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마지막 그림 - 화가들이 남긴 최후의 걸작으로 읽는 명화 인문학
나카노 교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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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은 그 예술가가 걸어온 삶이 도착한 지점을 반영한다. 긴 삶을 살았던 사람과 짧게 살고 간 사람들 사이에도 마지막 작품이 품은 의의는 차이가 크다. 떄로, 추하게 늙을 거였다면 일찍 죽은 것이 예술적 불멸의 원천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은 죽기 전의 삶을 말해준다. 죽기 전에 당도한 곳이 잠시 서늘한 그늘일 수도 있고 뜨거운 사막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 전부가 지나왔던 자취와 흔적은 죽기 직전까지의 삶 속에 녹아 있다. 그래서 긴 인생과 그 인생이 내놓은 작품들에 대한 이해 없이는 마지막 작품 역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의 마지막 그림>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15세기에서 19세기 사이, 시대를 대표하던 몇몇 화가들을 가려 뽑아, 그들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인생 속에 그림이 있고, 그 그림들 중 하나가 마지막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 연륜이 쌓이면 더 깊이 있고 완성된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노화가 가져오는 감각의 퇴행이 예술 작품 자체에 반영되어 퇴보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거기엔 어떤 규칙도 없다. 문학 작품만 하더라도 한 때 위대한 작품 하나로 반짝 세상을 놀래키고 세상의 이목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미술은 여기서 다루는 류의 근대 이전의 화가들의 경우, 그림 한 점만 그리고 그걸로 평생 먹고 살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그림 한 점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그리고 아마도, 그림 한 점을 그려서 세상에 이름을 알릴 만한 작가가 되려면 쏟아부어 습득해야 할 기술적 숙련도를 위한 비용을 그림을 그려서 뽑아야 했을 것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흔히 미술사를 중세,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인상파, 현대 등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기존 서적과 달리,  화가와 신, 화가와 왕, 화가와 민중 이렇게 세 파트로 나누었으며, 그 이유로 각 장에서 다른 화가를 다루더라도 동시대의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두 같은 경향의 작품만 열거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이렇게 기존 서적과는 다른 방법을 취함으로써 다양한 그림을 선보이고자 했다는 말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작가가 시대를 대표하고, 왕의 그림을 그렸던 역사적인 화가들을 다루고, 그 화가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그림들을 선택하다보니, 기존의 다른 미술 관련 서적에서 접했던 그림들이 다수 있다. 설명하는 방식과 주제가 조금씩 다르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큰 불만이 없다. 


