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학의 기원이자, 방대한 규모의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읽다 보면 전차를 타고 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고구려 벽화에도 바퀴를 이용했던 기록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중세 시대를 지나오면서 서구의 전쟁터에서 전차는 쇠락했다. 고려시대까지도 바퀴를 이용한 탈 것이 존재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바퀴달린 마차 대신 가마가 사람들을 날랐다. 


인류에게 바퀴의 역사는 기원전 4천년에서 3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난 바퀴를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는데, 양옆의 두 개의 바퀴가 차축 끝에 달려있어 차체가 회전할 때 함께 회전하는 장치인 윤축, 바퀴가 차축과는 독립적으로 제각각 굴러가는 독립차륜, 그리고 쇼핑카트나 가구 옮길 때 달린 바퀴인 캐스터가 그것이다. 바퀴가 처음 생겨난 이래, 인류가 발견해온 찬란한 문화유산들과 비교해볼 때 바퀴라는 것의 기술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 바퀴의 마찰력은 주어진 동력을 훨씬 더 큰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왜 바퀴는 중국, 일본, 한국 등의 동양권에서는 역사상의 한 때 사라졌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사용되지 않았을까. 콜럼버스 이전의 미 대륙에 수레나 우마차가 없는 이유로 자주 설명되는 의견으로는 바퀴달린 이동수단을 끌만한 큰 짐승이 없었다는 의견이 있는데 제라드 다이아몬드가 이 관점의 지지자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불리엣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저자의 생각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와 중국 등이 역사상의 아주 긴 기간동안 바퀴달린 운송수단을 이용하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하다. 


서양에서 각광받은 기술이 현재 지구촌을 지배하는 기술이 되었다고 해서, 그 기술의 근간이 되는 어떤 생활 양식이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것은 서구적인 관점이다. 바퀴는 서구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먼 고대에서부터 사용되어왔고 발전되었었다. 기원전 1200년경 상왕조 시대에 유목민의 전차 사용법을 도입했던 중국의 전장에서 기원전 300년 이후에는 기병대가 전차를 빠르게 대치하였다. 바퀴를 사용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어떤 시대에 마차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콜롬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했을 때 바퀴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토착민들에게 바퀴가 유용하지 않아서였지 가축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퀴달린 장난감을 만들었기 때문에 바퀴에 대해 알고 있었고 바퀴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의하면 사실은 바퀴가 전 역사를 통털어 늘 한결같이 유용했고 열성적으로 이용되었던 운송 수단은 아니었다. 말이 끄는 이륜 전차 암각화가 많이 남아 있는 사하라 남부지역의 여러 목축 사회에서도 거대한 가축 떼가 있었지만 바퀴는 없었다.  도자기 물레를 사용할 줄 알았던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도 또 일찍이 기원전 3천년부터 달구지와 전차를 사용했던 메소포타미아와 무역교류를 했던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시대가 되었을 때에는 바퀴달린 이동수단은 부재했다. 기원전 3천년즈음 이륜수레와 사륜 전투용 우마차를 사용했던 중동에서도 기원후 첫 5세기 동안 바퀴달린 운송수단은 다 사라져버렸다.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로 한 때(기원후 800년 이후 17세기 이전), 기사들에게도 마차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성들의 이동을 보호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수단으로 통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1세(1515-1547)의 통치 무렵까지도 파리에는 마차가 세 채 뿐이었다. 하나는 왕비의 것이었고, 하나는 왕세자의 애첩의 것이었고, 또하나는 뚱뚱해서 말에 탈수 없던 귀족 남성의 것이었다. 바퀴에 깊게 패이고 진창인 비포장 도로에서 마차는 자주 전복되고 도시의 도로는 말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이 되고, 사고가 잦았다. 이러한 별다른 기술적인 진보의 부재속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해 갑자기 마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그것은 이동수단을 바라보는 남성의 심리적 세계관의 변화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기사의 지위 기반을 향상시키고, 말탄 기사의 위상이 마차의 사용을 위축시켰다면,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위협과 군사적 명성은 사륜 수레를 원형으로 배치하여 포대로 사용하던 전법에 영향을 받아 마차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마차의 인기가 급등한 17세기 거리의 교통과 배설물, 진흙 문제, 바퀴자국 등의 문제로 영국 의회에는 마차의 남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논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기원전 1200년 무렵, 강력한 전차병을 보유했던 중국은 보병과 기마궁수의 진보로 이어졌고 전차 전투가 쇠퇴한다. 전차를 타고 이동하던 관습도 13세기 이전 몽골이 침략하기 이전에 사라졌다. 마차를 버린 중국이 대안으로 채택한 바퀴는 외바퀴 수레였다. 사륜 운송수단이 18세기까지 존재했으나, 영향은 미미했다.  책에 나와 있는 중국의 전통적 외바퀴 수레에 매료되어 사진을 조금 더 찾아봤는데, 방향을 가볍고 이동이 용이하고 방향 전환도 손쉬워서 농사일과 이동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말 대신 자동차가 동력을 대신하여 이제 바퀴달린 탈것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주요 운송수단이 되어버렸지만, 동력이 없이도, 우리는 여전히 바퀴달린 새로운 것들, 근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많은 바퀴달린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쇼핑카트, 여행용 트렁크, 휠체어, 유모차, 바퀴달린 의자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자동차와 마차 사이에는 인간의 근력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인력거가 아시아 권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인력거가 서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양에서만 보였던 이유는, 서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마차는 짐승이 끄는 것이고 따라서 인력거꾼의 지위가 짐승수준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라는 건데. 인간을 사고 팔며 채찍질을 해대던 서구 제국주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쯤 되는 미개발국가에 와서 이런 씨도 안먹히는 생각을 퍼뜨렸다는 건 개가 들어도 웃긴 일이긴 한데, 그들의 노예산업을 예외로 치더라도 인력거를 끄는 일은 공장일이나 광부일에 비해 건강에 덜 해로왔을테고, 말이 싸는 배설물과 각종 사회문제에 비교해봤을 때에도 친환경적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퀴가 그 사회를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서구인의 시각은 편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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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는 스핑크스가 있지만, 그리스 신화에도 스핑크스가 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에 등장해서,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점심에는 세발로 걷고, 저녁에는 두 발로 걷는게 뭐게? 하고 퀴즈를 내고는 맞추자 열폭해서 죽은 그리스 스핑크스는, 이집트 스핑크스와는 달리, 상반신은 여자고 하반신은 날개 달린 사자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맞추지 못하면 잡아먹는 그리스의 스핑크스는 그래서 사악하다. 사악하지만, 비밀을 풀자 자폭한다.


