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안는 것
오야마 준코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한 감동의 이야기.


새하얀 혹은 분홍빛으로물든 벚꽃 나무아래 고양이들의 우아한 몸짓이 그려져 있는 표지에 눈길이 갔다. 요즘 뭐니뭐니 해도 고양이가 대세인가 보다. 이전에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진집들이 많이 나왔다면 요즘은 그 고양이들이 미술책을 넘어 문학책에 자주 등장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2013, 현암사)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지만 올해 베르나르 베르베르 역시 고양이를 주제로 글을 썼다. 제목 또한 <고양이>(2018,열린책들)다. 이처럼 고양이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왔다. 예전에는 주인에게 '충성'하며 인간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강아지를 곁에 두었다면, 요즘은 고양이 특유의 우아한 몸짓과 조용한 특질을 가진 고양이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고양이를 멀리한 시절에는 고양이에 대한 많은 편견과 그들의 날큼한 눈빛에 움찔하여 다가가지도 못했다면, 요즘은 고양이가 있는 곳이면 서슴없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혹, 고양이가 놀랠까봐 조심스럽게 부르며 그들과 마주하곤 한다.

오야마 준코의 <고양이는 안는 것>은 도쿄 변두리에 있는 아오메 강의 '네코스테 다리'에서 늦은 밤 고양이의 집회가 열린다. '네코스테'는 고양이를 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다. 각기 다른 색채를 가진 고양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데, 사오리와 함께 살던 요시오는 사오리를 만나러 가다가 강에 빠져 휩쓸려 네코스테 다리에 오게 되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러시안블루인 수고양이 요시오와 삼색털 암고양이 키이로, 가을에 태어난 아기고양이로 아직 이름이 없다. 네코스테 다리에서 신비한 존재인 그분을 비롯해 여러 고양이가 나오지만 요시오와 키이로의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준다.

사오리와 요시오가 어떻게 만났고, 러시안블루 수고양이가 왜 '요시오'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연들이 애달프게 그려져 있다. 부모님 곁에서 가게일을 돌봐주며 나름 가족의 일원으로서 함께 했지만 늦은 밤, 부모님과 오빠가 한 이야기를 듣고 사오리는 그날 밤 하루의 매상과 함과 금전등록기를 들고 가출했다. 도쿄로 올라온 그녀. 힘써서 일한 그녀의 공을 몰라주고 자신을 짐으로 생각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는 오랫동안 그말이 가슴에 맺혀 버렸다.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사오리가 추위에 몸을 녹이려 들어간 공간에서 애완동물 가게를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짧은 회색 털을 가진 홀쭉한 몸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를 만났다. 자신이 일한 가게에 어떤 사정으로 학교 선생님의 명함을 받게 되고, 그것이 선의로 호감으로 느껴졌던 사오리는 '요시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으나 이내 그 남자 곁에 물건을 훔치던 소녀가 팔짱을 끼는 것을 본 사오리는 이내 마음을 내려 놓는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길에 가게에서 3만 엔에 사서 온 사오리는 그 고양이의 이름을 '요시오'라고 지었다.


아기 고양이는 자신이 고양이가 아니라 사오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숙소에서 함께 살 수 없었던 요시오는 창고에서 사오리를 만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오리와 더 오랜시간 함께 하고 싶어서 담을 넘다 강에 빠졌고, 그렇게 키이로를 비롯해 여러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키이로와 그의 주인인 고흐와의 만남은 더 아릿하다. 상자에 담겨진 아기고양이 형제들은 하나 둘 사람들이 선택해 데려가고 자신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아무로 데려가지 않는 종이상자에 홀로 장대비를 맞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라면 아기 고양이는 생명의 위협이 있을지로 모를 그 순간 화가인 고흐가 그 아기 고양이를 자신의 품에 안아 작업실로 데려간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주인이 이상하게 느껴졌으나 이내 색각이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고민이 많았던 고흐는 매번 그림을 그리다가 만다. 누나가 생활비를 대주고, 틈틈이 조카가 오고, 친구인듯 친구아닌 가타오카와 한 여자 모델이 종종 그의 작업실에 오곤 한다. 가까우면서도 먼 거리의 그들은 고흐의 작업실에 들르면서 그와 교류하지만 애정이 있는 동시에 그를 비난하고 그를 할퀴며 지나간다.

