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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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진실을 알고 싶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역설이 판타지와 추리, 성장 등의 장르가 교묘히 결합된 이 소설이 던지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 모든 걸 통과하고 나서 진실이란 살아남는 것이고, 거짓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거짓말을 먹고 살던 나무는 소설의 끝과 함께 죽어 판타지가 되어 사라지고 소설로 부화한 거짓이 되겠다. 그 나무가 먹고 자랐던 시대 속의 거짓말들은 나무가 토해내던, 정확히 말해서는 나무의 열매가 인간의 몸에 작용해 만들어내는 환상을 통해 말하려 했던 어떤 진실의 토대가 된다.


이 책을 읽을 때, 임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함께 읽었는데, 묘하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바로 종교 혹은 신화의 탄생 과정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알레고리와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를 다닐 때에도 다니지 않을 때에도, 구약을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억압(‘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류의’)과 강요에 저항하면서도 신약의 일부를 역사와 철학적 은유로 이해했다. 신념을 지키는 건 이래 저래 힘든 일이다. 내 경우는 거꾸로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겠다. 어쨌든..


나는 뭔 뜻인지도 잘 모르고(그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카레르의 왕국에서 루카가 그랬듯, 예수의 이런 저런 말씀과 일화들이 좋았지만, 교회(확신에 찬 신자들)가 그것은 은유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라며, 예수의 부활과 모든 기적을 성경을 근거로 하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듯 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그 교회가 목사를 둘러싸고 두 패로 갈려 폭력으로 얼룩진 분열과 갈등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의 뜻은 당신을 이런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열혈 신자들이 방식으로 믿지는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달리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냥 간단히 생각하자.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기억하고 기록하였지만 로마의 기독교 승인 이후 공의회에서 이것은 이단이고 저것은 신성이 아니고 등등을 정했으니, 그 1800년 전에 정해진 그것이 긴 시간 속을 걸어오는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의 뼈와 살과 함께 땅 속에 깊게 뿌리 박혔으니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거짓을 먹고 자란 나무가 토해내는 진실과 어찌 다르겠는가


나무가 애초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였는지, 마을에 퍼진 거짓말 때문에 쑥쑥 자라났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살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려진 더 커다란 진짜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거짓말과 관련해서 주워듣고 터득한 몇 가지 나름의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이 나무처럼 거짓말은 아주 작은 거짓말로 시작해 스스로 자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예수의 말씀과도 통한다. 한 톨의 씨앗은 온 들판을 풍성하게 황금빛으로 물들일 수 있다지 않았나. 소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공포를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거짓말은 사람과 사람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서서히 통과해가면서 괴물처럼 커져간다.


그래서, 범인은 잡히냐고? 범인만 잡힌다면 현대 미스터리 소설의 거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반전의 묘미가 없지. 이제 왜 라는 질문이 나타난다. 아버지는 왜 살해당했나. 저명한 학자지만 황우석 이상으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조작 사건으로 더이상 동네 창피해서 발붙일 수가 없어 조그만 섬으로 이사왔는데, 거기 사람들이라고 신문도 안 보고 사나. 귀족처럼 살던 목사 가족은 더욱이 목사가 자살했다는 의심 때문에, 하루 아침에 비오는 날 마차도 없이 진흙길을 걸어야 할 만큼 비참한 처지로 내몰린다. 머리는 좋은데 빅토리아 시대의 차별적 여성의 지위(말해 뭘해) 때문에 자기는 이미 다 아는 과학자들과의 대화에도 모르는 척 바보 표정을 지어야 하는 이 소녀는 과학자로서의 아버지, 목사로서의 아버지가 존경 너머 경외로운 존재였기에, 그의 죽음을 자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옳았지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 존경과 믿음마저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살해당했다면 살해당했을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닌가. 이 쯤해서 소녀와 독자들은 목사의 연구 업적을 가로챌 목적이라든가, 혹은 거짓말 나무를 빼앗기 위해서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랬을까.


반대로, 소녀는 허영과 사치, 예쁜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엄마를 증오한다. 아버지가 죽자 마자, 동네 남자들에게 꼬리치는 행동들이 역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 철없는 아가씨야. 시대를 보자. 아버지의 자살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그들은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게 생겼다. 그리고 시대는 여성의 그 무엇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키워내야 할 아들도 딸도 있고, 또 알고 보니 죽기 전 아버지는 땡전 한 푼 남겨놓지 않았다.그리고 사회가 여성에게 인정하는 유일한 단 하나의 가치는 그 시대가 마련한 기준에 부합되는 여성성 뿐.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미스터리라기에는 곳곳에 헛점이 눈에 띈다. 종종 개연성도 부족하고, 특히 상황의 긴박함에 대한 묘사에서 핍진성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불필요한 부분은 장황하게 설명이 많고 지루하게 구체적으로 아주 자세히 배경과 상황을 묘사하다가도 가장 중요하고 궁금한 부분은 몇 번씩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게 얼버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아마도 이 부분은 상세 묘사를 후루룩 읽어서 놓쳤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다시 읽어야 할 만큼 빡빡하고 밀도높은 소설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다고 치자 식으로 넘어갈 만한 부분 말이다.


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당대의 큰 과학자가 될 재목의 영민한 여성들이 사회의 편견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삶이 한 편으로는 자신을 실현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는 쪽의 서사가 반전처럼 등장한다. 이 부분의 비중을 키웠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 여성의 삶은 거의 몇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데, 결국 그 여성의 삶과 앞으로 살게 될 아이의 삶과 많은 공통분모가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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