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 수상작
이은소 지음 / 새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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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한 의사 이야기


시대를 불문하고 마음이 아픈 이들의 사연을 침이 아닌 마음으로 경청하며 들어주는 사내가 있다. 침을 못 놓는 침의지만 누구보다 그들의 헤진 마음을 꼬매주고 여며주며 마음을 다스리는 병의 혜안을 넓히는자. 제 아무리 병을 적확하게 알고 환자들의 병을 말끔하게 고쳐주지만,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목에 힘을 주고,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들은 보지 않은체 오직 검사한 결과를 모니터로만 보며 병을 진단하는 의사들을 많이 마주쳤다. 병원 복도에 앉아 차례가 다 되도록 몇 시간을 기다려도 순번은 돌아오지 않고,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서야 의사 얼굴을 마주 할 수 있다. 기다린 시간과 달리 오랜시간을 기다려 만난 의사의 진단은 짧고 명료하다. 때론 두루뭉실하게 이야기 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큰소리로 호통을 치기도 한다. 병을 고쳐주기도 하지만 병원에서 허비해 버린 시간은 그 누구도 보상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을 담아 환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그들이 하는 행동을 세심히 관찰하여 그들의 마음 속에 묶어있던 마음의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내린다. 요즘에서야 정신의학과에 진료를 받는 것이 조금은 일상화 되었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 것이 '정신이상자'라도 된 것마냥 눈길이 쏠리는 일이었다. 제 아무리 조용히 진찰을 원하더라도 병원을 방문한 것이 기록에 남다보니, 필요에 의해 꼭 가야 할 이도 갈 수 없었다.


은우가 앞서고 세풍이 뒤따랐다. 하얀 저고리, 하얀 깃, 하얀 동곳, 하얀 목덜미 위에 얌전히 앉은 검은 머리와 검은 댕기, 검은 목 비녀가 세풍의 눈에 들어왔다. 흰색과 검은색, 은우에게만 허락된 색이었다. 세풍도 아내와 사별했지만 제게 허락되지 않은 색은 없었다. 사정이 같은데도 세상이 저와 은우를 다르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세풍은 마음이 무거웠다. - p.12~13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의 환경의 반경은 사람들의 의식에 미처 못 따라갈 때가 있다.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달리 타인에 의해, 사회에 의해 옭아매어 그들은 주홍글씨 마냥 낙인이 찍혀 버렸고, 서자라는 이유로, 전란에 의해 다른 나라로 붙잡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온 이들을 '화냥년'이라 이름붙이며 그들을 손가락질 했으며, 우울증에 걸린 과부의 이야기며, 알코올중독의 광대등 조선시대에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을 심의인 세풍이 따스한 눈빛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이 품었던 한스런 마음을 어루고 달래준다.

가장 많이 평지풍파를 겪었을 이들의 사연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불안, 오롯하게 자신이 안전하게 있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우울증으로 변하기도 하고, 때론 그것들이 원인이 되어 하나의 루틴이 되어 불감증이나 히스테리로 변하게 된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수많은 전란이 휘몰아쳐 시대를 할퀴어 갔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알 수 없으니 그 사건이 그들에게 어떤 감정과 트라우마로 남았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은소 작가는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어떤 사건으로 자신의 아비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고,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함으로서 그는 의사로서 길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 순간 마저도 그는 의사로서 한 사람의 사연을 목도하게 되고, 그의 사연을 듣고 천천히 그들의 마음 속에 꽁꽁 싸매었던 마음을 따스하게 안아 풀어냈다.


