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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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 감은 눈을 더듬어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엔진 소리, 구름 밑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 소리, 길을 걷는 사람 목소리,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음악 소리.

 

 

 


 음량, 음정, 음색, 이 세 가지가 소리의 요소라면 음악의 세 가지 요소는 리듬(rhythm), 선율(melody), 화성(harmony)이다. 음과 음이 시작되어 부딪히고, 파생되거나 새로이 생겨난다. 이 때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우리가 듣는 무언가가 음악의 '계'를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는 필시 이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드러나는 은유와 치환, 숨김과 드러냄, 작거나 큰 울림. 이를 만드는 연주자들 중에서도 알프레드 브렌델은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내는 겸손한 피아니스트였다.

 

 

 

 

 


 여든도 넘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는(실제는 현재 체코 소도시인 모라비아 태생이나, 오스트리아로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됨) 2008년 '이제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며 조용히 피아노 앞에서 물러났다. 데카에서 그의 고별 연주회 실황을 출시했으며 최근 나는 그가 짧게, 조용히 갈무리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어림잡아 단상마다 길어도 한 페이지 남짓한 생각 조각. 겸허하고 성실한 전달자.

 

 


 잠시, 브렌델이 평생토록 연주했던 악기인 피아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간의 부분으로 있었던 악기. 반복을 기점으로 기초를 배우고 기교를 조금씩 내 것으로 익히는 재미. 뭔가 다른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마음이 딸꾹질 하던 때. 혼자 쇼팽과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여다 보거나 포기하거나, 이 두 갈래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순간의 음악. 글렌 굴드는 오른손이 왼손에, 손가락 하나는 나머지 아홉 개에, 전체는 그 깊은 곳의 영혼에 답하는 것이 피아노 연주라 칭한 적이 있다. 브렌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고 간결하다. 다른 연주자와 비교하면 조금 그 개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입자가 조밀한 성실한 대화.

 

 

 

 

텍스트에의 충실성


연주란, 과연 뭘까요? 가능한 다 보여 주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능한' 이란 말입니다.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이 지나칠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악을 악보로 옮기거나 악보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요. 우리는 항상 '작곡가가 무엇을 기록하고자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또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필요하지요. 텍스트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은 텍스트, 원전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악보의 엄격한 해석만을 강조하는 원전주의자라든가, 시대 악기만으로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정격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원래 있던 텍스트, 작곡가의 의도 위에 연주자의 지나치도록 강한 개성을 덧입혀 잘못된 엉터리 감동이나 해석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닐까.

 

 

 

 

 객석을 지키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작곡가에 관한 연주자의 의견이 궁금한데, 이 책에서 브렌델은 간결하게나마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등의 음악에 관한 그의 피아니즘을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에 관련하여 브렌델은 오히려 작곡가의 심경을 추측하여 더할 나위 없이 감성적인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는 이 연주자가 원전주의자, 정격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와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단락이 눈에 들어온다.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흔히 순수한 서정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드라마틱한 음악 전개를 보면 이를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방랑자 환상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철저하게 변신합니다.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아닌 작곡가 피아노의 소리, 형식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후기이 소나타들도 오케스트라풍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케스트라처럼 울려야겠지요. 현악 5중주에 가까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사실 피아노 음악에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는 않았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지요. 그의 피아노곡들은 페달을 섬세하게 써야 비로소 제 맛을 살릴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기보는 적힌 그대로만 표현되거나 혹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에게 있어 피아노란, 연주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악기.

 

 

 

 피아니스트는 다른 연주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 자기 자신을 지휘하는 지휘자이자 가수인 셈이다. 그러나 음악 없는 피아노는 그에게는 악기가 아닌 검고 흰 조각이 맞물린 가구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엇갈림으로 드러나는 음악의 조각이 꽤 날카롭다. 자신의 연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연주자가 보인다. 닫혀 있고 보이지 않는데 걸어야 하는 길이 나타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러한 사진을 떠올려 본다. 연관되어 일순 정지하였으나 다시 이어질 찰나의 세계. 그 자락을 들여다보며 브렌델의 글과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란 가장 말이 없는 것, 가장 닫힌 것, 가장 논하기 어려운 분야로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감동이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음악이 있고, 얼마나 많은 갈래 속에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숨은 것일까?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이런 작곡가들이 이룬 작품을 접하며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잠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세상 누군가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감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비틀즈를 들을 수도, 베토벤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만이 정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브렌델이 이야기하는 균형, 조화, 절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난다.


