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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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알고 싶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역설이 판타지와 추리, 성장 등의 장르가 교묘히 결합된 이 소설이 던지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나서 진실이란 살아남는 것이고, 거짓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먹고 살던 나무는 소설의 끝과 함께 죽어 판타지가 되어 사라지고 소설로 부화한 거짓이 되겠다. 그 나무가 먹고 자랐던 시대 속의 거짓말들은 나무가 토해내던, 정확히 말해서는 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몸에 작용해 만들어내는 환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어떤 진실의 토대가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임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함께 읽었는데, 묘하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바로 종교 혹은 신화의 탄생 과정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알레고리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다닐 때에도 다니지 않을 때에도, 구약을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억압(‘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류의’)과 강요에 저항하면서도 신약의 일부를 역사와 철학적 은유로 이해했다. 신념을 지키는 건 이래 저래 힘든 일이다. 내 경우는 거꾸로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나는 뭔 뜻인지도 잘 모르고(그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카레르의 왕국에서 루카가 그랬듯, 예수의 이런 저런 말씀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교회(확신에 찬 신자들)가 그것은 은유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며, 예수의 부활과 모든 기적을 성경을 근거로 하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그 교회가 목사를 둘러싸고 두 패로 갈려 폭력으로 얼룩진 분열과 갈등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의 뜻은 당신을 이런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열혈 신자들이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기록하였지만 로마의 기독교 승인 이후 공의회에서 이것은 이단이고 저것은 신성이 아니고 등등을 정했으니, 그 1800년 전에 정해진 그것이 긴 시간 속을 걸어오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의 뼈와 살과 함께 땅 속에 깊게 뿌리 박혔으니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거짓을 먹고 자란 나무가 토해내는 진실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무가 애초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였는지, 마을에 퍼진 거짓말 때문에 쑥쑥 자라났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살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려진 더 커다란 진짜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워듣고 터득한 몇 가지 나름의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이 나무처럼 거짓말은 아주 작은 거짓말로 시작해 스스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예수의 말씀과도 통한다. 한 톨의 씨앗은 온 들판을 풍성하게 황금빛으로 물들일 수 있다지 않았나. 소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거짓말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통과해가면서 괴물처럼 커져간다.


그래서, 범인은 잡히냐고? 범인만 잡힌다면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거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의 묘미가 없지. 이제 왜 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왜 살해당했나. 저명한 학자지만 황우석 이상으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조작 사건으로 더이상 동네 창피해서 발붙일 수가 없어 조그만 섬으로 이사왔는데, 거기 사람들이라고 신문도 안 보고 사나. 귀족처럼 살던 목사 가족은 더욱이 목사가 자살했다는 의심 때문에, 하루 아침에 비오는 날 마차도 없이 진흙길을 걸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다. 머리는 좋은데 빅토리아 시대의 차별적 여성의 지위(말해 뭘해) 때문에 자기는 이미 다 아는 과학자들과의 대화에도 모르는 척 바보 표정을 지어야 하는 이 소녀는 과학자로서의 아버지, 목사로서의 아버지가 존경 너머 경외로운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옳았지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 존경과 믿음마저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살해당했다면 살해당했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닌가. 이 쯤해서 소녀와 독자들은 목사의 연구 업적을 가로챌 목적이라든가, 혹은 거짓말 나무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랬을까.


반대로, 소녀는 허영과 사치, 예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엄마를 증오한다. 아버지가 죽자 마자, 동네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행동들이 역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 철없는 아가씨야. 시대를 보자. 아버지의 자살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그들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리고 시대는 여성의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키워내야 할 아들도 딸도 있고, 또 알고 보니 죽기 전 아버지는 땡전 한 푼 남겨놓지 않았다.그리고 사회가 여성에게 인정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가치는 그 시대가 마련한 기준에 부합되는 여성성 뿐.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스터리라기에는 곳곳에 헛점이 눈에 띈다. 종종 개연성도 부족하고, 특히 상황의 긴박함에 대한 묘사에서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불필요한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이 많고 지루하게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히 배경과 상황을 묘사하다가도 가장 중요하고 궁금한 부분은 몇 번씩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마도 이 부분은 상세 묘사를 후루룩 읽어서 놓쳤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다시 읽어야 할 만큼 빡빡하고 밀도높은 소설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다고 치자 식으로 넘어갈 만한 부분 말이다.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대의 큰 과학자가 될 재목의 영민한 여성들이 사회의 편견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삶이 한 편으로는 자신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쪽의 서사가 반전처럼 등장한다. 이 부분의 비중을 키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여성의 삶은 거의 몇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데, 결국 그 여성의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아이의 삶과 많은 공통분모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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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문학(post apocalypse)이라는 쟝르가 따로 있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황폐하고 퇴락한 도시와 거리 풍경은 쓸쓸한 감성을 자극한다. 핵전쟁이든, 범 우주적 재앙이든, 종말 후에도 어떤 종류의 삶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쟝르적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미지의 세계 또한 무궁무진하다. 