그와 같은 심의라면 조선시대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아니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의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았고, 경청하는 자세로 이야기를 듣고, 그에 맞는 처방전을 내린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아가지만, 약으로 될 수 없는 무엇이 늘 환자들에게는 존재한다. 약이나 시술, 수술로 몸을 치료하듯 세상 한복판에 자신만 오롯하게 서 있는 그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어주는 심의라면 이세상 그 누구도 다친 마음을 완연하게 회복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의 아픔과 기구한 사연을 옆에서 듣는 것 마냥 괴롭고 아팠던 심경을 조심스레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지만 구성진 이야기에 읽는 내내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단다. 하여 세월이 요술을 부려서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지. 한데 세월이 그만 실수를 해버렸단다. 좋은 추억까지 희미하게 만들어버린 게지. 사람들은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잊을까 걱정했어. 그때 세월이 말했단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대신에 사랑은 짙어질 거야.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

"연희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할 것 같니?"

"아니요."

"그럼 기억이 희미해져도 어머니를 향한 사랑은 짙어질 거야. 어머니의 물건이 없어도, 어머니를 입에 담지 않아도, 어머니는 연희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단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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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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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있는 삶의 탄생을 반복하는 삶.


 타임리프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은 어딘지 모르게 애틋함과 신비로운 느낌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주제로 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 곳에 정착한 삶은 안정적인 동시에 느슨하다. 생동감있게 삶을 살려면 살면서 여러 변화를 줘야 한다. 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어쩔 수 없이 타임리프 속으로 들어가 이곳 저곳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삶은 생동적이지만 불안정하다. 한 곳에 정착 할 수 없어 늘, 짐은 가볍고 한 곳에 머물 수 없기에 사랑하는 이와의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예전이라면 전자의 삶을 추구하는 삶을 좋아했지만, 요즘은 후자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각각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레어 노스의 <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은 독특한 이야기다. 처음 만나는 작가이기에 생경하고, 무려 열다섯 번이나 삶을 사는 해리 오거스트의 삶이 궁금했다. 다시 삶을 살고 싶냐고 누군가 물어 본다면 어떤 이들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전생의 삶을 또는 후의 삶을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나 해리 오거스트는 이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과 달리 열다섯 번의 삶 모두 기억하고 있어 이전의 삶의 기억들을 토대로 다시 다른 실수 없이 좋은 쪽으로 자신의 인생을 펼쳐 나가려 한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생을 다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거나 누군가의 검은 손길로 인해 자신이 태어나지만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인생의 음울함을 그는 극복하지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고, 그 후의 많은 삶들은 실패한 삶의 원인들을 분석해 단점들을 고쳐 나간다.


마치 제품을 개발하듯 해리 오거스트의 삶을 고쳐나가는 것처럼 삶이 바뀔수록 의학, 물리학, 종교등 다양한 분야를 탐구하며 자신의 능력을 높여 나간다 생에 생을 더할수록 점점 더 힘이 세어지는 히어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야기는 어디로 빠질지 모르는 미로처럼 계속해서 이야기가 펼쳐져 나간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쉼없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지니 읽는 내내 해리 오거스트의 삶이 시작된 1919년 1월 1일, 기차역 화장실에서 부터의 삶을 시작으로 긴 터널 같은 삶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기억하는 능력은 다시 삶을 수리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좋은데 비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가지도 온전히 담고 있어야 한다면 과연 반복되는 삶이 좋을까 싶기도 하다. 때론 망각의 힘도 필요할데가 있고, 이전의 실패했던 것을 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 능력을 넘어서기 위해 능력을 최대치로 키워 세계를 벗어나는 길을 한 사람이 채워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전에 미처 견주지 못한 이야기를 새로운 느낌의 책을 통해 만났는데 해리의 열다섯 개 이야기를 각각 보여주기 보다는 서로 비교하면서 보여주는 형식이 재밌게 느껴진다. 처음 만나는 작가였지만 탄탄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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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 / 인디고(글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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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먹는 먹방의 세계!


