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 컴퓨터가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5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엮음, 김일선 옮김 / 한림출판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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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튜링테스트는 기계가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테스트가 아니라 기계가 마음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일 수 있는가를 테스트한다. 물론 인지능력과 언어능력만 해당된다. 1. 사람이 질문을 하고 2.컴퓨터가대답을 하고 3. 사람이 다시 질문을 하면 네번째 대화에서 컴퓨터는 1과 2와 3의 내용을 기반으로 대답을 한다. 이것은 건배할 때의 선창과 같은 수준의 대화라는 비판이 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그렇다면 인간은?' 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가벼운) 대화하는 걸 잘 관찰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주제 하에서 깊이 있는 결론을 이끌어가는 경우보다는 바로 앞의 말과 그 앞의 말에 의해 다음 말이 결정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컴퓨터 저장 용량이 거의 무한처럼 보이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말뭉치의 연결관계는 무작위 대화 로봇앱이 사용하는 핵심 기술(?)이다. 이런 방법이 인간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다이알로그 말뭉치를 통으로 습득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가 대화할 때 다음 말을 이어가기 위해 쓰고 있는 표현이 사실은 몇개 안되는 관습적 표현들의 도서관에서 뽑아온 말뭉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기술로는 '기계가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리 의식을 구성하는 광대한 뉴런들의 수억의 조합이 수억분의 일초 내에 생산해 내는 정보처리의 용량과 방식은 인류 이전 작은 단백질로 생명이 시작되던 태고적부터 진화해온 시간만큼의 무작위 변이와 적응이 이루어낸 산물이므로 컴퓨터가 인간이 의식이라고 부를만큼의 지능을 가지려면 우리가 기대하거나 또는 두러워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뭘 모르냐 하는 것은 그 의식이라는 것, 홋은 지능이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생각인지 의식인지 뭔지가 아무튼 각자 인간에게 있는데, 그게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그게 무엇인지 그 구체성은 단지 언어로만 표현 가능하다는 거다.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네 속을 알겠니'다. 그런데 만일 기계와 대화하게 된다면, 그 기계가 생각을 말하는 건지, 말이 생각이 되는 건지 경계가 희미해질 거 같다. 두 사람이 대화할 때 온전히 언어 외적인 부분이 커뮤니케이션의 뭐 40프로라던가 60프로라던가 큰 비율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청소년들은  전화보다는 메시지로 주로 소통하고, 텍스트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전지구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언어외적인 신체적인 기호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의식의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라고 가정하면, 생각이란 것은 말이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이 원래 거기에 있어서 말로 표현하는 게 더 맞지만, 생각이 있다는 것의 증명은 말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이 만들어내는 행동이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99쪽)'. 이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철학자들이 말한다고 하는데 대화 상대가 어휘의 통상적 의미를 이호하는지 못하는지 본다는 뜻으로 위에 적은 내 생각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근본은 같다. 말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말할 수 있으면 무슨 말을 하건 간에 연결고리를 찾아 이해하는(혹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 사이의 생각 교환이고 소통이다.