<구스타브 모로(1826∼1898)> 출처 국제신문              기원전 530년 전에 만들어진 스핑크스 석상                                                                           (그리스 아티카), 출처 나무위키


너무 솔직하지만 않으면 참 좋은 친구일텐데, 라고 생각되는 친구가 어느날 사진 하나를 보여준다.



크고 흐릿한 눈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원작자의 의도는 흐릿한 눈이 아니라 수수께끼의 답을 혼자만 감추고 있으려는 듯한 모호한 눈빛이 아닌가 싶다. She was tall and slight, and strangely picturesque with her large vague eyes and loosened hair. 내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문장과 스토리를 통해 받은 그녀의 'vague eye'의 느낌은 무엇인가 감춘 듯한 신비감에 쌓인 애매모호한 눈빛이다. <켄터빌의 유령>에 들어있는 문학동네 판은 한술 더 떠서 멍하다고 표현한다.



이 여자 어때? 사진 한 장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나. 오 예쁜데? 오 잘생겼는데?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한계는 여기까지인데, 와일드씨는 화자에게 훨씬 더 많은 걸 감지하게 한다. 


사진 한 장. 그 사람을 얼마나 알려줄까. 요즘 SNS에 올라가는 얼짱 각도와 카메라 앵글에 최적화된 조작된 웃음을 가진 사진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광경이다. 그 여자가 지닌 비밀은 무엇일까. 내용은 짧고 간단하다. 그 여자를 길거리에서 반해 찾아다니다가 어느 집 만찬에서 우연히 만나 어렵게 스토킹한 끝에 썸타는 사이가 되었는데, 너무 뭔가 비밀스럽다는 거다. 과부였고, 화자가 사진을 보고 한 눈에 알아낸 것 이상으로 신비감에 쌓여있다. 둘의 대화는 늘 누가 들을까봐 주의의 대상이고 편지는 직접 집으로 배달하면 안되고 도서관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전달한다. 왜 그러냐 어떤 사정이 있냐고 물어도 그녀는 이유가 있으며 자신의 집에서는 편지를 받을 수 없다는 거다. 밀당에 지친 제럴드(남주)는 프로포즈를 하기로 작정을 하고 약속을 잡는다. 