 요즘은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인가보다. 티비를 틀었다 하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음식이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쿡방에 이어 먹방까지 계속해서 눈이 모자라 입까지 덩달아 침을 꿀떡 삼키고 있다. 더욱이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식욕을 자극하는 것은 그 음식을 먹는 이의 모습이다. 라면 하나를 먹더라도 먹음직스럽게 먹는 이가 앞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들고 달려가고 싶게 만든다. 많은 먹방들 중에서도 코미디TV 채널에서 하는 '맛있는 녀석들'을 가장 좋아한다. 네 명의 패널이 모여 한식은 물론이고 전국각지의 음식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음식들까지도 어마어마한 식탐으로 전부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개그맨들이라 그런지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도 재밌고, 음식을 푸짐하게 맛있게, 식탐을 내며 먹는 모습에 여러번 그들과 같이 먹어보기도 하고, 다른 음식으로 그들의 먹방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침만 꿀떡꿀떡 삼켰다. 정말 식욕 가득한 방송이다 보니 그들의 방송을 보다 나도 먹부림에 맛있게 더해 먹다가 체중계의 숫자가 살포시 올라가 버렸다. 그럴 정도로 그들의 먹방은 대단하다.


방송에서의 '맛있는 녀석들'이 대단한 먹부림이라면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의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역시 책으로 먹는 식욕 가득한 에세이다. 이젠 책 너마저도! 싶게 이 친근한 아저씨(처음보는 아저씨지만!)는 라면, 돈가스, 샌드위치, 카레, 젓갈등을 맛있게 먹어치운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원래의 음식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비법이 늘, 존재한다. 기존의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먹는 시간, 먹는 순서, 맛있게 먹는 방법이 각 음식마다 존재한다. 그들의 맛대로, 팁대로 먹다보면 더 맛있는데 마치 '맛있는 녀석들'의 돼단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라면을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며 입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먹는다. 조용히 먹으면 그건 라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듯!


구스미 마사유키의 글은 시종일관 그림과 글을 통해 고기구이, 라면, 돈가스, 도시락, 샌드위치, 생선회, 카레라이스, 나폴리탄, 낫토, 오니기리, 단팥방, 죽, 볶음국수, 중화냉면, 컵라면, 무, 고양이 맘마, 장어, 젓갈, 메밀국수, 튀김덮밥 두부, 오차즈케, 꽁치, 양배추, 소면까지 다양한 맛을 가진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먹었던 음식에 대한 평가, 일본 음식의 특징, 재료,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음식에 대한 추억이 글과 만화 속에서 살포시 드러난다. 일본의 음식들이 많아서 깊게 동화가 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감성돔에 횟장을 찍어 쌈을 싸먹었다는 이야기도 한다. 처음에는 느낄 수 없었던 회의 맛을 한 번 더 싸먹으니 비로소 감성돔의 맛을 알았다는 구스미 마사유키의 이야기. (감성돔을 쌈을 싸서 먹었다는 이야기에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와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와 유시민 작가의 에피소드가 새록 새록 떠오른다. 감성돔을 쌈을 싸먹는 것은 돔에 대한 모욕이야! 하며 유시민 작가가 외쳤던 이야기가 생각나서 한참을 웃었다.)

 

구스미 마사유키는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섬세함을 추구하는 작가인가보다. 돈가스를 먹을 때 돈가스를 자른 조각을 왼쪽부터 먹을지, 오른쪽으로 먹을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잘라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먹었을 뿐. 그러나 그는 저렇게 자르는 순서대로 먹어야 하고, 마지막 한 입이 작으면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책으로 먹는 먹방이 이렇게 재밌는지 그의 글을 통해 한참을 깔깔대다 호기롭게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으며 재밌게 책을 맛있게 읽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체할 걱정도, 몸무게가 늘 걱정도 없는 이 매혹적인 식욕 자극 에세이는 더운 날 식욕을 자극하는 동시에 웃음을 한 가득 보너스로 넣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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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면을 아주 좋아한다. '라면'이라는 글자만 봐도, '라면'이라고 발음만 해도 싱글멍글 기분이 좋아진다. '라'라고 발음할 때 혀의 움직임이 이미 라면의 고불고불한 노란 면을 연상시킨다.(덧붙여 메밀국수를 이르는 '소바'의 '소'는 마치 손으로 직접 친 얇은 소바를 후루룩거리는 느낌 '우동'의 '우'는 정말이지 하얗고 두꺼운 우동을 후루룩거리는 입 모양 같지 않은가?) - P.20

