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의 미덕을 알려주는 책

'내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읽어 볼 책'

톨스토이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많은 분이 읽으셨을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2.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번과 3번의 답으로 톨스토이는 사랑을 제시합니다.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든 버텨낸 사람의 인생에는 사랑을 받았거나, 사랑을 주었거나,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죠. 불행의 이유는 사람마다 달라도 행복의 이유는 모두 같을 수 있는 건 이 때문일까요?

'사랑'은 무척이나 좋은 말이지만, 문예남은 청개구리인지 2번 질문의 답 때문에 이 책을 읽고 또 읽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예남은 공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소설의 주인공이자 가난한 구두장이 세몬이 농부들에게 화가 나서 혼자 소리치는 말에 더 공감이 되었지요.

"너희(농부)는 집도 있고 소도 있고 다 있잖아. 나는 이 몸뚱이가 전부란 말이야! 너희는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지만 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돈 주고 사야 한다고."

세몬은 겨울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제대로 된 외투가 필요했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에겐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악착같이 돈을 받아내야 했지만 그러지 않고 돌아갑니다. 욕은 하지만 농부들의 사정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죠.

그게 참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필요한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취직이니, 결혼이니, 집 장만이니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도 있고 시간이 걸릴 때도 있고 심지어 운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어디 그뿐일까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양심과도 싸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서일까요. 문예남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게 허락되어 있지만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지 모르겠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돈이 필요했지만 양심과 상황 때문에 돈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괴롭게 소리치는 세몬처럼 말이에요.

저는 그 세몬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삶의 고통을 그린 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농부)는 집도 있고 소도 있고 다 있잖아. 나는 이 몸뚱이가 전부란 말이야! 너희는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지만 난 하나에서 열까지 다 돈 주고 사야 한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면서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죠. 톨스토이는 이 고통을 끝내는 방법으로 사랑을 제시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어렵고 까다로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답을 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이 소설에서 하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문예남은 이 책이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실천하는 도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세몬은 천국에서 추방당한 천사를 돕고, 추방당한 천사는 세몬의 일을 도와 세몬의 가정에 기여하고, 세몬의 집에 찾아온 한 여인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아이들을 키워냅니다.

톨스토이는 그 시대 어느 작가보다 농민을 사랑했고 스스로 농노를 해방하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미덕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작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습니다. "갈수록 돈이 중요해지는 시대에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실천하는 미덕에서 올바른 삶의 모습을 찾는 것일까?"하구요.

문예남은 이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고통의 초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미덕을 찾아보았는데요. 다른 분들은 무엇을 보셨을지 궁금합니다.^^

_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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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자>의 저자 실비아 플라스만큼 “신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가 또 있을까요.

아름다운 금발의 유망한 미국 여성 시인이 당대 최고의 천재 영국 시인과 결혼하면서 시작된 현대 영미문학계 최고의 황금빛 로맨스의 시작과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벨자>의 저자 실비아 플라스는 남편인 테드 휴즈의 외도 이후 별거에 들어가고 100년 만에 찾아온 런던의 혹한 속에서 우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하게 됩니다. 옆방에 노는 두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우유와 빵을 놓아두고 가스가 아이 방으로 새어 들어가지 않게 꼼꼼하게 문틈에 테이프를 바른 후 가스 오븐에 서른 살의 젊디젊은 머리를 넣는 끔찍한 자살을 시도한 것이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와 함께 사회 진출을 시작했으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을 해야만 했던 실비아 플라스. 그녀가 살아갔던 이야기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자가 살아가기 위해 흘려야 하는 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잔인한 신화로 만들어집니다. 

1953년 여름, 대표작 <벨자>를 집필하는 실비아


▶ 여성해방운동을 통해 순교자의 반열로…

그녀의 충격적인 죽음은 남성중심의 사회에 대한 상징적인 도전과 같은 것이기에 한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1960년대 태동한 페미니즘 운동에 힘입어 신화적인 인물로 만들어지지요. 강력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실비아 플라스의 삶과 작품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남성 세계에 희생된 여성 시인의 전형, 페미니즘의 기치를 든 피 흘리는 여신으로 만들어집니다.