제왕적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을 공주님처럼 모시고 싶은 '선한' 국민들은 대통령이 '혼이 비정상되고' ,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말같지 않은 말을 하더라도 혼이 뭐냐, 우주가 뭘 어떻게 도와주냐 제정신이냐고 따져묻지 않은 건 온국민이 따라서 그 영생교 귀신을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하는 말을 상식적인 차원에서 오독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이렇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된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보통의 국민들이 보통의 의식 속에서 '혼'은 귀신이 아닌 가치관이라던가 의지라던가 하는 대체되었겠지만, 그보다 더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대도, 그것을 각자의 안위 속에서 각자의 정치관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함과 증오 속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각자 다르게 혹은 비슷하게 넘겨왔던 거였다. 만약 그동안 했던 말들과 행동들 주변의 인물들의 행동반경 등에 대한 모든 빅데이트에서 문맥을 정상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똑똑한(딱딱한) 인공지능이  대통령의 말들을 분석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이 모든 불길한 징조를 일찌감치 간파하여 잔국민에게 비상경계주의보를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제가 샜다. 최순실이 이젠 내 몸과 마음까지 지배한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다.뒤숭숭한 마음을 정화하려고 가장 무관할 책을 읽어도 상념을 비껴가기란 쉽지 않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적 개념들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고 있는 책인데, 시기적으로 2012년에 나온 책인데 크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기사들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개념은 1950년과 1960년대에 정립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글들이 오래되었다는 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글들이 언제 쓰여졌는지는 밝혔어야 했다. 대화형 인공지능 유진이 튜링테스트를 통과한 지도 이미 몇년 전이고 세기의 바둑 대결에서도 인공지능이 승리한 마당에, 대화형 인공지능들이 튜링테스트가 통과하기엔 무식하다고 말하는 글들을 읽는다면, 그 사실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첨단 컴퓨터 분야의 책을 낼 때에는 이 부분에 대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올해 들어 인공지능 관련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라는 잡지의 과월호에서 인공지능과 관련있는 꼭지들을 골라 실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만 해도 이삼십여명 되고, 다루는 주제도 많다. 체계적으로 인공지능과 관련있는 것들을 분류해서 모든 부분을 골고루 다룬다는 점과 각 부분이 조금 구체적이라는 장점은 있지만, 이미 극복했다고 알고 있는 기술에 대해 뒤늦게 한계를 논하고 있는 책을 내는 것은 책 전체의 신뢰성에 의심을 가게 만들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가 뭔가 전문적으로 보이고, 저자들도 기자들보다는 대학의 교수진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어서 많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아쉬움이 더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두뇌에 해당하는 마이크로칩 기술은 그 크기가 원자와 분자적 수준에 달했을 때, 기술의 한계에 부딪힌다. 과학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을까. 앙자 컴퓨터, 바이오 컴퓨터, 분자 컴퓨터(유기물 회로), 광학 컴퓨터 등의 여러가지 대안이 소개되고 있다. 시장에서 밀려난 슈퍼 컴퓨터의 대안으로 소개되고 있는 대규모 병렬 처리 기법, 오래된 PC를 그물망처럼 연결하여 미니컴퓨터(슈퍼컴퓨터의 일종)를 만드는 베어울프식 클러스터링, 인터넷을 통한 개인용 컴퓨터를 대형 프로젝트의 수행에 유휴 시간동안 이용하는 그리드 시스템 등의 여러가지 개념들의 새로운 컴퓨터 기법에 대한 하드웨어 기술에 대한 소개가 유용했다. 인공지능 관련해서는 지능형 자가 학습의 원리 양자 컴퓨팅의 개념 및 한계, 광학 메모리를 이용하여 인간의 신경망을 흉내내는 광학 신경망 시스템, 과학자 로봇 기술과 아담이라고 실제 로봇 운용 사례 및 기타 여러가지 로봇의 기능과 한계 및 윤리적 이슈라던가 대화형 로봇의 의식의 문제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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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지음, 윤길순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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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느 민족, 어느 문화에서라도 음식이 모자랄 때 덜먹고, 양보하는 쪽은 대개 여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늘 양보의 아이콘이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혹은 기록 속의 문화에 소밥한 밥상 위의 새로 가득 푼 따스한 밥은 아버지를 위한 것이고, 아들을 위한 것이지 딸을 위한 것인 적이 없었고, 어머니 자신을 위한 적이 없었다. 

지금 21세기 일부 남성이 보기에 여성의 파워는 '지나치게' 막강해졌다. 일부 남성이 보기에 여성이 남성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 권력의 차지하는 일은 부당하고 참을 수 없다. 내가 젊었을 때는 어떤 남성은 여성이 '감히' 공공 장소에서 담배를 핀다고 모르는 여성의 뺨을 때렸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담배는 몸에 나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담배를 피던 시대에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는 일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담배 피는 친구가 있을 때에는 밀폐된 장소에서 만나야 했다. 