샌드위치 발명가, 존 몬테규 샌드위치 백작 (도박을 좋아해서 밥 먹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발명.) - P.51

빵의 살짝 쫀득한 식감에 앙꼬의 두툼한 닷맛이 한데 어우러지자, 단팥빵 특유의 은은한 달큰함이 혀 위로 밀려온다. 단팥빵에는 단맛과 함께 희미한 소금기가 있다. 이 희미한 소금의 맛을 느끼게 되는 순간,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99

뚜껑을 연 순간, 마치 운동회의 박 터트리기에서 박이 갈라지는 순간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구수한, 기품 있는 눌어붙은 향. 거기에 휘감겨오는 양념의 매콤달콤한 향. 탁하고 젓가락을 세우고 싶어지는 기분을 진정시키고서 산초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장어에 젓가락을 푹 찔러 그대로 밥까지 내뚫어, 한 입 분량의 장어와 밥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이 첫술이 최고다. 그 향히 입안에 가득 퍼진다. 가만히 턱을 움직이자 양념의 단맛이 좌르르 허물어지는 장어와 함게 밥과 뒤엉켜, 금세 입안은 농후한 감칠맛의 러브신이 된다. 혀가 떨리고 콧구멍이 넓어진다. 군침이 돌고 위가 으르렁거린다. 십이지장조차 '얼른 이쪽으로 보내'라며 솟구쳐오는 듯하다. -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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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안녕달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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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온기의 인사

 요시다 슈이치의 <사요나라 사요나라>(2009,노블마인)를 읽으면서 '사요나라'라는 인사말의 중의적인 표현을 느꼈던 것처럼 안녕달 작가의 <안녕> 또한 누군가에게 반갑게 해주는 인사말인 동시에 마지막을 고하는 인사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 반갑고, 그래서 더 슬픈. 제법 두꺼운 그림책 속에는 글밥이 많이 들어있지 않고 오직 그림 속에서의 소세지 할아버지와 강아지 한마리, 동글동글한 검은 폭탄이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처음에는 글밥이 하나 없는 그림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아 오랫동안 그림만 계속해서 멀뚱히 바라보았다. 소세지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도 어디가 머리이고, 다리인지, 얼굴의 눈,코,입과 할아버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소세지 할아버지의 외로움이 오롯하게 드러난다.

누군가에게 온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 사람의 몸피와 같은 두툼한 곰인형을 소파 한켠에 자리잡아 놓고, 그에게 몸을 기대어 눕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인형에게서 받은 안락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인형은 '쓰담쓰담'하며 다정히 몸을 쓸어주지도 않고, 마음을 외로운 할아버지의 마음을 달래주지도 않는다. 오직 자신의 마음 속에 가득한 슬픔을 눈물로 비워낼만큼의 포근함만 느껴질 뿐이다. 그런 시간 속에서 또 하나의 외로움이 가게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자의적으로 주인을 찾아나선 것이 아닌 타의적인 주인 찾기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아기 강아지를 반기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소세지 할아버지가 그 곁은 지나간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풍경처럼 지나쳤을 뿐, 시선을 두지 않았으나 이내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림책 속에서는 외로움이 외로움을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고, 다시 외로움이 또 누군가를 만나 어루만지려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이다. 드넓은 우주 속에서 마치 먼 행성에서 나 밖에 없는 외로움을 겪게되고, 온기를 찾아 서로를 품게 된다. 서로의 종이 달라도, 혹여 너의 몸짓이 나에게 생채기를 낼지라도. 소세지 할아버지의 안녕은 시작부터 끝까지 애틋함이 느껴진다. 자신이 겪은 외로움을 알기 때문에 나와 함께한 아기 강아지가 부디 잘 살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 온기를 나누어줄 사람이 없다면 인간도 동물도 모두 시들기 마련이다.

