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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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이유가 명백한 것에는 왜라는 물음을 묻지 않는다. 왜 그 어린 아이들은 자신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하녀를 죽이고 싶었을까. 아직 뭘 모르는 아이들이 목욕을 빙자한 '성추행' 혹은 '성적놀이'에 대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이유가 아닌 것 같다. 쌍둥이들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 어른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변태적인 성적 일탈을 그저 전쟁통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삶의 조건으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은 그 성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이득과 혜택을 영리하게 챙긴다. 독일군 장교가 그 아이들에게 채찍질과 같은 SM 변태 행위를 시킬 때에도 아이들은 폭력적 상황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롤을 부여받는다. 웃긴건, 아이들이 행복했던 과거를 잊고 자신들이 처한, 그리고 앞으로 닥칠 어떠한 고통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때리고, 욕하는 방법으로 신체와 마음을 단련시키는 것을 목격한 독일군 장교가 그 아이들의 행위를 성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역할을 자신에게도 시킨 것이다. 이건 코메디같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때리는 아이들, 그것을 목격하고 같이 놀자는 SM 변태 동성애자. 그렇게 채찍을 휘두르고 함께 피투성이가 되는 댓가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깨끗이 세탁된 폭신한 장교의 침실에서 뒤엉켜 자는 것이다. 자신들을 단련하기 위해 혹독한 수련 기법을 개발하는 똑똑한 아이들이 그런 것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씻기고, 냄새나고 더러운 빨래를 맡아 해 주던 신부의 하녀는 도대체 왜 아이들의 희생이 되어야 했을까. 아이들은 또한 어른들의 성적 욕망이 어른들에게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런 행위를 이용할 줄 안다. 동네 거지인 언청이가 그동안 신부에게 아랫도리를 보이고 먹을 것을 얻어갔던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언청이가 굶어죽을 처지에 처하자, 그 사실로 신부를 협박하여 돈을 얻어내고 그걸로 언청이를 기아로부터 구해낸다. 재밌는건 그 협박 건을 계기로 신부와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서 신부의 책들을 빌려가서 읽고, 부모도 없이 의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신부와 부모를 대신할 만한 인간관계를 갖고 나름대로 여러가지 교감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선과 악의 경계
이렇게 전쟁터에서 선과 악은 마구 섞여 있다. 그 어떤 선도 악을 누르지 못하고, 그 어떤 악도 선을 몰아내지 못하는 곳이다. 아이들은 상상도 못하는 엄청난 악을 행하면서 동시에 눈물겨운 선을 당연한 듯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언청이를 돕고, 신부를 돕고, 할머니를 돕는 일,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돕는 수많은 사람들 하녀, 신부, 독일군 장교와 보초병들.. 전쟁은 내가 가장 험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더라도 나보다 더욱 어려운 사람이 생기는 곳이고, 그런 곳에서 인간적인 선의는 그것이 선천적으로 품고 있는 악과 상관 없이 자연발생적인 것인지 궁금하다. 아이들은 이렇게 선과 악이 뒤집히고 경계 없는 하나의 혼란한 세계를 자신들의 세계로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선한 행동들은 그 후에 지속적으로 반전처럼 나타나는 아이들의 악마적 행동들과 대조를 이룬다.

작은 도시의 거리에 수용소로 끌려가던 굶주리고 헐벗은 유태인들을 향해 하녀는 자신이 먹던 빵을 줄 것처럼 내밀었다가 도로 빼앗으며 깔깔거리고 장난을 친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타고난 혹은 환경이 그들에게 준 가치관 속에서 그녀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는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더 심한 폭력이며 악랄한 악으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러한 악에 대한 댓가로 정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아이들은 자신들의 수련법의 하나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실험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그랬다는 정황적 증거는 있지만, 결정적 증거도 없고, '우리'라는 화자가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 아이들을 믿고 싶다면 끝까지 아이들이 그러지 않았다고 믿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반전은...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용하여 국경을 넘을 계획까지 했을까.

어쨌든 하녀의 악은 아이들에게 베풀던 선의와 또다시 대조된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구박하고, 한때 남편을 죽였다는 혐의까지 있는 악마 같은 할머니는 사과를 안고 유태인들 무리 앞에서 넘어지는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자신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에 몰리지만, 의도적으로는 그 사과를 끌려가는 유태인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행위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어떤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 악의 화신처럼 마치 잔혹 동화에서 아이들을 잡아먹을 마녀처럼 못된 마귀할멈같던 할머니와, 비록 아이들에게 목욕시키는 것을 빙자해 성추행을 하나, 천사처럼 아이들을 돌보던 하녀의 선과 악은 그렇게 간단히 뒤집어 지는 것이다.

