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 절망을 이기는 용기를 가르쳐 준 감동과 기적의 글쓰기 수업
에린 그루웰 지음, 김태훈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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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긴 여운

 

무던히도 지루했던 그 날 오후, 나는 소위 "시간을 죽이기" 위해 영화 한편을 보게 되었다. 힐러리 스웽크라는 걸출한 배우가 나오는 [프리덤 라이터스]. 사실 이 영화가 원작을 가지고 있다는 것 쯤은 옛날에 알고 있었다. 책 이름을 먼저 접했고, 읽을까 말까 약간의 고민을 했었지만, 읽어야만 하는 책들의 홍수 속에서 어느새 잊혀져 있었다.

영화의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나는 그 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속에 푸욱 빠져버렸다. 영화를 보자마자, '갱스터 파라다이스'가 귓가에 흐르는 듯한 환청을 느꼈다. 미셀 파이퍼와 힐러리 스웽크, [위험한 아이들]과 [프리덤 라이터스]. 이 둘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후에도 여운이 길게 나았다. 그들을.. 프리덤 라이터들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를 읽어보게 되었다.

 

그들만의 전쟁터, 그들은 이미 전사였다

 

전 세게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LA흑인폭동. 그 무렵 아주 어린 아이였던 나도 바다 건너 저멀리 미국이란 곳에서 일어난 그 사건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큰 사건은 미국이란 다문화공간에 만연해있던, 하지만 쉬쉬 숨겨왔던 인종차별주의 문제를 세상으로 터뜨려 보여주었다.

 

우리의 프리덤 라이터들도, 아직 어린 십대의 소년 소녀였지만 그 인종차별의 그늘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동양계, 히스페닉계, 흑인, 백인... 피부색으로 패를 갈라 서로 으르렁대며 누구하나 서로에게 다가가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기에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키고, 자신들의 혈족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지만 학교 건물안에 경찰이 들어와있는 모습이 쉬이 상상되는가? 어린 아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총을 들고 등하교하는 모습은? 그것도 아니면 약에 절어 헤롱대는 십대 어린아이의 모습은?

 

미국이란 큰 땅덩어리 안에서, 피부색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차별을 받아온 아이들은 그들만의 전쟁터에서 그들만의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스스로를 '전사'라 불렀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음을 불사하고 전의를 불태워야하는.. 전사.

학생이라면 누구를 가리지 않고 사랑과 교육으로 감싸안아야 할 공간, 학교. 그곳도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사방이 꽉 막힌 그 공간 안에서 아이들은 학교밖의 전쟁을 그대로 이어나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즘 아이들이란..." 시선과 싸워나가야 했다.

순종은 밥 말아먹은지 오래고 모범생은 따돌림과 경멸, 우스꽝스러운 대상이 된지 오래다. 그냥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뿐이다. 꿈? 그런건 없다. 왜냐구?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운명적인 만남, 변화.. 그리고 ...

 

죽음 아니면 삶. 이 두가지로도 버거운 삶을 간신히 버텨나가던 아이들에게 풋내기 여선생이 다가온다.

실습을 갓 마치고 이제 교직에 첫 발을 내딛은 그 풋내기 여교사는 스스로를 움츠러트리고 온 몸에 신경을 곤두세운 아이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리고 이 조그만 만남 하나가 아이들과 여교사,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다들 자기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비극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왔다. 안그렇겠는가? 아버지가 눈 앞에서 체포되고, 14살 어린나이에 낙태를 해야했으며, 누군가는 누명을 쓰고 징역살이를 해야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어두운 삶 속에서 풋내기 여선생은 아이들에게 조그만 빛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만을 위한 글을 썼고, 처음으로 책을 읽었으며, 처음으로 남의 고통을 이해하겠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변해갔다. 조그마하고 나약하지만 자신들의 힘을 모아 세상에 대고 외쳤다. 폭력과 전쟁이 얼마나 흉측스러운 그림자를 길게느리우는지를,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파해야하는지를 말이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다.

어떤 아이는 자신의 집안에서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게 되었고, 어떤 아이는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는 죽기전에 자신이 할 수 없었던 모든 일 들을 해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통해 내가, 세상이 이 만큼이나 변할 수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가끔은 편견에서 벗어나 괴짜스러운 시선으로, 혹은 세간에서는 멍청한 짓이라 할지라도 소신을 가지고 시도하면 언제난 결과는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준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기적을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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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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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빵 굽는 타자기 인가.