21세기에 많은 것이 변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된 지금이지만 공공 흡연 장소에서 여성이 담배를 피어도 누가 다가가서 뺌을 때릴까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밤길은 여전히 두렵고, 강간는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만, 여성에게 모든 기회는 활짝 열려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뒤늦은 페미니즘 논쟁은 오히려 핍박받던 시대보다 더욱 후꾼하다. 만연된 것인지, 일부 루저들의 커뮤니티 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 없는 여혐 현상이 전국을 강타하고, 참다 못한 여성들은 여혐을 그대로 미러링 하여 일상에서 여혐을 일삼던 남성들을 그대로 비추기를 시도했다. 여혐을 방관했던 죄없는 '착한' 남성들은 남혐에는 예민했다. 그들은 작은 성기 사이즈를 뜻하는 어느 커뮤니티의 로고에 대동단결하여 분노했다. 영원할 것 같은 진부한 개그 소재로 여성 아이돌의 작은 가슴 사진과 함께 절벽 사진이 매일 유머 랍시고 올라오고 여성 연애인들의 얼굴과 노출된 몸매로 늘상 떠들썩한 곳들, 스스로 진보라 생각하고 있는 '정의로운' 거의 모든 커뮤니티에서조차 메갈색출에 서슬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무엇이 그들을 분노케 했을까. 

여성이 하면 안되지만 남성이 하면 되는 일들이 많다. 남성은 안해도 되지만 여성이 안하면 안되는 일도 많다. 그 중 이제까지 여성이 좋아서 스스로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책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치적 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엄청난 규모의 산업과 숨겨진 계략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여성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신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도 없는 여성의 미, 여성성, 여성다움에 대해 새고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때로 지나친 비약이다 싶은 부분도 많았지만, 자각은 자극에서 시작된다. 

책의 초판은 1990년대에 쓰였다. 하지만 당시 저자 나오미 울프가 목격한 만연된 '아름다움이라는 신화'는 20년 후인 지금 더욱 심화되었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내 식대로 받아들이자면 이 책을 통해 나오미 울프가 주장하는 것은 여성은 사회가, 혹은 여성이 혹은 관습이 만들어낸 거짓말인 '아름다움의 신화'에 맞서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의 신화란 이런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객관적, 보편적 특성이 존재하며 여성은 그런 특성을 가지고 싶어하고 남성은 그런 특성을 지닌 여성을 원한다. 이러한 특성은 생물학적, 성적 진화론적 현상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을 두려워한 기존 권력에 의해 계속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얼핏 들어서는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여성이 바보인가, 예뻐야 한자 라고 남성이 말했기에 예뻐지시 위해 스스로를 가꾸기 위해 이제껏 쌓아온 여성의 위치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일부는 맞다. 불행스럽게도 말이다. 대략 챕터별로 6가지 정도로 각각, 일, 문화, 종교, 섹스, 굶주림, 폭력이라는 주제 하에서 어떻게 여성의 아름다움의 신화에 의해 다시 여성이 억압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일을 보자. 남성의 몸은 옳고, 여성의 몸은 그르다. 남성은 햇볕에 그을린 그대로의 생기있는 맨얼굴로 다니지만 여성은 18세가 지나면 노화가 시작된다는 시장의 논리에 천문학적 숫자를 화장품에 쏟아 부으며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 성숙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얼굴을 감추고 '교정'한다. 요즈음은 화장을 하는 시기도 빨라져 중학생 아이들도 화장을 하고 다닌다. 수많은 직업군에서 여성의 외모와 '여성스러운' 복장을 강요하거나 해고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용인된다. 손석희 와 함께 아나운서 공채 시험으로 입사했던 그 많은 예쁜 아나운서들은 지금 티브이에서 얼굴를 볼 수 없으면 뉴스 앵커들은 마치 규칙이라도 있는 것러럼 나이든 남자와 젊고 예쁜 여자와 짝을 이룬다. 서비스업이 고용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갈 수록 여성은 나이가 듦에 따라 일자리에 위협을 받으며 시대가 만들어 놓은 허상인 아름다움의 신화가 요구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뼈를 깎고 옷을 사고 얼굴을 바늘로 레이저로 찌르는 등의 아픔과 비용을 감수한다.

