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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평점 :
왜? 빵 굽는 타자기 인가.
독특한 제목이다.. 싶었다. 폴 오스터에 대해서 잘 몰랐던 그 무렵, 나는 [빵 굽는 타자기]를 그저 도서관에서 스쳐 지나치는 하나의 독특한 제목으로만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손을 뻗어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볼 용기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 제목만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었다.
혹시 배를 곯고있는 한 젊은이에게 빵을 만들어주는 타자기가 생긴 이야기인가? 아니면 정말 빵을 구울 수 있는 타자기를 발명한 한 사내에 관한 유쾌한 이야기 일까?
누군가 들여다보지도, 검열하지도 않는 내 머릿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은 나래를 펴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책을 그냥지나치던 그 순간으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빵 굽는 타자기]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이 책이 왜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폴 오스터, 글은 왜 쓰는가?
미국이나 한국이나,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그래서 글을 쓰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과 그리고 이미 등단한 기성작가들을 곁에서 보고 접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옆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들중에 소위 잘 나간다는 작가는 없었다. 먹고 살기 어려움에 대한 고충을 웃음거리로 승화시키던 그들의 결론은 "글써서 먹고 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였을까? 작가, 혹은 에세이스트, 자유기고가는 그냥 돈벌기 힘든 직업군으로 분류가 되었다. 그리고 작가를, 혹은 글쓰는 직업을 선망하는 사람은 아직 철이 덜 든, 혹은 시대감각이 없는, 또는 용감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폴 오스터도 그 용감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폴 오스터는 운명적으로 자신이 "작가"가 될 것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운명에 순응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약간은 곱게도 자랐을 듯한 그가 그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생업으로" 글을 쓴다는 과정으로 발돋움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옮겨담은 책이 바로 이 [빵 굽는 타자기]이다.
이제 조금 감이 오는가? 이 책의 제목이 왜 [빵 굽는 타자기]인지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서로 다른 성향의 부모님의 갈등과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론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리고 군 징집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학교?로 여행을 떠났다.
의도치 않게 유명인과 친분을 쌓기도 했고, 굉장한 소신을 가진 사업가 밑에서 허드렛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배를 타고 항해를 하기도 했다.
폴 오스터에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항상 '돈'과 관련된 일이었다.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작가"가 되기위해 그는 정말로 험난하고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그 덕택일까?
그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폴 오스터는 현재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엄청나게 먼 한국이라는 곳에서 일군의 팬 층을 형성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책을 번역, 출간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빵 굽는 타자기]
다시 돌아와서 제목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우연하게 폴 오스터가 타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게 말하면 매니아, 나쁘게 말하면 오타쿠.
폴 오스터는 타자기에 관한 에세이 책을 출간할 만큼 타자기에 지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다.
왜 빵을 굽는 타자기인지.. 책을 덥고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작품을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그에게 있어서, 온전히 글로 먹고살던, 그리고 지금도 글로 먹고사는 그에게 있어 타자기는 단순한 타자기가 아니었다. 타자기는 밥벌이를 해주는 고마운 대상이었다. 그리고 밥벌이 그 자체였다.
[빵 굽는 타자기]란 바로 그 밥벌이에 대한 고마움과 예전의 그 고난과 시련의 그 시간을 위트있게 , 폴 오스터답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