 

독특한 제목이다.. 싶었다. 폴 오스터에 대해서 잘 몰랐던 그 무렵, 나는 [빵 굽는 타자기]를 그저 도서관에서 스쳐 지나치는 하나의 독특한 제목으로만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뻗어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볼 용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제목만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었다.

 

혹시 배를 곯고있는 한 젊은이에게 빵을 만들어주는 타자기가 생긴 이야기인가? 아니면 정말 빵을 구울 수 있는 타자기를 발명한 한 사내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 일까?

누군가 들여다보지도, 검열하지도 않는 내 머릿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은 나래를 펴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책을 그냥지나치던 그 순간으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빵 굽는 타자기]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왜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폴 오스터, 글은 왜 쓰는가?

 

미국이나 한국이나,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그래서 글을 쓰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과 그리고 이미 등단한 기성작가들을 곁에서 보고 접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들중에 소위 잘 나간다는 작가는 없었다. 먹고 살기 어려움에 대한 고충을 웃음거리로 승화시키던 그들의 결론은 "글써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작가, 혹은 에세이스트, 자유기고가는 그냥 돈벌기 힘든 직업군으로 분류가 되었다. 그리고 작가를, 혹은 글쓰는 직업을 선망하는 사람은 아직 철이 덜 든, 혹은 시대감각이 없는, 또는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폴 오스터도 그 용감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운명적으로 자신이 "작가"가 될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운명에 순응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약간은 곱게도 자랐을 듯한 그가 그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업으로" 글을 쓴다는 과정으로 발돋움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담은 책이 바로 이 [빵 굽는 타자기]이다.

 

이제 조금 감이 오는가? 이 책의 제목이 왜 [빵 굽는 타자기]인지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서로 다른 성향의 부모님의 갈등과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론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학교?로 여행을 떠났다.

의도치 않게 유명인과 친분을 쌓기도 했고, 굉장한 소신을 가진 사업가 밑에서 허드렛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배를 타고 항해를 하기도 했다.


 

폴 오스터에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돈'과 관련된 일이었다.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되기위해 그는 정말로 험난하고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그 덕택일까?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폴 오스터는 현재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엄청나게 먼 한국이라는 곳에서 일군의 팬 층을 형성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책을 번역, 출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빵 굽는 타자기]

 

다시 돌아와서 제목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우연하게 폴 오스터가 타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게 말하면 매니아, 나쁘게 말하면 오타쿠.


 

폴 오스터는 타자기에 관한 에세이 책을 출간할 만큼 타자기에 지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왜 빵을 굽는 타자기인지.. 책을 덥고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작품을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그에게 있어서, 온전히 글로 먹고살던, 그리고 지금도 글로 먹고사는 그에게 있어 타자기는 단순한 타자기가 아니었다. 타자기는 밥벌이를 해주는 고마운 대상이었다. 그리고 밥벌이 그 자체였다.

 

[빵 굽는 타자기]란 바로 그 밥벌이에 대한 고마움과 예전의 그 고난과 시련의 그 시간을 위트있게 , 폴 오스터답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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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 / 열림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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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톤먼트]와 [연을 쫓는 아이]

  몇 달 전, 서울의 한 극장에서 나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제임스 맥어보이와 키아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어톤먼트]. 한 어린소녀의 실수가 한 연인의 운명을 180도 바꿔버린 그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해 걸은 속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를 읽고 [어톤먼트]를 떠올렸다. 어린시절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버리고, 그 운명은 대를 이어 어린 소년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된 아마르는 성인이 되서야 어린시절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비극을 늦게나마 속죄하려고 한다. 아마르.. 그는 다른 얼굴의 브라이오니였다.

평생을 지고가야할 원죄, 평생을 함께해야 할 속죄
 
   [연을 쫓는 아이]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아마르에게 파키스탄에서 라힘 칸이 걸어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시작한다. 그 전화는 아마르에게 과거을 일을 환기시킨다. 

 아직 어렸던 그때, 아마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조금은 부유한 삶을 살았다. 집안일을 봐주는 하인과 비록 언청이이긴 하지만 충실한 놀이친구였던 하산. 아마르는 자신을 충견처럼 따르는 하산과 함께 새총을 쏘거나 연을 날리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평범한 아이였다. 하지만 어느날, 여느때처럼 연줄이 끊겨 날아간 아마르의 연을 쫓아간 하산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은 아마르에게 커다란 불편함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건 이후로 아마르는 하산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다. "도련님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그렇게 할게요."라며 자신을 보며 웃었던 하산을 아마르는 누명을 씌워 집에서 쫓아낸다. 