신을 위해 그림이 존재했던 중세시대의 화가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엘그레코, 루벤스를 다룬다. 왕의 그림을 그렸던 궁정화가로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고야, 다비드, 비제 르브룅을 다룬다. 풍속화가로 브뤼헐, 페르메이르, 호가스, 밀레, 고흐까지다. 지금 세어보니 총 15명의 화가를 만나볼 수 있다. 각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의 배경, 화가들의 어린시절, 그리고 미술을 배우게 되는 계기에서부터 한 사람의 미술가로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 혹은 살아서는 끝까지 인정받지 못하고 단 한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던 루저로서의 고단한 삶을 만나보게 된다. 불멸의 작품을 남긴 미술가들의 영광은 유전자가 빚어준 재능이 선물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절대 군주제 하에 살았던 화가들은 왕실화가로서의 삶이 탄탄대로를 의미했기에,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회화가 왕후 귀족과 성직자, 또는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세대였다. 시대가 급물살을 타서, 혁명이 일어나거나 적들의 세상이 오면, 화가도 함께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는 역사화가 최고 등급의 지휘를 부여받았는데, 그 이유는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과 이해 등과 같은 폭넓은 교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학과 미술사 혹은 세계사적 지식이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장마다, 미술사적 지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유명한 화가들의 인생을 조명하고 있기에, 그림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작가를 먼저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짧은 전기들의 모음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세계사적 지식과 함께 결합되면 더욱 풍부한 지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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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와 넬 - 대작가 트루먼 커포티와 하퍼 리의 특별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7
G. 네리 지음, 차승은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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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다. 앨리바마의 시골 아주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낸 두 사람 중 한 명은 퓰리처 상을 받고, 또 한 명은 퓰리처상의 강력 후보가 되는 일은 그 힘들다는 로또 여러번 맞기나, 번개 여러번 맞기보다도 확률적으로 어려울 거 같다. 앵무새 죽이기에 보면 스카웃의 어린 시절을 엉뚱하고 개구진 추억으로 가득차게 한 멋진 친구가 한 명 나오는데, 그 남자가 바로 하퍼 리와 실제로 6~7(만)세의 어린 시절에 친구였던 트루만 카포티다. 아이들이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내 가며 역할 놀이에 빠져 놀고 모험을 즐기는 전반부의 내용은 <앵무새 죽이기>에서도 가장 재미있고 흐뭇하고 정겨운 장면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 어린시절이 하퍼리가 카포티와의 체험을 반영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만큼 이 책에서 트루와 넬, 그리고 그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여러 종류의 이웃들은 <앵무새 죽이기>에서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다른 버전의 <앵무새죽이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책을 받기 전에는 이 책이 두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추적해서 쓴 전기류라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소설이었다. 후기를 읽어보면 작가 G 네리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로, 트루만 카포티와 하퍼 리의 어린 시절에 관한 여러 자료에서 영감을 받아서라고 말한다. 이미 출판된 여러 서적과 매체를 통해 '알려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시 가공한 허구다. 카포티의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앵무새죽이기>에서 함께 등장하는 두 개구장이 꼬마들의 모습은 귀엽고 재기 발랄하다. 소설 속에서는 그들이 함께 한 짧은 시간들 속에서 함께 겪은 약간의 사건을 가지기에 그들이 후에 어떻게 만나고 관계를 이어져나갔는지는 후기에만 쓰여져 있다. 


완벽한 왕따 한 쌍이었다. 트루먼은 남자애들과 놀기엔 너무 세련되었고, 넬은 여자애들과 놀기엔 너무 말괄량이였다. 하지만 둘이 노는 것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하퍼 리는 넬이라고 불리고 트루먼은 트루라고 불리운다. 둘의 가정에는 각자 서로 다른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넬의 엄마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어 집을 비우고 요양중인 것으로 나오는데 우울증이거나 정신질환으로 추측된다. 형제로 언니들이 있지만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서 모험심이 가득한 넬에게는 아무 도움이 못된다. 이 때, 갑자기 이웃집 아주머니집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 트루는 엄마와 아빠가 이혼의 위기에 처해 있고, 26살의 어린 엄마는 아들 트루를 자신이 증오하는 남편과 동일시하여 냉정하게 군다. 엄마의 모진 불평을 엿들은 트루는 상처받지만 그럼에도 엄마 아빠가 자신을 데려가서 다시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고, 자신은 이모 삼촌들의 집에 맡겨진 것이다. 이모들은 아이를 따뜻하게 대하지만 친부모를 향한 그리움은 트루를 위축시킨다. 사내 아이 같은 넬과 함께 다니면서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마을의 사건들을 파헤치고, 말썽을 부리고,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먼 훗날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은 결국 트루 엄마의 재혼을 이별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뉴욕으로 가게 된 사실을 상심하는 트루에게 넬은 대도시로 가게 되어 진짜 세계에 살게 되고, 진짜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될 거라면서 격려하지만 넬은 "하지만 네가 없자나"라고 말하며 훌쩍댄다.


앵무새죽이기에서도 스카웃이 딜에 대해 느꼈던 거지만, 카포티는 이야기 만들기에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났던 것 같다. 작은 사건 하나 하나를 커다랗게 부풀려 어른들까지도 푹 빠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그것이 거짓인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귀기울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난 인물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하퍼 리는 그의 그런 재능에 영감과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토록 다른 성격의 아이 둘이 그토록 떼어놓을 수 없을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은 어릴 때부터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있었고, 책을 통해 서로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넬, 약속 하나 하자. 나 글 쓸 테니까 너도 글 쓴다고 약속해...

