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읽는 이집트 문명 모자이크로 읽는 지중해 오디세이 4
김문환 글.사진 / 지성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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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첫 정착 농격 문화는 바다리 문화다. BC 5000~ BC 3800년 사이의 문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은 이 시대의 것을 포함한다. 1920년 경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책에 소개된 BC 5천년경의 바다리 문화의 유물은 모두 해외로 반출되어, 르부르박물관과 대영박물관에 있다. BC를 말할 때 1천단위를 넘어가는 시대의 유물을 상상해보기는 어렵다. 농경이 신석기 BC 8천년에 싹트고, 금속 사용이 BC 6천년경에 시작되면서  BC 5천년부터는 이시대까지 보존이 가능했던 유물을 남긴 것이다. 


이집트의 역사를 말할 때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로 지도상에서는 아래 부분에 해당하는 상이집트와 지도상에서는 윗부분이지만 나일강 하류에 해당하는 하이집트 부분으로 나뉜다. 상하 이집트와 각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상이집트에는 <미이라>의 스콜피언 킹의 모델이 되는 왕이 등장하고, 그 뒤로 나르메르가 상하 이집트를 합쳐 첫 통일 왕조를 세운다. 멤피스는 첫 통일 왕조의 수도다. 이 때가 선왕조시대라 불리우는 시대이고, 그 중에서도 0왕조다. 0왕조는 BC 3150에서 BC 3050 년까지 계속되었다.


우리는 이집트의 유적이 발굴될 당시 유럽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들에 흩어진 이집트의 고대 유물들과, 상하이집트에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방문하면서 선왕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 장구한 이집트의 역사를 차근차근 비교적 상세히 펼쳐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역사란 남겨진 기록과 유물, 유적을 바탕으로 재생한 추측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분명 누락된 역사의 조각들이 여러 역사가들의 상상력 혹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어붙여지면서 왜곡된 사실이나 허구가 존재한다. 말이 전하는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물건은 최소한 존재 자체가 거짓말이 될 수 없다. 


유물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그것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상태로 남겨져있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겨진 유물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고, 남겨진 유적은 폐허가 된 유적지를 돌아봐야 볼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박물관과 유적지를 돌아봐봤자 그 유적이 말해주는 것들을 들을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보다는 여러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유물과 유적지들을 시대별로 그 유물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함께 책으로 읽어보는 일이 더 유익할 수 있게 만든 책이다. 물론 작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모습을 가까이서 들이다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겠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찍는 사람의 관점이 남아있다. 우리가 관람객으로서 빠듯하게 짜여진 여행의 다음 일정을 위해 휘리릭 보고 떠나는 것보다는 어떤 유물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진 저자의 시각이 반영된 사진으로 설명과 함께 제공된 문맥을 함께 읽고 볼 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다. 


7천년의 역사 중, 이집트 고유의 토착 민족이 왕족이 되어 고유의 고대 이집트 문화를 지킨 것은 대부분의 BC 시대다. BC7세기 이집트를 정복한 누비아의 흑인 왕조인 쿠시 왕조와 그 이전에 왕족간의 혈연으로 파라오가 된 리비아 계열의 왕조가 집권하기도 했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된 페르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그리스 용병에 의지하다가 끝내는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킴으로써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접수했을 때, 이집트 왕조는 막을 내리고 헬레니즘 시대로 편입된다. BC343년에 이집트와 페르시아가 맞붙었을 때 양쪽 선봉은 모두 그리스 용병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용병들은 돈만 주면 싸웠고, 더 강한 용병을 더 많이 고용한 쪽이 이기는 거였다. 이렇게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독립적 세력을 갖지 못한 이집트의 마지막 토착 파라오 (넥타네보2세)는 누비아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우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없다. 이후 지난한 AD의 모든 세기를 다 이방인의 통치 하에 있었고, 이집트인이 통치하게 된 것은 1952년의 일. 2200여년간 스스로를 남에게 맡겼던 셈이다. 


이집트의 왕조의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비교적 상세하게, 가능한 한 모든 왕조의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하면서 해당 왕들의 유물과 유적들을 방문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조명하는 방법으로 기술되어있다. 역사책이면서 기행문이기도 한 이 책은 문체가 조금 독특한 ~어요 체로 되어 있는데,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역사를 부드럽게 말하는 식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런 방법을 쓴 것 같은데, 내게는 조금 집중에 방해가 되었다. 


왕위 쟁탈전

어느 나라에서나 영웅이 있기 마련이고, 믿어지지 않는 신화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이집트가 강력한 모계사회라서 왕의 정통성을 위해 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정비의 딸과 결혼한 사위가 파라오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니 모계사회라면 딸이 파라오가 되어야지 왜 전혀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위가 엉뚱하게 파라오가 되는 것인가 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지만, 그 딸이 다시 아들을 낳으면 다음 세대에서는 아들이건 딸이건 적자가 혈통을 잇게 함으로써 길게 보면 정통성이 생기는 게 맞는 거 같긴 하다. 그래도 내가 왕가의 딸인데, 엉뚱한 남편이 파라오가 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신왕국 시대(BC 1570년~BC 1069년)의 하트셉수트는 투트모스 1세의 정비 태생의 딸로,  남자 형제들이 모두 죽자, 유일한 계승자가 된다. 