그 중 맨 앞에 실린 올슨 스콧 카드의 고물수집을 소개한다. 읽고는 뭐 어쨌다는 거야? 하고 책을 덮었는데,  쨍하고 맑은 가을날의 풍경과 대조적인 종말(혹은 대참사) 이후의 풍경이 상상 속에서 아른거렸다. 





올슨 스콧 카드는 엔더의 게임과 죽은 자를 위한 변명으로 휴고상과 네뷸러 상을 수상하고 그 밖에도 여러 상을 수상한 이름난 SF 작가다. 2013년 영화 <엔더의 게임> 개봉과 함께 국내에도 재출간되었다.  글쓰기 저서도 눈에 띈다. 



고물수집


이 단편은 1980년대에 발표되었다. 핵전쟁과 대홍수 같은 대재앙이 끝난 후 생존자들의 삶을 그렸는데, 종교적인 부분도 있고 뭔가 너무 심오한 듯 하면서 심심하게 끝난다. 트럭을 몰고 멀리 있는 파괴된 도시에서 냉장고니 세탁기 같은 고물을 수집해오는 걸로 먹고 사는 데니는 마지막 전자 제품 하나를 수거한 후, 더이상 수거할 쓰레기가 없어 실직하게 생겼지만, 믿는 구석이 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의 주변은 종말 전에는 도시였는데(솔트레이크가 배경인듯), 소금 호수가 되어, 마천루를 포함한 버려진 도심가들이 물 밖으로 솟아 있고, 그 곳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그는 거기에 금이 숨겨져 있다고 트럭 운전사들끼리 하는 얘기를 우연히 흘려 들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마음만 먹으면, 거기에 있는 금을 그냥 가져오면 팔자가 필 거라고, 마치 종신 보험에 들어놓은 것처럼 든든해 했다. 실직을 앞두고 몇일 쉬는 지금이 그 종신보험을 탈 적기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여기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몬교 교인들이거나, 교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 몰몬교를 믿는다. 오직 디바만이 이방인처럼(실제로 이방인이기도 하다) 믿지 않으며, 그들의 종교를 대놓고 비웃는다. 형이라고 불러 친동생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친구였던 레히와, 동네의 노파 로레인의 도움으로 잠수복과 모터 보트를 구해,  호수 한복판 예전에 도시였던 곳에 물밖으로 솟아나온 첨탑 건물로 금을 캐러 물속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며 주워 올라온다. 그런데 물속에서 건진 것은 금이 아니라 캔 쪼가리다. 


디바가 금이라 믿고 있던 건 뾰족한 걸로 희망 사항들을 기도로 긁어 적은 쇳조각들이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 내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이 곳에 와서 그 쇳조각에 기도를 적어 두고 온 것인데, 더 화가 나는 건 그를 돕던 두 사람 로레인 아줌마와 레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몰몬교도들이 정기적으로 찾아와 기도문을 남겨두었지만, 아무도 디버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걸 혼자만 알지 못했고, 또한 금이 있다는 소문 역시 자신만 잘못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디바가 몰몬교에 대해 늘 비웃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는 익사한 도시에 살면서, 늘 과거에 속해있는 그 사람들이 딱하다고, 자신의 도시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으며 그의 도시는 바로 미래에 있다고 자기 합리를 하며 그곳을 떠난다. 