넬은 자기한테 트루먼과 같은 재능은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 개쯤은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p227)


작가 노트의 내용을 보면, 둘의 우정은 계속되었고, 먼저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커포티가 하퍼 리에게 글을 쓸 것을 권했고, 하퍼리가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만, 하퍼 리의 앵무새죽이기가 풀리처 상을 수상한 후, 자신의 '장황하고 자극적인 작품 세계'에 불만을 품게 되고 하퍼 리의 성공에 대한 질투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이후 카포티의 소설 <인 콜드 블러드>는 하퍼 리가 큰 도움을 주었던 모양인데 카포티가 그녀를 '비서 역할'로 격하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어떤 관계를 지속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카포티가 동성애자였으므로 둘이 연인 혹은 부부 사이가 되어 세간의 저렴한 호기심 속에서 조명되지 일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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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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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선현들은 많은 글을 남겼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 생각을 남기기 위해서다. 언어는 생각을 구체화시켜 준다. 문자의 다양한 조합은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생각을 연결시켜주는 강력한 기호 수단이다. 복잡한 말의 의미가 전달되려면 복잡하고 정교한 표현이 필요하다. 글이 모아져 책이된 이유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광범위한 공간과 시간을 살었던 사람들이 믿어오는 까닭이다.

책의 말미에 의하면, 쇼펜하우어는 글을 쓰는 사람엘 세 부류로 분류했다. 생각없이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사람, 생각 먼저 하고 글을 쓰는 사람. 첫 번째 부류는 일어난 일을 그냥 서술하는 사람들이다. 초등학생 일기쓰듯 어디갔고 뭐했고, 누구 만났고 뭐봤고 그런 거. 기록이다.  두번째 부류는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사색한다. 
세번쨰 글쓰기는 사색 후 나오는 걸 글로 옮긴다. 세 번째 부류 대부분은 그 사색을 위해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한 강력한 자극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세계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에서 나오는 독창적인 생각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글쓰기의 이유라는 말이다. 이 때 생각은 살아가는 이유,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지침으로 삼아 매 순간 나침반이 되어줄 자신만의 근본적인 가치관이 될 것이며, 그러한 생각을 옮긴 글이 한 개인의 고유한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하겠다.

멀리는 14세기경부터 가깝게는 20세기에 걸쳐 한중일 세 나라와 서양의, 문인으로서 뛰어난 저술 작품들을 남긴 학자, 예술가들을 공통된 특성을 한 챕터씩 묶어 주제별로 그들의 글쓰기 방법을 분석하고 비평한 책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비슷한 철학을 펼쳤던 동서양 글쓰기 천재들을 한 공간에 모아 연결해서 비교했다. 총 9개의 장을 통해 글쓰기 비슷한 비법을 공유한 한중일 세 나라와 서양의 문인 네 명의 글쓰기 패턴을 분석하므로 이 책을 통해 총 36명의 학자와 고전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 36명의 학자와 작가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점은 낡은 가치 체계의 모방과 답습에 저항하고 독창적인 사고를 통한 새로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장르를 개척하였고 이미 살았던 선인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창적 글쓰기룰 했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로 끝을 맺은 이유는 바로 독서와 글쓰기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이 수많은 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분석하여 이끌어나고자 하는 이 책의 궁극적 주제와 통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책만 너무 많이 읽으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주장을 했다고. 그는 인생론 원문에 "독서란 자기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생각해주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독서와 글쓰기에 따르는 사색을 강조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우리나라 고전은 단 한권도 읽은 것이 없다 . 반면 일본과 중국의 작가 중에는 나신과 소세키의 아큐정전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을 통해 살짝 접해본 적이 있다는 사실과 비교해서도 그렇다. 각 챕터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주로 서양인들의 저서만 읽어보거나 많이 들어 친숙했던 거다. 동양 고전에 취미를 못붙이는 이유는 자라면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서양적 학문과 세계관에 익숙해져서, 성리학적 사상이 깊이 배인 동양의 고전들을 읽을만한 내공이 갖추어지지 않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이유라면 또다른 이유는 원전이 현대 일상어로 쉽게 번역된 저서들이 흔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정민 선생의 책이 (비슷비한 게 중복된 내용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누군가의 리뷰로 읽은 적이 있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가 독해가 쉬운 말로 되어 있기 때문일 거 같다. 이 책 역시 대중서라 알기 쉽게 번역되어 있고 해설이 풍부하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알 수 없고, 사전에도 없어서 짐작으로면 넘어 가야 하는 단어들이 보이고, 특유의 고문어체와 만연체 번역체들이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부분이 보였다. 어리석은 핑계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서 단편적으로나마 글을 마주하고 나서야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을 알게 된 이옥, 심노승, 이용휴, 이가환 등은 물론이고 역사책에도 나오고 자주 고전 연구 서적에 등장하는 이익,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의 학자들의 매우 유명한 저서들 중 단 한편도 원전으로 읽은 책이 없다. 이들은 모두 유교적 사회의 위계질서와 사대부의 허위와 위선의식 속에서 잃고 있는, 개성 있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를 잘못 타서 문체반정으로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으며 스스로의 글에 대해 잘못했다는 반성문까지 써야했는데, 정조대왕님도 참 딱하시지 왜 그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모자라서, 단지 문체가 옛것을 모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유롭다는 이유로 똘똘한 학자들에게 반성문 같은 걸 쓰게 하고 어린 성균관 유생까지 귀양을 보내 못살게 굴으셨는지. 

