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뿔(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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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소설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로가 가족이나 친구 이야기를 많이 다루니 말이지만 '아무리 가족이나 친한 친구라고 해도 서로 간의 완전한 이해, 소통,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입장 내지 시선이 먼로의 소설에는 존재한다.

‘분리’라는 단어는 <태워줘서 고마워>의 한 대목에서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그 뒤 몸에 찾아드는 나른함과 한기. 그리고 분리.”(158) 이 소설 남자 주인공의 내적 독백에 해당하는 대목인데, 이 장면에서 남자애는 좀 뜬금없이 라틴어 문장을 떠올린다. 근데 이때 그가 떠올리는 라틴어 문장 자체가 분리되어 있다. 전체 문장은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성교 후에 모든 동물은 쓸쓸해진다)”인데, 남자애의 생각을 따라가는 서술 속에서 ‘포스트 코이툼’은 아예 생략되어 있고,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는 서로 떨어져(=분리되어) 제시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정말 기법적으로 탁월한 서술인 듯하다. 서술 자체가 ‘분리’라는 주제를 강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여자애(로이스)와의 교육 격차를 생각하면 이 라틴어 자체가 그와 그녀 사이 ‘분리’를 암시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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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역시 '분리'가 주제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물들이 다른 인물과 눈을 못 마주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른 채 순수하고 외곬이어서 '답답한' 마살레스 선생님 같은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무슨 의도를 갖고 그러기 전에 눈이 자동적으로 외면한다.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로 밀려난 삶, 노답인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렇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살레스 선생님과 그녀의 장애인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다른 시선을 취할 수 있을지는 나 역시 자신이 없다. 물론 내가 그런 시선을 받을 때도 있을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우리의 정의로운 주체가 구성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짐짓 심각하게 따지면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자(인종, 성, 장애, 계급, 종교)를 차별하는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도 하고, 다름과 다양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말도 하며, (빈부나 지식 수준이나 외모나 그밖의 기타 등등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말들도 한다. (또 이런 말들을 앞세워 차별에 무감각한 사람, 올바른 삶, 사회 정의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신나게 비난, 풍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노력과 말들을 실제 현실에, 매일의 구체적인 일상에 적용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그런 ‘우리들’을 풍자하거나 훈계하면서 환골탈태를 촉구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현실, 우리들의 한계(그건 어쩌면 인간 본연의 한계다)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단절된 채로,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모르겠다. 그런 게 앨리스 먼로의 메시지는 아닐 것 같다.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정리가 꼭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레이먼드 카버 소설의 메시지를 (교훈적으로) 요약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써서 귀를 기울일 것’ 뭐 이런 식으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요약은 소설을 읽는 중에 우리가 생생하게 느꼈던 것들을 모두 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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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그림자의 춤> 마지막은 이렇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399쪽)

이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남의 인생, 남의 가치관을 두고 딱 잘라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심판’할 수 없게 만드는), 남의 삶을 두고 손쉽게 '딱하다'고 재단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경험들, 어떤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예술과 문학이 잠깐 동안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운 순간은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 즉 외교상의 공식 문서다. ‘외교상의 공식 문서’를 우리가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자명하다. 예를 갖춰야 한다. 카버가 체호프의 죽음 앞에서 '샴페인 마개를 조심스레 주워 챙기는 행동'을 통해 예를 갖추듯, 체호프가 자신의 소설과 희곡들을 통해 세상의 ‘등신들’에게 예를 갖추듯 말이다. 하지만 그 ‘저쪽 나라’가 보잘것없는 나라라면? 별 권력도, 힘도, 존재감도 없는 약소국이라면? 현실 정치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듯, 예를 갖추는 건 정말이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덧) 


작가 앨리스 먼로의 개인사 흥미롭다. 많은 소설들이 자전적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가장 훈훈했던(?) 사실 : 대학 입학한 10대 후반에 문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 20년 쯤 후 재회하여 결혼(첫 남편과 이혼 후 재혼)하여 평생 같이 산 것. 낭만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유행했던 말을 빌리자면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부를 수 있을까나... 뭐랄까 체호프의 '사랑'에 대한 입장을 현실에서 실현한 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개인사가 너무 맘에 들어 독서모임 때 멤버들에게 소개했는데 다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인상적이면서 묘하게 위로가 되었던(이해가 되었던) 사실 : 
1) 평생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2) 오랫동안 파킨슨병을 앓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오호, 아하, 저런, 흐음~을 반복했다. 