무채색이던 고흐와 키이로의 이야기는 서로 닮아있어 애정 가득한 손짓을 바라본 그의 조카 호노의 악의로 키이로와 헤어진다. 사람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고양이의 생과 사를 좌우 할만큼 그들은 그렇게 이별한다. 주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다리에 내다버렸고, 키이로는 길고양이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주인이 있는 고양이는 이름이 있는 동시에 안전하지만, 그 안전 또한 언제 바뀔지 모른다. 메여 있어서 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한 그들의 몸짓을 보면서 길고양이와 집고양이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할까?라는 물음이 들었으나 키이로의 말처럼 그들의 인연은 운명이니 결국 정답을 없다. 길고양이의 자유와 집고양이의 이름과 안전 그 둘을 비교 할 수 없으니.

서로가 서로를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동시에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외로운 사람과 외로운 동물과의 교감은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하고, 감동적인 동시에 인간의 악의와 숨어있다. 가슴 따듯한 동화를 읽는 것 처럼 아련한 느낌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져 나도 모르게 여러번 책의 표지를 매만지곤 했다. 아마도 옆에 고양이가 있었더라면 포근하게 안아주었을 것이다. 따스함과 씁쓸함. 슬픔, 기쁨, 행복의 순간들이 옴니버스식으로 이어져 있어 읽는 내내 감동적이면서도 눈물이 났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교훈과 감동의 이야기처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를 만든 이누도 잇신 감과 사와지리 에리카 주연의 영화 원작인 <고양이는 안는 것>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만큼이나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작품이다. 동화처럼 혹은 만화처럼 읽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선의와 악의가 함께 그려져 있어 행복한 결말이 그려진 그림 사이로 그들의 이야기가 쌉싸름하게 혀끝에 맴돈다. 원작만큼이나 영화에서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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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밥을 얻어 먹어 온 고양이들의 역사에서 수렵의 기술은 더 이상 대단한 가치가 아니다.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인간에게 사랑받고 더 오래 살아남는다. 미(美)에 대한 집착하는 것은 생존 본능인 것이다. 여자 고양이는 남자 고양이만큼 외모에 연연하지 않는다. 아름다움보다 몸짓의 사랑스러움이 인간의 마음을 더 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33


읽어버려서 마음 아픈 것은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중한 것은, 보통은 하찮게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 하찮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 p.55


"됐어. 막으면 고양이가 못 돌아올 거 아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돌아온다고 주인이 믿어야 돌아오지."

"······."

"믿지 않으면 영원히 만날 수 없어."

관리인의 눈을 거칠고, 그 안은 공허했다. 사오리는 관리인의 눈에서 늙음을 느끼고 문득 쓸쓸해졌다. - p.75


"키이로는 나와 같은 세계를 보고 있어. 나의 색각은 고양이의 색각과 같아. 사람에게는 드문 증상이지만 소수라고 해서 그걸 비정상이라고 치부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너희들하고 보이는 게 다른 건 확실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어. 빨강도 파랑도 초록도 내 방식으로 보고 있어. 많다고 정상이라 하고, 적다고 비정상이라 하는 건 다수의 오만이 아닐까?" - p.117


어떤 일이 있어도 대립하지 않고 공생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백로가 계속 번식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철학자는 생각한다. 철학자로 불리게 되면서 사물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름의 영향은 대단하다. - p.168


"호기심은 자립을 위한 첫걸음이야. 자립을 지켜보는 것도 엄마의 일이잖아?" - p.227


"살면 살수록 나 자신이 미약하다는 걸 느낍니다. 알면 알수록 겸허해지지요. 머지않아 소년도 이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겁니다." - p.276


인간과의 거리를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 거리감을 갖는 것, 즉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다,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해요. 포기하는 것의 반짝거림이랄까. 저는 어릴 때부터 '모두 함께하자' '우리는 하나다', 이런 생각을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어요. 경계선이 있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죠.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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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엮음.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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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좋은 책을 안내하는 적확한 안내자 헤세의 비평.


 올해 그책에서 출간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배수아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지금까지 만난 헤세의 판본 중에 가장 좋아서 헤세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어 고른 책이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이다. 헤세의 책은 <데미안>을 포함해서 그의 많은 대표작들이 출간되어 있지만 그의 글이 손에 잡힐듯 그려지지는 않는 작가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풀어내지 않는 관념 같은 것이 묻어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풀어 내야만 비로소 그의 깊이를 음미 할 수 있다. 아직까지 그런 경지에 오르지 않았기에 천천히 그의 작품을 하나 둘 접하고 있고, 그의 작품이 아닌 글을 접하고 싶어 만난 책 역시 그의 색깔이 오롯하게 드러난다.