중국에서 늘 영향을 받으며 사대를 시대의 가치관으로 종교처럼 믿고 살던 조상들이 문체마저 그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삼는 일이 일어났다면, 다른 나라, 중국, 일본 역시 글쓰기에 제약이 없지 않았을 리 없다. 캉디드를 쓴 볼테르는 풍자적 글쓰기가 왕조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으로 망명과 투옥을 밥먹듯했다. 걸리버여행기 역시 볼테르보다 30년 앞서 영국 태생의 조너던 스위프트에 의해 쓰여졌는데 인류 자체를 풍자한 전무후무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 밖에도 니체의 신의 부정, 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의 자족하는 여유로운 삶을 추구한 독자적 선택에 대한 삶의 방식과 그 기록들, 삶의 권태에서 벗어나 다시 글쓰기를 할 수 있게 했던 괴테의 로마 유적 답사, 마르코폴로의 동방 여행과 그 여행담이 나오게되기까지 포로로서 함께 하게 된 대필 작가와의 인연 등 많운 사연들과 그들의 글쓰기 전략들이 그들 개개인의 삶 속에서 조명된다.

동서양의 글쓰기 천재들의 글쓰기 방법이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글쓰기의 기술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흔한 말들과 글들 속에서 목적없이 떠도는 현대인들에게 왜 읽는지 또 왜 쓰는지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책의 유용성에 있어서 수많은 고전들을 직접 마주하고 그 상세한 설명과 함께 일일히 대면할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값지고 소중했다. 고전 해설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 소개하는 옛 글, 사상, 인물들이 다소 칭찬 일색이라는 점이 아쉽고, (내게는 반복되는 구절이 도움이 되었지만 ) 다소 중언부언하는 부분들을 좀 더 간결하게 편집했다면 두께를 줄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이만큼 많은 고전들을 하나의 책에서 다루고 특히 동서양을 오그며 함께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써 한눈에 문화적 차이와 동질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한점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작가 서문에 독자들이 완독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뉘앙스의 문장이 있는데 일주일 내내, 그리고 토요일 하루 종일 걸쳐 완독했다. 시간을 많이 못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인용문에 대한 설명이 인용문과 유사하고 비평이라기보다는 해설 방식이어서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688쪽에 판형도 큰 편 치고는 빨리 읽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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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
앙드레 모루아 지음, 신용석 옮김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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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인종이란 것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현재 프랑스를 구성하는 지역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이라 침략을 마무리하고 나와 침략자가 정착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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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켈트라는 민족 단위가 정말로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 고대 그리스 학자들은 북쪽 지방에 사는 야만족, 알프스산 너머에 있는 키가 크고 백색 피부에 금발인 종족을 통칭해 켈트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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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혈관에는 리구리아인과 이베리아인의 혈액에 켈트인, 로마인을 비롯한 기타 수많은 인종의 혈액이 혼합되어 흐르고 있다. 골루아라는 이름은 로마인이 켈트인을 지칭할 때 쓰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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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 로마의 무기로 골족을 정복하고 골족의 재물로 로마인을 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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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가 정복지의 지도자를 이용해 통치하는 방식이다. 로마는 합병한 민족에게 간단한 시민권을 부여하며..