본받고 싶은 점 : 패션 감각이 뛰어나시다고. 

앨리스 먼로 소설은 한국에 3권 번역 출간 되어 있다. 몽땅 추천한다.



#막독 17기 #노답  

세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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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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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먼로의 <위안>이란 소설.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이 소설 뭐랄까 ‘주체적인 삶’의 한 단면을 서늘하게 보여준달까. 왜 흔히들 말하는 그런 삶 있지 않나, 이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성적인 인식에 토대를 둔 삶. 우리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도 마치 ‘제2의 자연’처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하나의 상. 

주체성에 관한 여러 담론들이 떠돈지도 오래다. 물론 ‘주체성’을 여러 맥락, 여러 층위에서 다룬 난해하고도 정교한 이론들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매우 단순화된 주체성이란 신화/당위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책을 읽더라도 ‘주체적인 독서’를 해야 하며, 소비를 하더라도 (광고의 기만술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도 마찬가지. 어떤 입장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도. 

삶의 전 과정, 전 국면에서 모든 판단과 결정이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이 신화. 이 신화 속에서는 내가 한 모든 판단과 행동의 책임 역시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물론 사회의 책임이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한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의 의식이 (고르게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달하지 못하고) 미성숙한 탓’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는 흘러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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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위안>에는 굉장히, 뼛속까지 주체적인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학교의 과학 선생이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그가 재직하는 학교가 시골 마을 학교여서 진심으로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는 창조론 지지자들과는 물론, 창조론도 하나의 설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해달라는 온건한 타협안과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다. 

그에게 진화론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진리다. 과학적으로 옳다고 증명된 사실을 부정하는 다른 입장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은 비이성적이다. 문제는 그가 그런 비이성적인 견해를 ‘그럴 수도 있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피곤하고도 적대적인(그리고 끝이 없는) 논쟁을 기꺼이 감수한다.

종교와 정치, 성차별 논쟁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란 얘기가 있다. 때로 논쟁이 붙을 때가 있는데, 이럴 때 그나마 훈훈한(?) 결말은 ‘그래 뭐 어쨌든 너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물론 그건 너와는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대화는 포기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이 과학 선생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해서 논쟁한다. 창조론을 믿는 학생 및 학부모와 논쟁하고,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는 교장과 논쟁하고, 가망없는 논쟁을 계속하는 게 안쓰러워 그를 달래려는 아내와도 논쟁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나요? 그게[창조론과 진화론 둘 중 무엇이 진리인지 하는 문제]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죠?”라고 말할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한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 그와 아내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러나 일단 논쟁을 하게 되자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둘 사이의 관계는 싸늘하게 식는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논쟁을, 자신의 이성과 과학적 진리를 사랑한다. 그는 창조론을, 그리고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진화론과 동등한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라는, 사람들은 각자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라는 타협안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나아가 인간 이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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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과 관련한 모든 면에서 주체적인 태도,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관철하고자 했던 과학 교사는 죽음도 그다운 방식으로 죽는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그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죽음을 준비하며 실행에 옮긴다.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신과) 은밀히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태도, 즉 거짓임을 뻔히 알면서도 어떤 희망을 가지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시종일관 냉정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누군가 곤경에 처하거나 사회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즉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죽는다. 

앨리스 먼로는 그런 남자가 죽은 이후 혼자 남겨진 아내의 모습과 행동을 그린다.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른다.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영혼이 남는다는가 하는 건 모두 기만적인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바탕을 둔 모든 종교적(=비이성적) 의례를 제거하고 이성적이고 유물론적인(?) 절차에 따라 단순하고 깔끔하게 장례를 치르라는 게 남편의 뜻이다. 아내는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싸늘한 한기를,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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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좀더 이어진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소설의 제목은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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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1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신준 옮김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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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는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파리, 모더니티>라는 책을 함께 읽은 적이 있다. 