오랫동안 폐품 트럭을 몰고 헛간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이곳에 속해본 적이 없음을 자각하며, 떠나는 자. 종말 이후의 디테일에 몰몬교라는 종교적 색채가 제 3자의 눈으로 비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쿵 하고 내려앉는 한 방 이런 게 없어 조금 아쉬웠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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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유 - <미 비포 유> 두 번째 이야기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이나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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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혔던 것 같은데, 몬 내용인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체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간간히 박힌 인상은 있다. 이 책의 전작인 미 비포유가 출간 당시 흥했는데,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하고 바로 이 책을 먼저 읽었다. 사실 중요한 로맨스는 다 끝나고 홀로 남은 여주가 그 남겨진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라, 개중 미 비포유를 매우 좋아했던 독자들과는 다르게 읽혔을 것 같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야 사랑이랬는데, 전편에서 죽은 남자 윌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후속편에서는 그 환상이 처참히 깨진다. 사랑했을 때는 몰랐던 남자의 과거가 드러나고, 그 과거가 남긴 씨앗이 있었다. 윌이 그냥 곱게 죽은게 아니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안락사라는 금기의 주제를 건드렸던 주인공이라, 미국으로 돌아온 후 루이자는 상실의 슬픔 뿐만 아니라 따가운 사회적 시선도 견뎌야 한다. 그러다가 옥상에서 실수로 떨어지는데, 사람들은 그게 실수가 아니라 자살기도였다고 생각하고는 심리치료까지 다니는 처지가 되는데, 그걸 목격하는 사람이 바로, 윌도 모르게 태어난 윌의 사춘기 딸이다. 


윌의 딸은 죽은 아버지가 궁금해서 뿌리를 더듬고 싶어서 찾아온 거 같지는 않다. 갈 곳이 없어 재워주기 시작한 그녀가 이제 루이자의 동반자가 되지만, 가출, 마약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그녀와 루이자는 사사건건 부딪친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샘과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하는 전형적인 드라마적 공식을 따르는데, 술술 잘 읽혀 하루만에 뚝딱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용 자체보다는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삶, 그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윌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존재, 또 윌과 유전자로 연결된 그 충격적 존재가 윌이라는 환상화된 사랑을 어떤 식으로 깨뜨리고 그 동시에 현실 속에서의 삶을 이어가는 매개가 되는지 이런 부분에서 잘잘한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공감되도록 잘 표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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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읽은 지 오래되어 세부사항은 기억나지도 않고, 읽을 때의 느낌(살짝 불편한?)만 기억난다.  책방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의 일이므로 책에 대한 기본적 호감도가 지금보다는 더 낮았을 수도 있을 때의 일이다. 어쨌든  이런 스토리는 불편하다.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인데, 그 여자가 너무 못생겨서 사랑마저도 금기처럼 여겨진다. 주인공 남자가 화자이고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자는 떠나는데, 못생겨서 떠난다. 그리고 나중에 둘은 재회한다. 어떤 책은 읽고 나서 얼마 안가 읽은 사실까지도 까마득하게 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이상하게도 읽을 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기억난다. 제목이 살짝 허세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문체에서도 그런 걸 느꼈던 것 같다.  여자의 비밀이 드러나기까지 미스터리에 가까운 그 자의식이 두 사람의 사연을 궁금하게 하다가 드러난 비밀(?)은 이 여자가 단지 못생겼다는 거고, 그 모든 이별, 사랑의 실패, 도피가 여자가 못생겼기 때문에 거기서 출발한 귀결이라는 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미'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름다움인데, 단지 그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배척받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어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말할 때,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개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예쁘다 못생겼다를 이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외모 뿐만이 아니지 않나. 아무리 못생겼다고 해도, 자꾸 보면 예뼈지는게 사람 얼굴이다.


이런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여성의 가치가 미적 기준으로 판단되는 시대적 영향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그 '못생긴' 여성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 '못생김' 이외에는 그 여성을 특징짓지 않으므로 독자는 이 여성의 정체에 대해 전혀 할 말이 없고 살아있는 캐릭터가 되지도 못할 뿐, 긴 머리채를 늘이고 성에 갇힌 라푼젤의 이미지와 다를 바가 없다. 못생겼다고 생각이 없나? 못생겼다고 가치관이 없나? 못생겼다고 캐릭터가 없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거기에 못생겼음 그 하나만이 남은 여성은 남성위주의 시선에서 단지 호기심에 불과한 신비에 쌓인 인형같은 존재일 뿐이다. 일반 인형과 다른 건 못생긴 인형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못생겼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인지, 무엇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결국 그렇게 못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자선을 하듯,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문체로 그 못생긴 여성을, 어느날 사라져버린 그 못생긴 여성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그림 얘기가 나온다. 