33 
골 지방은  수세기 동안 로마의 일개 주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아키텐, 리움, 벨기에 3곳에 골 정부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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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모든 통치가 끝난 뒤에도 골 지방은 여전히 라틴어 문화권의 일부로 남았다. 이렇게 게르만 또는 발칸 민족과 갈로-로마인은 진정으로 로마와 동화되었다. 그들에게 처음 통합을 상징하는 갈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국경으로 삼게 한 것도 로마였고, 도로 구축, 부족간의 교섭, 고대세계의 문화등을 전해주고 정의와 법률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친 것도 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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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에게는 그들이 동경하던 로마제국을 정복하거나 파괴할 수가 없었다.

42
야만족이 정착한 지방에서도 여전히 갈로-로마인의 수가 침입자의 수보다 많았다. 하지만 이들은 내부 분열과 제국의 힘 약화로 침입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43
그들은 로마 귀족의 딸과 결혼 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고 로마화한 민족을 지배하려면 라틴어와 로마 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43
로마제국의 멸망 후 골 지방에는 조직적인 국가가 하나도 없었고 무장 군단만 존재했다.

44
프랑크족의 클로비스가 골 지방에 거주하던 모든 게르만족을 제압했고... 그리스도교는 골 지방에서 일종의 지속적인 통일을 유지했다. 클로비스는 이교도였지만 부르군트 족과 서고트족의 왕보다 오히려 교회와 쉽게 융화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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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동지를 살육하면서 왕국을 피레네산맥까지 확정한 클로비스는 (...) 로마 제국 멸망 후 그는 프랑크의 토지라고 해서 훗날 프랑스로 명명된 골 지방의 지역적 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국가의 정신적 통일의 전제조건인 왕권과 교회의 통합을 이뤘다. 나아가 그는 (...) 교황으로부터 로마 집정관이란 칭호를 승낙받음으로써 왕권의 영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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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티어리는 갈로-로마인의 후손으로 믿고 싶어 하는 프랑스 일반 대중을 프랑크족 후손인 이기적인 귀족 계급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것이다. 갈로-로마인의 대지주들은 메로빙거 왕의 주위를 둘러 싼 주교들과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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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빙거 궁전의 생활은 터키의 할렘과 노예 시장을 방불케 했다. 다고베르트 1세 왕(629-639)의 치세는 메로빙거 문명의 절정기로 이탈리아 스페인 게르마니아까지 관여했으나 이후로 메로빙거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하나의 구질서가 사라질때의 모든 시대처럼 이 시대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활개치는 암흑의 시대였다. 갈로-로마인은 이미 로마식 행정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야만족은 법질서를 파괴하고 모두 자신들의 관습을 주장했다. 그레고아르의 이야기에는 배신 밖에 나오지 않는다. 메로빙거 궁전은 창녀굴이고, 프레데공드는 굉장한 요녀다. 왕들은 모두 처자를 살해했고 누구나 얼마 되지 않는 금전에 매매 되었다. 이런 사회가 존속되기는 어렵다.