포르노에 쉽게 노출된 현대 사회에서 강압적 섹스(강간)과 사도마조히즘은 마치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 현상 역시 여성을 폭력에 무감각하게 한다. 강간과 같은 난폭한 성 문화를 비디오 등으로 릴찍부터 접하게 되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 학습되어 폭력적이고 난폭한 섹스에 더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다. 여성은 학습되어 가고 길들여져가고 있었던 거란 말인가. 날씬해야 한다는 아름다움의 신화는 천문학적 비만 시장의 논리대로 움직여 다이어트 열풍은 수십년째 식을 줄을 모르며 여성들은 19세기 이전에는 어느 문화에서도 미인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어느 허약하고 깡마르고 뼈가 드러나는 몸을 갖기 위해 스스로 건강을 해치며 굶고 병든다.

여성을, 얼굴을 수술과 화장으로 교정하지 않고, 몸매를 건겅하고 활기차게 유지하고 여성이 필요로하는 지방을 지니 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누가 아름대움의 신화를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여성들이 외모에 쏟는 시간과 돈 건강 등등을 이용해 반사 이익을 얻는 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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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0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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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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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 권력의 기록 1 랑야방
하이옌 지음, 전정은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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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연재했던 소설이라든데, 수없이 쏟아지는 인터넷 연재소설이 인기를 끌고 드라마로 제작되고 판권이 다른 나라로 수출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다른 종류의 무협지를 읽어보지 않아서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 소설은 황당한 액션이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시각적인 장면으로 떠오르는 묘사가 일품이고, 자칫 천편일률적이고 진부하기 쉬울 장르 소설의 캐릭터에 재치있는 입담과 상상을 앞지르는 사건과 행동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강한 개성과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번역은 유려했지만, 내 경우 한자어로 된 각종 지명, 제도, 나라이름, 단체 및 권력기관이나 무술 협회 등의 이름, 성들을 구분하지 못해 읽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시간을 허비했다. 게다가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고, 실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여러 중요 과거 인물과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누가 누구인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가 불분명하기에 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 주인공은 매장소이고 소설 내에서 현재의 주인공을 지칭할 때 거의 매장소라고 지칭하지만, 강좌맹의 대종주라는 표현과 강좌매랑이라는 표현도 나온다. 그래서 강좌맹은 또 뭐고 강좌매랑은 뭔가 궁금해하다보니 강좌맹은 천하제일 대방파라고 하니, 뭐가 뭔지 더욱 헷갈린다. 무협지를 자주 보거나, 한자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이런 이름들이 대략 무엇의 이름인지를 알 것 같지만,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짦막하게라도 각주를 붙여주었다면 무지 감사하게 읽었을 것 같다. 


700여 페이지 가까이 되는 거대한 소설이 전체 스토리의 1/3에 해당되기 때문에, 앞으로 두 권을 모두 읽어야 전체 내용이 이해가 가겠지만, 1편에서는 매장소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 데에서 끝을 맺고 진짜는 매장소가 자기 목적을 달성하게 될 2편과 3편에서야 만나게 될 것 같다. TV 드라마로도 했다고 하는데, IPTV의 드라마 다시 보기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유튜브에 자막없는 동영상들은 볼 수 있었다. 


매장소는 실로 여러 인물이 결합되어 하나의 인물이 된다. 성형 수술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시대라 얼굴을 뜯어고칠 수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인물이 되려면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까. 처음 부분을 읽을 때는, 매장소가 자꾸 역모에 희생되는 장면을 회상할 때, 본인이 그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의 기술로 자기 식구들도 못알아볼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액션신의 황당함을 생각하니, 물론 2편과 3편에서 밝혀질 일이겠지만, 변신술로 커버가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사실은 당시 성형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설정도 가능하겠다. 


