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기타노 다케시 지음, 이영미 옮김 / 레드스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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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식 사랑


 요즘 영화감독이 쓴 소설들이 대세인가 보다. 이와이 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기타노 다케시, 신카이 마코토등 일본 감독들이 쓴 작품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영화감독이었을 때 그들이 만든 작품은 각각의 색다른 색채감을 나타내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영화의 제목이 술술 나올 정도로 명작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감독들의 글을 책으로, 문장으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영화감독을 하기 전에 극본을 쓰거나 스텝이 되어 경력을 쌓아가다가 마침내 영화감독의 길을 걸어가는 감독들의 이야기를 많이 봐왔다. 그렇기에 영화감독이 글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스크린 속 이야기와 달리 책은 뚜렷한 색채를 내기 보다는 잔잔한 이야기들을 많이 담았다.


기타노 다케시의 <아날로그> 역시 무색소 저염식이라는 순애소설이라는 글귀에 눈길이 갔다. 보통 음식에 표현되는 문구를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저렇게 표현 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건축 디자이너인 사토루의 하루 일과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컴퓨터나 휴대폰을 즐겨 사용하지 않고, 오직 사무소의 일과 요양원에 홀로 있는 어머니 생각 뿐이다. 젊은 날 아버지를 잃고, 노모는 홀로 아들을 키웠다. 사토루는 젊은 남자들이 즐기는 것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고, 오직 낙이라면 오랜 친구와 함께 한 잔 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이 유일한 일탈이라면 일탈이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카페 피아노에서 미유키를 만난다. 상대방을 만나면 당장 전화번호를 물으며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10자리의 번호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언제, 어디서 , 만나기로 약속을 하며 그렇게 헤어진다. 아날로그식 만남은 기다림을 전제로한 만남이다. 서로 정확하게 약속을 정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하지는 못한다. 10자리의 번호도 주고받지 않았기에 그 어떤 설명도 할 수 없다. 그 흔한 이메일도, 집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과연 그 약속을 오랫동안 지켜올 수 있을까.


사토루는 미유키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지만 그 사이 어머니의 죽게되고 한동안 그녀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여러번 미유키와 만나면서 사토루는 엄마의 정을 느끼며 미유키에게 빠져버린다. 사랑하는 만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전하던 사토루는 청혼을 하려 했으나 미유키가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고 몇 년 후에 다시 재회한다. 서로의 연락처를 바로 알고, 매일 같이 연락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순도 높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토루처럼 남들이 연락을 취하는 방식이 아닌 고전적인 만남이 그녀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개인의 전화가 흔하고, 너무나 쉽게 연락을 하고, 기다림 없이 상대방을 만나며 가볍게 즐기는 사랑을 보다 '아날로스'식 사랑을 하는 그들이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고 싶은 순수한 애정 소설의 순도를 깊이 끌어 당겼다거나, 애절한 느낌이 아닌 정적인 느낌의 온도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더 깊은 맛을 우려내기 보다는 그저 느릿느릿한 느낌의 작품이라 기대를 갖고 읽은 작품 치고는 아무 것도 마음에 남아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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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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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이야기