 하지만, 하산을 그렇게 집에서 쫓아낸 후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해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안도 사실 하산은 아마르에게 있어 평생을 지고가야할 원죄가 되었다. 그랬기에 아마르는 라힘 칸의 전화 한 통에 지옥과도 같은 전쟁을 치루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한다. 그리고 만난 하산의 아들, 소랍. 이 무슨 신의 장난인지... 소랍은 하산의 고통을 대를 이어 받고 있었다.

 아마르는 어린시절에는 차마 할 수 없었고, 가질 수도 없었던 용기를 내어 소랍을 그 지옥에서 건저낸다. 그리고 소랍을 미국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미국에 온 소랍은 행복하지 않았다. 말을 잃고 서서리 자신의 안으로 잠겨가는 소랍을 아마르는 묵묵히 지켜낸다. 그리고 공원에서 연을 날리며 처음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보인 소랍을 보며 아마르는 "천번 이라도 너를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기쁜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성인이 될때까지 온 일생을 받쳐애 했던 하나의 속죄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써내려갔다. 어린시절 한 소년의 외면과 거짓이 불러온 한 부자의 고통스런 이야기와 그를 속죄하기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으로 뒤어든 한 남자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그 관심은 이 이야기를 영화화하는데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내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를 알게 된 것은 영화덕분이었다. 아마르와 하산의 운명을 바꿔버린 그 사건을 영상으로 담은 후 아역배우들의 가족들이 신변보호와 외국 이주를 촬영진에게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한 영화잡지에서 먼저 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렇게 [연을 쫓는 아이]를 읽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평생을 하산의 존재를 숨겨왔던 바바와 하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준 아마르. 이들 부자는 하산과 그의 아들 소랍에게 평생 죄책감을 가져야하는 것이 마땅했다. 주변 사람들의 냉정한 심판의 눈이었든, 신체적으로 안겨질 폭력이라는 위협이었든, 바바와 아마르는 자신들이 정히 이루고 행해야했을 책임과 윤리를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들의 이러한 행동은 하산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소랍에게 대물림 되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른이 훌쩍 넘은 아마르가 공원에서 연을 쫓아가면서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바로잡기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고, 위협적인 존재에게 항거하고, 비록 하산은 없지만 소랍을 위해 '천번이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하산에게 행했던 원죄에 대한 죄씻김을 하고 앞으로도 평생 소랍을 돌보며 속죄를 해 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아마르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연을 쫓는 아이]와 아프가니스탄
 

어린시절 , 하늘을 높히 나는 연을 쳐다보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두 어린아이의 모습은 마치 현재 아프가니스탄이 나아가야 할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신분의 차이도, 누구의 잘잘못을 가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두 아이의 모습은 아직도 혼돈에서 허우적대는 아프가니스탄에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

 

아마르가 낮은신분인 소랍을 양자로 들이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자신의 아들임에도 천한 신분의 어미에게서 얻은 탓에 하산을 외면했던 바바의 모습과 대립각을 이룬다. 어쩌면 바바가 하산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바바와 아마르의 일생을 괴롭힌 그 고통스러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아프가니스탄이 같은 국민이 혈족으로 편이 나누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더라면, 지금 아프가니스탄은 아마르와 하산이 연을 날리면 뛰놀던 그때처럼 행복하고 안전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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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
빌 브라이슨 지음, 강주헌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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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유년시절이 어땠냐고 물어온다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나는 나의 유년시절하면 다락방과 책이 떠오른다. 어느 동네에 사는 누구누구처럼 어린시절 "데미안"에 심취하여 천재성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대여섯살 무렵의 나는 계몽사에서 나온 백과사전의 탄생석 챕터와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디즈니 명작 동화 시리즈"에 꽤나 심취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시작된 책에 대한 일방적인(?) 나의 사랑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유년시절"하면 불량식품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구는 100원을 들고 향했던 오락실의 두근거림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누구나의 유년시절은 즐겁고 향수어린 것이다. 그리고 빌 브라이슨의 유년시절은 남들보다 조금 더 유쾌하다.

 

사실 나는 빌 브라이슨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되었다. "거의 모든 것들의 역사"와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여러 권의 책을 쓰고, 그 중 몇 권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다는 꽤나 유명한 작가이지만 약간의 편식적 습관을 지닌 나의 독서이력을 살펴볼 때 그를 접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가 어떤 작가인지도 모르면서도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스티븐 킹 덕분이었다.

물론 스티븐 킹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나의 손을 꼬옥 잡고 이 책을 권해준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은 뒤 나는 '작가'라는 생업을 가진 사람들의 유년시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쓴 책은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단순히 '작가'의 유년시절에 관한 에세이라는 설명만을 듣고서 용감하게 책을 손에 넣었다.