왕가의 야화는 유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흥미진진한데, 뜨거운 햇볕 강렬한 모래 사막 위에 헐벗은 통치자들이 형제자매부모사이 가리지 않고 결혼하는 고대 이집트라면 어땠을까. 짧게 짧게 나오지만 언제나 어느 왕조에서나 반복되는 왕위 쟁탈전과 그에 따르는 음모와 계략은 서늘하다. 투트모세1세의 서자인 투트모세 2세는 취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투트모세1세의 정실의 딸 하트셉수트와 결혼(남매끼리)하지만 일찍 죽는다.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 투트모세 3세가 제위에 오르자, 물을 만난듯 공동통치를 내세우고 정권을 쥐고 흔들던 하트셉수트는 나일강 건너 카르나크 아몬대신전과 일직선으로 연결된 파라오의 장제전을 짓고 스스로 파라오가 된다. 하트셉수트의 치세에 이집트의 국력은 강했고 그 어느 때보다 번영했다. 투트모세3세 역시 서자라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트셉수트의 딸이자 자신의 배다른 남매인 네페루네와 결혼한다. 하지만 네페루네는 일찍 죽고, 하트셉수트가 죽은 후, 그녀의 모든 흔적을 역사에서 지운다. 장제전을 청소하고, 하트셉수트의 조각상을 파괴하고 그녀를 새긴 부조를 지우고(이 책에는 이렇게 나와있는데 나무위키에 찾아보니 다른 의견도 있다. 일부러 부수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는 듯), 그리고 나서 복수하듯 해외 원정에 나섰다. 18년간 휴가를 가듯 매년 레반트와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떠나, 무려 350개의 도시를 굴복시켰다. 이러한 왕위 쟁탈과 정통성 확보를 위한 혈통간의 결혼은 계속된다. 아버지와 딸 사이는 물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그 극단을 보여준 예가 친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 3세다.  이 일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없던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클레오파트리의 결합 이후 벌어진 왕위 계승 스토리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나중에 다시 정리를 해야겠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룩소르)



세계로 흩어진 투트모세 3세의 오벨리스크

위대한 문명은 그 규모에서 압도한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유적과 유물이 해외로 반출되었고, 도굴되었고, 파괴되었다. 우리나라의 유물도 일본과 각지로 반출된 것이 많지만, 이집트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유물들을 세계 각지로 흩어보냈으니 국민들이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할까 싶다. 특히 오벨리스크의 경우 그렇게 커다랗고 높은 탑이 어떻게 세계 각국에 흩어졌을까가 의문이다. 양엄마며, 고모며, 장모였던 하트셉수트에 대한 강한 복수심으로, 하트셉수트가 세운 오벨리스크를 가리며 세운 네 개의 오벨리스크는 세계 각국에 뿔뿔이 흩어졌는데, 하나는 357년 로마 콘스탄티우스 2세때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던 것을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 전차 경기장 가운데로 옮겨 현재는 이스탄불에 가면 볼 수 있다. 다른 두 개는 18세기 이후 런던의 템즈강에 하나,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보내졌다. 정복왕 투트모세 3세가 지금도 세계를 정복중이라는 저자의 말이다.  손자 투트모세 3세가 만들다가 죽자 4세가 완성한 오벨리스크는 로마로 갔다. 로마의 전차 경주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워졌는데, 이후 1588년 경에 교황 식스투스가 산 지오반니 광장으로 옮겼다. 


신석기에서 BC3150년까지의 선왕조 시대는 바다리 1기, 2기와 나카다 1기 2기 3기로 분류된다. BC3150년부터 BC 2686년까지는 초기왕조시대로 분류되는데, 이 때 상형문자가 등장한다. 0왕조에 전갈왕과 나르메르가 통치하고 이어 나르메르의 아들부터 파라오 일곱명이 아비도스를 수도로 다스리던 시기가 1왕조(BC3050~BC2890)다. 이후 파라오 다섯명이 다시 멤피스를 수도로 통치한 이백년이 2왕조(BC2890~BC2686)이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까마득한 옛날 3천년 경에 이미 문자가 쓰였고, 또렷하게 남아있는 조각과 부조, 상형문자들은 신비감을 넘어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3왕조부터 6왕조까지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시대를 고왕국 시대다. BC2686년부터 BC 2181에 해당된다. 피라미드의 등장은 3왕조 2대 파라오(BC2668~2649)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까마득한 시대에 이미 상상도 못할 규모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제작하고 온갖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했으니 이후 이민족이 지배하기 전까지 계속된 25세기의 찬란한 이집트 문명은 끝이 없이 계속된다. 허무한 게 있다면, 이렇게 많은 내용을 이렇게 오랫동안 읽었으나, 기억에 담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이다. 470여쪽으로 책의 두께에 비하면 페이지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편이며, 사진을 많이 담고 있어 텍스트 역시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엄청나게 많은 사실이 요약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대용량의 두뇌를 필요로 한다. 고로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이 제한된다. 시간도 엄청 걸리고. 좋은 책이다. 두고두고 5천년전의 고대 도시로 언제든 책만 펼치면 여행할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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