 언제부턴가 '사랑'이야기를 달달함만에 취해서 읽지는 않는다. 20대에 다가왔던 느낌과 30대에 읽었던 느낌이 다르듯이. 예전에는 사랑이야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면 내 일 마냥 발을 쭉 뻗고 잘 수 있었으나, 결말이 세드엔딩이면 어딘가 이야기를 들 읽은 것 같은 찜찜함이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달달한 이야기 보다는 끝맺음이 쌉싸르한 결말을 놓고 자꾸만 생각을 돌이켜 본다. 왜 그이가 그렇게 밖에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 나선다. 때대로 이해 할 수 없는 물음들이 생각을 가로 막았고, 그럴 때면 시간의 여유를 두고 여러번 그들의 이야기를 반추해 나갔다. 처음에는 두 사람을 둘러싼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작가의 목소리를 따라갔다면, 다음에는 각기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을 나눠 그들의 이야기를 등반한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지만 시작하는 순서도 다르고, 좋아하는 타이밍도 다르고, 함께 있다가 이별을 하는 순간도, 깨달음도 다르다. 시작은 운명처럼 우연으로 다가왔다가 나이에 불문하고 19살 청년 폴과 48살의 유부녀 수전은 테니스 클럽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수전은 폴 보다 나이도 더 배로 많고 두 딸과 남편을 가진 이였지만 지울 수 없는 사랑의 시작점을 향해 맹렬차게 길을 걸어간다.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은 나이가 든 백발의 노인이 오랜 시절 자신의 겪어왔던 단 하나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문체가 아닌 꺼끌꺼끌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회의 초년생이 겪을 만한 청년의 말투로 폴과 수전의 이야기를 과감없이 털어놓는다. 어릴 때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을 그저 꽁냥꽁냥하게 지내는 단편적인 모습으로 사랑을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것이 사랑의 전부라 생각했었다. 시대적으로 남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작품들을 과감하게 꺼내들지 않는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이를 불문하고 환상의 연애보다는 현실을 직시 하도록 현실성있는 작품들이 많다보니 환상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다.


그런 두 사람의 이야기는 19살 소년의 이야기로 되어 있고, 사랑의 끝을 짐작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지만 처음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에게 끝이 있으니, 조심하시오 혹은 후회할 행동을 하지 말고 적당한 속도로 상대방을 사랑하라면 과연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나같아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결혼하지 않는 남녀가 사랑을 시작하고 걸어가는 과정도 만만치 않는데, 남편과 자식이 있는 수전과의 사랑이라면 말해서 무엇할까.


사람들의 시선과 그들의 부모님, 그들이 가진 특질적인 성격이 그들의 사랑을 멈추게 하기도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에 힘입어 한걸음 더 도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야기가 이렇게 심오하고, 어렵고, 날카롭고, 적나라한 것이라면 나는 그렇게 불길을 뛰어들듯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을 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사랑을 완성해 봤던 이들이 모두 공감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줄리언 반스는 두 사람의 사랑만을 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를 주축으로 더 많은 세계의 이야기들이 나타나고, 둘이 애써 감췄던 상황들이 한걸음 더 성큼들어 가면 반전처럼 다시 두둥실 떠오른다. 알면 알수록 더 심오한 관계의 늪이.


햇살이 좋은 날, 선선하게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깊이 느끼고 싶었는데 오히려 사랑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에 빠져 버렸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자연스러운 문장보다는 삐그덕 거리는 문장이 많아 여러번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문 그대로의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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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2 - 이게 사랑일까
안나 토드 지음, 강효준 옮김 / 콤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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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없이 가벼우면서도 격정적인 사랑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좋아하는 것들이 점점 변하게 된다. 예전에는 강렬한 색채를 띄며 좋아했던 것들도 시틋해지고, 좋아하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강렬함을 내뿜기 보다는 색이 옅어졌다고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색이 더해졌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삶을 관조하게 된다.


테사와 하딘의 나이 때에 만났다면 나도 이들과 같이 사랑했을까?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보아도 테사와 같은 사랑을 못했을 것 같다. 안나 토드의 <애프터 2>는 시종일관 한 없이 가벼운 하이틴 로맨스를 읽는 것 같다가 때로는 19금 넘치는 격정적인 로맨스에 퐁당였다가, 다시 사랑과 전쟁으로 빠져든다. 한시라도 테사와 하딘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였다면 이번엔 하딘의 주체 못하는 질투로 인해 화를 내뿜고, 카사노바 같은 하딘의 과거 행적으로 인해 테사는 여전히 하딘을 사랑하면서도 갈팡질팡 한다. 서로를 갈구 하면서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가 생기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애간장 녹이는 연애를 해나간다.