그는 여성의 신비감에 매료되었으면서 동시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녀의 미스터리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의 미스터리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으나,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건 여자의 미스터리다. 사랑하는 여자의 실체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런던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여자를 보게 되고 그녀가 허름한 lodge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아하 그것이 그녀의 미스테리였군, 이제야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겠거니 생각한 제럴드는 그녀가 자신이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는 거짓말을 듣자, 빼도박도 못하게 그녀가 그 lodge에서 떨어뜨린 손수건을 흔들며 거기서 무얼 하고 있었던거냐고 캐묻는다. 당황한 여자는 울며 말한다. 무슨 권리로 그런 걸 묻냐고 자기는 할 말이 없다고. 다른 사람을 본 거라고, 자기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믿지 못한다. 이 신비에 쌓인 여자를 더이상 믿지 못한 남자는 여자를 떠나고, 도시를 떠나 한달 이상 휴가를 보내고 오는데, 다녀 왔더니 여자는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알게 된다. 


여자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비밀을 알고 싶은 남자는 그녀를 보았던 그 월셋집을 찾아가서 주인을 만나 그녀의 비밀을 캔다. 그녀는 그 허름한 집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녀는 밀당의 고수였을까? 무엇 때문에 그에게 비밀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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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3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 여인이 처한 상황에 대입하면서 <비밀 없는 스핑크스>를 읽었을 때, 남자 인물들의 은밀한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졌어요.

CREBBP 2016-11-30 23:33   좋아요 0 | URL
여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이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는 것 같아요
 
맛의 천재 - 이탈리아, 맛의 역사를 쓰다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 음식의 역사 책이다. 약 16가지 정도의 대표적 이탈리아 먹거리의 기원을 찾아서 먹거리 관련 책을 쓰거나 관련있는 시대의 인물들과 풍속들을 애기한다. 이미 정립된 어떤 확고한 사실 혹은 '사실로 알고 있는' 것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을 뒤져 어떤 요리가 탄생되기까지의 길고 긴 변천을 추적한다. 예륻 들면 로마의 요리책, 중세 때 수도사에서 펴낸 요리책 등을 뒤져 거기서 어떤 요리가 어떻게 변형되어가는지를 추측하고 추적한다. 요리 뿐만 아니라 와인이나 디저트 등 여러 종류의 먹거리에 대한 것들도 포함한다.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이탈리아의 국수류를 통털어 파스타라고 하는 것 같은데, 파스타의 종류만도 어마무시하게 많다. 파스타 중 특별히 실 모양의(우리의 국수) 긴 스파게티는 마르코폴로가 중국에서 들여왔다는 설도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근거가 없다. 1938년 영화 <마르코폴로의 모험>에서 스코틀랜드인으로 변신한 마르코폴로가 국수가 들어있는 냄비가 뭐냐고 묻자, 중국인은 자기네 나라 말로 스파 게트라고 한다는 말을 듣는 장면과 함께 영화의 성공이 스파게티 중국 기원설에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다. 마르코폴로의 여행기를 받아 적은 감옥 동료 루스티켈로의 기록에도 파스타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스파게티나 베르미첼리라는 단어와는 무관했다는 이탈리아 저자는 당시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의 손님으로 몽고에 가 있을 당시 몽고인들은 스파게티를 먹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수천년부터 국수를 먹고 살았다는 증거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밀국수가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에 도달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저자의 의견은 양보가 없다. 


상이한 재료를 사용하여(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파스타는 그라노두로 만듬, 중국 국수는 평범한 밀로 만듬)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면서 제각기 고유의 문화로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중국의 자국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이탈리아 못지 않게 크므로 어떤 결론이 나든 결론을 이끄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민속사의 가치가 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주장이나 가설에 의지하기보다는 방대한 문헌을 꼼꼼하게 고찰하여 고증을 통해 역사와 기원을 캐는 방식으로 책을 쓰고 있으므로, 증거가 없는 부분, 기원이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고 그만큼 독자에게는 상상력의 여지를 많이 남겨준다. 그러니 앞으로 스파게티가 중국 기원이다라는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고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확실한 것일 수도 있고 마치 우리가 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수많은 다른 의견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지식 혹은 믿음이라 할 수 있겠다.

요리역사가들에게는 파스타를 만들던 도구로 보였던, 네안데르탈인이 남긴 에트루리아 무덤의 벽화에 그려진 밀방망이 밀판, 바퀴모양의 물건은 고고학자들의 의견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서 기원을 찾는 것은 완전히 억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남아있는 확실한 기록만을 증거로 채택하는 저자는 2세기경의 로마시대 라가늄 조리법에서 라자냐의 기원을 찾는다. 인류의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진화의 뿌리인 최초의 생명체에까지 닿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기술도 어떠한 요리도, 곡식을 갈아 만든 음식으로 기원을 찾아볼 수 있지만, 라가늄은 파스타의 일종인 라자냐와 발음도 비슷하다.  조리법은 오늘과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밀가루 반죽이라는 공통 요소를 가진다. 라자냐의 기원(이라고 판단하는)인 로마의 라가늄은 밀가루 반죽에 상추즙을 섞어 얇게 만들고 향료를 가미한 뒤 튀긴 음식이다. 물컹거리는 라자냐보다는 로마 시대의 라가늄이 훨씬 맛있었을 것같다. 식용유가 흔하지 않았을테니 튀겼다는 말이 오늘날의 딥프라이드가 아니라면 부침개와 비슷했으려나? 상추즙이라니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삼색 국수의 원조도 로마로 거슬러갈 수 있겄네. 