그후 애정하는 학자가 되어 틈틈이 저서들을 찾아서 읽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힘들 때 하비의 책을 읽는 건 꽤 도움이 된다.  

그건 내가 힘든 이유가 주로 돈 문제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뭐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자본(주의)=돈'에 관련된 책들을 틈나는대로 읽어보곤 한다. 

내가=우리가 왜 이렇게 힘든지 그 이유라도 알고 나면 덜 힘들까 하는 심리에서인 듯.

('인식'에서 힘? 즐거움? 스피릿? 을 얻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명인 듯.) 

그런데 책을 읽는다고 해서 실제로 덜 힘든 거 같지는 않다. 

(알든 모르든 똑같이 힘든 듯. 외부 상황은 그대로니까.) 

다만 책을 읽고 나면 힘든 걸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진다.

최소한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거...

까놓고 보자면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힘든 때에 찾아보고 싶은 책이 있고 

그 책을 보는 게 실제로 힘이 되고 적어도 기분 전환이 된다는 건 그 자체로 큰 행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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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을 달래고자... (참가신청자가 1도 없어서 '한 책 읽기' 독서모임을 취소했다) 책을 읽었다. 


예쁘고 촉감 좋은 표지 및 그립감 좋은 두께 덕에 종종 펼쳐드는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말 그대로 맑스 <자본>을 강의로 풀어 놓은 책인데, 이 책 의외로 재밌다. 연륜 있는 저자가 중간 중간 이런 저런 사례, 에피소드들 들려주는 덕분인데, 특히 하비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재밌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예전에 자신이 자본 강의를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한 적이 있는데, 계획대로 진도를 뺄 수 없어서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나는 극도의 절망감에 빠진 채 거의 한학기 전부를 제1장을 읽는 데에만 소비했다." 그냥 애를 먹었다는 것도 아니고 극도의 절망감에 빠졌다는 거... 


아니 대체 왜 진도를 뺄 수 없었을까? 하비는 이렇게 쓴다. "(학생들이)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내가 보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에만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ㅋㅋㅋ 이런 대목을 읽으면 위안이 된다.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에 별 관심이 없음[혹은 제멋대로 들음], 하지만 그게 또 그리 절망적인 일만은 아님을 하나의 소설적 주제로서 훌륭하게 다룬 사례로 체호프를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어쨌든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다 못한 하비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여러분, 우리는 진도를 나가야 합니다. 적어도 노동일 부분까지만이라도 나가야 합니다."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안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가치란 무엇입니까? 맑스가 화폐상품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신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심지어 <자본> 독일어판을 들고 와서 (영어) 번역본과 일일이 대조하기도 한다. 


나중에 하비는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이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자크 데리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는) 그러한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하비는 교육은 지식 소유자(=선생)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가르치고 설파하고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는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정말이지 매력적인 선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하비는 진도를 나가는 자신의 강의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하비가 "적어도 '노동일'까지는 진도를 나가야 한다"며 학생들에게 호소한 대목이다. 왜 하필 노동일일까? 궁금해서 읽어봤다. 총 25장인 <자본> 1권에서 '노동일'은 8장이니 초반 3분의 1 지점이다. 그런데 실제로 강의의 이 대목을 읽어보면(이 장만 따로 읽어도 된다) 왜 하비가 노동일까지만이라도 진도를 나가자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정말 재밌다. 강의자가 준비를 많이 한 대목인 게 보인다. 앞서 설명한 어려운 이론과 개념들이 이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맑스의 핵심 논지가 무엇인지 , 그가 당대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철저하고 세심하게 자본(및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했는지, 동시에 그러한 분석이 오늘날에도 충분히 유효한지, 그의 사상이 '혁명적'인 이유가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그러한지, 그리고 후대의 맑시스트 학자들(특히 푸코)이 어떤 지점에서 그의 유산(과제)을 계승했는지 등이 명확해진다. 더군다나 하비는 그걸 우리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쉽게, 다양한 사례와 에피소드를 들어가며 설명해준다. 그의 입장에서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충분히 초조해할만하고 학생들에게 서운해할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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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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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상황에 대한 이 솔직하고 깔끔한 태도는 몹시 골리니쉬체프의 마음에 들었다. 안나의 마음씨 착하고 쾌활하며 정력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안나의 남편]도 알고 있던 골리니쉬체프로서는 그녀라는 사람을 완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 자신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말하자면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들을 버리고 명예고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5부 7장 / 문학동네 2권 438쪽.


