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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일 년 후 ㅣ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평점 :
사랑의 유효기간
언젠가 친구와 길을 걷다가 두 남녀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복잡한 종로 거리에서 그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대자 남자는 발걸음을 돌려 버리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악을 쓰며 울어댔다. 또 하루는 영화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두 남녀가 사소한 걸로 언쟁을 벌이고 있다. 오늘 두 사람의 데이트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 대한 걸로 다투고 있었다. 서로가 먹고자 하는 메뉴는 달랐고, 그 누구도 양보 할 마음이 없었다.
제 3자가 보기에는 오늘과 내일 혹은 다음에 나누어 먹으면 다툼이 없으련만 그들은 꼭 오늘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먹어야겠다는 계산이었다. 서로 양보를 안하자 서로의 목소리가 높아져만 가고, 이내 과거의 그들이 소환되었다. 친구가 와서 그후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모른다.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기억이 희미해져 결말을 모르는지도 모르겠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한 달 후, 일 년 후>를 읽고 있으니 문득 그들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들에게도 하하호호하던 시절도 있었고, 서로를 위해 양보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나가면 어느새 우리가 아닌 나와 너로 돌아간다. 각자도생이라고 할까. 만남은 달콤한데 이별은 참 사람의 밑바닥을 끝까지 보게 한다. 좋은 이별은 결코 없는 법이다.
<한 달 후, 일 년 후>는 일본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자 주인공이 이 소설을 좋아해 주인공인 조제로 불리고 싶다는 대목에서부터 유명해진 책이다. 소설 속 조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으며 소설가 지망생인 베르나르와 연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베르나르가 아니라 연하인 의대생 자크와 애정을 나누고 있는 관계다. 베르나르에게는 조제 대신 아내인 니콜과 결혼했지만 애정이 없다.그들은 매일마다 살롱을 열고 있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어울린다. 베르나르는 연인관계였던 조제를 잊지 못하고 그녀 곁에서 맴돌지만 조제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출판사에 다니는 알랭의 조카 에두아르가 무명인 여배우인 베아트리스를 좋아하게 된다. 힘있는 연극 연출가 역시 베아트리스를 마음에 들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다 보니 이내 오십대 남자인 알랭 역시 베아트리스와의의 사랑이 점점 수렁으로 빠져든다.
사랑이 불타는 시기는 짧고, 강렬하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화력으로 남자와 여자는 불이 붙는다. 그러나 빠르게 불이 붙는 만큼 두 사람의 관계도 빠르게 식어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애정의 밀도는 점점 더 내려가고 온기조차 남지 않을 때 그들은 각기 남이 된다. 젊었기에 맹목적이었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점점 사그러진 온도와 열정만이 그들에게 남아있다. 더 이상 그에게 쏟을 정성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관계. 누군가는 끝을 맺지 않았고, 누군가는 이미 자신의 애정을 모두 소진한채 그렇게 관계의 종말을 고해 버린 이야기였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화살표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가 보다는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
"작년에 연주했던 것과 똑같군요. 당신 기억나요? 우리는 저기에 있었죠.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저 음악가도 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나 보죠. 하기야 우리도 마찬가지예요."(생략)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 p.186~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