3세기동안이렇게 저렇게 변형되어 가던 라가늄은 라자냐라는 이름으로 '로마시대의 요리사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아초피'가 기록에 남겼다. 아초피 라자냐는 '몇 장의 파스타 사이에 고기를 갈아 채워넣고 화덕에 넣어 굽는다'(p142). 그 까마득한 옛날에 요리사가 남긴 요리법까지 기록으로 남겼으니, 이탈리아가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밀반죽을 튀긴 것, 삶은 것, 구운 것 각각의 맛과 질감은 확연히 다른 것이어서, 로마시대의 굽거나 튀긴 요리를 오늘날의 마케로니의 뿌리로 보는 것은, 인간의 기원을 원숭이로 보는 것만큼이나 논란의 여지를 줄 수 있겠으나, '모든 것의 기원이 아랍인들의 건조 파스타에 있으리라'는 가정은 합리적이다. 신선한 파스타는 유통이 쉽지 않았고, 아랍인들은 멀리 여행을 떠날 때 가지고 다닐 음식으로 건조방법이 발달했으며, 건조 파스타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랍인들에 의해 시칠리아로 들어와 상로를 거쳐 유럽 각지로 전파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지중해 서부 가장 중요 항로였던 제노바에서 건조 파스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초기 파스타는 오늘날 세계인이 기대하는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한시간 이상 푹 삶아 고기와 치즈, 설탕 계피 따위로 간을 해서 먹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물에 익힌 후 물 속에 한시간동안 담가두기 까지 한 요리법이 중세 말기에서 근대에 들어서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거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13세기 말, 볼로냐의 한 수사본 문헌에 기록된 조리법은 밀가루 반죽을 밀어 말린 후 고기 육수에 집어넣고 끓여 접시에 담은 뒤 치즈를 갈아 뿌린다고 되어 있다. 뭐지? 이건 닭칼국수를 삶아 건더기를 접시에 덜어 먹는 것과 똑같잖아? 1792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요리책에는 끓는 물에 세 시간 동안 익힌 후 10분 정도 육수에 담가두는(p148) 요리법이 여전히 출간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조리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이후 어느 정도 단단한 상태로 익히는 현재의 조리법에 이르게 된 듯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빨간색은 1800년대 이후에 나타난다. 그 전까지 파스타는 그냥 밀가루색이었다. 1700년대에 마카로니는 이탈리아의 국민요리가 되었다. 

