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문우답 - 인생보다 일상이 버거운 당신에게
백성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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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자기 스스로 '나는 행복하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될까?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슬럼프'의 시기가 찾아온다. 내게는 한 2년 전이 그랬고, 지금이 또 그런것 같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유독 '행복'이라던가 그런 긍정적인 주제를 다룬 책을 많이 찾게되는 것 같다. 현재의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고, 인생이 참 어렵다고 느껴진다. 앞, 뒤, 옆 모두 꽉꽉 막힌 방안에 들어갔는데 불시에 갑자기 불이 꺼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던 차에 '정진석 추기경님과 고우스님, 최인호 작가님, 이재철 목사님이 먼저 읽고 감동한 50일 치유 수업'이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눈길이 사로잡혔다. 천주교와 불교, 기독교의 종교를 가리지 않는, 그야말로 종교를 넘나들면서 만인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 책이라니, 가뭄든 듯 쩍쩍 갈라져버린 내 가슴을 촉촉히 적셔줄 가랑비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현문우답>의 작가는 백성호라는 기자이다. 메이저 언론에서 동명의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작가가 가장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던 50편을 추려서 세상에 한권의 책으로 내놓았다. 그 50편의 이야기 중 내 기억에 가장 깊게 남겨진 에피소드는 바로 책 가장 첫부분에 등장한 중국의 고승, 임제선사의 에피소드이다. 진정한 불법(佛法)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답변대신 매서운 따귀를 날린 임제선사. 그리고 작가가 만난 한 스님과의 일화.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출발선: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였다. 진정한 깨달음과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에게 황망히 따귀를 날린 큰 선생님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기자들과의 다도 중에 외마디 큰 소리와 함께 찻잔의 차를 쏟아버린 스님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 제자도, 기자들도 어안이 벙벙했을 거였다. 하지만 이를 해석하여보면 스님과 임제선사 모두 사람들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신 것이었다. 황망하고 황당한 그 순간, 모든 것과 단절이 되고 일순간 온전히 자신에게 충실하게 마음이 반응하는 그 순간,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내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하고, 내 하루하루를 어둡고 칙칙하게 보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스스로 나에게만 집중하여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떨어져 자유롭지 못하는 것이 결국에는 내 마음을 무겁고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닐까?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마음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또는 마음이 좀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책을 통해서 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해보게 되고, 그 현실에서 좀 벗어날 수 있다면 행복해지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누군가 그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말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그 시간을 즐기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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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위로한다 - 정신과 명의 이홍식 심리치유 에세이
이홍식 지음 / 초록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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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등에 혹을 단 듯 답답함과 통증을 느꼈다. 매일 새벽 4시가 되면 통증에 잠을 깨서 진통제를 먹고나서야 겨우 잠을 청했다. 앞으로 엎드리면 갈비께가 아프고, 드러누우면 등이 너무 아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각종 검사를 하고 수액을 맞았다. 검사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돌아온 날 밤에 다시 통증에 잠에서 깼고, 한의사는 내게 '스트레스로 인한 홧병'이라는 결론을 내주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힘이 들어서 화가 쌓여 병이 되었느냐고 묻는 한의사에게 할 말은 없었다. 과연 내 안에 쌓이고 쌓인 그 화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회사와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답을 했다. 하지만 근래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것이 짜증을 불렀고, 답답증을 키웠다. 내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상황이 변해서 나를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것인지... '나는 나를 위로한다'를 읽게 된 것도 그러한 때문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넌 참 재미없게 인생을 사는구나'하고. 나도 가끔은 내 인생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답변으로 그 친구의 말에 긍정을 했다. 그래서 나도 나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에 막연히 '나는 나를 위로한다'를 읽게되었다.
 

