미뉴에트, 부레 등으로 다양한데,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박자나 빠르기, 유래한 국가에 따른 것.) 그리고 또 오페라/오라토리오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다. 주지할 점은 춤곡에서는 음악이 '반주'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 어디까지나 '춤-몸의 움직임' 또는 아리아를 부르는 '목소리'가 메인 요소이고, 음악은 '반주'로서 춤이나 목소리를 지원하고, 그 효과를 부각하거나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목소리'와 '춤'이 메인이었던 시기를 거친 후에 비로소 '악기'의 시대가 찾아온다. 바흐부터 베토벤까지의 시기(그러니까 바로크에서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18-19세기)는 소나타, 모음곡(조곡), 협주곡, 교향곡, 퀸텟, 콰르텟 등 여러 형태의 '기악곡'이 발전을 거듭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는 연주자가 '악기'를 다루는 능력, 마에스트로로서 작곡가-지휘자가 각 악기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서로 조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하는 비르투오소 연주자가 등장한 시기이자,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악기 장인이 등장하여 (바이올린 등) 악기 자체의 가능성을 극대화한 시기이며, 새롭게 등장한 악기인 피아노가 (한계가 많았던) 하프시코드의 자리를 대체한 시기이기도 하다.

 

목소리, 춤, 악기라는 음악의 세 요소를 시간축을 따라 세워보았는데, 다음번에는 그 시간축 위에 또 하나의 평행선을 그려보고, 거기에 음악의 세 요소를 대입해볼 수 있겠다. 이 축에 '성과 속'(신과 인간)이름을 붙이면 적절할 듯 싶다. 

 

중세의 그레고리안 성가는 '목소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 목소리로만 이루어진 이 음악의 목적은 '신을 찬미하는 것'이다. 즉 이때의 음악은 인위적 조작이나 기교가 없는 것, 순수하고 금욕적인 것, 곧 (신=인간 동형설의 관점에서) '성스러운 것'이다.

 

그레고리안 성가에 비하면, 발레나 춤곡은 세속적 즐거움을 위한 것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춤을 출 때의 쾌감, 신나게 몸을 흔들거나 이성 파트너를 팔에 안고(또는 손을 잡고) 유혹적인 눈빛과 숨결을 주고 받을 때의 야릇한 쾌감에서 신성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임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새롭게, 그리고 뭐랄까 한층 세련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된다. 춤을 통한 자아의 발견이랄까.

 

그럼 기악곡은 어떨까. 모차르트 시기까지 기악곡은 대부분 왕족, 귀족들의 여흥을 위한 것, 기분전환용, 편히 즐길 수 있는 것, BGM에 가까운 감상용이었다고 한다. 물론 내적 형식의 측면에서는 복잡, 섬세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겠지만, '궁정사회'에서 기악곡은 여전히 왕족과 귀족들의 여흥에 봉사하기 위한 것, 그리고 왕족 및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에 이르면 음악 자체와 음악을 둘러싼 상황 모두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베토벤은 다른 누군가의 여흥을 위해, 혹은 (신이든 왕족이든) 다른 누군가의 영광을 드러내고 찬양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넘치는 감정과 사상을 토로하기 위해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을 통해 우리들 청자에게 전해지는 베토벤의 감정과 사상은 일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진다(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개인사를, 말하자면 그의 퍼스낼리티를, 혹은 퍼스낼리티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린다. 즉 그의 귀먹음을, 봉두난발과 형형한 눈빛을 떠올리고, '불멸의 여인'과의 관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담긴 감정과 사상은 개인적인 만큼 보편적이기도 하며,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청자는 문득 "아 내가 지금 숭고하고 신성한 어떤 것을 듣고 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베토벤은 스스로 신이 되는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위대한 단독자, 위대한 솔로 베토벤. 영원한 마에스트로.
아아 베토벤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사심 폭발)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건, 그 중에서도 베토벤을 애호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베토벤은 특히 나와 같은 '중2병 환자'들에게 어필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관절 음악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음악을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하는가? 음악은 신성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감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인가? 신나는 음악, 듣기 편한 음악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인가? 아니면 음악은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경지를 열어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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