여성의 야망과 성적인 생명력을 허용하지 않는 남성의 세계에 희생된 신화적인 순교자로 추앙된 것이죠.

남편이었던 테드 휴즈는 엘리자베스 2세의 계관시인까지 지냈던 20세기의 대문호(大文豪)였지만, ‘실비아 플라스’ 살인자라는 오명만큼은 평생 낙인처럼 달고 다녀야 했고, 강연이나 시낭독회마다 시위대를 팬클럽처럼 몰고 다녀야 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무덤 묘비명에 새겨진 남편의 성(姓)인 ‘휴즈(Hughes)’라는 글자들은 새로 새기고 또 새겨도 분노한 실비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지워지고 또 지워졌습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폭풍처럼 흥성한 페미니즘의 순교자라는 아이콘이 되어 버린 것이죠.
 

1954년 여름. 해변에서


▶신화 속에 외면당한 그녀의 삶은 같은 고통을 경험한 친구의 이야기

그러나 실비아 플라스를 뒤덮은 이 신화들은 실비아의 삶을 왜곡시키고 폭력을 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 명의 어머니였고 아내였고 또 투쟁하는 생활인이었던 인간 실비아 플라스의 목소리는 주목받지 못한 것이죠. 이러한 맥락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아주 특별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일기보다 그녀의 일기는 읽기 어려운만큼 고통스러운 육성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녀는 냉혹할 정도로 자신에게 정직했습니다. 그녀의 일기를 읽는 분은 그 솔직함과 신랄함 그리고 문학인이나 지식인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범속한 욕망에 대한 표현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962년 3월 데본에서 프리다와 니콜라스와 함께. 실비아는 남편과의 불화에도 자녀에겐 다정한 엄마였다.


이 일기를 읽다 보면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 덩어리인가를 느끼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이기주의자이고 끔찍할 정도로 자신의 능력을 사랑했지만 타인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다는 점에서 말이죠. 한편으로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문화가 실비아를 이렇게 독단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외롭게 더 외롭게 자신만의 인생을 혼자 완성​해 가고자 했던 실비아의 자기혐오와 타자에 대한 공격성은 한때 가장 아름답고 뛰어났던 한 여성 작가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욕망과 모순과 정직하게 싸우며 때로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도움의 손길을 구해보지 않은 분들에겐 그녀의 삶이 삶을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테드 휴즈와 함께, 1956년 요오크셔.

​오늘날은 모든 것을 욕망하게 되는 사회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욕망을 하라고 강요하기도 하지요. 욕망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욕구, 즐기고 싶은 욕구, 성취하고 싶은 욕구, 만들어진 욕구까지. 만약 여러분이 살기 위해 필요한 욕구와 성취하고 싶은 욕구가 타인과 세상에 의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녀의 일기는 같은 고통을 경험한 친구의 이야기로 읽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장영희(서강대 영문학과 교수) 선생님의 추천사를 남겨 봅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63년에 서른 살 나이로 자살한 미국의 천재 여성 시인이다. 많은 사람은 궁금해한다. 왜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그녀가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준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일기 안에서 그녀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과 재능을,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열정과 야망을 가지고 성공하고자 했던 한 비범한 천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비아는 자신이 겪은 사랑과 슬픔, 광기에서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면, 어떤 새로운 경험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

영미문학을 대표하는 실비아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가 2004년 종이책으로 출간된 이후 11년이 지나 전자책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종이책 서점 가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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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 증후군 메르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과 근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1.5%라는 최저 금리가 나올 정도로 경제도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전염병으로 건강과 생활에 대한 걱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가운데 이런 상황에선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야할지를 몰라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펼쳐보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염병인 페스트를 맞이한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고통을 견디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죠.

 

인상 깊은 말들이 많았습니다. 도시의 배경부터 말이에요.

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그렇게 사는 습관만 있다면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도시의 생활 패턴. 그리고 외지인에게도 점잖은 평을 받을 만큼의 적당한 교양이 있는 곳.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 <페스트>의 배경이 되는 도시와 한국은 뭔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반응도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염 요인을 가볍게 생각하고 점점 확산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책을 찾아보는 과정이 가장 처음 등장합니다. 병이 점점 확산되는 동안 누군가는 무서워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기도 하지요. 지금 한국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소설 <페스트>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갑니다. 모두가 더 이상 전염병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 것이죠.

