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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판 ㅣ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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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어떤 경우의 삶이든 전부 같으며 여기서의 내 삶도 결코 불만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64p
의심의 여지 없이 사는 것은 길었지만,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어가는 것으로 그렇게 팽창하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이름을 잃는다. 어제 또는 오늘이라는 단어는 내게 의미가 지켜진 유일한 것이었다. -113p
우리는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나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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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제목을 ‘완전히 새로운 이방인’ 이라고 할까 고민 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기존 번역서와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현재의 제목으로 변경 했다. 새움 출판사에서 2020년 개정판으로 나온 <이방인>은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읽기’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고전, 세계 문학을 읽기 힘들어 할까? 혹은 왜 읽기는 쉬운데 ‘이게 도대체 왜 명작이지?’ 라는 생각이 들까? 이 두 가지 질문의 답을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에는(문학동네 출판사 이기언 역자 작품) 글 자체는 재미있고 쉽게 읽혔으나 ‘나의 삶이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타인이 정해주는 굴레를 지켜보아야 하는 세상에 대한 아이러니함’ 이외에는 딱히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 한 가지 느낌으로도 ‘굉장한 작품이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도무지 왜 노벨문학상을 받을 정도의 작품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이전 서평을 다시 보니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썼었다.) 그러나 이번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읽으면서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은 읽기 부자연스러운 ‘직역한 느낌’의 문장에(후에 알고보니 실제로 직역한 것이었다.) 다소 뚝뚝 끊기기도 했고, 자꾸만 앞으로 되돌아가 흐름을 되찾아야 했기에 굉장히 힘들게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지를 더해갈 수록 소설의 구성과 치밀한 설계에 혀를 내두르며 읽게 된다. 새움 출판사 <이방인>의 가장 큰 이점은 소설 페이지 수 만큼의 페이지를 소모하고 있는 역자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의 번역은 이 모든 것을 거제시킨 불구였던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결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이유였다. -205p’ 라며 다소 과격하게 발언하기도 하는 역자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가 여태까지 번역을 얼마나 잘 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지적 활동의 기쁨이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주인공 ‘뫼르소’ 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이야기는 시작 된다. 그는 그녀의 죽음을 두고 ‘그렇게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자유를 느꼈을 테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를 했음이 틀림 없었다. 누구도, 어느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166p’ 라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것은 1장의 시작인 어머니의 죽음과 2장 본인의 죽음, 마지막 장면과 놀랍도록 큰 연결이 되어 있다. 그녀의 죽음으로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고통 속에서 그는 그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뫼르소는 끝내 ‘우리가 죽는 이상, 어떻게건 언제이건,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그건 명백한 것이다. -156p’ 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다소 부정적이고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뫼르소라는 캐릭터는 사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이해하기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가 단순히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캐릭터라면 ‘나는 엄마를 무척 사랑했지만, 그건 하등의 의미가 없다. 모든 건전한 이들은 많게든 적게든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원한다. -93p’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엄마를 ‘무척’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거짓’을 이야기하기 보다 ‘진실’을 이야기 한다. 사랑과 진심, 혹은 진실은 다르다는 것을 거침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 뫼르소라는 캐릭터의 성격에 집중하여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과 내용이 일맥상통하다. 단순한 포인트로 뫼르소의 ‘어떤 점에서는 소송을 보게 되어 흥미롭다. -116p’ 라는 말에서도 자신의 일을 마치 타인의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의 죽음(현실)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삶에 다소 방관자적인 태도를(그렇게 보이는) 유지한다. 또한 법정에서 뫼르소에게 발언의 기회가 전혀 없으며 (그의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내게 의견을 구하지 않은 채 내 운명이 정해지고 있었다. -136p’ 뫼르소가 평소에 행해온 모든 행동들이 그들의 잣대에 맞춰 평가되는 모습에서 뫼르소 자신은 사회에서의 이방인이 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사실 우리 모두는 더 나아가 스스로의 삶에 있어서 이방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1부와 2부의 장나눔에 의의를 두고 읽다보면 작가의 설계를 하나씩 깨달으며 소름이 돋게 된다. 1부의 모든 내용이 2부를 위한 밑거름 이며, 어머니의 죽음과 본인의 죽음. 방관하는 자세와 방관해야 하는 상황 등 1부와 대조 되는 2부 처럼 이 모든 것이 불필요한 장면 자체가 하나도 없으며 완벽한 설계에 의해 완벽하게 분할 되어 완벽한 한 권의 소설이 탄생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잘 된 번역’을 운운하면서 번역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어떤 번역이 올바른 번역인가? 완벽한 번역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정서 역자는 이에 대해 ‘잘된 번역은 그것을 얼마나 정확히 옮겨 주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고, 역자가 얼마나 읽기 좋게 옮겨 주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310p’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무조건 자연스럽고 한국의 정서에 맞는 번역을 좋아하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저자는 또한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것, 그게 곧 번역일 테다. -233p’라고 이야기 하며 번역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의 의도를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하여 ‘역자는 작가가 쓴 그대로를 옮기려 애써야 한다. 그래야만 원래 이야기를 왜곡시키지 않게 되는 것이다. -225p’ 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거기에는 ‘의미가 틀린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투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것이다. -173p / 아무리 소소한 일상이라도 그것이 작품 속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198p’ 라는 이유가 존재한다. 물론 선택은 독자의 몫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무심히 넘어가던 번역에 관한 사색을 할 수 있었고, 내가 얼마나 ‘이방인’ 처럼 그 많은 세계문학을 읽어왔나 깨달을 수 있었다. 명작과 함께 역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오랜만에 지적 활동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직역과 잘 다듬은 번역 사이에서의 갈등은 앞으로도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겠지만.
-<이방인>을 한 번쯤 읽어 봤다면, 혹은 읽어보고 싶다면 새움 출판사의 <이방인>을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새로이 읽어보는 것도 모두 여러분의 지적 활동 만족도를 높여줄 것이다. 아니 이 <이방인>은 꼭 읽어봐야 한다. 또한 역자의 이야기가 끝난 후 다시 한 번 소설을 읽는다면 더 짜릿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