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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봄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4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뭔가를 아주 잘 아는데 아무리 애써도 그게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저 한 마디로 시작하는 소설. 그 앞의 책날개엔 이러한 소개가 있다.
1890년 영국 데번에서 미국인 프레더릭 밀러와 영국인 클라라 베이머 부부의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어머니의 교육을 받았고 열여섯 살 때 파리로 이주해 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배웠다. 1912년 영국으로 돌아와 2년 뒤 아치볼드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했고 1차 대전 시기에 쓴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으로 데뷔했다. 1976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BC 살인사건' 등 80여 편의 추리소설을 집필했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출간 직후 애거사는 어머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 등에 큰 충격을 받고 스스로 실종 사건을 일으키는 등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이때의 사유를 바탕으로 1930년부터 1956년까지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정원의 여자, 39세의 피부가 희고 꼿꼿한, 부유한 집안의 잘 교육받은 여자. 뭔가를 경험하여 타인에게 보일 동정심이 없는 여자. 일요일에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페스트리, 수플레, 볼로방. 프랑스어와 상상 속의 친구들. 간결하게 힘을 빼고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밤새 이야기해나가는 여자. 바로 '두번째 봄'의 셀리아의 이야기인 동시에 메리 웨스트매콧의 이야기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다른 이름은 고스트 라이터일 수도 있고,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애거사 크리스티와 메리 웨스트매콧이 될 수도 있다. 이미 굳어진 지문을 피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작가의 자기 이야기. 이 책은 한낮에 읽다 쉬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을 잘 읽기 위해서라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첫 장을 펼쳐 들어 쉬지 않고 한 번에 쭉 읽어야 할 것이다. 셀리아의 이야기엔 그런 그림자가 있다. 어디까지가 내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아빠의 부인일까? 어느 구름 뒤에 해가 있고 어느 구름 뒤에 폭우가 숨었을까?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불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어떤 일에 있어 한가지 다행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 다 살지 않았다는 점. 애거사 크리스티에게는 분명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자신의 자서전에도 빼놓을 만큼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나는 지금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앞면과 아무도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는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아는 추리소설의 여왕, 데임 작위의 애거사 크리스티. 직업의 성공, 유복하고 풍요로운 유년, 탄탄한 자기 세계. 숨죽여 울고만 싶고 돌아가고만 싶은 어머니의 품속, 이제 더는 없는 그 온기. 누구보다도 가까이하고 싶었던 세계가 점점 멀어져 가고 급기야는 자신을 아프게 할 때의 탄식. 글 앞에서 한없이 강하다가도 겸손해지는 작가의 자의식. 이 모든 것이 바로 메리 웨스트매콧이었다. 바로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그림자.
단어, 낱말, 문장, 문단, 이야기로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로서의 애거사 크리스티가 있었다면 하나하나 과거를 되짚어가는 메리 웨스트매콧이 있다. 그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일 수도, 남편의 외도일 수도, 이혼, 혹은 자살 시도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것은 방아쇠에 불과하다. 이야기 속 셀리아가 반해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고 너무나도 사랑한 더멋같은 남자는 아무리 부모의 죽음과 배우자의 외도, 이혼과 자살 충동을 겪어도 이렇게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하듯 대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셀리아가 지닌 이야기에의 열망, 자신을 돌아보고자 함에서 오는 성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삶에 대한 오만함의 삼위일체가 빚어낸 때늦은 결과물이다. 삶의 상징은 그런 것이랍니다. 라고 말하는 나직한 작가의 목소리. 만약 삶이 우리 앞에 기호로 놓여 있다면, 사는 것은 한결 간단할지도 모른다. 아예 간단함을 넘어서 정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1:1로 해석할 수 없는 것.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무엇. 상징은 그러한 것이고 사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어떤 여자일까?' 하는 케케묵은 질문일 수도, 핀에 찔린 나비가 너무 불쌍한데 그 나비를 선물한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여자 아이일 수도, 화가의 글로 남은 셀리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책장을 넘기는 내 손끝에 걸린다.
셀리아에게는 친절도 동정도 없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헛되이 소진해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알았듯 그녀는 그런 점에서 바보 같았다. 그녀는 너무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베풀 동정심이 없었다. 입가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그녀가 지금까지 참고 견딘 커다란 고통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이내 내게도 '어떤 일이 일어났었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우리는 동등했다.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았고, 날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내 불행은, 그저 내가 어떻게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 그녀의 결심을 알아보았는가를 이해하는 근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타오른 불길과 거친 물결에 투신했던 사람은 길에 버려진 동물에게 품을 동정심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오히려 커다란 재앙에 효율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감정은 빨리 지나가지만 깊은 통찰은 바뀌지 않는다. 감정을 버리고 사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걸었던가. 탕플 감옥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 직전에, 골든 게이트 브릿지에서 투신자살하는 이들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그리고 셀리아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총을 든 남자에게서 도망쳐 다시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이들은 다들 모종의 위험 앞에서 마지막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은 사력을 다한다. 이때 작품 속에 녹아드는 작가의 목소리.