'파스타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제노바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것은 폴리아주, 무엇보다도 나폴리에서다.' 그라노두로(파스타용 밀)가 익을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가졌고, 모자란 그라노두로를 배로 쉽게 수입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리는 곳곳에 마케로니를 파는 노점상으로 가득했고,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집어들고 고개를 치켜든 쩍벌린 입으로 가져가는 풍경은 당시 나폴리의 여행 코스 중 볼거리의 하나였다. 이 볼거리들은 1900년대 초까지만해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있는 스파게티, 피자, 모짜렐라 치즈, 티라미수 외에도 세계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먹거리, 마실거리, 음식에 관련된 기원과 역사를 문헌을 통해 남아있는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책이다. 프랑스의 샴페인에 대적하는(값은 프로세코가 훨씬 싸다고) 탄산 와인 프로세코, 최소 12년의 숙성 기간을 거치는 전통 발사믹 식초, 왕들의 와인 바롤로, 칼테일계의 슈퍼스타 스프리츠, 물소의 젖으로 만들던 진짜 모짜렐라, 전세계적인 크리스마스 전통 케익이 된  판도로와 파네토네, 악마의 초콜렛 누텔라 등의 기원이 길고 긴 이탈리아의 역사속에서 변형되어 세계적인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책 속에서 찾았다. 잘 모르고 발음도 어려운 이탈리아 곳곳의 지명들과 그들의 역사 속에서조차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그러나 먹거리의 역사 속에서 획을 그어왔고 기록을 남긴 역사 속 인물들이 만들어간 먹거리의 역사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요리 중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다면 샐러드, 폴렌타, 프로슈토, 파네토네, 카르파초다. 샐러드라고 하면 그 기원을 따지는 것조차 우스울만큼 새로울 것이 없는 요리지만, 로마 시대때부터 싱싱한 채소와 과일이 주요 먹거리였으며, 육식을 주로했던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채식을 즐겨했으며 싱싱하고 바삭거리는 샐러드의 가치와 무한한 재료의 조합이 다양하고 신선한 맛과 영양과 건강을 선사했던 것이다. 그 어떤 채소라도 싱싱한 것이라면 기름과 식초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는 것이 샐러드였다고 한다. 폴렌타는 옥수수 가루를 물에 타서 끓인 일종의 죽이다. 옥수수가 남겨진 최초의 기록은 어느 귀족의 빌라에 그려진 그림으로 콜롬버스가 돌아온 뒤 73년이 지나서였는데, 부엌을 침투한 것은 5년뒤 수프를 끓여먹기 시작했다. 한 때 귀족의 상에도 오르기는 했지만 늘 가난한 사람의 음식이었던 폴렌타는 펠라그라의 발병에도 그치지 않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해 한때 사장될 위기에도 놓여있었지만, 슬로푸드로 소개되며 부활한다. 하몽으로 알고 있는 돼지 뒷다리로 만든 프로슈토, 얇게 저민 육회의 일종인 카르파초, 크리스마스용 케익 파네토네 등 이탈리아의 국민 음식들을 알게 되고, 그것들의 유래에 대해 곳곳을 시간과 공간을 여행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특정 음식의 기원을 찾는 일은 어찌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하다. 모든 문화며 기술이 다 그렇지만 특정한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무에서 유를 생성해내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의 기원은 기본적으로는 아주 먼 고대의 음식이 서서히 변천되어 가는 과정에서 특정 지명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다가, 조리법은 서서히 세기와 세기를 거듭하며 바뀌고 이름도 새로운 이름을 갖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독단적인 요리가 되는 것이다. 티라미슈만 해도 그렇다. 서로 자신이 발명했다며 나서는 사람이 많아 치열한 법적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이 요리의 탄생은 고작 1970년대의 일이다. 누텔라와 같이 기업인이 직접 만들어 상표권 등록을 한 경우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대개의 요리는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한 가정에서 다른 가정으로 ,또 한 고장에서 다른 고장과 다른 나라로 전파되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형되고 다르게 불리면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낸다 마치 생명의 진화를 연상시킨다. 저자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의 책 <책공장 베네치아>를 작년인가쯤에 너무 재밌게 보아서 이 책을 샀는데, 기대를 충족시켰다. 생소한 대명사들이 너무 많아 읽는데 엄청 많이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언제든 자꾸 펼쳐보고 싶은 책이어서, 주말에 놀러다니면서도 틈틈히 야곰야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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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1878년에 발표된 <데이지밀러>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헨리 제임스에게 가장 모욕적인 소설이기도 했다. 제임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표와 더불으 즉시 보스턴에서 해적판이 출간되는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달콤한 찬사'를 받음과 동시에 이 번창한 작품의 출간과 동시에 어떤 비난이 함께 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그를 인정한 한 잡지사에 투고된 소설은 처음에 즉시 반송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인 아가씨들을 모욕하기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출간된다.


<데이지 밀러>는 한 여성을 연모하는 어떤 남자의 시선이 그려내는 한 시대, 특정 계급의 풍경이다. 소설에서, 귀족적 계급의식에 쩔은 미국인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장기적 유럽 여행 혹은 휴양에서 그들만의 폐쇄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주로 여성이 주축이 된 그들의 사교계에서 공통적인 세계관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차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는 나이지만 나의 역할은 미미하고, 윈터곤이라는 이야기 속 다른 남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데이지 밀러의 이야기인데,  윈터곤은 당시 미국 귀족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랙터를 가진 데이지 밀러에 대해 첫눈에 반해 애정을 갖게 되지만, 쾌활하고 솔직하고 당시로서는 개방적인 데이지 밀러에 대해 매우 복잡한 심경을 갖게 된다. 따라서 주인공은 데이지 밀러이지만, 그녀의 내면은 윈터곤이 바라보는 시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호텔 문 앞에서 뛰어다니는 저 끔찍한 젊은 여자들, 저들이 바로 진짜 데이지 밀러에요"(198/199)