작가로서 직접 글을 쓰는 것 뿐만 아니라 그는 책을 읽는 것 또한 좋아하는 작가다.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서평을 받기 위해 여러 출판사들이 그에게 책을 보냈다고 한다. 늘, 책더미에 싸여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책의 무덤 속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불을 밝히며 책을 읽어 나갔다. 1900년부터 1962년까지 작품을 쓰는 틈틈이 신문과 잡지에 수 많은 서평과 에세이를 기고 했고, 그가 쓴 3천여 편의 서평 중에서 73편의 글만 뽑아 엮은 책이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이다. 프란츠 카프카, 귀스타브 플로베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로맹롤랑, 보카치오, 셀라 라겔뢰프, 슈테판 츠바이크, 크누트 함순, 프랑시스 잠,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조너선 스위프트, 로베르트 무질, 펄 벅, 카렐 차페크, 조지프 콘래드, 스탕달, D.H 로렌스, 공자, 노자, 열자, 포송령, 조설근등 그야말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작가와 책의 리스트들이 담겨져 있다.


몇몇 작가에 대한 작품은 읽어본 적은 있지만 대부분 이름은 들어봤지만 일면식도 없는 작가와 작품들이 많았다. 그의 서평은 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군더기기가 없다. 깔끔하며, 적확하게 작품을 이야기하고 있고 혹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글쓰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 한다. 시공간은 달라도 거장과 거장과의 만남은 독특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가 읽어가는 프란츠 카프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를 어떻게 읽고 느끼는지를 알 수 있다. 동종업계를 종사하는 그는 책을 허투루 읽지 않고, 또 작가로서 냉철하게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의 변한 문제나 혹은 날렵하게 베어내지 않는 무딘 칼날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를 건넨다. 때론 그가 애정하는 책이나 작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애정의 깊이가 담겨져 있는지 단어 하나하나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많은 이들이 읽고, 또 읽어냄으로서 거장의 찬사를 받는 괴테도 헤세의 날렵한 눈빛에는 벗어나지 못하는지 유독 그의 글에 대해서는 서리가 내려 앉는다. 헤세가 읽은 혹은 글을 쓴 궤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생소하면서도 접점이 없어 도무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이 책은 그의 궤적을 따라 올라가기 전에 위에 언급된 수 많은 작가와 책의 리스트들을 반 이상 읽어본 독자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장편 소설을 쓰든, 산문을 쓰든, 시와 서평을 쓰든 그는 각기 다른 칼로 그의 생각을 드러내고, 적확하게 작가를 이야기 하며 그의 작품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본다. 작가를 깊이 알아야만 설명할 수 있는 궤적의 깊이를 그는 말하고 있고, 겉에서만 맴돌아서는 알 수 없는 작품의 의미를 그는 누구보다 더 깊이 이해한다.


고수의 서평은 이런 것이구나, 생각될 정도로 그는 할애된 지면 속에서 하고픈 말을 허락된 공간 안에서 그 작품을, 그 작가의 색채를 드러냈다. 읽는 내내 헤세의 눈으로 날렵하게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아쉬운 점 또한 많은 작품을 접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이기도 했다. 그와 같이 그에 관한 읽고 읽었더라면 더 풍성한 책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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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놀랍고도 단순하고 순수한 인간이었던 것 같다. 서문은 약간 서투른 방식으로 그를 소개하고 있지만, 여기서 알게 된 몇 가지는 이 동화 작가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는 가난하게 자라 일찍부터 남의 후원을 받았고, 여행을 좋아하고 명예욕이 있었지만 언제나 동화속의 길 떠난 아들 모습이다. 마지막에는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지만 다정함은 얻지 못해 늘 마음이 결핍되어 있었고, 사랑에서도 불운했다. 이 특이한 남자는 이렇게 살았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였기에 실망하고 외로울 때면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위한 동화를 구상했다. 그는 다른 작품들 덕에 명성을 얻었지만 오직 그의 동화들만이 살아남았다. 이들이 스러지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 p.23 <안데르센 동화집> 중에서