못생긴 남자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창조주프랑켄슈타인에게서 버림받고 숨어 지내게 된 이유 역시 못생겨서다. 사랑이 차고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날 심오한 과학적 세계에 탐닉하게 되고, 자신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 소설이 처음 빛을 보았을 때 메리 쉘리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리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이다. 문학사에 기록될만한 대단한 작품을 쓴 건 맞지만, 어린 그녀에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재는 잣대는 18년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책에서 본 것들이 전부다. 특히 삶에서 어떤 깊이 있는 철학을 통찰할 수 있었을까.


200년 전의 소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거의 처음으로 시도하는 SF 소설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18세의 나이였기에 이런 상상을 글로 옮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만든 생명을, 지금으로 말한다면 안드로이드를 그토록 혐오하고 내버리고 도망치고 하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금 시각으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생긴다. 


괴물의 유일한 소망은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거였지만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내친다.  오늘날의 안드로이드(상상 속의)는 대체로 사랑받고 싶어하지도, 사랑받을 별로 이유도 없음을 돌이켜볼 때 이 소설의 주제는 못생긴 생명을 배척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며, 내용은 괴물이 갑자기 뚝 떨어지듯 못생기게 태어난 하나의 개체로서 소외와 결핍 속에 어떡하든 남들과 섞여 살고자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18세 소녀에 메리 쉘리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차 있어야 옳았고, 한 못생기고 기이한 생명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았다. 그토록 추악하고 기괴한 생명일지라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다는 것을. 창조주의 기술부족으로 결정된 추악한 외모가 창조주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그 아이러닉한 상황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성찰과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못생긴 것과 잘생긴 것을 거꾸로 놓았을 때.


아래 링크는 우연히 팟 캐스트를 듣다가 알게 된 이야기 'eye of the beholder' 인데 

오래 전에 환상특급이라는 단막 SF 드라마로 방영된 것이다. 팟라디오 용으로 목소리 연기하는 걸로 들었는데 반전 짱이다. 왜 이 소설에 이 드라마를 연결시켜놨는지는 아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너무 못생겨서, 수십번의 수술로도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다.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단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추악한 얼굴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붕대를 감고 살겠다고 부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들을 그들끼리 살도록 다른 장소로 추방(?)하는 것이다. 화면에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과 일부 모습만 보인다. 반전이 기가막히다.


Eye of the beholder 링크 http://www.pandora.tv/view/cdm74/12740957/#3982765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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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11-15 15:32   좋아요 1 | URL
예쁘고 밉고의 문제는 첫인상에서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한 거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단 몇 분만 이야기해보아도, 그 사람이 진짜로 이쁘고 밉고가 태도와 말투와 지성과 캐릭터 모든 것이 함께 융화되어 결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말투와 목소리 억양 이런 것은 외모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개성을 크게 좌우하는 거 같아요.
 



메리 포핀스 하면 얼른 떠오르는 이미지는 우산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이미지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의 표지가 아마도 그랬었던 같기도 하지만, 이후 포핀스를 차용하거나 패러디한 수많은 연극이며 영화 포스터에서 유사한 이미지를 많이 사용해서 눈에 익었을 수도 있겠다. 최근 해리포터와 전개와 흐름이 묘하게 유사한 <네버무어>라는 책을 읽다가, 우산 쓰고 낙하하는 장면이 나와서, 메리 포핀스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우산쓰고 하늘을 난다는 설정이 있다는 건 그 책이 온갖 신기한 마법이 펼쳐지는 세계라는 뜻이다. 