 이 책 안에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기가막힌 방법이 실려있지 않을까? 그도 아니라면 내 인생을 위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쯤은 실려있지 않을까? 턱도 없고 말도 안되는 기대를 하면서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대중에게 '자신의 인생을 위로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정신의학자로서 명망을 얻은 작가가 스스로의 사타구니가 시꺼멏게 멍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스트레스를 스스로 털어내버리기 위해 했던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에세이 형식으로 담겨진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본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란 작품을 떠올렸다. 섬단송포증을 가진 야쿠자와 공중그네에서 번번히 떨어지는 공중곡예사 등등 각종 공포증과 그로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치료하던 닥터 이라부. 아, 그리고 또하나 떠오른 사람은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 시리즈에 등장하는 닥터 다구치도 떠올랐다. 두 사람 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회복을 돋는 일환으로 끊임없는 한풀이의 대상이 되어준다. 한참을 털어놓고 넋두리를 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쌓인 무언가가 해소되면서 환자의 회복을 돕는다. 하지만 한번도 닥터 다구치나 닥터 이라부가 스트레스로 힘들어할 거라는 상상은 해본적이 없다. 하지만 실제 현재의 닥터 이라부, 닥터 다구치쯤 되는 작가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환자들의 병환과 병원에서의 일 뿐아니라 일찍 결혼을 하겠다고 나선 아들과 치매가 점점 심하게 진행되는 어머니, 그리고 그런 가족을 지탱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그 또한 사람인지라,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때마다 그는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사타구니께를 꼬집었고, 결국 그 부분은 까맣게 죽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면서 스트레스를 참아오던 작가는 마침내 자신을 억눌러왔던 스트레스를 털어내기 위해 방법을 찾아나선다.

 

  작가가 찾아낸 방법은 바로 몸을 욺직이는 것이다. 산에 오르고 길을 걸으며, 다소 무모해보이는 마라톤에 도전한다. 쉴 사이없이 몸을 욺직이면서 작가는 스스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결국 그렇게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정신적인 건강뿐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도 건강해진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나를 위로할 것인가? 책을 다 읽었음에도 나는 아직까지 내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몸을 욺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마라톤이나 등산을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 하지만 그나마 가능한 방법은 걷기가 아닐까 싶다. 그냥 평지를 주욱 걷다보면, 언젠가는 나도 작가처럼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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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 개정판
이황 지음, 이장우.전일주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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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지독히 지엽적이다. 말년까지 왕의 신뢰를 받아 몇 번이나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충신이었고,  유교사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라는 정도가 내가 '퇴계 이황'선생에 대해서 하는 전부다.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그저 역사책이나 윤리책에서 언급되는 정도로만 우리는 '퇴계 이황'선생을 알고 있다. 그래서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라는 책을 접했을때 왠지 모를 설레임을 느꼈다. 살아있던 당시나 세상을 떠난 후 몇 백년이 지난 후에도 학자로, 충신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위인의 새로운 모습을, 그것도 아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알 수 있다니... 설레임이 이는 것이 당연했다.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는 이황이 첫째 아들 이준에게 보낸 편지 중 162통을 한역하여 옮긴 책이다. 과연 성리학의 거두이자 이름높은 충신은 아들에게 어떤 편지를 썼을까? 성리학의 이론을 논했을까? 아니면 인생의 가르침을 전했을까? 이황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한 통 한 통을 읽어보면 우리시대의 아버지와 이황선생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에게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고,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유한다. 이황선생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구나 싶다. 또한 장남에게 식솔을 어찌 다스리는 것이 좋은지, 그 해의 수확을 어찌 처분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한다. 한 나라의 재상으로 소소한 가정사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을것 같았던 이황선생이 집에서 부리는 사노비 하나 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어떻게 처분할지 조언하는 모습에서 그 세심한 모습이 놀랍기까지 하다. 또한 손자와 며느리를 챙기는 자상한 모습과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아들을 기리는 그의 모습에서 필부의 모습이 겹쳐진다.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는 성리학자나 관직에 나아간 정치가로서의 이황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이황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식을 옳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성현에게나 평범한 사람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매로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녀를 인정하고, 옳바른 길을 권하며 때로는 강한 어조로 가르침을 내리는 그의 모습에서 옳바른 '자녀교육'이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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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일까? - 대중문화 속 법률을 바라보는 어느 오타쿠의 시선 대중문화 속 인문학 시리즈 1
김지룡.정준옥.갈릴레오 SNC 지음 / 애플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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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뉴스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법의 판결을 접하게 된다. 어린 여아를 무자비하게 성폭행하여 생식기관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무자비한 성범죄자가 술을 마시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심실미약'으로 형편없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뉴스가 몇 해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한 아이의 인생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사람이 고작 '술'을 핑계로 감형을 받을 수 있다니, 법이란 참으로 우리의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구나 싶었다. '술'을 마시면 자동으로 '심실미약'이 되고, 때문에 범죄를 저질러도 그건 '술'의 탓이 된다니. 참으로 쉬운 핑계가 아닐 수 없다. 비단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법'이란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경우는 많다. 법은 분명 다수의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왜 우리가 접하는 '법'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떨어져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분명 '법'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느끼기엔 어렵고 복잡한 것이 분명하다.
 

