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저도 아니다.' 혼란스럽고 못 올 데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우리 할머니가 쓰는 말이었다. 비행기는 내게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는 하늘에 열네 시간을 떠 있는 동안 내내 샤샤 생각만 하거나 멋진 몸매로 인기 잡지의 표지 모델이 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긴 시간을 채워 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진한 크림 맛이 느껴지는 리큐어만 홀짝일 수밖에 없었다. 엘에이도 아니고 멜버른도 아니고, 이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도 아니고, 유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니었다. 뚱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날씬하지도 않다. 확실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패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내 디스크맨에서 너바나의 희귀곡이 흘러나왔다. 커트 코베인이나 나나 엉뚱한 곳에서, 이해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신세였다. 커트 코메인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은 후에도 그렇다. '자살을 하면 행복해 질지도 몰라' 라는 가사를 들으니, 자살을 눈앞에 두고 있다면 더는 이런 끔찍한 경주를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폭삭 늙어 버리거나 죽을 때가 다 되면 새 시즘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표지 모델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어쩌면 성공항 배울, 스타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호의 기회를 잡고도 그걸 살리지 못했다. 모든 면에서 남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려고 자신에게 너무 스트레스를 주다 보니 내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장애물 경주가 되어 버렸다. 허들을 뛰어넘으며 허덕허덕 50년을 보내리라는 생각을 하니, 그 경주를 바로 내가 해야 할 거라고 생각을 하니 또 베일리 생각이 났다.







 머릿속이 꼭 수챗구멍같을 때가 있다. 이게 잘하는 일인가, 뒤돌아보게 되거나 하루 종일 햇빛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날들. 날 선 말에 맞받아칠 기운마저 내려놓게 되는 날. 전의를 다지지도, 생각을 정리하지도 않는 날. 바빠야 할 때인데,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괜찮다며 '낭낭하게' 있을 때. 누군가는 욕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자유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살아있다는 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동네 뒷산을 백 번 정도 오르는 일이라 했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종종 이도 저도 아닌 걸까, 생각하다 읽은 책.





 계속 포샤 드 로시의 사진을 보게 된다. 이 금발과 이 매력적인 눈매의 여자가 써내려간 고백은 거식과 폭식, 성적 주체성과 배우로서의 자괴감과 성취감을 오락가락하지만 사실 읽는 내도록 그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너무나도 생생하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전달하지도 않고, 옛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지도 않는다. 체념과 머뭇거림도 없다. 오히려 이 책을 가득 채우는 것은 넘칠듯한 강박의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강렬해서 오히려 젊음이 빛난다. 살을 빼야 한다. 먹어서는 안 된다. 달려야 한다. 더 작은 사이즈를 입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녀의 강박감이 드러난다. 그 관계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파괴적이고 지배적이어서 그녀는 마침내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마저 한다. 그 절망 속에서 오히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때' 마침내 생리가 멈추고, 골다공증 진단을 받고, 관절 통증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마저 힘들어질 때 찾아오는 것이 바로 폭식이다. 거식과 폭식은 마치 나쁜 남자 같아서, 그는 자신을 어르고 달래고 혐오하는 광경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거식증 없는 폭식증은 본 적 있어도 폭식 없는 거식증은 본 적 없다. 구토 없는 거식증은 더더욱. 손등에 이빨 자국(토할 때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야 하는데 이때 손등에 윗니가 닿는다), 멈추는 생리, 빠지는 머리카락. 





 무엇 하나에 매달리지 않고는 숨 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조경란은 '백화점'에서 카드를 긁는 그 찰나의 순간 없이는 살기 힘든 순간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캐롤라인 냅은 친구를 만나기 전 먼저 한 잔 더 하려고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약속장소에 나가 있었다는 말을 한다. J는, 한 병을 마시면 한 박스를 다 마셔야만 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모든 걸 다 해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들에 비하면 극단적이지 못했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쏟기에는, 그래도 이루어야 할 것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알량한 핑계지만 그것 역시 자랑의 일종일 것이다. 불행의 비교. 포샤 드 로시, 조경란, 캐롤라인 냅, J, 그리고 나, 이 다섯 명이 서로의 불행을 자랑한다면 누가 이길지를 상상해 본다. 자기 제어의 측면에서는 포샤 드 로시가 이긴다. 거식증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미칠듯한 자기 제어, 온종일 칼로리만 생각해도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의 강박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취 욕구 측면에서는 누가 이길지 쉽사리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성취는 행복일까 불행일까. 1Q84에서 하루키는 '누구든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라고 했더랬다. 하루키 선생의 저 문장이라면 나야말로 부동의 1위. 그러나 1위와 2위, 3위를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라고 불러도 된다면) 우리 다섯 명은 그 강박의 세계 속에서 누구보다도 생생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는 것이 무엇일까. 행복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생활을 보내는 것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그것이 내겐 반쪽짜리 인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불행이라는 낱말을 뜯어보면, 그것은 단지 행복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행복 본위의 사고가 나는 두렵다. 그것이 정반합 중 합의 상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성춘향이 괜히 변 사또의 이것을 주랴, 저것을 주랴 하는 말에 '아아니 그것도 나는 싫소'라고 말했겠는가. 희로애락에 셋을 더 붙여 칠 정을 느끼는 삶. 자신을 온전히 느끼고 계속 질문하는 삶. 

