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여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읽은 지 오래되어 세부사항은 기억나지도 않고, 읽을 때의 느낌(살짝 불편한?)만 기억난다.  책방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의 일이므로 책에 대한 기본적 호감도가 지금보다는 더 낮았을 수도 있을 때의 일이다. 어쨌든  이런 스토리는 불편하다. 못생긴 여자가 주인공인데, 그 여자가 너무 못생겨서 사랑마저도 금기처럼 여겨진다. 주인공 남자가 화자이고 둘은 서로 사랑하지만 여자는 떠나는데, 못생겨서 떠난다. 그리고 나중에 둘은 재회한다. 어떤 책은 읽고 나서 얼마 안가 읽은 사실까지도 까마득하게 잊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이상하게도 읽을 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기억난다. 제목이 살짝 허세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문체에서도 그런 걸 느꼈던 것 같다.  여자의 비밀이 드러나기까지 미스터리에 가까운 그 자의식이 두 사람의 사연을 궁금하게 하다가 드러난 비밀(?)은 이 여자가 단지 못생겼다는 거고, 그 모든 이별, 사랑의 실패, 도피가 여자가 못생겼기 때문에 거기서 출발한 귀결이라는 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미'라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와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름다움인데, 단지 그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배척받는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어떤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말할 때, 그를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단지 개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예쁘다 못생겼다를 이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외모 뿐만이 아니지 않나. 아무리 못생겼다고 해도, 자꾸 보면 예뼈지는게 사람 얼굴이다.


이런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여성의 가치가 미적 기준으로 판단되는 시대적 영향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그 '못생긴' 여성에 접근하는 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 '못생김' 이외에는 그 여성을 특징짓지 않으므로 독자는 이 여성의 정체에 대해 전혀 할 말이 없고 살아있는 캐릭터가 되지도 못할 뿐, 긴 머리채를 늘이고 성에 갇힌 라푼젤의 이미지와 다를 바가 없다. 못생겼다고 생각이 없나? 못생겼다고 가치관이 없나? 못생겼다고 캐릭터가 없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거기에 못생겼음 그 하나만이 남은 여성은 남성위주의 시선에서 단지 호기심에 불과한 신비에 쌓인 인형같은 존재일 뿐이다. 일반 인형과 다른 건 못생긴 인형이라는 것. 


그래서, 그런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못생겼기 때문에 여자를 사랑하는 것인지, 무엇때문에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결국 그렇게 못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자선을 하듯,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문체로 그 못생긴 여성을, 어느날 사라져버린 그 못생긴 여성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그림 얘기가 나온다. 


못생긴 남자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자신의 이름조차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창조주프랑켄슈타인에게서 버림받고 숨어 지내게 된 이유 역시 못생겨서다. 사랑이 차고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프랑켄슈타인은 어느 날 심오한 과학적 세계에 탐닉하게 되고, 자신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이 소설이 처음 빛을 보았을 때 메리 쉘리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리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일이다. 문학사에 기록될만한 대단한 작품을 쓴 건 맞지만, 어린 그녀에게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을 재는 잣대는 18년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책에서 본 것들이 전부다. 특히 삶에서 어떤 깊이 있는 철학을 통찰할 수 있었을까.


200년 전의 소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거의 처음으로 시도하는 SF 소설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18세의 나이였기에 이런 상상을 글로 옮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만든 생명을, 지금으로 말한다면 안드로이드를 그토록 혐오하고 내버리고 도망치고 하는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금 시각으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생긴다. 


괴물의 유일한 소망은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랑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거였지만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내친다.  오늘날의 안드로이드(상상 속의)는 대체로 사랑받고 싶어하지도, 사랑받을 별로 이유도 없음을 돌이켜볼 때 이 소설의 주제는 못생긴 생명을 배척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며, 내용은 괴물이 갑자기 뚝 떨어지듯 못생기게 태어난 하나의 개체로서 소외와 결핍 속에 어떡하든 남들과 섞여 살고자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18세 소녀에 메리 쉘리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차 있어야 옳았고, 한 못생기고 기이한 생명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알았다. 그토록 추악하고 기괴한 생명일지라도 사랑받고 관심받고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졌다는 것을. 창조주의 기술부족으로 결정된 추악한 외모가 창조주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배척받는 그 아이러닉한 상황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성찰과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을


못생긴 것과 잘생긴 것을 거꾸로 놓았을 때.


아래 링크는 우연히 팟 캐스트를 듣다가 알게 된 이야기 'eye of the beholder' 인데 

오래 전에 환상특급이라는 단막 SF 드라마로 방영된 것이다. 팟라디오 용으로 목소리 연기하는 걸로 들었는데 반전 짱이다. 왜 이 소설에 이 드라마를 연결시켜놨는지는 아래 드라마를 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너무 못생겨서, 수십번의 수술로도 교정이 불가능한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다. 그녀의 유일한 소망은 단지 이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토록 추악한 얼굴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붕대를 감고 살겠다고 부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들을 그들끼리 살도록 다른 장소로 추방(?)하는 것이다. 화면에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모습과 일부 모습만 보인다. 반전이 기가막히다.


Eye of the beholder 링크 http://www.pandora.tv/view/cdm74/12740957/#3982765_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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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8-11-15 15:32   좋아요 1 | URL
예쁘고 밉고의 문제는 첫인상에서 있어서는 큰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한 거 같아요. 하지만, 조금만, 단 몇 분만 이야기해보아도, 그 사람이 진짜로 이쁘고 밉고가 태도와 말투와 지성과 캐릭터 모든 것이 함께 융화되어 결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말투와 목소리 억양 이런 것은 외모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인간의 개성을 크게 좌우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