그러다 다시 불이 붙는 두 사람. 테사와 하딘은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딘의 속삭임에 동거를 하게 되지만, 최악인 남자는 끝까지 최악인걸까? 아니면 테사가 진짜 사랑이 아닌 지나가는 바람인걸까? 그녀와의 관계를 친구들에게 진실대로 이야기 하지 못하고 그녀와 나눈 모든 것들을 친구들의 수다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한 없이 가볍고 격정적인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이 서로를 향한 애정이 난무 하면서도 서로 믿지 못하고, 진실되지 못하는 그들의 관계는 뜨거우면서도 위태위태하다. 누군가 살짝 그들의 관계를 툭 하고 건드려도 그들은 다시 서로를 사랑하지 못 할 것 같다.


나라면 이 애간장 나는 사랑을 지탱하지 못 할 것 같다. 아무리 하딘의 매력이 흘러 넘쳐도. 그럼에도 안나 도트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하이틴 로맨스와 19금 로맨스가 섞여있는 동시에 문학적인 이야기가 한데 섞여 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어렸을 때라면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기에 그저 테사가 하딘이 아닌 다른 이와의 연애를 꿈꾸기를 희망하지만 2권이 끝이 아닌 3권이 나온다고 하니 그들의 연애의 결말이 궁금하다. 부디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연애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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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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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도리스 레싱의 책은 서걱서걱한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안이 텁텁하다. 읽고 있으면 어딘가 불안하고, 사랑을 하고 있을 때 조차도 다음 그림이 반전으로 물들어 버린다. 콩깍지가 씌여 누군가의 손을 맞잡은 두손은 이내 썩은 동아줄처럼 흐느적 거린다. 평생을 함께 할 이의 품으로 들어간 한 여자는 이내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쓰러져 갈 집과 황무지 같은 땅을 조금 갖고 있는 무덤덤한 사내가 옆에 있을 뿐이다. 처음 <풀잎은 노래한다>(2008, 민음사)를 읽고 나서 텁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재밌다기 보다는 생경한 마음과 어딘가 미묘하게 불편한 마음이 공존했기에.


그 이후로 도리스 레싱의 작품을 천천히 한 작품씩 접하고 있는데 단편과 장편 모두 그런 서걱거림이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를 그저 무지개빛으로 환하고 밝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순간에 빛으로 선택해 결국 파멸에 이르기까지 혹은 진절머리 나는 결혼생활의 적나라함. 사회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역할의 차이를 도리스 레싱은 섬세한 붓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그 모든 순간을 담아낸다. 읽기에는 조금 불편해도 읽고 나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그녀의 작품 속에 있다.


<사랑하는 습관>은 도리스 레싱의 단편선으로 <19호실로 가다>(2018,문예출판사)의 후속작이다. 두 작품 모두 도리스 레싱의 초기 단편을 모았고, 1950년~60대의 유럽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개인의 습관이나 오래 이어져 온 관습도 있지만 사회적인 영향으로 인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채롭게 바라 볼 수 있다. 단편선의 매력이라면 장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이미지나 이야기를 다채롭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인데 그런 점에서 도리스 레싱의 단편은 장편과 같은 무게감을 던져준다. 짧은 이야기라도 묵직한 무게의 파편이 마음 속에 쿵하고 박히는 것 같다.


초기 단편 소설의 묶음 중에서도 표제작인 '사랑하는 습관'과 '와인'을 가장 재밌게 읽었다. 사랑이라면 20~30대의 젊은 남녀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년의 삶에서의 사랑은 또다른 색깔을 띄고 있다. 처음 결혼했던 아내와 이혼하고 함께 살았던 연인, 그러다 다시 만난 수 많은 여자들. 나이가 많이 들었음에도 누군가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의 살결과 따스한 체온을 그리다가 다시 만난 젊은 여자인 보비와의 관계와 사랑이야기는 어딘가 모르게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지기도 했다. 전자가 '사랑하는 습관'의 이야기라면 '와인'은 그야말로 술의 특성처럼 숙성하는 사랑이야기인데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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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품격 - 작은 섬나라 영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박지향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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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품격