그렇다. 나는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어찌됐든 그녀가 무너져 항복할 때까지-그녀 곁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손을 쓸 수 없는 화가가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핵심만 기록할 생각이라는 듣는 이의 결심은 곧 메리 웨스트매콧이 된 애거사 크리스티의 마음이다. 커다란 파도 앞에서 당시에는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더는 잃을 정신이 없다는 이의 마지막 자의식. 남편의 외도 앞에서 셀리아의 모든 정신은 남편에게 가 있다. 남편의 여자에게 가지 않는 그의 놀라운 강인한 자의식 앞에서, 메리 웨스트매콧이 되어야 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가가 늘 앉던 책상 앞이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을 때는 이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읽고 싶은 마음. 스스로가 창조한 세계가 아닌, 창조한 세계 속에서 숨 쉬던 자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하여 어렸을 때, 핀에 찔린 나비를 보고 괴로워하고, 아주 드높이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한 산이 멀찍이 있는 모습이 실망하고, 아빠가 죽었을 때 엄마에게로 가서 '아빠는 천국에 갔어요. 계속 아빠를 불러서 휴식을 방해하고 싶진 않죠, 엄마?'라고 착하게 말하는 여자아이를 만나는 마음.
이야기 마지막, 셀리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는 '그녀는 서른아홉 살에 돌아갔다....성장하기 위해....'라고 말한다.
아, 이 한 가닥 자만심이라니!
책장을 덮기 전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 글귀에서, 이 오만한 추리소설의 여왕이 남긴 채찍질은 너무나도 근엄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는 내도록 느꼈던 모종의 일체감이 경외심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셀리아가 서른아홉 살에 돌아간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던 그가 자신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였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는 정리된 손길, 삶이 간혹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호가 아닌 상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 동정심과 상상력, 어머니의 따스함과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 힘을 탕진해버릴 수 있는 책임감. 가짜를 가졌을 때는 진짜를 가질 수 없는 법.
애거사 크리스티는 아마도 이 소설을 쓴 다음에야 자신이 직조한 추리소설로 한결 가볍게 돌아설 수 있었을 것이다. 큰 일과 작은 일. 굵직한 사건과 조그만 느낌. 큰 결심을 뒤로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가 들려주는 자기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유모가 잠자리에서 입에 넣어주는 달콤한 과자, 아름답고 다정한 어머니와 자상한 아버지.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 아버지의 죽음 이후 좀 이상해 보이는 어머니. 늘 자신만만한 할머니, 사교계! 너무나도 원했기에 손에 쥐기를 오히려 주저하는 겸허한 사랑, 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 자신의 것을 최대한 지키려는, 모든 것을 잃은 자가 낼 수 있는 당당한 목소리. 자신을 닮지 않아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 없는 딸. 그 사이를 적시는 것은 어머니의 미소, 아버지의 목소리. 남편의 포옹, 딸의 냉정함. 사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의 셀리아. 혹은 홀로 정원에 앉아 굴렁쇠를 하마라고 상상하는 셀리아. 정원에 나가면 그 어린아이가 앉아 공상하고 있었고, 집안에 들어가면 마호가니 가구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 셀리아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셀리아, 전쟁 중의 셀리아. 더멋과 결혼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내어다 주려는 셀리아......
이 모든 것이 당신이에요. 라는 목소리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짙어진다.
메리 웨스트매콧이, 셀리아가, '나는 바보였어요. 다른 여자들에게는 다 일어나는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을 펼치면 그가 거기에 있다. 책을 읽으면 그가 거기에서 서성인다. 그는 셀리아이기도 하고, 셀리아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모든 것을 부수는 총을 든 남자이기도 하다. 셀리아가 너무나도 사랑해서 결국, 모든 것을 내어주게 된 더멋이기도 하고 죽도록 머리를 쓰며 살아온 셀리아의 엄마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책장을 덮은 나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받아쓴 메리 웨스트매콧도 알 수 없다. 오로지 셀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단 한 사람만이 어렴풋이 짐작할 뿐,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은 우리에게 이렇게 늘 다가왔다가 멀어진다. 우리의 읽는 눈과 말하는 입이 앞으로도 이야기 속의 그들과 오버랩되는 삶을 살며 무언가를 느낄 것이며,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리 자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실마리를 조그맣게 남긴 채.
출발 경적이 울렸고 나는 뛰어야 했다......
그래서 내게 그런 인상만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인상은 아주 선명했다.
공포......그리고 안도.
안도라는 말은 너무 약하다.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구제가 더 적절한 것이다.
그녀가 본 것은 총을 든 남자였다. 그녀에게 공포를 상징하는......
긴 세월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총을 든 남자......
그녀는 마침내 그를 똑바로 대면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아주 평범한 인간이었다.
나 같은......
따옴표 속 모든 말은 책속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