얼마 전에 지인과 체호프의 안나와 톨스토이의 안나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잠깐 나눴다. ('체호프의 안나'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사랑에 관하여>에 등장한다. 그밖에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아직 확인을 못했다.)

차후 더 디테일한 비교를 위해 일단 내가 파악한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성격을 정리해둔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simple(솔직하고 깔끔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full of spirit(쾌활하고 정력적인 모습)이다.

'솔직하고 깔끔한'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솔직하고 꾸밈없는'(작가정신), '직설적이고 솔직한'(민음사)라고 번역했다. 영어본에서는 'direct and simple'.

'쾌활하며 정력적인'의 다른 번역은 '유쾌하고 적극적인'(작가정신), '명랑하며 활기찬'(민음사), '명랑하며 열정적인'(펭귄클래식)이다. 영어로는 'spirited gaiety'(혹은 full of spirit).

톨스토이는 이 두 가지 성격적 특성, 즉 '솔직함'과 '열정'을, 개인이 사회적 억압(프레셔)에 맞서 '진정한 삶', '주체적인 삶', 혹은 '행복한 삶',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근데 이 두 가지 자질을 갖춰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소설에서 안나는 결국 자살한다. 물론 결과만 놓고 볼 일은 아니고, 어째서 그런 결말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거기에 어떤 함의가 깃들어 있는지는 따로 또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뭔가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숱한 문학 작품, 철학서들(그리고 요새는 인문학 강좌들)이 강조하는 게 바로 저 두 가지 자질이고, 사실 저 두 가지를 갖추는 것만해도 무척 힘든 일이거늘, 그걸 다 갖춘 사람도 결국 끝은 자살이라니. 그것도 극심한 신경쇠약에 이은 자살... 허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체호프가 흥미로운 것은 톨스토이가 강조했던 저 두 가지 자질을 (아마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인물들에게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체호프의 안나들은 (자신의 욕망/마음에) 솔직하지도 않고 당연히 열정적이지도 않다. 그런데 체호프가 놀라운 것은 이런 주인공 같지도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도(단편이니 가능했겠지만) 거기에 상당한 함의를,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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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 대목(내가 정말 사랑하는 대목이기도 한데)에서 톨스토이의 솜씨도 상당하다. 거장은 거장이다. 인용 대목은 소설 중반, 안나가 불륜의 대가로 모든 걸 잃은 상황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남편을 잃음과 동시에 사회적 평판을 잃었다. 이건 자신이 원하는 삶, 자신의 욕망/마음을 simple하게 드러낸 대가다. 사실 사교계에서는 모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아무도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쉬쉬한다. 하지만 안나는, 예의 direct and simple한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다. 오늘날 독자 입장에서야 이런 안나가 '존멋'이어서 '걸크러쉬'를 하고픈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안나가 속한 '세상' 입장에서는 괘씸하게도 사교계의 불문율을 어긴 셈이니 그 대가로 자연히 왕따를 당한다. 안나는 고립된다. 당대 러시아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거의 사회적 죽음을 당한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나는 full of spirit의 태도로 모든 걸 걸고 브론스키를 사랑하지만 그는 자꾸 안나의 사랑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부담스러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교계를 떠나 외국으로 간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 위 장면은 외국에 머무는 이 커플을 브론스키의 친구인 골리니쉬체프가 방문하는 장면. 이 사람은 여기서만 등장하는 단역이고 안나와는 거의 안면도 없다. '빙의의 천재' 톨스토이는 이 '단역의 시각'에서 안나를 바라보게 한다. 친구가 어떤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그 결과 안나의 (객관적) 처지가 어떠할지 잘 아는 상태에서 이들을 방문했을 골리니쉬체프에게는 안나의 현재 모습, 심리 상태에 대한 어떤 상식적인 기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안나는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그 상식을 단번에 깨뜨려버린다. 정말이지 '매력터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통해 독자는 안나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인인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게 톨스토이의 솜씨다. 그는 인물의 매력을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며, 그보다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안다.

