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3
혜경궁 홍씨 지음, 정병설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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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총 6권으로 되어 있는데, 4~6권은 몇장 안되는 내용이 한 단원에 모두 들어있으므로, 대부분은 1~3장까지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권은 혜경궁 홍씨의 집안 내력을 얘기하고, 간택되게 된 경위와, 그 때의 심경 등을 담고, 이후 궁에 들어와서 살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적었는데, 이제껏 영화나 사극에서만 보던 궁중의 생활사에 대해 틈틈히 엿볼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임오화변(뒤주에갖혀죽은일)의 그 끔찍한 일들을 다 겪어낸 후, 맨 처음 자신이 궁에 들어왔을 때를 회상하며 한자 한자 써내려갔던 홍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한중록의 1편에는 그녀가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옷도 변변히 못해 입고 1차 간택에 응했으나 왕후들과 궁정 식구들의 마음에 들어 듬뿍 사랑받는 모습이 더욱 마음을 짠하게 한다. 


정성 왕후와 선희궁, 여러 옹주들이 내 손을 잡고 귀여워하시니 황송할 뿐이었다.(10/126)


엄격한 법도와 예절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스킨쉽(?)이 전혀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왕실에서, 아직 세자빈으로 책봉되지 않은 민간인의 손을 잡고 귀여워했다는 모습은 당쟁의 세력 쟁탈전으로 인해 앙칼진 모습으로만 그려졌던 규중 궁궐의 여인네들의 참삶을 엿볼수 있게 한다. 2편에는 제 3자의 시각으로 조명한 아버지와 아들 그 자체다. 이 부분은 영화 <사도>와 거의 일치하는데, 사실 송강호가 연기를 너무 잘하기도 했거니와 그 때 나온 명대사들이 실제 실록에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못된 말을 들을 때 아들을 데려와 듣게 하고 귀를 씻거나 하는 등의 홀대는 아버지로서 폭력 이상의 학대다.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아주 잘 쓰여진 드라마라고 생각했던 건데, 한중록에 나와 있는 아비의 아들 박해에 대한 내용은 <사도>보다도 심하다. 영화는 실록을 추려내야 했을 만큼 역사가(역사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더 잔인했던 거다. 


홍씨는 1편에서도 그랬지만 2편에서는 '더욱 그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기록해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당시 이미, '사도가 병이 없는데 임금이 모함하는 거짓말을 듣고 그런 일을 했다는 소문'을 비롯해서 각종 추측과 억측이 난무했던 모양이어서, 당시 세손이었던 순조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쓴 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덕일을 비롯한 노론 음모설이 사실이라면, 현재 '조울증으로 판단되는(나무위키 참조)' 사도의 광증을 아무 정신분석학 지식도 없던 혜경궁 홍씨가 지어냈다는 일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쨌든 나는 학자가 아니므로, 노론음모설은 관심없고 이 책을 있는 그대로 작가의 의도 그대로 읽었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건, 한중록 자체의 톤이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사도나 정조의 어린시절의 영특함에 대한 좀 황당한 과장은 있을지언정 매우, 진실을 덮기 위한 어떤 의도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호소력 짙고 진실되게 읽히기 때문이다. 


동궁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용모가 특출나셨다. 넉 달 만에 걷고(말도 안됨), 여섯 달만에 임금께서 부르시자 대답하고(옹아리였을듯), 일곱달 만에 동서남북을 아셨다. 두 살에 글자를 배워 60여자를 쓰고, 세 살에는 다식에 새긴 글자를 골라 가며 드셨다. (41/126)


이렇게 영특한 아이가 어쩌다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을까. 혜경궁 홍씨는 동궁이 '태어난 지 백일 만에 보모에게 맡'겨 어릴 때 부모님의 애정을 듬뿍 받지 못한 것을 '참혹한 일의 시작'으로 보았다. 이름도 섬뜩한 저승전에 머물던 동궁을 영조는 네다섯살까지 아끼고 자주 찾아갔지만, 어릴 때 신동인 아이들은 부모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은 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진리인 듯하다. 이후 2부와 3부에서 계속되는 아들에 대한 아비의 증오와 아비에 대한 아들의 채워지지 않는 애정의 갈구와 두려움은 아들을 더욱 깊은 광적 수렁 속으로 내몬다. 


1년중 가장 추운 겨울 홍역이 채 낫기도 전에 눈쌓이는 궐마당에 석고대좌를 하고 앉아, 눈인지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눈을 맞으며 몇일 동안 앉아있던 일, 얼음 위에 앉아 석고대좌를 몇일 씩 하고도 머리를 짖찧어 크게 다칠만큼 자해를 하게 하는 일, 조용히 훈계않고 매일 남들이 모인 자리에서 흉보듯 아들에게 말하는 일, 좋지 않은 일을 들으면 귀가 더렵혀진다고 동궁을 앉혀놓고 대답을 하고 나면 귀를 씻게 하는일, 그렇게 비정상적인 아비가 임금이므로, 자식은 임금을 거역할 수 없던 자식은 미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듯싶다. 미친 세자가 나중에는 거의 가족들도 못알아보고, 연쇄적으로 궁궐의 사람들을 죽이고 난폭하게 굴었으므로, 그런 동궁에게 한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던 일. 조용히 폐위하여 외딴 섬에 귀양보내는 일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이 때 한중록에 따르면 동궁을 없애야 하는 데 힘을 실어준 사람은 친엄마였음을 홍씨는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임금께 그렇게 요청을 했다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한다고 꾸중하시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한다고 화를 내시며 모두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심지어 가뭄이 들어도 동궁이 덕이 없어 그렇다고 꾸중하셨다. 일이 이러하니 동궁께서는 날이 흐리거나 천둥이 쳐도 또 무슨 꾸중을 들을까 근심하고 염려하셨다.(54/162)


회고록이라고 하나,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증오와 망상, 아비와 아들의 그 애증의 관계가 엄청난 비극이었기에 웬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롭게 읽혔다. 번역 부분에서 한자를 어려워하는 나같은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현대어 및 자연스러운 문체 덕분에 가독성이 좋아서 쉽고 빠르게 읽힌다. 심지어는 오래된 사극에서 나오는 극존칭체 혹은 어려운 단어 같은 것도 배제되어 있다. 어차피 많은 독자들이 보기 위해 번역을 하는 것이라면 번역은 이렇게 하는 게 (나는) 좋다.


* 실제 읽은 책은 e북으로 모서점에서 무료 대여로 읽은 <한중록

: 한국인이 꼭 읽어야 할 한국 고전 및 사상 100선 - 동아출판>인데, 상품찾기에서 못찾아서 문학동네 판으로 상품을 대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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