이 말은 소설 밖에서 친구에게 제임스가 직접 들은 말을 작가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제임스는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타고 가다가 한 호텔 앞 번잡한 분수 계단에서 젊은 두 아가씨가 테라스에서 천방지축하고 천진난만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저 아가씨가 데이지 밀러라는 말에 발끈한다. 저런 철부지들과 자신의 데이지 밀러를 어찌 비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데이지 밀러를 어떤 판단이든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독자는 철부지 여자 아이들을 보며, 그곳에서 데이지 밀러를 보았던 것이다. 줄거리 자체만을 본다면 별로 쓸말도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또한 분량 또한 많지 않아 누벨라에 해당된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글쓰기가 <나사의 회전>에서 그 극한을 보여주었듯이 어떤 사실과 사실 사이의 뚜렷한 경계가 없이 희미하고 상징적인 배치가 가득하기 때문에, 짧고 단순한 소설임에도 이야기 거리는 풍성하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귀족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귀족 이라고 하면 기사도로 시작하여 대대로 되물림되는 부와 권력의 핵심에서 거대한 영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인데, 당시 미국의 귀족층이라고 하면 정경유착과 각종 부당한 방법을 통해 취득한 온갖 혜택을 독점하던 신흥 부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넘쳐나는 부는 유럽의 휴양지와 여행지에서 미국 여행자들의 사회를 구축할만큼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여행지에서 그들은 사교계를 형성하면서 서로 교류하는데 데이지밀러의 가족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 잘 끼지 못한다. 천박하다는 것이 이유다. 데이지밀러의 단지 돈만 많고 그들의 품위를 만족시킬만한 위엄을 갖지 못한 가문 출신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눈에 못마땅했던 이유는 그녀가 자유분방하다는 소리인데, 윈터곤은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보다도 그녀의 그 자유분방한 기질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분방함이 모든 남성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특히나 로마에서 조바넬리라는 하류층이지만 잘생긴 남성과 어울린다는 사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질투와 혐오를 동시에 느낀다. 


모호성이라는 서사 방식을 즐겨 사용하던 헨리 제임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이 여성을 바라보던 탐탁지 못했던 수많은 귀족 사회의 모습에서는 우리 사회가 다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탐탁지 못한 많은 시선들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윈터본이 보기에 데이지 밀러는 완전히 새로운 너무나도 매력적인 유형이었다. 그녀는 소탈하고, 사교적이었으며 개방적이고, 열정적이다. 윈터곤은 그녀에게 숭배할만큼 끌리고, 그녀 역시 그에게 친밀함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밤에 남녀가 나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당시로서는 금기시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지만, 주변의 드글드글한 여러 부인들(워커 부인, 코스텔로 부인)의 윤리관은 그렇게 천박한 여성과 어울리는 윈터곤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해 보이고, 윈터곤의 적극적 행동 못지 않게 데이지 밀러의 윈터곤에 대한 태도 역시 적극적이다. 둘의 인연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을 떠나 로마에서까지  계속됨에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 있으니 그것은 사회적 편견이기도 하고 허물지 못하고 용납되지 않는 윤리관과 자유로움 사이의 갭이다. 게다가 새롭게 나타나 그녀와 늘 함께 붙어다니는 조바넬리의 존재 또한 장애요소이다. 


그녀가 날 사랑했을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끝에서 이 수수께끼같은 의문은 누구에게도 그 답을 주지 못한다. 모호함의 끝에 매달린 의미심장한 메시지 하나가 그의 가슴을 때린다. 세 번씩이나 전해달라던 그 부탁. 그녀가 했던 거짓말. 그건 어떤 의도였을까.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윈터곤은 그녀가 조반넬리와는 약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윈터곤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남자의 모순은 이거다. 그녀가 자기와 한 금기시된 행동 함께 '은밀하게' 성을 구경 가고 자기와만 누렸던 밀회는 용납할 수 있으나, 그런 행동을 그것도 로마의 바람둥이와도 했다는 사실에서 그는 이미 그녀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혐오를 느낀다. 하지만 실은 그와 약혼하지 않았음을 꼭 전해달라고  했던 그녀의 그 메시지는, '소나기'에서 입던 옷을 꼭 입혀달라고 했던 소녀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조반넬리와 같이 순수한 친구를 용납하는, 그런 자유를 보장받는 자로서의 남자친구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윈터곤과 관계가 가까와지더라도 윤리관을 운운하며 시시콜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장관리를 하는 바람둥이 여성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그 숱한 편견의 눈초리를 따갑게 맞으며 오로지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녀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굴레 속에서 스스로 택한 희생이 미국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은 헨리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시 소설이(해적판이) 날개돋힌 듯 팔리고 소설의 영향으로 미국 사회에서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데이지 밀러처럼 자유분방한 행동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해설이 전하는 바다. 성격도 유행이 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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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읽는 이집트 문명 모자이크로 읽는 지중해 오디세이 4
김문환 글.사진 / 지성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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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집트의 첫 정착 농격 문화는 바다리 문화다. BC 5000~ BC 3800년 사이의 문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은 이 시대의 것을 포함한다. 1920년 경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책에 소개된 BC 5천년경의 바다리 문화의 유물은 모두 해외로 반출되어, 르부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있다. BC를 말할 때 1천단위를 넘어가는 시대의 유물을 상상해보기는 어렵다. 농경이 신석기 BC 8천년에 싹트고, 금속 사용이 BC 6천년경에 시작되면서  BC 5천년부터는 이시대까지 보존이 가능했던 유물을 남긴 것이다. 