이 소설을 절반 성숙한 힘든 소년의 개인 이야기로 읽든, 아니면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의 상징으로 읽든, 독자는 작가를 통해 낯섦에서 이해로, 역겨움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멋진 길을 안내받는다. 문제 많은 시대, 문제 많은 세계에서 문학이 이보다 더 높은 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 p.26


이 책에서 늙은 대가 함순을 보여주지 않는 문장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옛날의 대담하고 변덕스런 관찰이자 작가인 함순을, 모든 것이 여기 다시 나타난다. 그의 비웃음, 일상적인 것에 대한 경멸, 날씨나 사랑 같은 일에서 신경질적인 섬세함, 탁월함을 기뻐함, 감추어진 우수 등 그 모든 것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저 나이의 숨결이 덧붙는다. 더욱 부드러워진 지혜와 가볍게 비웃음이 섞인 미소, 모든 감상주의를 더욱 꺼리는 태도 등이. 개별 장면들에서 그는 완전히 늙은 사람이다. 늙은 폰타네의 모습, 늙은 라베의 모습, 하지만 월등한 몸짓으로 갑작스럽게 그 옛날의 함순, 결코 만족하지 않는 빛나는 함순이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그는 체념했고 자주 피곤하겠지만, 그리고 아마도 호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자주 움켜쥐는 일도 더욱 드물어졌겠지만, 삶은 크누트 함순을 그렇게 쉽게 끝장내지 않았다. - p.180~181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지는 무대 자체도 중요하다. 이 섬세하고 사랑스런 작품들의 배경은 언뜻 보기에는 성과 산, 골짜기와 정원, 가까운 해변이지만, 실제로는 시인의 영혼이다. 그는 영혼 안에서 이 세계의 온갖 현상들은 아름다운 하늘에 떠가는 한조각 구름처럼 부드럽고 맡갛기도 하다. - p.203


그가 더 엄격한 시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말로 옮겨갈 때마다 세계와 그 내면의 풍부함이 그에게 과도하게 쏟아져 들어왔던 듯하다. 그는 처음부터 순수하게 예술적으로 제한된 서술 형식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거나 아니면 느끼고, 이야기꾼으로서 온갖 형식을 동원하여 인간성을 추적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즉 필요에 따라 상당히 멋대로 대화 형식, 현지 형식, 일기 형식, 그리고 자주 직접적인 가르침의 형식을 사용하기로 한 것 같다. - p.208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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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 생물.도시.기업의 성장과 죽음에 관한 보편 법칙
제프리 웨스트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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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보편 법칙


 연일 폭염이다보니 선풍기와 한몸같이 살고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양산을 드는 이가 있는가 하면, 손선풍기를 드는 이가 있다. 핸드폰도 들어야 하고, 손이 모자랄 정도다. 더불어 별다방에서 막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그야말로 손이 몇개가 필요하다. 불에 타는 듯한 더위 때문인지 요즘은 무엇을 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 그저 더위만 가시면 좋으련만, 집이고, 회사고, 모든 건물에서 연신 찬바람을 내뿜고 있고, 도로에는 지글지글 끊는 아스팔트와 차가 연신 지나간다. 사람과 도로, 차는 있는데 열이 발산하며 식혀줄 공간이 없다보니 도심의 더위는 더 지글지글 타오른다.


휴가 때 버스를 타고 시골에 다녀왔다. 도시와 다른 풍요로움이 있고, 분명 도시와 같은 온도임에도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밤에는 선선했다. 날씨가 살짝 흐렸지만 멀리 별도 많이 떠 있었다. 예전에는 도시가 주는 편리함이 좋았다면, 요즘에는 사람들의 익명성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일률적으로 붙어있고,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상대적인 박탈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요즘에는 더위에 시달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탁한 공기 때문에 더워도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할 정도로 미세먼지 걱정을 모두가 할 정도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물질적인 풍요로워지지만 예전과 비교해 요즘이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성장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고, 더딘 성장과 인구 팽창, 에너지와 환경문제, 출산 저하와 노령인구의 증가, 인간 수명,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그에 따른 지구환경은 점점 최저치를 찍고 있다. 제프리 웨스트의 <스케일>은 제목 그대로 엄청난 범위의 주제의 이야기를 담아 그에 다른 전망을 다룬 책이다. 과학에 관한 거시적인 관점을 다룬 책을 읽을 깜냥이 되지 않지만 이론물리학자인 제프리 웨스트의 새로운 개념과 평소 느꼈던 생각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죽음, 세금,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열역학, 제2법칙은 우리 모두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 적용된다. 마찰로 무질서한 열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하게, 흩어놓는 힘들은 끊임없이, 가차 없이 작용하면서 모든 계를 붕괴시킨다. - p.29