한 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그 영광을 수식어에 붙일만큼 영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그야 말로 지구본을 돌리면 누가 많은 땅을 차지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에게 많은 식민지가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것만 찾다보니 순간순간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을 잊게 된다. 우리가 가졌던 강점도, 지난 시간 인류가 이룩해왔던 빛나는 순간들도 잊고 오늘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TV를 틀어도 현대극만 있고, 시대극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세계 여러나라들을 여행하고, 음식만 맛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거리가 멀었던 나라들이 이전 보다 더 가깝게 보이지만 실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깊이 통찰하지 못하는 우리는 과연 여행자의 발걸음처럼 그저 화면 속에서 발도장만 콕콕 찍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말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잔혹한 세상이 그려지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니 가슴이 두근두근, 언제 긴장을 놓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매번 물밀듯이 밀려온다. 요즘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잔악했던 일본인들의 만행을 보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서서히 밀려드는 시간 속의 암흑기가 찾아와 주인공들이 앞으로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지 뻔히 알고 있기에 더 가슴을 조리며 보고 있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다른 나라에 들어와 권력을 손에 쥐고 그 영토를 집어 삼키고, 모든 것을 움켜쥐는 일을 우리는 겪어왔다. 제국의 권력을 손에 움켜 쥐었던 나라가 아닌 오랜시간 식민지 통치를 받은 나라였기에 강자의 마음 보다는 약자의 마음을 더 깊이 안다. 어쩌면 서로의 동질감일지도.

한동안 제국주의에 대한 관심은 경제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제국이 얼마나 이득을 가져다주었는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는데,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보면 식민지들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이득이 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이익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영제국의 경우, 그 방대한 제국을 지키는 데 들어간 방위비는 제국이 가져다준 경제적 이익을 훨씬 앞질렀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19세기 말에 영국인들이 해외에 투자한 돈이 국내에 투자되었다면 영국 경제 쇠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맞지 않는다. 영국 경제는 자본이 부족해서 쇠퇴한 것이 아니라 기술 혁신과 구조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쇠퇴했던 것이다. 대조적으로 18~19세기에 영국이 전 세계에 영국 제품을 판매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영국 제품의 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제국은 결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 p.22~23


박지향 교수의 <제국의 품격>을 읽고 있으니 문득 내가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잘 알고 있는 나라, 라고 생각했으나 떠올려보니 아는 것이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작은 파편같은 지식이 대부분이다. 섬나라인 영국이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있는 나라도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영국사의 권위자인 박지향 교수가 세밀하게 그들의 품격을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영국은 일본과 같이 섬나라이기에 해상전력이 우위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너무나 다른 제도와 기술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을 시절 치를 떨 정도로 그때의 시간을 기억한다면, 식민지였던 곳은 그들의 잔재를 지우기 보다는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사례를 많이 보았다.


20세기 초까지 지도의 4분의 1이 영국의 식민지 였으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도 영광을 뒤로 하고 서서히 빛나는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식민지의 숫자가 줄어들고, 세계적으로 우위를 점했던 힘도 약화가 된다. 영국의 힘이 약화되고 권력의 공은 신생국가인 미국이 받게 된다. 모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의 정신을 받은 미국은 그들의 밑바탕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르게 힘을 구사한다. 유럽 역사에 있어서 종교과 경제, 바다의 지배자였던 시대는 저물고 선진국들이 갖는 문제에 봉착하며 현재를 살고 있는 영국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까지 에필로그로 담아냈다.


아무리 제국의 힘이 강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아도 세계를 막론하고, 시공간을 뛰어넘어도 결국 해는 뜨고 진다. 그럼에도 그들이 가졌던 원동력의 힘, 제국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길을 걸어 가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청사진이다. 영·미가 아닌 영국이 걸어왔던 길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로마를 비롯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이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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