 

겁도 없이 엄청난 즐거움을 기대하며 훔쳐보게 된 빌 브라이슨의 유년시절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 없었다. 스스로를 "썬더볼트 키드"라고 믿으며, 세상만사를 즐겁게 살아가는 빌 브라이슨. 그런 그의 유년시절을 따라가는 것은 읽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즐겁고 흥에 겨웠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에,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공간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유년시절을 보낸 그의 추억은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았다. 그는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느 장난꾸러기 꼬마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흥겨웠던 것은, 꽤나 성공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과거를 너무나 적나라하고 용기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여자친구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던지, 스트립 쇼를 보기 위해 졸지에 뇌종양에 걸린 환자가 되어버린 에피소드는 웃음을 절로 유발시킨다.

 

겁도 없이 집어 든 책이 너무나도 즐거워, 나는 빌 브라이슨의 다른 작품도 주의깊게 살펴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이렇게 즐겁지 않을까 싶다. "캐리"가 스티븐 킹에 대한 보증수표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재밌는 세상" 역시 나에게 있어 빌 브라이슨의 다른 작품에 대한 보증수표가 되어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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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 버틀러의 사람들
도널드 맥카이그 지음, 박아람 옮김 / 레드박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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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15인치 개미허리를 자랑하는 비비안 리 덕분에 동명의 영화는 원작보다 더 유명하다. 그래서 나도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접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은 스칼렛이 침대 기둥을 잡고, 흑인유모가 스칼렛의 코르셋을 힘껏 조이는 장면이다. 15인치. 다큰 성인의 허리 사이즈라고는 감히 믿을 수 없는 그 신비의 숫자가 내 머릿속을 앞도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룬뒤 상복을 입고 파티장에 참석한 스칼렛의 모습이다. 마음속으로는 춤을 추고 싶어 미칠거 같지만 상중인지라 그러지 못하고 치마속에서 열나게 스텝을 밟아대던 그모습!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바로 레트와 스칼렛의 첫만남이다. 애슐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스칼렛과 그 모습의 전부를 지켜보았던 레트의 첫만남. 그때 그들은 아마 자신들의 연이 그리도 질기고 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아무튼 이렇게 나에게 있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렛 오하라의 이야기이면서도 스칼렛오하라 라는 인물 자체에는 별로 정이 가지 않았다. 내세울 거라고는 15인치 장장개비만한 허리사이즈와 팜므파탈적 기질이외에 그녀가 잘난게 뭔가? 싶어서이다. 나는 스칼렛보다는 레트에게 더 정이 많이갔다. 스칼렛이 폐허가 된 타라농장에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니까"라는 명대사를 날릴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레트 덕분이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좀 능글맞기는 하지만 잘생기고 돈도 많은 남자가 날 사랑한다는데 스칼렛은 정말 배가 불러도 너무 부른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레트는 타라농장에 스칼렛을 남겨두고 떠난다. 그리고 스칼렛은 미래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과연 스칼렛과 레트는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저 독자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너무나 열화와 같아서 였을까? 이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그 후속작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이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남녀간의 지지부진한 애정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세계적인 명작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남북전쟁이라는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 아메리카, 그 큰 땅떵어리를 신념의 문제로 남과 북으로 가른 동족상잔의 비극은 미국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이다. 마치 한국의 6.25와 같이. 때문에 남녀의 애정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절대 가볍지 않고 진득하니 중심을 잡는 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레트 버틀러의 사람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소외되었던 레트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좀더 깊이 파고든다.

 

농장주의 딸로 태어나 흑인 유모의 수발을 받으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스칼렛과는 달리 농장주이며 세력가의 아들로 태어난 레트 버틀러는 어린시절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노예 윌의 죽음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말도 안되는 노예문제에 반감을 가지고 자라나게된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와 보장된 앞날을 거부하고 신사가 아닌 선장 버틀러가 된다.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펴며 살아온 레트의 이야기.

스칼렛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보다 나의 맘에 들어온 이야기는 바로 그것 이었다. '스칼렛'을 사랑한 '레트버틀러'가 아니라, 그냥 인간 '레트 버틀러'에 관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한 것이었다. 그렇게 기다렸고 고대되었던 이야기였기에 나는 그 두툼한 책을 손에 들자마자 숨쉴겨를도 없이 후다닥 읽어버리고 말았다.

스칼렛과의 달달한 사랑이야기 보다도 쓴맛나는 레트와 흑인노예제도, 남북전쟁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아마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거렛 미첼도 "러트 버틀러의 사람들"을 본다면 흡족해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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