사람이 너무나 많이 죽고 너무나 많이 병에 걸려서 지칠 때로 지친 사람들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희미해집니다. 그다음엔 죽음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죠. 전염병이 끝날 것이란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란 단순한 이성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페스트>의 말처럼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까지 고통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소설 <페스트>는 그 노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과연 기억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집니다. 카뮈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 않았지만, 지금의 메르스 사태가 끝난 후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는 행위가 기억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카뮈의 말처럼 상황에 대한 주석은 그만하고 전염병을 맞이한 도시의 사람들을 묘사한 소설의 문장들을 소개하겠습니다.

* 본문 안 재화라는 단어는 재난, 재앙으로 읽어주시면 됩니다.

* 본문 시작 전 각 상황은 <패스트> 본문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1. 전염병이 퍼지기 전 도서의 모습

시민들은 일을 많이 하는데, 언제나 그것은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서 하는 일이다. (...) 습관만 들이면 사람들은 그날그날을 거뜬히 보낼 수가 있다. (...) 우리 고장에선 난잡한 것을 모른다. 그리고 솔직하고 동정심 많은며 활동적인 우리 주민들은 여행격들의 마음 속에 늘 점잖은 느낌을 남겨주었다. 이제 주석이나 말막음 그만두고 이야기 자체를 시작할 때인 성싶다.


 

2. 전염병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


우리 시민들은 자기들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그들은 재화(재난)을 믿지 않고 있었다. 재화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내 지나가버리는 악몽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가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이다. 특히 휴머니스트들이 맨 먼저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 몸을 보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할 줄 모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토로하기도 했다. 미래라든가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말살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가 있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3.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의 모습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그 순간에도 재화(재난)가 두서너 명의 희생자를 들볶아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단호히 인정하고, 결국에는 쓸데없는 공포감을 쫓아버려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페스트는 멎을 것이다.
(...)
의사 리외는 기운을 냈다. 매일매일의 노동, 거기에야말로 확실성이 있었다. 나머지는 무의미한 끈이나 동작에 얽매여 있으므로 그런 식으로 어물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해나가는 일이다.

 

4. 전염병으로 도시가 격리되었을 때의 모습

시민들은 각자 자신의 직장에서 그럭저럭 일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市의 문들이 폐쇄되자 그들은 모두 독 안에 든 쥐가 되었으며, 거기서 그냥 견딜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우리가 타협의 여지가 없는 형편에 놓여 있으며, '타협'이라든가 '특전'이라든가 '예외'라든가 하는 말이 더는 의미를 갖기 못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우리에게는 편지를 쓴다는 사소한 기쁨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5. 격리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페스트의 2단계에서 ...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단조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화의 기간 중 집단적인 고통의 종말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 사실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초기에서와 같은 안타까운 감정은 없고,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일종의 빈약한 이성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6. 격리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2


타루가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흐린 눈빛이었으며, 모두가 자기들이 영위하던 생활에서 격리된 이별의 슬픔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휴가 중이었다.


 

7. 격리된 상황에서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서의 덕목을 알아가는 과정


나는 이번 유행병에서 배운 거라곤 하나도 없고, 있다면 여러분 틈에 끼어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걸 배웠을 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간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밖의 것, 즉 건강, 완전함,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훌륭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의 긴장을 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코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선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8.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 적응하여 전염병 자체를 3인칭(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상황

 

그는 페스트가 그 도시에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지, 모든 것이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작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 했다. 타루는 페스트가 그 도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시민들의 가장 강한 욕망은 현재도 또 앞으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선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딴 의미에서는 비록 충분한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으며, 페스트는 적어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라도 그 흔적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9. 전염병이 완전히 끝난 상태에서 미래를 생각하는 모습


그러나 그래도 그는 이 기록이 결정적인 승리의 기록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시내에서 올라오는 경쾌한 환호성을 들으면서 리외는 그러한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고 있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몇십 년간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잠자고 있을 수가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헌 종이 같은 것들 틈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안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일러누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 가지고 어떤 행복한 도시로 그것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앗! 그런데 카뮈의 <페스트>에서 페스트가 꼭 전염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은 당연히 아시죠.