그의 책은 모토카와 타츠오의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2018, 김영사)를 떠올리게 한다. <스케일>은 생물, 도시, 기억의 성장과 죽음에 관한 보편 법칙이라고 쓰여진 부제처럼 하나의 상황이 그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 줄기로 엮이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저 하나의 분야만이 오롯하게 발달되고,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 과학, 도시와 성장, 죽음이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말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왜 혁신의 속도가 빨라지는지를 대담하게 설명한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스케일링은 단순히 말해서, 크기가 변할 때 계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가리킨다. 도시나 기업의 크기가 2배로 커지면 어떻게 될까? 건물, 항공기, 경제, 동물의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다면? 도시의 인구가 2배로 는다면, 그에 따라 도시의 도로, 범죄 건수, 특허 건수도 약 2배 늘어날까? 매출이 2배로 늘면 기업의 이익도 2배로 늘까? 동물의 몸무게가 반으로 줄면, 먹이를 먹는 양도 줄어들까? - p.31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과학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쉬이 쓰여져 있다. 물론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깜냥을 아니지만 유기적으로 그가 만들어낸 거시적인 주제와 관념들이 어떻게 이어져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관계를 갖고 있는지 조곤조곤 설명해주고 있어 하나의 주제가 아닌 보편 법칙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인간을 가지고 실험을 할 수 없음으로 스케일링 법칙은 동물의 크기를 통해 그들이 먹는 먹이, 심장 박동의 수, 수명등을 계산 할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신약을 계발하기 위해 쥐를 이용하는데 쥐를 대입할 것이 아니라 몸집이 작는 동물과 큰 동물의 차이를 계산하고, 그들이 에너지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관리하는지를 관찰한다. 그것으로 도출된 결론에 따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규모에도 적용이 된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다 보니 동물의 크기 추적은 인간과 몸피와 비교하여 대사율과 체중에 따라 수명을 알 아낼 수 있다니 그에 따른 인구 증가와 도시의 성장과도 연관이 깊다. 유기적인 접근인 동시에 원리와 패턴이 있는 그의 이야기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느낌이라 읽는 내내 현미경을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게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으로 다가온 책이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의 힘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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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관청기행 - 조선은 어떻게 왕조 500년을 운영하고 통치했을까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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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국가 시스템의 모든 것!


​ 오랜만에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 지금껏 읽은 역사책 중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익하면서도 재미가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책 제목을 '기행'이라 표기했지만 '기행'이라 쓰고 '사전'으로 읽는다, 라는 말을 쓸 정도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골격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책이다. 500년동안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었던 나라. 현대의 시점과 가까워서 가장 많이 책과 영화, 드라마에서 수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재생산 해내면서도 화수분같이 끝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보면서 자라왔다.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도 끊임없이 그들이 기거하는 공간이 다르고,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지는지 늘 궁금했는데 비로소 <조선관청기행>을 읽으면서 그 궁금증을 알아냈다.