이집트의 역사를 말할 때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로 지도상에서는 아래 부분에 해당하는 상이집트와 지도상에서는 윗부분이지만 나일강 하류에 해당하는 하이집트 부분으로 나뉜다. 상하 이집트와 각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상이집트에는 <미이라>의 스콜피언 킹의 모델이 되는 왕이 등장하고, 그 뒤로 나르메르가 상하 이집트를 합쳐 첫 통일 왕조를 세운다. 멤피스는 첫 통일 왕조의 수도다. 이 때가 선왕조시대라 불리우는 시대이고, 그 중에서도 0왕조다. 0왕조는 BC 3150에서 BC 3050 년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집트의 유적이 발굴될 당시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들에 흩어진 이집트의 고대 유물들과, 상하이집트에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방문하면서 선왕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장구한 이집트의 역사를 차근차근 비교적 상세히 펼쳐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역사란 남겨진 기록과 유물, 유적을 바탕으로 재생한 추측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분명 누락된 역사의 조각들이 여러 역사가들의 상상력 혹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어붙여지면서 왜곡된 사실이나 허구가 존재한다. 말이 전하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물건은 최소한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 될 수 없다. 


유물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그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상태로 남겨져있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겨진 유물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고, 남겨진 유적은 폐허가 된 유적지를 돌아봐야 볼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봐봤자 그 유적이 말해주는 것들을 들을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보다는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유물과 유적지들을 시대별로 그 유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함께 책으로 읽어보는 일이 더 유익할 수 있게 만든 책이다. 물론 작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을 가까이서 들이다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겠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찍는 사람의 관점이 남아있다. 우리가 관람객으로서 빠듯하게 짜여진 여행의 다음 일정을 위해 휘리릭 보고 떠나는 것보다는 어떤 유물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진 저자의 시각이 반영된 사진으로 설명과 함께 제공된 문맥을 함께 읽고 볼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7천년의 역사 중, 이집트 고유의 토착 민족이 왕족이 되어 고유의 고대 이집트 문화를 지킨 것은 대부분의 BC 시대다. BC7세기 이집트를 정복한 누비아의 흑인 왕조인 쿠시 왕조와 그 이전에 왕족간의 혈연으로 파라오가 된 리비아 계열의 왕조가 집권하기도 했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된 페르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그리스 용병에 의지하다가 끝내는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킴으로써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접수했을 때, 이집트 왕조는 막을 내리고 헬레니즘 시대로 편입된다. BC343년에 이집트와 페르시아가 맞붙었을 때 양쪽 선봉은 모두 그리스 용병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용병들은 돈만 주면 싸웠고, 더 강한 용병을 더 많이 고용한 쪽이 이기는 거였다. 이렇게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독립적 세력을 갖지 못한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 파라오 (넥타네보2세)는 누비아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우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이후 지난한 AD의 모든 세기를 다 이방인의 통치 하에 있었고, 이집트인이 통치하게 된 것은 1952년의 일. 2200여년간 스스로를 남에게 맡겼던 셈이다. 


이집트의 왕조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비교적 상세하게, 가능한 한 모든 왕조의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하면서 해당 왕들의 유물과 유적들을 방문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조명하는 방법으로 기술되어있다. 역사책이면서 기행문이기도 한 이 책은 문체가 조금 독특한 ~어요 체로 되어 있는데,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역사를 부드럽게 말하는 식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쓴 것 같은데, 내게는 조금 집중에 방해가 되었다. 


왕위 쟁탈전

어느 나라에서나 영웅이 있기 마련이고, 믿어지지 않는 신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집트가 강력한 모계사회라서 왕의 정통성을 위해 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정비의 딸과 결혼한 사위가 파라오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니 모계사회라면 딸이 파라오가 되어야지 왜 전혀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위가 엉뚱하게 파라오가 되는 것인가 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그 딸이 다시 아들을 낳으면 다음 세대에서는 아들이건 딸이건 적자가 혈통을 잇게 함으로써 길게 보면 정통성이 생기는 게 맞는 거 같긴 하다. 그래도 내가 왕가의 딸인데, 엉뚱한 남편이 파라오가 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신왕국 시대(BC 1570년~BC 1069년)의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스 1세의 정비 태생의 딸로,  남자 형제들이 모두 죽자, 유일한 계승자가 된다. 