랑야각은 돈만 내면 원하는 정보를 거래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매년 여러 분야 고수들의 순위를 매기는데, 이 순위는 절대적으로 신뢰된다. 태자와 예왕의 두 차세대 황제 후보가 치열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랑야방은 그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기린지재'로 등극시킴에 따라 두 후보 태자와 예왕은 앞다투어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그 과정에서 매장소의 의도대로 순위에 한참 밀려 아예 경쟁 대상도 되지 않는 우직한 정왕을 밀어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매력과 독특한 성격들을 나타내며 등장하는데 매장소는 처음부터 베일에 쌓여있다. 그것은 황자였던 아버지가 무모하고도 잔인한 왕권 다툼에서 역모로 몰려 그가 데리고 있던 7만 대군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매장소 역시 죽은 걸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모든 정교한 계략들을 어떻게 준비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천하여장부 예황과의 어릴 때 약혼자였음을 통해, 그들의 사랑이 각자의 삶의 목적의 뒤에서 어떤 비극적 결말을 보게될 지도 궁금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엄청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황제가 죽으면 태자와 예왕 중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어느 편에 서 있는지에 따라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앞으로의 영화가 결정되는 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상황도 곁다리로 펼쳐진다. 토지강탈사건에서 비롯하여 우물살인사건, 기방살인사건 등 여러 굵직 굵직한 사건이 발생하여 예왕과 태자의 주요 세력들은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사건들의 배후에는 매장소의 계략이 숨어있다. 계략은 일단 십여년 전 역모 사건에 대한 복수인데, 그 복수가 사사로운 복수인지 어떤 정의감 때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매장소 자체의 캐릭터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하고 냉철한 인물로 설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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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 22: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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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4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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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17: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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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8 2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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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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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총 6권으로 되어 있는데, 4~6권은 몇장 안되는 내용이 한 단원에 모두 들어있으므로, 대부분은 1~3장까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권은 혜경궁 홍씨의 집안 내력을 얘기하고, 간택되게 된 경위와, 그 때의 심경 등을 담고, 이후 궁에 들어와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적었는데, 이제껏 영화나 사극에서만 보던 궁중의 생활사에 대해 틈틈히 엿볼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임오화변(뒤주에갖혀죽은일)의 그 끔찍한 일들을 다 겪어낸 후, 맨 처음 자신이 궁에 들어왔을 때를 회상하며 한자 한자 써내려갔던 홍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중록의 1편에는 그녀가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옷도 변변히 못해 입고 1차 간택에 응했으나 왕후들과 궁정 식구들의 마음에 들어 듬뿍 사랑받는 모습이 더욱 마음을 짠하게 한다. 


정성 왕후와 선희궁, 여러 옹주들이 내 손을 잡고 귀여워하시니 황송할 뿐이었다.(10/126)


엄격한 법도와 예절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스킨쉽(?)이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왕실에서, 아직 세자빈으로 책봉되지 않은 민간인의 손을 잡고 귀여워했다는 모습은 당쟁의 세력 쟁탈전으로 인해 앙칼진 모습으로만 그려졌던 규중 궁궐의 여인네들의 참삶을 엿볼수 있게 한다. 2편에는 제 3자의 시각으로 조명한 아버지와 아들 그 자체다. 이 부분은 영화 <사도>와 거의 일치하는데, 사실 송강호가 연기를 너무 잘하기도 했거니와 그 때 나온 명대사들이 실제 실록에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못된 말을 들을 때 아들을 데려와 듣게 하고 귀를 씻거나 하는 등의 홀대는 아버지로서 폭력 이상의 학대다.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아주 잘 쓰여진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건데, 한중록에 나와 있는 아비의 아들 박해에 대한 내용은 <사도>보다도 심하다. 영화는 실록을 추려내야 했을 만큼 역사가(역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잔인했던 거다. 


홍씨는 1편에서도 그랬지만 2편에서는 '더욱 그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기록해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당시 이미, '사도가 병이 없는데 임금이 모함하는 거짓말을 듣고 그런 일을 했다는 소문'을 비롯해서 각종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던 모양이어서, 당시 세손이었던 순조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쓴 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덕일을 비롯한 노론 음모설이 사실이라면, 현재 '조울증으로 판단되는(나무위키 참조)' 사도의 광증을 아무 정신분석학 지식도 없던 혜경궁 홍씨가 지어냈다는 일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쨌든 나는 학자가 아니므로, 노론음모설은 관심없고 이 책을 있는 그대로 작가의 의도 그대로 읽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한중록 자체의 톤이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사도나 정조의 어린시절의 영특함에 대한 좀 황당한 과장은 있을지언정 매우, 진실을 덮기 위한 어떤 의도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호소력 짙고 진실되게 읽히기 때문이다. 