 그리하여 아주 찰나 떠오르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을 얻는 삶. 제대로 된 결핍을 선택하고 제대로 그 공간을 메우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것은 어떨까. 체중계가 40을 찍었을 때, 수입에 비해  지나친 소비를 매일같이 할 때, 술과 수면제를 동시복용할 때에는 그 여자는 너무 바빴다. 종일 음식 생각만 했다. 먹고 싶은데 먹을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에는 사고 싶지도 않았던 물건을 사들였다. 죄책감에 상표를 그대로 붙여둔 옷과 가방, 구두가 쌓였다. 그다음엔 정신을 잃는 일만 남았을 뿐. 그리고 당시 온갖 정신 나간 실수를 하면서도 결정적인 실수는 하지 않는 상태.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본인 자체가 문제였으니까. 





 지금 그러지 않는 것은 그럴만한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포샤 드 로시의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그가 당시 얼마나 젊고 또 젊었던가, 하는 것이다. 앨리 맥빌을 찍으러 갔는데 스커트가 꽉 낀다. 운전하려고 앉았더니 뱃살이 접힌다. 로레알 광고를 찍으러 가서는 그 어떤 옷도 맞지 않는 수모를 당하면서, 그는 하루에 1000 칼로리 이하로 섭취하며 죽도록 달린다. 비행기에 타서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이 강박적인 거식의 이면에서, 그는 내도록 사랑받고 싶음을, 인정받고 싶음을 말한다. 뱃살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신을 책망한다. 39 킬로그램까지 살을 빼고 자랑스러워 한다. '다이어트 지옥에서 탈출한 스타들!'이라는 기사 사진으로 등장하면서 꿈속에서 다이어트 콜라가 아닌 그냥 콜라를 마신다. 그가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이었다.





울며불며 뱃살 생각만 하다가 그만 촬영을 위해 쓰기로 한 로레알 제품이 아니라 다른 싸구려 샴푸를 써 버렸다. 큰일이다. 눈은 퉁퉁 부었지, 똥배는 툭 튀어나왔지, 머리는 짚단인데 이 꼴로 촬영장에 가게 생겼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로레알 샴푸 신제품을 광고하기로 한 모델이 로레알의 광고 문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엉뚱한 샴푸를 쓴 건 아닐까? '나는 소중하니까요'라는 그 유명한 카피 말이다.

 "나는 소중하니까요." 거울로 턱에 난 뾰루지를 보면서, 세상에 대고 자기들은 소중하다고 외치는 지난 로레알 모델들의 말투를 큰 소리로 흉내 내어 보았다. 광고에 나오는 꼭 그런 투로. 좀 웃겼다. 나는 집안을 걸어 다니며 계속 말했다.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예쁜 속옷을 찾아보았지만 서랍장에는 보기 싫고 늘어난 속옷밖에 없었다. 촬영을 앞두고 예쁜 속옷을 사 놓을 생각도 안 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중얼거리면서 블랙커피를 마셨다. 아주 날신해서 크림을 듬뿍, 마음껏 타서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블랙커피가 너무 진해서 썩은 행주 냄새가 났고 혀도 얼얼했다. 아침은 건너뛰자. 나는 소중하지 않으니까. 





 이 자학의 유머를 보면 오히려 그가 자기 자신을 지금은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그의 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내려놓음이 보이지 않는다. 종종 인생의 모든 것이 회색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눈빛을 한 이들의 말을 듣노라면, 그들이 전하는 말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회색이었고, 회색이며, 회색일 것이라는 그 어두운 괴로움 앞에서는 지나간 고통의 시간조차 회색이다. 이때 그들이 전하는 것이 무채색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간을 공간으로 착각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또한 그렇다. 포샤 드 로시 역시 그렇다. 어떤 공간에 머무르는가. 어떤 공간에 있어야만 하는가. 어떠한 공간에 머무르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성격이 결정된다는 그 압도적 실수. 그리하여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 상황, 정체성마저 결정짓게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우리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이 아니던가. 총량이 아닌 결정적 순간을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 시간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내가 무엇을 포기하거나 얻을 수 있을지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래서 햇빛 아래 미동 없이 앉아있는다. 핸드폰은 방해금지 모드. 음악 없는 적막함. 꿈을 기억하는 얕은 잠. 답을 남기지 않는 작별, 응답하지 않는 이메일, 들추어본 남의 연애편지 같은 속내. 바람은 세차게, 햇볕은 강렬하게. 내가 말하는 그 어떤 것도 진짜이기 힘들 때는 가만히 그리고 멍청히 앉아있는 것이 차선일지도 모른다. 의도를 감춘 채 원하는 바를 상대를 통해 이루려는 것이 수사학이라면, 나는 참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이므로. 이 눈치 없음으로 나 스스로 계속 질문을 해본다. 달의 반대편을 다 보고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을까? 이미 나는 한 가지 중독에서 헤어날 길 없으니, 더는 강박에 쏟을 힘이 남아있지 않다. 이런 나 같은 인간이 다시 강박에 빠져든다는 것은 자폭과 다름없으니, 이제 다시 묻는다. 잘할 수 있을까? 포샤 드 로시가 이 책 내내 깔고 있는 이 질문은 당위가 아닌 존재이다. 확신을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여배우의 폭식증과 거식증 이야기인데, 읽고 나면 그것이 체중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책.

 당신을 닮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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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5-07-2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의 백화점 읽어 보고 싶어요. 감사해요.

Jeanne_Hebuterne 2015-07-24 13:55   좋아요 0 | URL
몬스터님
조경란 작가의 책은 사람에 따라 호오가 극명하게 나뉘는 것 같더라고요(배수아 만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호`쪽이고, 백화점은 픽션이 아닌 백화점이라는 공간에 관한 층별 탐구여요. 읽고나면 그 거대한 공간이 담은 사람 이야기가 들어오는 책이랍니다. 몬스터 님의 감상이 궁금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