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것처럼 강아지의 안부가 궁금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애틋했고, 내려다 보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의 마음 속에 조금이나마 갖고 있지만, 바쁜 생활 속에서 꺼내들지 않는 '측은지심'이 드러나있다. 그래서 이 동화는 고요하게 울려퍼지는 종소리처럼 안녕이라는 말을 잔잔히 내뱉는다. 누군가에게 희미하지만 가장 밝은 등대처럼 빛나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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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 인문학 - 오늘, 우리를 위한 동양사상의 지혜
박홍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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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을 보는 재미


 ​그림은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서양의 화가들의 그림이 우리의 그림보다 더 많이 노출되었고, 마주치는 횟수가 더 많아서 그런지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이제 그림이 아니라 생활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들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굿즈들이 생활 전반에 깔려있고, 색채의 매력에 빠져 나도 모르게 그들의 그림이 든 것들을 손에 쥐게 된다. 반면, 우리의 그림은 서양의 화가들이 그림보다 색채감이 뛰어나지 않지만 잔잔한 호숫가를 연상시키듯 잔잔하면서도 여백의 미가 있다. 함께 보면 서양의 그림에 매혹되지만 오래도록 보고 있노라면 동양의 그림들이 차분함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매우지 않는 구도 속에서 해학적인 느낌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대체로 자화상은 외형을 비슷하게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화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일정하게 성격이나 내면을 드러낸다. - p.41 


일전에 저자의 전작인 <감정의 자화상>(서해문집, 2018)을 읽었는데, 거칠거칠하지만 자화상을 통해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느껴졌다. <옛그림 인문학>은 동양사상을 산책하는 동시에 우리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을 자주 접했다 생각했는데, 자신을 그린 그림인 '월하취생도(자화상)'가 인상적이었다. 김홍도의 또다른 면을 바라보는 것 같다. 자주 보지 않아 생경한 마음이 들지만 저자가 들려주고, 보여주는 그림은 상상이상으로 멋스럽고, 호젓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픈 그림들이 다수 도판으로 실려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글을 읽는 것도 좋지만 그림 한 점으로 마음을 식혀주고, 그들이 살았던 배경을 꿈꾸게 하고, 그들이 공부했던 사서삼경과 논어, 공자, 맹자등 동양 사상에 대해 심취하게 만든다.


표현하는 것은 다르지만 동서양의 그림은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다. 동양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자연미가 물씬풍기며, 자화상 하나를 그리더라도 두루뭉술하게 그리기 보다는 사진을 찍듯 점 하나, 수염 하나까지도 적확하게 그리며 그이를 대변한다. 거울처럼 자신과 똑닮은 그림 속에 그이의 성정을 나타내고,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즘 같으면 포토샵으로 샤샤삭 단점을 보완하겠지만, 예전 화공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그림의 미학이라 생각했나보다.


김두량의 '월야산수도'와 윤용의 '협롱채춘도'는 그 어떤 그림보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림이다. 깊은 달밤의 풍경과 농사일을 하는 여인의 뒷모습. 영감은 서양의 미술에서만 찾아오는게 아니다. 낯설다고 느꼈던 동양의 철학과 그림은 우리가 늘, 멀게만 느꼈지만 어쩌면 우리가 자주 보는 그림 보다 더 가깝다. 그들의 그림을 우리가 멀게만 봤을 뿐. 돌담을 조심스레 한걸음 한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주는 즐거움이 이 책 속에 묻어나 있다. 요즘같이 더울 때 먹는 자극적인 음료의 맛이 아닌 은은하면서도 깔끔한 단맛이 주는 편안함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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