한 나라가 500년 동안 지속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인체와 같이 골격이 탄탄해야 하는데 조선은 놀랍게도 사람의 몸과 같은 국가 경영 시스템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마치 로마가 모든 나라를 재패한 것처럼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장점을 가진 것처럼 조선 또한 500년 역사의 힘이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왕과 왕비가 살고 있는 궁궐에서부터 지방 관청의 시스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드라마를 통해 익숙한 직책부터 그들이 일을 했던 공간들이 눈에 선연하게 보였다. 중앙 관청의 중심인 궁월과 궐내각사, 사극에서 늘 중전이 줄창 외쳤던 내명부의 일들과 조직 체계, 왕실을 가까이서 보필했던 그림자 관청 내시부, 왕의 공식 비서실인 승정원, 세종 대왕 때 가장 큰 꽃을 피웠던 문예부흥의 사실인 집현전, 국가공무원이라면 필시 가고 싶어했을 청요직의 상징 홍문관과 예문관, 실록을 편찬한 공간은 춘추관, 4대에 걸쳐 죄가 없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청정지역인 간쟁 전문 기관 사관원, 글자와 숫자가 하나도 틀리면 안되는 외교문서기관 승문원등 그야말로 나라의 주요 요직과 없어서는 안될 기간들과 주요 요직, 품계, 그들이 받는 녹봉에 관한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 책을 보면서도 너무나 많은 소재와 배경이 차용되다보니 조선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지곤 했는데 실은 내가 알고보고 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1부에서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들어있다면 2부에서는 육조거리와 중앙 관청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고, 3부에서는 중앙관청을 뒷받침하는 의금부나 왕실 사람들을 위한 관청, 궁궐 유지, 예술, 통번역등 그야말로 없으면 안되는 관청들을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4부에서는 지방 관청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직과 아전, 향관, 문졸, 관노비등 후기 조선시대의 참상에 대해 알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조선은 초기 부터 탄탄하게 지어진 나라는 아니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잠재적으로 모두 없애버림으로서 세종대에 이르러서 학문과 예술이 꽃피울 수 있었다. 각 관청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지만 그 관청의 가장 전성시대는 세종이 왕권을 잡고 있을 때 가장 빛이 났었고, 그 후부터는 각기 역할을 제대로 시행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의 수를 줄이거나 조직을 없애기도 했다고 하니 세종대왕의 전방위적으로 활동했을 때 가장 빛이 났다.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 잘 만들어 놓은 물길이 후기로 갈수록 모래가 쌓이고, 불필요한 노폐물이 가득 쌓여 병폐를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시스템이 잘 작동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초심을 잃어가고 자신의 이기심만 늘어나 관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나라가 아닌 자신의 안위만 생각해 당파에 휩쓸리고, 간언을 해야 할 직책을 가진 이들이 눈과 귀를 닫아 버린다. 그렇게 여러번 실수들이 반복에 반복을 더하면 어느새 그들이 가진 시스템의 장점은 무너지고, 500년을 지탱해온 나라의 역사가 조금씩 균열이 간다.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이런 흐름을 가졌지만 그럼에도 오랫동안 나라를 지탱해온 힘을 <조선관청기행>을 통해 그들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관청에 대한 각각의 설명과 도표, 사진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읽는 내내 눈을 반짝이며 읽었던 책이다. 한 번에 읽어서는 도저히 그들의 관직과 관청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익힐 수 없었지만 많이 노출되고 봐왔던 이야기와 직책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책장 가까이에 꽂아두고 여러번 반복해서 읽을 책이다. 이 한 권의 책이라면 조선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조선의 내밀한 부분을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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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아직에서 '체가'의 뜻은 '아나'로 전체 풀이는 '아나 이것 받아라'입니다. 쉽게 말해 일을 시킨 뒤 일만 만큼만 '이것 받아라'하듯 녹봉을 주던 관직이라는 얘기지요. 체아직은 일종의 기간제 계약직입니다. 정해진 녹봉 없이 1년에 네 차례 근무평정에 따라 녹봉을 주되 직책을 보장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의 무반직武班織중 하급직은 대부분 체아직이었고 기술 관료와 훈도訓導도 마찬가지입니다. - p.21


이렇듯 승정원 주서는 임금의 특명을 받아 시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임금의 눈과 귀 노릇을 했습니다. 그래서 승정원 주서 임무를 마치면 그들의 벼슬을 반드시 올려 중요한 직책이로 이동하게 했습니다. - p.82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부터 25대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종과 순종이 빠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실록은 왕이 사망한 이후에 썼는데 고종과 순종은 일제의 압받을 받던 시기와 일제강점기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따로 실록청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일본총독부에서 《고종실록》,《순종실록》을 만들었지만 일본인의 압력을 받고 쓴 것이라 일본에 유리한 내용과 허위 사실까지 들어가 있기에 정통 실록에 넣지 않고 따로 떼어서 다룹니다. - p.102


3단계에 걸쳐 완성한 실록은 전국의 사로에 보관하고 편찬에 이용한 시정기와 사초, 초초, 중초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고 종이를 재생하기 위해 자하문 밖 시냇물에서 세초洗草했습니다. 종이를 빨아서 재활용한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한지는 굉장히 질기고 튼튼했기 때문에 물에 담그면 먹물한 쏙 빠져나가고 하얀 종이로 되살아나 다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물에 담그면 흐물흐물해지거나 쭈글쭈글해지는 종이와는 차원이 달랐지요. - p.103