콧대 높은 포핀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무심한 듯 여기 저기 환상 여행을 시켜준 것처럼, 네버무어에서도 <이븐 타이드>라는 날 죽기로 되어 있는 저주받은 아이를 구조하여 마법이 현실인 환상적인 세상으로 데려가 신기한 것들을 보여준다. 아직 1편밖에 읽지 않았지만, 네버무어를 읽으면서 떠올린 책들은 <해리포터>와 <메리 포핀스> 뿐만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도 있다. 해리포터 네버무어 두 개가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장르적 성격을 가진다면, 메리 포핀스를 비롯한 나머지 셋은 순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다. 전자는 마법이 수단에 가깝다면 후자는 마법이 매혹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메리 포핀스는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라(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국내 판본도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몇권 되지 않았다. 첫편의 대대적인 성공으로 이야기는 8편인가까지 시리즈로 나왔다는데 찾아보니 절판되지 않은 첫편 완역판은 허밍버드, 인디고, 시공사 세 곳 뿐이고, 이후 시공사에서는 2편과 3편을 건너뛰고 쩔둑발이처럼 4편만 있다. 어쨌든, 허밍버드와 인디고는 아동 소설의 완역본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출판사다. 번역을 살짝 보면, 허밍버드 판이 주석처리가 잘 되어 있고 원작의 일러스트를 실은 것 같고 , 인디고는 예쁘게 채색된, 누구나 동심을 업데이트해서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든다. 
















기억은 이런 저런 이미지와 섞여 왜곡되어 내 머리 속에는 <메리 포핀스>가 하늘에서 우산을 타고 내려왔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리 포핀스가 어떤 트랜스포트를 이용해서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바 없고, 아이들 눈에 처음으로 띄었을 때는 이미 집 앞에 와 바람에 밀려 살짝 발이 지면에서 뜬 상태로 바람이 밀어주는 힘으로 왔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손잡이에 앵무새가 새겨진 우산은 메리 포핀스의 소중한 물건 중 하나다. 아이들을 처음 만날 때 그녀의 우산은 접혀져 있었으며, 카펫으로 만든 텅 빈, 커다란 가방 속에서 온갖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꺼내지만, 우산만큼은 한쪽 옆구리에 끼고 왔다.


매리 포핀스에서 포핀스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마법보다 더 매력적인 건 메리 포핀스의 츤데라 성격이다. 그녀의 쌀쌀맞고 콧대 높은 성격은 처음 아이들의 엄마와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드러난다. 유모구함 광고를 내면 구직자들이 길을 메울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홀로 당당히 나타난 포핀스는 엄마에게 면접을 당하러 온건지 자기가 면접관인지 모를 정도로 오만하고 콧대 높아서 유모가 면접을 위해 자기 소개를 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우리 애들은 착하다며 애써 유모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형국이다. 소개서를 가져왔냐는 물음에, 그런 퀘퀘묵은 관습이라며 기선을 제압하고, 바로 아이들에게 가서는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도 하는 말마다 뭉개면서 쌀쌀맞게 군다. 하지만 아이들은 첫눈에 포핀스에게 반해버리고 포핀스와 함께 있는 동안 어떡하든 포핀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아첨(특히 미모를 칭찬하면 잘 먹힌다는 걸 아이들은 일찌감치 눈치챘다)을 하고 찍소리 않고 말에 따르는 작전에 능하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포핀스와 함께 있으면 상상도 못할 신기한 일들이 눈앞에 무한히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매력은 디즈니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면서 빛을 많이 잃었는데 우리에게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알려진 줄리 앤드루스의 아이들을 향한 자애의 빛, 부드러운 이미지 때문이었다. 메리 포핀스의 이같은 성격 수정은 제작사와 원작자 파멜라 린던 트래버스 사이에 큰 트러블을 낳았고, 이 제작 과정 자체가 다시 또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영화를 다시 찾아서 중간 정도까지 보았는데, 사운드 트랙의 모든 곡들이 정말로 너무나도 귀에 익은 술술 자동으로 따라하게 되는 것들이었다. 약간의 텀을 두고 7주와 13주씩 총 20주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포핀스의 성격이 상냥해진 점 외에도 애니메이션의 삽입, 뮤지컬 반대 등으로 생긴 트래버스와 제작사 사이의 트러블은 제작과정은 어렵게 했지만, 메리 포핀스 역을 맡은 줄리 앤드루스는 승승장구하여 이듬해쯤 <사운드 오브 트랙>에서 또다른 유모 역을 맡게 된다. 세계적 규모의 영국 국민 유모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 


