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1878년에 발표된 <데이지밀러>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면서도 동시에 헨리 제임스에게 가장 모욕적인 소설이기도 했다. 제임스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표와 더불으 즉시 보스턴에서 해적판이 출간되는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달콤한 찬사'를 받음과 동시에 이 번창한 작품의 출간과 동시에 어떤 비난이 함께 했다는 사실이 그러하다. 그를 인정한 한 잡지사에 투고된 소설은 처음에 즉시 반송되었는데 그 이유는 미국인 아가씨들을 모욕하기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게 되고, 우여곡절끝에 출간된다.


<데이지 밀러>는 한 여성을 연모하는 어떤 남자의 시선이 그려내는 한 시대, 특정 계급의 풍경이다. 소설에서, 귀족적 계급의식에 쩔은 미국인들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장기적 유럽 여행 혹은 휴양에서 그들만의 폐쇄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주로 여성이 주축이 된 그들의 사교계에서 공통적인 세계관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위선과 모순으로 가득차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는 나이지만 나의 역할은 미미하고, 윈터곤이라는 이야기 속 다른 남자의 시선으로 관찰한 데이지 밀러의 이야기인데,  윈터곤은 당시 미국 귀족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캐랙터를 가진 데이지 밀러에 대해 첫눈에 반해 애정을 갖게 되지만, 쾌활하고 솔직하고 당시로서는 개방적인 데이지 밀러에 대해 매우 복잡한 심경을 갖게 된다. 따라서 주인공은 데이지 밀러이지만, 그녀의 내면은 윈터곤이 바라보는 시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호텔 문 앞에서 뛰어다니는 저 끔찍한 젊은 여자들, 저들이 바로 진짜 데이지 밀러에요"(198/199)


이 말은 소설 밖에서 친구에게 제임스가 직접 들은 말을 작가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제임스는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타고 가다가 한 호텔 앞 번잡한 분수 계단에서 젊은 두 아가씨가 테라스에서 천방지축하고 천진난만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저 아가씨가 데이지 밀러라는 말에 발끈한다. 저런 철부지들과 자신의 데이지 밀러를 어찌 비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데이지 밀러를 어떤 판단이든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했지만, 독자는 철부지 여자 아이들을 보며, 그곳에서 데이지 밀러를 보았던 것이다. 줄거리 자체만을 본다면 별로 쓸말도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또한 분량 또한 많지 않아 누벨라에 해당된다. 그러나 헨리 제임스의 글쓰기가 <나사의 회전>에서 그 극한을 보여주었듯이 어떤 사실과 사실 사이의 뚜렷한 경계가 없이 희미하고 상징적인 배치가 가득하기 때문에, 짧고 단순한 소설임에도 이야기 거리는 풍성하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귀족이란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귀족 이라고 하면 기사도로 시작하여 대대로 되물림되는 부와 권력의 핵심에서 거대한 영지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던 사람들인데, 당시 미국의 귀족층이라고 하면 정경유착과 각종 부당한 방법을 통해 취득한 온갖 혜택을 독점하던 신흥 부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넘쳐나는 부는 유럽의 휴양지와 여행지에서 미국 여행자들의 사회를 구축할만큼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여행지에서 그들은 사교계를 형성하면서 서로 교류하는데 데이지밀러의 가족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속에 잘 끼지 못한다. 천박하다는 것이 이유다. 데이지밀러의 단지 돈만 많고 그들의 품위를 만족시킬만한 위엄을 갖지 못한 가문 출신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눈에 못마땅했던 이유는 그녀가 자유분방하다는 소리인데, 윈터곤은 그녀의 외적 아름다움보다도 그녀의 그 자유분방한 기질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 자유분방함이 모든 남성들에게 개방되어 있고 특히나 로마에서 조바넬리라는 하류층이지만 잘생긴 남성과 어울린다는 사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질투와 혐오를 동시에 느낀다. 


모호성이라는 서사 방식을 즐겨 사용하던 헨리 제임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당시 이 여성을 바라보던 탐탁지 못했던 수많은 귀족 사회의 모습에서는 우리 사회가 다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탐탁지 못한 많은 시선들을 비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윈터본이 보기에 데이지 밀러는 완전히 새로운 너무나도 매력적인 유형이었다. 그녀는 소탈하고, 사교적이었으며 개방적이고, 열정적이다. 윈터곤은 그녀에게 숭배할만큼 끌리고, 그녀 역시 그에게 친밀함을 거침없이 내보이며, 밤에 남녀가 나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당시로서는 금기시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지만, 주변의 드글드글한 여러 부인들(워커 부인, 코스텔로 부인)의 윤리관은 그렇게 천박한 여성과 어울리는 윈터곤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해 보이고, 윈터곤의 적극적 행동 못지 않게 데이지 밀러의 윈터곤에 대한 태도 역시 적극적이다. 둘의 인연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을 떠나 로마에서까지  계속됨에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 있으니 그것은 사회적 편견이기도 하고 허물지 못하고 용납되지 않는 윤리관과 자유로움 사이의 갭이다. 게다가 새롭게 나타나 그녀와 늘 함께 붙어다니는 조바넬리의 존재 또한 장애요소이다. 


그녀가 날 사랑했을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끝에서 이 수수께끼같은 의문은 누구에게도 그 답을 주지 못한다. 모호함의 끝에 매달린 의미심장한 메시지 하나가 그의 가슴을 때린다. 세 번씩이나 전해달라던 그 부탁. 그녀가 했던 거짓말. 그건 어떤 의도였을까.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윈터곤은 그녀가 조반넬리와는 약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윈터곤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남자의 모순은 이거다. 그녀가 자기와 한 금기시된 행동 함께 '은밀하게' 성을 구경 가고 자기와만 누렸던 밀회는 용납할 수 있으나, 그런 행동을 그것도 로마의 바람둥이와도 했다는 사실에서 그는 이미 그녀에게서 돌이킬 수 없는 혐오를 느낀다. 하지만 실은 그와 약혼하지 않았음을 꼭 전해달라고  했던 그녀의 그 메시지는, '소나기'에서 입던 옷을 꼭 입혀달라고 했던 소녀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조반넬리와 같이 순수한 친구를 용납하는, 그런 자유를 보장받는 자로서의 남자친구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윈터곤과 관계가 가까와지더라도 윤리관을 운운하며 시시콜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장관리를 하는 바람둥이 여성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그 숱한 편견의 눈초리를 따갑게 맞으며 오로지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녀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굴레 속에서 스스로 택한 희생이 미국 사회에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은 헨리 제임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시 소설이(해적판이) 날개돋힌 듯 팔리고 소설의 영향으로 미국 사회에서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데이지 밀러처럼 자유분방한 행동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는 해설이 전하는 바다. 성격도 유행이 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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