​^^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문예남은 페스트를 자신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고통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자신이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무서운 병균...일수도 있다는 것이죠.

아무튼,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야 겠습니다.

메르스가 물러가는 그날까지 건강 항상 조심하세요.~~~

_문예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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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5-06-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구요.

문예출판사 2015-06-15 17:09   좋아요 0 | URL
네, 역사가 반복되는 것처럼 사람의 실수도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메르스 사태 때문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더 이상 거창한 감정을 품지 않게 되었다는 소설의 글과 같은 현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움도 증오도 슬픔도 느낄 수 없을만큼의 커다란 재앙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입니다.
 



*

불면은 대개 병, 근심, 불안한 생각에서 온다. 그러나 때로는 과도한 휴식, 너무 편안한 생활, 여러 종류의 과로 또는 낮잠 등으로 생긴다. 요컨대 우리는 수면이 원래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사실 소용없는 탐구나 설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으로 확실히 아는 것은 다음 사실뿐이다. 즉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는 것, 특히 신경계통 질환에 가장 좋고 놓칠 수 없는 치료 방법이라는 것, 거기에다 수면은 밤에, 그것도 초저녁부터 적어도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 동안 중단되지 않고 일관되게 취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 그리고 수면제는 되도록 피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불면은 언제나 일종의 고통이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불면이 압도적인 내적 환희에서 생겼을 경우(이때 불면은 인생 최대의 희열에 속한다), 또는 평상시에는 어쩐지 부족한 시간, 즉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인간에게 주기 위하여 불면이 선사되었음이 확실한 경우에는 이와 다르다. 후자의 경우 불면은 내적 생활에 최대의 진보를 촉진하고 인생 최고의 보물을 얻게 하는 무시할 수 없는 기회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생애의 결정적인 견해나 결의를 실로 잠 못 이루는 밤에 찾아냈을 것이다.

 

불면의 문제를 이런 견지에서 고찰한다는 것은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카히나이의 아들 랍비 카니나, 즉 이스라엘의 현자는 말한다. “밤에 잠자지 않고 혼자 나그넷길에 있으며 그 마음을 안일에 맡기는 자는 자기 영혼에 죄를 범하는 자이다.”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놓치고, 비속한 사념이 따르기 쉬운 위험에 몸을 내맡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이 좋다. 그것은 잘 이용해야지 이유도 없이 공격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하자면, 불면에 무언가 목적이 있지 않은지 자신에게 묻고, 그러한 시간에 보통 때보다 더 잘 들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갖가지 사념을 멀리하는 것이 어떻든 상책일 것이다. “어찌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이 나에게 찾아왔는가”라는 질문이 커다란 축복이 될 수 있다.

 

칼 힐티,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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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류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명제를 등불처럼 환히 밝혀주는 책!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스위스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법률가인 칼 힐티의 저서다. 신앙과 삶이 일치된 인생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그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저작을 많이 남겼다. 이 책은 그중 하나로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로 추앙받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내면의 행복을 찾고, 세속적인 행복과 진리 추구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지 제시한다.
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인간 본성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알려준다. 이 책은 기독교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봉사, 자선, 자비, 사랑 등 어떤 인간에게도 기본적인 덕성이 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권유하며, 불교나 천주교 등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논하고 있다. 또한 “금전적으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려면, 수입에서 비록 소액이라도 일정한 액수를 자선에 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이것 때문에 더 가난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데 그마저도 스스로 하기 싫어할 만큼 게으른 부자가 많다” 하는 칼 힐티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방법,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균형을 이루어 조화로운 인생을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365일 동안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며 내면의 고요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명상서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밤이면 찾아오는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미 백 년 전에 쓰인《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오히려 오늘날의 잠 못 이루는 현대인에게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책이다. 저자 칼 힐티는 불면의 밤이야말로 축복이나 선물과 같다고 하면서 불면의 고통에 몸부림치지 말고 양서를 읽거나 명상을 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라고 권유한다. 고요히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이러한 매일의 숙고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찾는 시간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1년 365일 매일 읽을 수 있는 짧은 글들을 이 책에 실어 독자들을 친절하게 명상의 세계로 이끈다. 
원래 이 책 1부는 힐티가 살았을 때인 1901년에 간행되었지만 2부는 사후인 1919년에야 유고 형식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1부와 2부가 똑같이 1월 1일에 시작해서 12월 31일에 끝난다(이 책은 1부만 수록함). 따라서 하루에 한 편씩, 1년을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하루 한 편씩 읽으며 넘쳐서도 안 되고 빠뜨려서도 안 된다는 뜻으로 여기서 우리는 힐티의 규칙적인 교양 교육법을 터득할 수 있다. 이처럼 사고 활동이 가장 활발한 한가하고 조용한 시간에 한 편씩 읽으며 마음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이번에 문예출판사에서 새로이 나온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시인 송영택의 번역으로 칼 힐티의 원문을 잘 살려 번역했으며, 양장본에 편안한 본문 조판으로 오래 곁에 두면서 매일 읽기 좋은 디자인에 주안점을 두었다.  