  몇 해전, <데스노트>라는 일본 만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지루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사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천재 소년을 만나 '데스노트'를 건네주고, 소년은 '키라'가 되어 '데스노트'를 이용하여 범죄자들을 처단한다는 것이 그 주된 이야기다. 그 처단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데스노트'에 처단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죽음의 방법만 쓰면된다. 손에 피 한방울 뭍히지 않고 범죄자를 응징한다. 분명 누군가를 죽인 것은 확실하니 '살인'이지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니 '살인죄'를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경우 '키라'는 살인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일까?'는 이런 상황, 분명 범죄적 성격을 띄긴 하지만 범죄로서의 그 명확함이 불분명한 상황을 대중문화 속의 에피소드에서 차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데로 '키라'는 살인죄를 인정받을 것인지, 개인소유의 땅에서 잡은 포켓몬의 주인은 땅주인인지 아니면 잡은 사람인지? 영웅 스파이더맨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지의 여부 등 책이 다루고 있는 상황들은 어느 쪽이 유죄이고 무죄이고를 가려주기 참 어렵다. 공익을 위해 한 행동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영웅에게 너무해 보이고, 그렇다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참고 넘기라고 하는 것도 너무해 보인다. 개인 소유의 땅에서 서식하는 야생동물에게 주인이 존재하는 것인지? 법적인 지식없이 그저 개인의 양심과 도덕으로 판결을 내리기엔 아리송한 점 투성이다.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일까?'는 이런 상황을 대중문화에서 차용해오므로서 독자의 호기심을 배가시킨다. 그 누구도 영화를 보면서, 만화를 보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하지만 생각해보면 꽤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법적인 시각에서 접근함으로서 독자에게 '법'의 원리와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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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피넛 2
애덤 로스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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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의 아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뒤돌아 다시 한 번 바라볼 정도로 뚱뚱하다. 하지만 아내의 뚱뚱하고 육중한 외모는 그에게 있어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육중한 아내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꿈꾸고, 소설까지 쓴다. 그런던 어느 날, 남자의 아내가 죽어버린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어, 일찍이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그녀가 너무나 어이없게 땅콩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경찰은 자살이 아닌 타살을 의심하고, 결국 남자는 용의자가 된다.

 

 처음 <미스터 피넛>을 읽었을 때는 아내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결국에 죽여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너무 육중해서 다이어트에 열중하고, 헛돈을 쓰지만 아무런 성과없이 오히려 배로 요요가 와서 결국에는 다이어트를 하느니 못한 아내와 그런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녀의 불어나는 살마저도 사랑으로 감싸안는 남자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요즘 여기저기 추천사를 남발한다는 소리를 듣는 스티븐 킹이기는 하지만, 명불허전! 그가 괜히 장르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이겠는가! 처음에는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궁금증을 더해갔다. 앨리스의 육중한 몸도 사랑했던 데이비드가 왜 앨리스를 죽이고 싶어졌는지, 설마 데이비드가? 그럴리가 했던 내 생각이 청부살인업자 뫼비우스의 등장으로 산산히 깨어졌다. 그리고 앨리스 사건을 조사하는 두 형사의 개별적인 이야기도 결코 무난하지 않았다.

 

 능력을 인정받는 게임 프로그래머 데이비드 피핀과 그의 아내 앨리스, 어느 날 방에 들어가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한나와 그녀의 남편 워드형사, 유망한 외과의사였다가 형사가 된 샘 형사와 살해당한 그의 아내 마릴린. 용의자와 경찰이라는 불쾌한 인연으로 만난 데이비드와 샘, 워드는 모두 아내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와 결론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영화 2편이 생각났다. 하나는 박중훈과 최진실이 주연한 <마누라 죽이기>이고 다른 하나는 엄정화와 감우성이 주연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다. 장르도 주연한 인물들도 다른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결혼을 신성하고 행복한 '사랑이 충만한 두 사람의 결합'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미스터 피넛>을 읽으면서 두 영화를 떠올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티븐 킹은 <미스터 피넛>에 '결혼의 어두운 측면을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명한 소설'이라는 추천사를 날렸다. 결혼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헤어지기 아쉬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꿀과 같이 단 신혼이 곧 지나고 사랑으로 뛰던 가슴이 내성으로 무덤덤해져 버리면 결혼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닌 일상이 된다. 그 일상에서 부부는 서로를 미워하고 이해할 수 없어하기도 하며 때로는 증오하기도 한다. 스티븐 킹의 말대로  <미스터 피넛>은 그런 일상이 되어버린 결혼생활의 어두운 부분을 세상에 까발린 소설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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