우리, 그리고 둘 중 하나
우리는 소설의 시점에 따라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주요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1인칭일때, 소설은 보다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3인칭일 때는 전지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내려다보기에 객관적 입장에 서게 된다. 물론 내가 작중 화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지겠만 시점은 소설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연작 소설 세 개를 하나로 묶은 국내에서 만든 세 스토리의 합산 제목인데, 그 첫번째 소설인 <비밀 노트>의 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다. 여기서 주어는 항상 '우리'다. '우리'는 쌍둥이 형제를 말한다. 그 둘은 같이 똑같이 행동한다. 둘은 심지어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두명이 각기 다른 행동을 한 것은 둘 중 하나가 이렇게 했고 나머지 하나가 저렇게 했다라는 식으로 기술된다. 둘은 한몸처럼 움직이고, 한몸처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은 알 수 없다. 우리라는 주어에 소설이 묶여 있을 때, 소설에는 객관적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부연설명하지 않는다. 헤밍웨이가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헤밍웨이를 한차원 넘어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생각조차 기술되어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왜'를 따지는 거다. 왜 소년들은 그렇게했는가. 그런 궁금증들이 넘쳐나게 된다.

헝가리에 전쟁이 터졌고, 아버지는 전장으로 나갔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국경 근처 할머니 집에 맡겨진다. 마녀같은 할머니는 아이들을 혹독하게 다룬다. 아이들은 너와 나라는 개별 인격체가 아닌 우리라는 이름으로 합쳐져서 서로를 의지한다. 똑똑한 아이들은 살아남아야 했다. 스스로를 단련시킨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매질과 욕설에 적응하기 위해 서로를 마구 매질하고 온갖 욕설을 함으로써, 그것들이 닥쳤을 때 참아나갈 수 있게 만든다. 심지어는 묵언 수행, 단식 연습에 생명을 죽이는 연습까지, 서로가 서로를 도와 가장 혹독한 환경에 자신들을 몰아감으로써 살아남는 연습을 한다. 그러나 극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슬픔이 있다. 그것은 포근했던 과거의 기억이다. 아이들을 향해 애고 내 귀여운 새끼들 이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그 달콤했던 전쟁전의 추억이 사무치고 그것들이 서로를 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 추억들에 무디어지기 위해, 달콤한 말을 회상해도 마음 아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시 서로를 향해 내 귀여운 새끼들과 같은 과거의 달콤한 말을 해보지만, 그건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어떤 폭력보다도, 자신을 사랑했던 가족들과 깨끗했던 환경 속에 놓여지고 날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은 가장 극복하기 힘겨운 고난이었다.

국경 근처 마을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또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국경은 탈출의 장소며 동시에 죽음의 공간이다. 바로 코 앞에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는데, 그곳은 지뢰로 덮여져 있다. 자유를 찾기 위해, 밟아야 하는 것은 지뢰고, 치르는 대가는 생명이다. 전쟁이 끝나도 폭력은 끝나지 않는다. 적국(독일군)이 조국 해방군(소련군)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그 살벌한 세상에서 아이들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2부에 그려지는데, 거기서 시점이 바뀐다. 시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중 하나'로 바뀌었다는 소리다. 황폐하고 매정한 전쟁통에서 두 소년은 그들이 둘이기에 마치 끈으로 연결된 하나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지탱할 수 있었고, 또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문장에 너무나도 수식어 하나 없이 건조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 채택한 '우리'라는 주어는 나'보다 훨씬 더 따스한 느낌을 주는데 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생각이 통하는 하나처럼 따스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1편인 <비밀 노트>까지만 리뷰를 쓴다. 세 편의 소설은 독립적인 소설이기도 하면서, 연결시키면 복잡하게 얽히고 섥켜 풀어갈 수 있는 한편의 미스테리 소설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편의 소설에서 네 편의 소설을 읽는다. 세 개의 개별 소설과 한 개의 매우 긴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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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6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6-27 01:20   좋아요 1 | URL
인간이 없어야할 절대적 이유는 백만가지라도 찾아볼 수 있을 거 같아요. ^^

sb 2016-06-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또 새롭네요! 잘 읽었습니다.

CREBBP 2016-06-27 01:20   좋아요 1 | URL
저도 여러번에 걸쳐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