왕가의 야화는 유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흥미진진한데, 뜨거운 햇볕 강렬한 모래 사막 위에 헐벗은 통치자들이 형제자매부모사이 가리지 않고 결혼하는 고대 이집트라면 어땠을까. 짧게 짧게 나오지만 언제나 어느 왕조에서나 반복되는 왕위 쟁탈전과 그에 따르는 음모와 계략은 서늘하다. 투트모세1세의 서자인 투트모세 2세는 취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투트모세1세의 정실의 딸 하트셉수트와 결혼(남매끼리)하지만 일찍 죽는다.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 투트모세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물을 만난듯 공동통치를 내세우고 정권을 쥐고 흔들던 하트셉수트는 나일강 건너 카르나크 아몬대신전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파라오의 장제전을 짓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다. 하트셉수트의 치세에 이집트의 국력은 강했고 그 어느 때보다 번영했다. 투트모세3세 역시 서자라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트셉수트의 딸이자 자신의 배다른 남매인 네페루네와 결혼한다. 하지만 네페루네는 일찍 죽고, 하트셉수트가 죽은 후, 그녀의 모든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다. 장제전을 청소하고, 하트셉수트의 조각상을 파괴하고 그녀를 새긴 부조를 지우고(이 책에는 이렇게 나와있는데 나무위키에 찾아보니 다른 의견도 있다. 일부러 부수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는 듯), 그리고 나서 복수하듯 해외 원정에 나섰다. 18년간 휴가를 가듯 매년 레반트와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떠나, 무려 350개의 도시를 굴복시켰다. 이러한 왕위 쟁탈과 정통성 확보를 위한 혈통간의 결혼은 계속된다. 아버지와 딸 사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 극단을 보여준 예가 친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 3세다.  이 일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없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리의 결합 이후 벌어진 왕위 계승 스토리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야겠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룩소르)



세계로 흩어진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

위대한 문명은 그 규모에서 압도한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유적과 유물이 해외로 반출되었고, 도굴되었고,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의 유물도 일본과 각지로 반출된 것이 많지만, 이집트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유물들을 세계 각지로 흩어보냈으니 국민들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할까 싶다. 특히 오벨리스크의 경우 그렇게 커다랗고 높은 탑이 어떻게 세계 각국에 흩어졌을까가 의문이다. 양엄마며, 고모며, 장모였던 하트셉수트에 대한 강한 복수심으로, 하트셉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를 가리며 세운 네 개의 오벨리스크는 세계 각국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하나는 357년 로마 콘스탄티우스 2세때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던 것을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전차 경기장 가운데로 옮겨 현재는 이스탄불에 가면 볼 수 있다. 다른 두 개는 18세기 이후 런던의 템즈강에 하나,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보내졌다. 정복왕 투트모세 3세가 지금도 세계를 정복중이라는 저자의 말이다.  손자 투트모세 3세가 만들다가 죽자 4세가 완성한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갔다. 로마의 전차 경주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워졌는데, 이후 1588년 경에 교황 식스투스가 산 지오반니 광장으로 옮겼다. 


신석기에서 BC3150년까지의 선왕조 시대는 바다리 1기, 2기와 나카다 1기 2기 3기로 분류된다. BC3150년부터 BC 2686년까지는 초기왕조시대로 분류되는데, 이 때 상형문자가 등장한다. 0왕조에 전갈왕과 나르메르가 통치하고 이어 나르메르의 아들부터 파라오 일곱명이 아비도스를 수도로 다스리던 시기가 1왕조(BC3050~BC2890)다. 이후 파라오 다섯명이 다시 멤피스를 수도로 통치한 이백년이 2왕조(BC2890~BC2686)이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까마득한 옛날 3천년 경에 이미 문자가 쓰였고, 또렷하게 남아있는 조각과 부조, 상형문자들은 신비감을 넘어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3왕조부터 6왕조까지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시대를 고왕국 시대다. BC2686년부터 BC 2181에 해당된다. 피라미드의 등장은 3왕조 2대 파라오(BC2668~2649)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까마득한 시대에 이미 상상도 못할 규모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제작하고 온갖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했으니 이후 이민족이 지배하기 전까지 계속된 25세기의 찬란한 이집트 문명은 끝이 없이 계속된다. 허무한 게 있다면, 이렇게 많은 내용을 이렇게 오랫동안 읽었으나, 기억에 담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이다. 470여쪽으로 책의 두께에 비하면 페이지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며, 사진을 많이 담고 있어 텍스트 역시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실이 요약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대용량의 두뇌를 필요로 한다. 고로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이 제한된다. 시간도 엄청 걸리고. 좋은 책이다. 두고두고 5천년전의 고대 도시로 언제든 책만 펼치면 여행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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