 

 


■ 차례

 

서문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해설
칼 힐티 연보


■ 본문 엿보기


■ 그러므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것이 좋다. 그것은 잘 이용해야지 이유도 없이 공격해서는 안 된다. 바꿔 말하자면, 불면에 무언가 목적이 있지 않은지 자신에게 묻고, 그러한 시간에 보통 때보다 더 잘 들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갖가지 사념을 멀리하는 것이 어떻든 상책일 것이다.  -서문 중에서

■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선 감사할 만한 것을 찾아 정직하게 감사하라. 그러면 마음이 한층 편안해지고 다른 일도 훨씬 견디기 쉬워진다. 이것을 끊임없이 연습하면 차차 좋은 습관이 되어 생활이 아주 편안해진다.  -30쪽

■ 인생에서 행복이란 고난이 적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빛나게 극복하는 데 있다.  -53쪽  


■ 모든 행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소유하는 순간이 아니라 소유하기 직전이다. 즉 우리의 희망이 거의 성취되어 그것이 확실하게 나타날 때이다. -78쪽

 

 

■ 특히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키워야 한다. 어른도 아이들의 기분에 맞춰 티끌만큼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93쪽

■ 많은 일을 하며 한 주를 보낸 뒤 일요일이 가장 유쾌하듯, 고난을 겪은 뒤의 행복이 가장 유쾌하고 위험이 적다. -211쪽

■ 제노바의 성녀 카타리나는 당돌하게 물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을 배척한다, 그래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가, 라고. 그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을 얻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가능한 한 네 이웃의 정신적・육체적 행복을 위해 애써야 한다. 참다운 사랑은 이웃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239쪽

 

 

■ 지은이 소개

 

칼 힐티Carl Hilty (1833~1909)

스위스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법률가로 스위스 베르덴베르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팅겐대학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으며, 스물넷에 결혼하고 쿠르에서 변호사로 17년 동안 일했다. 마흔한 살에 베른대학 법학교수로 취임해 스위스 혁명기와 왕정시대를 주로 연구했으며, 1886년 《스위스 정치연감》 발행을 시작해 평생 이 일을 계속한다. 1890년에는 57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하원 대의원에 당선되어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한다. 1902년 베른대학 총장으로 취임하고, 1909년에는 국제법의 대가로 국제중재재판소 스위스 위원으로 위촉받아 활동했으며, 1909년 10월 12일, 제네바 호반의 클라렌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이상주의적 사회개량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신앙과 삶이 일치된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수많은 종교적·윤리적 저작을 통해 세계적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스위스연방공화국 헌법》, 《행복론》Ⅰ・Ⅱ·Ⅲ, 《독서와 연설》, 《신경쇠약에 대하여》, 《백색의 노예매매》, 《예의에 대하여》, 《보어전쟁》,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Ⅰ, 《병든 정신》, 《영원한 생명》, 《힘의 비밀》 등 수많은 저술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Ⅱ가 사후에 출판되었다.