한편, 거의 반세기만에 포핀스가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메리 포핀스 리턴즈>가 크리스마스쯤에 개봉한다(미국 개봉일 2018년 12월 19일) . 극 중 시간은 20년이 흘러 전편의 주인공인 마이클과 제인은 성년이 되었는데, 이혼 후 남겨진 아이들이 있다.


https://youtu.be/cE9qhJNmgd4


영화와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마이클과 제인의 두 쌍둥이 동생들이다. 얘네들은 아직 젖먹이라 항상 거의 애들이랑 어디갈 때 유모차 속에서 동행하는 역할만 하는데,  이 아기들만 묘사한 기가막히게 감동적인 챕터 하나가 들어있다. 쌍둥이 아기들(존과 바버라)은 어른들과 대화하지 못하는 대신 사람이 대화하지 못하는 다른 모든 자연의 대상과 대화가 가능하다. 새와 벌레와 동물, 햇빛과 바람과 별들과 하루 종일 떠들고 논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하얀 벽들을 스쳐 지나 쌍둥이가 누워 있는 아기 침대 위로 춤추며 너울거렸다. 

"에잇 저리가! 눈부시단 말이야" 

존이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

햇살이 말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어쨌거나 나는 이 방을 가로질러 가야 하거든. 그게 자연의 법칙이야. 하루동안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여 가야 하는데, 그 길 한가운데 이 놀이방이 있는 걸 어떡해. 미안! 눈을 감으면 내가 안보일거야"


특히 찌르레기와는 쌍둥이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둘도 없는 친구이다. 아기들은 찌르레기에게 자기들이 왜 발가락을 입에 넣는지 설명한다.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정말 좋아하고 귀여운 것 똑똑한 것 이러며 마구 칭찬하기 때문에 연습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람 말을 이해하게 되면 찌르레기의 말을 잊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엉엉 울어버리며, 자신은 나이가 들어도 절대 까먹지 않을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기들은 몇개월도 채 되지 않아 옹아리를 배우고, 어른의 말을 차차 이해하게 되어 어느날 찌르레기가 말을 걸었을 때, 아기들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 알게 된다. 


포핀스와 즐거운 환상 여행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마이클과 제인이다. 제인이 누나고 조금 더 철들었지만 마이클 역시도 순종적이고 아주 착한 아이들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아이들은 메리 포핀스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 안되 보이기도 하는데, 어느 화요일 아침에 일어난 마이클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못되진 것이다. 목욕물 틀으라는 하늘같은 메리의 말에도 대답도 않고, 싫어요, 싫다고요를 반복하며 번번히 부딪히고 못되게 군다. 계단 난간을 발로 차며 내려가고, 주전자를 쥔 앨런을 툭 쳐서 물을 쏟게 만들고, 요리사 브릴의 양푼 속에 손을 집어넣어 휘젓고, 부인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구두를 닦는, 자신이 좋아하는 잠자는 로버트씨를 들이받고는 화가난 로버트씨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못된 행동에 대한 아이디어는 하루 종일 아이를 흥분시키고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마술적 세계는 많은 환상 소설들의 모티브가 되었을 듯하다. 물론 그 이전에 또다른 소설과 신화들이 있었겠지만. 우산을 타는 것만큼, 아이들을 매혹시킬만한 많은 마법이 펼쳐진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 못된 화요일 길에서 주운 나침판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세계 여행을 하는 것, 웃음 가스가 몸을 빵빵하게 해 천정으로 붕 뜨게 되는 것,  빈 가방 속에서 필요한 물건이 척척 나오는 것, 사람과 동물이 바뀌어 사람이 우리에 갇히고, 동물이 사람을 구경하는 밤의 동물원(여기에는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과 메시지가 스며 있다.). 하지만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은 단순히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마법이 펼쳐지는 현상보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개성들이다. 저자는 포핀스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단역에까지 세심하게 캐릭터를 불어넣었다. 20년동안 디즈니를 까다가 겨우 영화 제작을 승낙하고는 그것도 마지못해 불발될 뻔했던 이야기의 탄생 비화에는, 그토록 정성껏 창조한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상업 영화를 통해 스테레오타입으로 밋밋하고 뻔한 주변 인물들로 변형되는 우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못되고 허영있어 보이지만 그 속에 깊고 따뜻함이 숨어있는 포핀스를 창조주인 작가의 의도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최고였겠지만. 어휴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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