그나저나... '한 책 읽기'(한 권의 책을 여러 주에 걸쳐 집중적으로 읽는 모임이다)에서 조만간 <안나 카레니나>를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이 오길 기다려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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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효용 -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에 관한 연구 질문의 책 5
리처드 호가트 지음, 이규탁 옮김 / 오월의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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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교양의 효용>이란 책이 번역 출간 되었다고. 저자 리처드 호가트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와 비견되는 학자인데, 중요도에 비해 한국에 소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나도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다... 


눈길을 끈 건 역시 제목. 교양의 효용이란 과연 뭘까...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히 눈길이 갔다. '교양의 효용'을 내 버전으로 바꿔 말하자면 이렇다. "세계문학을 읽는 것은 과연 무엇에 도움이 될까?" "독서모임은 과연 모임 참가자에게 무슨 효용이 있을까?"


한 발 양보해 '교양의 즐거움', '독서의 즐거움'이라고 표현하면(눙치면) 모두가 납득하기 쉽다. 교양을 즐거움, 즉 쾌락(혹은 허영)과 관련짓는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의 초반 스테판과 레빈의 대화가 그렇다. 


스테판 : 바로 그 점이야말로 교양의 목적이 아닐까? 모든 것에서 쾌락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레빈 : 그것이 목적이라면, 나는 차라리 야만인이 되겠네.


그러니까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을 빌려 교양을 (개인적) 즐거움하고만 연관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이제부터 소설 속에서 (레빈을 아바타 삼아) 1) 본격적으로 교양의 효용을 탐색해보겠다고, 2) 맨 뒤에 가서 그게 뭔지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는 셈이다. (근데 내 생각에 톨스토이는 1은 성공하지만 2는 실패한다... 최소한 나라는 독자를 납득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ㅎㅎ) 


그나저나... 책을 읽는 것은 과연 어떤 효용이 있을까. 앞으로 독서모임 홍보를 잘 하기 위해서라도 좀 정리를 할 필요가 있는 문젠데, 솔직히 즐거움 이상의 효용은 잘 모르겠다. 뭐 책 읽기의 효용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담론들이 있기는 하다. 시야가 넓어진다, 생각이 깊이가 깊어진다,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공감능력이 향상된다 등등. 그런데 내게 와닿지가 않는게 문제다. 오히려 반대로 책을 너무 읽어서, 혹은 문학에 너무 많은 가치와 우선순위를 부여해서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만 맴돌고, 책만 보느라 현실에서 타인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결과적으로 공감능력도 떨어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봤다. 스스로에게서 그런 낌새를 채고 깜짝 놀랄 때도 있다. 


뭐 여튼 그건 그렇고. <교양의 효용>에서 '교양'은 '컬처'가 아니라 '리터러시'의 번역이라고 한다. 읽고 쓰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문해력'이라고 옮긴다. 상당히 넓은 의미의 교양인 셈이다. 재밌을 것 같으니 일단 질러 놓고 틈나는대로 뒤적여보기로. 다음은 책 소개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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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트는 문화연구라는 학문 분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문화연구 전개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교양의 효용>은 20세 초중반의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는 책이다.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 음악,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책 등의 대중매체뿐만 아니라 일상 속의 가족의 역할, 남녀 관계, 술집 문화, 언어 형태까지 꼼꼼하게 조사했다. 호가트는 왜 문화연구자들이 노동자계급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더불어 노동자계급의 문화가 해당 시기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발전하며 변화하는지를 상세하게 밝혔다. 즉 이 책은 이후 잇달아 등장하게 될 영국 노동자계급 문화에 대한 연구의 효시라고 불러도 좋을, 문화연구 분야의 고전 중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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