49
하나의 문명이 사멸하면 또 다른 문명의 탄생하게 마련이다. 게르만의 왕위는 선거제였으나 갈로-로마 지방은 세습제로 이는 로마제국의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왕이 사망하면 왕자들이 왕국을 분할 상속하는 제도 때문에 왕의 권력은 약해지고 국토는 여러 갈래로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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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통일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왕국의 영토는 한사람의 주교가 관장하는 주교관구로 분할되었다... 10분의 1 세로 교회 재산은 급격히 늘어갔다 10분에 1세는 카톨릭이 부활시킨 유대인의 제도로 신자가 수입을 10분의 1을 납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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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멸망과 행정조직 해체는 무서운 진공상태를 형성했고 그 공간을 주교제도 봉건제도 군주제도가 서서히 메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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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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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이유가 명백한 것에는 왜라는 물음을 묻지 않는다. 왜 그 어린 아이들은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하녀를 죽이고 싶었을까. 아직 뭘 모르는 아이들이 목욕을 빙자한 '성추행' 혹은 '성적놀이'에 대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이유가 아닌 것 같다. 쌍둥이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 어른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변태적인 성적 일탈을 그저 전쟁통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삶의 조건으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은 그 성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이득과 혜택을 영리하게 챙긴다. 독일군 장교가 그 아이들에게 채찍질과 같은 SM 변태 행위를 시킬 때에도 아이들은 폭력적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롤을 부여받는다. 웃긴건, 아이들이 행복했던 과거를 잊고 자신들이 처한, 그리고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때리고, 욕하는 방법으로 신체와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을 목격한 독일군 장교가 그 아이들의 행위를 성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역할을 자신에게도 시킨 것이다. 이건 코메디같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때리는 아이들, 그것을 목격하고 같이 놀자는 SM 변태 동성애자. 그렇게 채찍을 휘두르고 함께 피투성이가 되는 댓가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깨끗이 세탁된 폭신한 장교의 침실에서 뒤엉켜 자는 것이다. 자신들을 단련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 기법을 개발하는 똑똑한 아이들이 그런 것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씻기고, 냄새나고 더러운 빨래를 맡아 해 주던 신부의 하녀는 도대체 왜 아이들의 희생이 되어야 했을까. 아이들은 또한 어른들의 성적 욕망이 어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런 행위를 이용할 줄 안다. 동네 거지인 언청이가 그동안 신부에게 아랫도리를 보이고 먹을 것을 얻어갔던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언청이가 굶어죽을 처지에 처하자, 그 사실로 신부를 협박하여 돈을 얻어내고 그걸로 언청이를 기아로부터 구해낸다. 재밌는건 그 협박 건을 계기로 신부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신부의 책들을 빌려가서 읽고, 부모도 없이 의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신부와 부모를 대신할 만한 인간관계를 갖고 나름대로 여러가지 교감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선과 악의 경계
이렇게 전쟁터에서 선과 악은 마구 섞여 있다. 그 어떤 선도 악을 누르지 못하고, 그 어떤 악도 선을 몰아내지 못하는 곳이다. 아이들은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눈물겨운 선을 당연한 듯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언청이를 돕고, 신부를 돕고, 할머니를 돕는 일,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돕는 수많은 사람들 하녀, 신부, 독일군 장교와 보초병들.. 전쟁은 내가 가장 험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나보다 더욱 어려운 사람이 생기는 곳이고, 그런 곳에서 인간적인 선의는 그것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악과 상관 없이 자연발생적인 것인지 궁금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선과 악이 뒤집히고 경계 없는 하나의 혼란한 세계를 자신들의 세계로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선한 행동들은 그 후에 지속적으로 반전처럼 나타나는 아이들의 악마적 행동들과 대조를 이룬다.

작은 도시의 거리에 수용소로 끌려가던 굶주리고 헐벗은 유태인들을 향해 하녀는 자신이 먹던 빵을 줄 것처럼 내밀었다가 도로 빼앗으며 깔깔거리고 장난을 친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타고난 혹은 환경이 그들에게 준 가치관 속에서 그녀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더 심한 폭력이며 악랄한 악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러한 악에 대한 댓가로 정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련법의 하나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실험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그랬다는 정황적 증거는 있지만, 결정적 증거도 없고, '우리'라는 화자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 아이들을 믿고 싶다면 끝까지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다고 믿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은...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하여 국경을 넘을 계획까지 했을까.

어쨌든 하녀의 악은 아이들에게 베풀던 선의와 또다시 대조된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구박하고, 한때 남편을 죽였다는 혐의까지 있는 악마 같은 할머니는 사과를 안고 유태인들 무리 앞에서 넘어지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자신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몰리지만, 의도적으로는 그 사과를 끌려가는 유태인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행위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어떤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 악의 화신처럼 마치 잔혹 동화에서 아이들을 잡아먹을 마녀처럼 못된 마귀할멈같던 할머니와, 비록 아이들에게 목욕시키는 것을 빙자해 성추행을 하나, 천사처럼 아이들을 돌보던 하녀의 선과 악은 그렇게 간단히 뒤집어 지는 것이다.