■ 옮긴이 소개

 

송영택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강사로 재직했으며,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이사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집 《너와 나의 목숨을 위하여》가 있고, 번역서로는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릴케 《릴케 시집》, 《말테의 수기》, 《어느 시인의 고백》, 헤세 《헤르만 헤세 시집》,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쇼펜하우어 《삶과 죽음의 번뇌》, 레마르크 《개선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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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경 2015-06-05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책들이 왜이리 많은걸까요?
`이제 좀 읽자`. 생각하고. 책을 펼치는 순간. 숙면에 빠진답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불면의 밤은 언제나 오려는지...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정보 고맙습니다!!

문예출판사 2015-06-09 09:1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이 책은 잠 못자면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주고 성경의 좋은 구절을 인용하여, 성찰을 돕는데요. 종교적인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마음을 보살피시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5-06-1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옛날에 한 페이지씩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방 한구석에 낡은 표지로 꽂혀 있어요.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

문예출판사 2015-06-16 14:04   좋아요 0 | URL
앗! 이 책을 기억하여 주시는 분이 계시다니!! 과거엔 제법 많은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여준 책인 것 같아요. ^^ 문예남도 살짝 보니 좋은 말들이 참 많더라구요. 다만, ㅜㅜ 모든 좋은 말들이 그렇지만 읽기는 좋지만 본인이 행하지 않으면 변화가 없다는 점에 있어선 항상 반성만 하네요. ㅜㅜ
 



[터미네이터],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 [다이버전트], [헝거 게임] 등 불안한 미래를 주제로 한 헐리우드 영화 때문일까요?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로 읽히는 <멋진 신세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최근 몇 년 동안 오리혀 더 늘어난 것만 같습니다.

<1984>와 <멋진 신세계>의 차이라면 '직접적인' 통제의 유무이겠죠. <1984>의 세계에서는 정보, 언론, 생필품 등 모든 것이 통제된 세상을 그렸다면, <멋진 신세계>의 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보와 즐길 거리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이 알아야 할 것들로부터 무관심해지는 세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날의 세상은 <멋진 신세계>에 더 가까운 것 같네요. 


기술과 문명의 '편리'로 개개인의 인간성을 제한하는 사회.

'편리' 때문에 자신을 통제하는 사회를 옹호하게 되는 개인.

과연 이 두 짝이 이끌어가는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한우리 독서 토론 논술 책임연구원이신 서은영 님의 서평과 여러분의 생각을 비교하여 보세요.^^

_문예남 올림​


*

<서울신문> 서평

- 전문 읽기 : http://goo.gl/oDhpeo


(전략)

우리는 흔히 미래사회에 대해 막연히 낙관적인 전망을 한다. 과학기술 문명의 양양한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긴 이상향 즉 유토피아가 이룩된 사회를 꿈꾼다. 헉슬리가 1932년에 쓴 미래사회에 대한 이 소설은 20세기 소설 가운데 가장 현실감 있고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그가 위에서 제시한 미래의 모습은 언뜻 보기엔 모든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유토피아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왜 작품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을까.


“… 유토피아는 실현가능하다. 그러나 지식인과 교양인은 유토피아를 회피하며, 불완전하지만 자유로운 비유토피아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

-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우선 작품 제목의 의미부터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제목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제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철저히 반어적인 어법으로 쓴 제목은 템페스트에서 주인공 미란다가 외친 말인데, 미란다는 아버지와 함께 12년 동안 섬에 갇혀 살았다. 그녀는 조난당한 나폴리 왕자 퍼디난드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갈등을 풀고 밀라노로 떠나면서 미란다는 외친다. “이 멋진 새로운 세계여.” 이 말은 문명사회의 실상과 어두움을 모른 채 그저 환상과 호기심만으로 가득 찬 미란다를 반어적으로 표현한 말로 멋진 신세계의 주인공 존의 상황과 부합한다. 헉슬리는 작품의 제목에서 미래 문명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헉슬리가 보여주는 미래 문명사회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자. 