동궁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용모가 특출나셨다. 넉 달 만에 걷고(말도 안됨), 여섯 달만에 임금께서 부르시자 대답하고(옹아리였을듯), 일곱달 만에 동서남북을 아셨다. 두 살에 글자를 배워 60여자를 쓰고, 세 살에는 다식에 새긴 글자를 골라 가며 드셨다. (41/126)


이렇게 영특한 아이가 어쩌다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을까. 혜경궁 홍씨는 동궁이 '태어난 지 백일 만에 보모에게 맡'겨 어릴 때 부모님의 애정을 듬뿍 받지 못한 것을 '참혹한 일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름도 섬뜩한 저승전에 머물던 동궁을 영조는 네다섯살까지 아끼고 자주 찾아갔지만, 어릴 때 신동인 아이들은 부모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은 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진리인 듯하다. 이후 2부와 3부에서 계속되는 아들에 대한 아비의 증오와 아비에 대한 아들의 채워지지 않는 애정의 갈구와 두려움은 아들을 더욱 깊은 광적 수렁 속으로 내몬다. 


1년중 가장 추운 겨울 홍역이 채 낫기도 전에 눈쌓이는 궐마당에 석고대좌를 하고 앉아, 눈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눈을 맞으며 몇일 동안 앉아있던 일, 얼음 위에 앉아 석고대좌를 몇일 씩 하고도 머리를 짖찧어 크게 다칠만큼 자해를 하게 하는 일, 조용히 훈계않고 매일 남들이 모인 자리에서 흉보듯 아들에게 말하는 일, 좋지 않은 일을 들으면 귀가 더렵혀진다고 동궁을 앉혀놓고 대답을 하고 나면 귀를 씻게 하는일, 그렇게 비정상적인 아비가 임금이므로, 자식은 임금을 거역할 수 없던 자식은 미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듯싶다. 미친 세자가 나중에는 거의 가족들도 못알아보고, 연쇄적으로 궁궐의 사람들을 죽이고 난폭하게 굴었으므로, 그런 동궁에게 한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던 일. 조용히 폐위하여 외딴 섬에 귀양보내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이 때 한중록에 따르면 동궁을 없애야 하는 데 힘을 실어준 사람은 친엄마였음을 홍씨는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임금께 그렇게 요청을 했다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한다고 꾸중하시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한다고 화를 내시며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심지어 가뭄이 들어도 동궁이 덕이 없어 그렇다고 꾸중하셨다. 일이 이러하니 동궁께서는 날이 흐리거나 천둥이 쳐도 또 무슨 꾸중을 들을까 근심하고 염려하셨다.(54/162)


회고록이라고 하나,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증오와 망상, 아비와 아들의 그 애증의 관계가 엄청난 비극이었기에 웬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롭게 읽혔다. 번역 부분에서 한자를 어려워하는 나같은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현대어 및 자연스러운 문체 덕분에 가독성이 좋아서 쉽고 빠르게 읽힌다. 심지어는 오래된 사극에서 나오는 극존칭체 혹은 어려운 단어 같은 것도 배제되어 있다. 어차피 많은 독자들이 보기 위해 번역을 하는 것이라면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게 (나는) 좋다.