우리, 그리고 둘 중 하나
우리는 소설의 시점에 따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1인칭일때, 소설은 보다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3인칭일 때는 전지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내려다보기에 객관적 입장에 서게 된다. 물론 내가 작중 화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겠만 시점은 소설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연작 소설 세 개를 하나로 묶은 국내에서 만든 세 스토리의 합산 제목인데, 그 첫번째 소설인 <비밀 노트>의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여기서 주어는 항상 '우리'다. '우리'는 쌍둥이 형제를 말한다. 그 둘은 같이 똑같이 행동한다. 둘은 심지어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두명이 각기 다른 행동을 한 것은 둘 중 하나가 이렇게 했고 나머지 하나가 저렇게 했다라는 식으로 기술된다. 둘은 한몸처럼 움직이고, 한몸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은 알 수 없다. 우리라는 주어에 소설이 묶여 있을 때, 소설에는 객관적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연설명하지 않는다. 헤밍웨이가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헤밍웨이를 한차원 넘어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생각조차 기술되어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왜'를 따지는 거다. 왜 소년들은 그렇게했는가. 그런 궁금증들이 넘쳐나게 된다.

헝가리에 전쟁이 터졌고, 아버지는 전장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국경 근처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마녀같은 할머니는 아이들을 혹독하게 다룬다. 아이들은 너와 나라는 개별 인격체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합쳐져서 서로를 의지한다. 똑똑한 아이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스스로를 단련시킨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질과 욕설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를 마구 매질하고 온갖 욕설을 함으로써, 그것들이 닥쳤을 때 참아나갈 수 있게 만든다. 심지어는 묵언 수행, 단식 연습에 생명을 죽이는 연습까지,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가장 혹독한 환경에 자신들을 몰아감으로써 살아남는 연습을 한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 있다. 그것은 포근했던 과거의 기억이다. 아이들을 향해 애고 내 귀여운 새끼들 이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그 달콤했던 전쟁전의 추억이 사무치고 그것들이 서로를 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 추억들에 무디어지기 위해, 달콤한 말을 회상해도 마음 아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서로를 향해 내 귀여운 새끼들과 같은 과거의 달콤한 말을 해보지만, 그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어떤 폭력보다도, 자신을 사랑했던 가족들과 깨끗했던 환경 속에 놓여지고 날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은 가장 극복하기 힘겨운 고난이었다.

국경 근처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국경은 탈출의 장소며 동시에 죽음의 공간이다. 바로 코 앞에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는데, 그곳은 지뢰로 덮여져 있다. 자유를 찾기 위해, 밟아야 하는 것은 지뢰고, 치르는 대가는 생명이다. 전쟁이 끝나도 폭력은 끝나지 않는다. 적국(독일군)이 조국 해방군(소련군)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그 살벌한 세상에서 아이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2부에 그려지는데, 거기서 시점이 바뀐다. 시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중 하나'로 바뀌었다는 소리다. 황폐하고 매정한 전쟁통에서 두 소년은 그들이 둘이기에 마치 끈으로 연결된 하나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지탱할 수 있었고, 또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장에 너무나도 수식어 하나 없이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 채택한 '우리'라는 주어는 나'보다 훨씬 더 따스한 느낌을 주는데 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생각이 통하는 하나처럼 따스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1편인 <비밀 노트>까지만 리뷰를 쓴다. 세 편의 소설은 독립적인 소설이기도 하면서, 연결시키면 복잡하게 얽히고 섥켜 풀어갈 수 있는 한편의 미스테리 소설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편의 소설에서 네 편의 소설을 읽는다. 세 개의 개별 소설과 한 개의 매우 긴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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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6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6-27 01:20   좋아요 1 | URL
인간이 없어야할 절대적 이유는 백만가지라도 찾아볼 수 있을 거 같아요. ^^

sb 2016-06-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또 새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CREBBP 2016-06-27 01:20   좋아요 1 | URL
저도 여러번에 걸쳐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