1908년 포드사의 T모델 자동차가 세계 최초의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생산되어 미국 소비사회가 개막된 지 63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사회는 더이상 모태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험용 병에서 인공 수정되어 부화기로 옮겨지는데 이때 5가지 계급 중 알파와 베타를 제외하고 하위 계급인 감마, 델타, 엡실론 계급은 ‘보카노프스키법’에 따라 처리된다. 성장 억제 조치를 받은 하위계급은 수백만의 일란성 쌍생아로 태어나 불평 없이 일할 수 있는 조건으로 최적화된다. 생후 8개월 된 아기들은 신파블로프식 조건반사와 수면교육을 통해 의식이 주입된다.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로 가족 간의 유대나 끈끈한 의무감은 없다. ‘소마’를 먹으면 감정처리까지 완벽하게 해결되는 행복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버나드와 헬름홀츠같이 개인적 자각을 가지고 이런 문명에 회의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한편 문명세계와 대조되는 뉴멕시코 야만인 보호구역에 사는 존 세비지는 문명사회에서 우연히 이탈한 린다에게서 태어나 셰익스피어와 종교와 신, 죽음이 가지는 자연적이고 은밀한 가치관을 체화하면서 자랐다. 존은 버나드에 의해 문명사회로 오게 된다. 문명인 레니나의 아름다움과 문명사회에 대한 동경으로 “오오, 멋진 신세계여!”라고 외치며 기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명사회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경악한다. 극도로 안정되어 보이는 이 문명사회는 ‘공유, 균등, 안정‘이라는 표어 아래 전제주의로 획일화된 사회였으며, 보카노프스키법으로 처리되어 대량 복제된 엡실론 하위 계급의 노예화로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이미 상실된 곳이었다. 모든 신체의 감정과 영혼까지 제거된 사회를 보고 구토하는 존에게 총통은 문명사회에 대해 설명해 준다. 여기서는 더이상 예술과 과학, 종교는 필요 없다. 그것은 안정을 위해 지불해야 할 희생일 뿐이다. 대신 대중에게 촉감영화같이 말초적이고 단순한 유쾌함만을 주입한다. 한때 허용했던 무제한의 과학발전과 진리탐구는 비탈저폭탄으로 인한 9년 전쟁으로 사라지고 대량생산과 보편적 행복과 안정을 위해 대중들에게 통제되었다. 인간의 노령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서 종교에서도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심신의 안정과 위안은 의약품으로 가능하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독교 정신을 터득하는 것이 소마의 본질이다.


이러한 문명사회의 실체를 알게 된 존은 더이상 머물기를 거부하며 불편해질 권리를 요구한다. 신을 원하고,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하며 죄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존에게 총통은 “그렇다면 자네는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를 요구하겠지?”라고 되묻는다. 존은 더이상 문명사회의 조롱과 괄시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과연 나는 이런 편리한 문명사회를 거부할 수 있을까? 존이 선택한 불행해질 권리는 과연 합리적인 대안일까?’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헉슬리가 보여준 미래문명 세계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오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헉슬리가 상상한 미래가 상당 부분 이미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기계문명의 극한적인 발달과 과학적 성과 앞에 노예로 전락한 인간과 존엄성의 상실이라는 비극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헉슬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기계문명의 위협이 심각하고 전쟁과 과학을 결부시켰을 때 어떠한 파괴적인 결과가 나타나는가를 직접 체험했으며 1920~30년대 전체주의적 독재정권이 근대과학의 성과를 마음대로 이용할 때 초래한 비극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헉슬리가 제안한 기계문명과 인간가치 보존에 대한 양자택일의 방법은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헉슬리는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려면 원시사회의 불편을 감수하라는 결론과 함께 야만의 추악함과 불완전성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존이 문명세계와 야만세계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죽음을 선택하는 결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발표한 지 27년이 흐른 뒤 ‘다시 가본 멋진 신세계’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보완한다. 그는 자신의 예언보다 더 빨리 인구과잉과 과잉조직화, 독재체제의 선전, 화학적 약물로 인한 중독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자유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고, 개인의 독창성과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자유와 관용, 자비심을 강조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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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ptive 2015-06-04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자극적 이네요. 이렇게 해야 될까요?

문예출판사 2015-06-04 10:56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제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해당 제목은 서울신문에서 연재가 되는 기사의 제목인데요. 다른 표현은 없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후, 기사를 출판사 블로그에 인용하는 경우에는 나름의 고민을 통해 덜 자극적이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