* 실제 읽은 책은 e북으로 모서점에서 무료 대여로 읽은 <한중록

: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한국 고전 및 사상 100선 - 동아출판>인데, 상품찾기에서 못찾아서 문학동네 판으로 상품을 대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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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의 눈 -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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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1984>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기억상실이라는 너무 막장스러운 테마가 앞쪽에 있어서, 뭐 이런 작품에 문학상을 다 주는건가 싶었는데, 조금 읽다 보면 <본 아이덴터티>에서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자아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살짝 보였고, 계속 책장을 넘기다보니, 기억상실이란 것은 이 작품에서 전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의 흐름을 엮기 위한 액세서리일 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사건이란 걸 알게 되면서, 현실과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중첩적으로 교차되는 1984가 생각나는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미래를 갖지 못한 어떤 굉장히 우울한 가상의 세계, 가상의 시대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매일 자살을 선택하고, 10%의 부자들이 1%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는 동안 나머지 90%들은 10%의 1%를 위해서 살아간다. 이야기의 전개는 사변적이고,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의미심장한 대화가 스토리를 끌고 간다. 흔히 감시의 시대에는 도청과 카메라, 첨단 디지털 매체로 인간보다는 기계에 의한 간접적인 감시에 의해 대량의 데이터 처리 방법을 통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는데, 이 작품에서 감시의 주체는 '스파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스파이들은 점으로 존재한다. 스파이들은 스파이로 태어나며, 자신이 스파이인 줄을 모르는 스파이와 자신이 스파이임을 알게 되는 스파이로 나누어져 있다. 스파이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스파이의 세계에서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 더 높은 수행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기심과 의심은 스파이의 최대 금기다. 스파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최소한의 이 무능한 사회에서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잘리기 전에 아무 회의도 갖지 않고 그저 열심히 일만 해야 하는 것처럼 이 사회에서 스파이들 역시 주는 대로 일감을 받아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미래가 없는 사회에서 그들은 왜를 묻지 말아야 한다. 


미스터리나 스파이 소설처럼 쓰여졌지만 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이다. 스파이들을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고, 또한 그 스파이들이 무엇때문에 존재하는지도 작품 속에서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스파이들이 자신이 스파이인 줄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노리는 지점은 먼 미래나 디스토피아적 공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디스토피아적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가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면, 소설 속의 공간은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먹고 샆만한 사람들은 모두 스파이이다. 


X는 기억을 잃는 시점에서 자신의 스파이로서의 존재를 자각했을 지 모른다. 15년간의 경험으로 이룩한 것들을 없애기 위해, 그의 기억을 지웠을까. Y는 기억을 잃은 채로 깨어난 X에게 다가가 조작된 과거 인연으로 자신을 위장하지만 승진을 앞둔 시점에 이 모든 것에 의심을 시작하고, 그 의심의 대가로 좌천되어 한참 낮은 단계의 스파이들이 하는 일인 소설가 Z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서류상 언니만 존재하고 본인은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않은 D는 어느날 언니가 사라진 곳에서 언니의 흔적을 쫓으며 언니 행세를 하며, 정신과 상담실에서 기억을 잃은 X를 만난다. 소설을 써서 먹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소설가 Z는 어둡고 모순된 사회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B는 조직에서 꽤 윗선에 위치하지만 줄을 잘못서서 더이상의 승진은 어려워지고..이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사라져가고 말 점이다. 점은 전체를 볼 수 없기에 선이 되지 못하고, 그것들은 소멸되고 말지만, 그들은 사회를 의심하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보고 싶어했기에 소리도 없이 사라져간다. 끝까지 살아남지 못하기에 패자로 불리지만, 스스로 패자이기를 선택했으므로, 그들이 패자의 서에 남긴 것들은 보태지고 모아져서 덩어리지게 될 것이고 그것들의 실체가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각 인물들이 어떤 정형화된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뿔뿔이 흩어져서 자신이 보는 것을 기술하는 형태로 쓰여졌기에 리뷰에 내용을 대충이라도 정리하기가 너무 힘들다. 이제까지의 혼불 문학상과는 차별화된 소설이고 문장도, 구조도 좋았으며 몰입하게 하는 게 있다. 글쓴이의 사고와 자본주의적 모순에 대한 현실 비판이 그대로 사변적인 글의 형태로 너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때로 직접적인 현실 비판처럼 읽히는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부분이 인문학적 백그라운드가 충분한 독자들에게는 불필요한 설명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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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구마 2016-10-1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빨리 읽어보고 싶어요. 하성란작가님 또한 심사평에 조지 오웰의「1984」가 생각난다고 하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CREBBP 2016-10-19 17:03   좋아요 0 | URL
네 1984가 전체주의에 의한 감시사회를 그리면서 스탈린과 히틀러를 생각나게 했다면 이 소설은 먼 미래의 디스토피아가 아닌 현실 속에서 우리가 생각지 못한 디스토피아적 부분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