승정원이라는 비서실이 있었지만 사간원은 언론 기관으로서 왕을 모시는 역할도 수행한 것입니다. 왕이 행차하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다녔지요. 그 외에 관리들의 인사나 상벌을 주는 일에 관여해 비리나 부정이 없도록 하는 일도 담당했습니다. 이처럼 사간원 기능이 광범위하고 힘이 막강했던 터라 관원의 자격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을 비롯해 4대에 걸쳐 죄가 없는 집안의 인물이어야 하고 성품이 강직하면서도 올곧은 선비여야 했습니다. - p.106


인사권을 담당한 이조전랑은 홍문관 출신의 실력있는 청년 문신 중에서 발탁했습니다. 특히 문관 임명에서 정승과 판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권한이 막강한 그 자리를 청년에게 준 것입니다. 이처럼 젊은 전랑에서 강력한 권한을 준 것은 대신들의 권한을 견제하고 젊은 관리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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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1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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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약한 동시에 가장 악한 존재의 이야기


 ​공지영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마음의 음지를 그리고 있다. 소재를 불문하고 언제나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녀의 이름만으로 책 제목만 보고 책을 펼쳤다가 몇 번이나 마음을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달콤새콤한 맛을 기대하고 책을 읽었으나 이내 내가 모르는 맛의 이야기가 펼쳐지더니 이내 그 마저도 이야기의 떱떠름한 맛과 그늘진 마음이 가시지 않아 여러권의 다른 책을 읽고 나서야 그녀가 쓴 이야기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 푸른숲)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2010,오픈하우스)도 그랬고, 가장 크게 어퍼컷을 날린 것은 <도가니>(2009, 창비)였다. 아무리 다른 이야기를 읽고 또 읽어도 이야기의 무거움과 우울함이 없어지지 않았다.
 

 

도가니 이후 9년 만에 공지영 작가는 무진을 배경으로 한 <해리>를 신작으로 출간했다. 배경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혹은 뻔히 보이는 수작의 행태를 내 보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음폐하는 족속을 공지영 작가는 이전의 필치와 마찬가지로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마치 늦은 밤 르포 형식의 고발 프로그램처럼 은밀하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날 것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낸다. 여자라면 마치 늘씬해야 하고, 자신만의 무기로 남을 현혹하여 이끌어내어 그들을 궁지로 몰고간다. 인간이 나약하여 가장 불변함이 없을 '신'을 믿고자 발걸음을 향한 그들에게 그들은 더 큰 고통을 심어준다. 뚱뚱한 여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며 유년시절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의 폭력아래 방치된 해리는 독기를 머금고 약을 부자비하게 먹으며 날씬하게 살을 뺀다.


"인간이란 얼마나 약하니······. 자기 자신조차 속이기 쉬운 존재냐고." - P.48

 

 

마치 가면을 바꾸어 가듯 해리의 모습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기 바꾸어 쓰며 동정을 호소한다. 거짓과 자신이 만들어낸 겉면을 SNS에 올리며 자신을 포장한다. 백진우 신부 또한 자신의 만행을 자신이 속한 종교에 귀속하여 그들을 부리고, 진실을 말하는 그들을 파멸시키고자 한다. 재산과 목숨을 빼앗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라는 듯 백진우와 해리는 천주교와 장애우를 섬기며 일하고 있는 단체의 이미지를 힘입어 선의로 낸 돈과 그들의 활동을 모두 제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이 벌이는 부패와 부정의 몸짓은 인간의 윤리와 소명의식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저 그들은 욕망의 도구로만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나는 그런 진실의 목소리를 모아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덮어버린 진실을 찾아 그들이 악의 모습들을 하나 둘 들춰낸다. 1권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 뿌리내려 탄탄하게 기반을 다잡았지만 그 속에 선의가 아닌 악의 소굴로서의 모습을 과감없이 보여준다. 눈깜짝할 사이에 여자의 몸으로 홀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독으로 홀리는 해리의 모습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악하다.

다만, <도가니>를 읽었을 때처럼 엄청난 충격은 아니었다. 이미 뉴스를 통해 우리는 소설에서 보다 더 큰 사건과 인물들의 악의에 대해 지켜보았고, 그들의 높은 성곽은 뚫리지 않았다. 아무리 진실을 꺼내 놓아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그들을 탄압한다며 돈으로 유망한 변호사를 사서 그들을 제압했다. 시작은 호기로웠으나 끝은 명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의 시작점이 밝혀져도 마지막은 흐지부지되는 것은 여러번 보았기에 소설 속 이나는 어떻게 그들의 사건을 내보이며 결론을 맺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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