 

 

 

감동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음악가만이 다른 이들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디드로와 부소니는 반대 입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은 배우나 음악가는 스스로 감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자기 자신이 감정에 빠져 버리면 예술적 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책 속에서


 

 

 

 

 


 그의 글을 읽다 고개를 들면, 지금껏 여기까지 오면서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여러 가지 일, 사람, 상황, 사건, 바쁘거나 지치거나 적막한 극단 사이를 시소를 탄 마냥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조용히 바닥에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며 보낸 시간. 지금까지 감동한 부분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쓰고, 만들고, 듣는다. 다양한 연주와 해석, 갈래에 따른 생각과 느낌이 이루는 체계, 작은 오솔길. 크레센도, 레가토, 음향, 해석자, 맥박, 앙상블, 단순, 극단, 감동을 따라가면 어느새 이 연주자의 고요한 숨결이 옆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숨결은 귀를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내 느낌을 조용히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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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6-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 대한
Jeanne_Hebuterne님의 아름다운 리뷰 잘 들었습니다.
마치 브렌델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습니다. 가끔 바흐의 피아노 연주곡도요.
최근에는 브렌델과 레파토리가 많이 겹치는 빌헬름 캠프의 연주를 더 자주 듣지만요.

덧)
그런데 올리신 글 가운데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독일 출신의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에서
길렐스는 아마도 에밀 길렐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의 조국은 러시아 아닌가요.^^

Jeanne_Hebuterne 2013-06-23 00:4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틀린 점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왜 길렐스가 독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재빨리 수정!!)!!

브렌델이 연주한 하이든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댓글을 보니 궁금해집니다.
빌헬름 캠프도! 찾아서 듣도록 해야겠어요 :)
 
제이슨 브룩스의 파리 스케치북
제이슨 브룩스 지음, 이동섭 옮김 / 원더박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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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마다 축제인 곳이라고 헤밍웨이가 말하고 모두가 배우가 되는 곳, 누구도 관객으로 남지는 못하는 곳이라고 장 콕토가 말한 곳, 그곳을 오늘 떠올렸습니다. 봄날 집에서 맡는 저녁같은 냄새의 도시. 에펠탑과 보주 광장, 마카롱과 카페 드 플로르, 디올의 부티크, 툴르즈 로트렉과 모딜리아니, 에콜 드 파리, 인상파와 아르 누보, 기마르 헥토르의 메트로폴리탄, 개선문의 도시, 파리.











P,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겪습니다. 그걸 당신은 그저 보여 주곤 해요. 들려주고 보여주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당신은 '뒷모습'이라는 사진집에는 에펠탑 뒷골목 쓰레기를 가득 안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고다르 감독의 영화에서는 흑백의 봄날 냄새를 풍기기도 해요. 나는 당신의 꽤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카페, 서점, 마카롱, 그곳에 사는 사람의 옷과 향수, 미술품과 생활양식까지. 그리고 당신이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에펠탑까지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도 다시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고 투덜대는 당신의 잔뜩 찌푸린 낮은 구름 표정이 떠오르지만, 오늘 저는 당신에 관한 또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세계 3대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 모습이었습니다. 건축, 거리, 카페, 패션, 쇼핑, 예술, 이동, 밤. 이 챕터로 당신 얼굴이 200여 컷도 넘게 있었어요. 종종 당신은 그 안에서 냉담하거나 서늘했습니다. 이를테면 저 컷이 그랬습니다. 보주 광장인데 그 날은 추웠나 봅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당신에게 이렇게 썼어요.

'보주 광장은 17세기 초에 조성되었다. 나는 건물 회랑 앞에 올곧게 서 있는 잘 손질된 나무들을 그렸는데, 잎이 다 떨어진 한겨울의 삭막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서 길게 이어져 있다.'










당신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해요. 그러나 이 일러스트레이터가 바라본 당신은 아주 화려한 화장을 벗고 오랜만에 무표정한 무채색 옷을 입었습니다.



카페 테이블에서 웃고있는 연인은 얼핏 브라사이의 사진같기도 하고, 도로 뒤편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은 핫젯의 사진처럼 절반 정도만 보인다. 만약 당신이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를 피해 따뜻한 카페 안으로 뛰어들었다면, 스스로 헤밍웨이 소설 속 인물이라도 된 듯 느껴질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의 조화로운 공존이야말로 파리가 품은 마법과도 같은 매력이다. ... 파리는 세느 강을 기준으로 좌안과 우안으로 나뉜다. 그리고 중앙의 1구부터 동쪽의 20구까지 시계 방향으로 나선형을 이루며 20개의 구로 분할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지역은 각각 고유한 특징과 거리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있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차들이 오가는 파리 외곽 순환도로 한가운데 서 있자니 파리 자체가 하나의 우주로 느껴졌다.-책 속에서















아마 저 가로등 앞을 지날 때 비가 온다면 당신은 가느다란 은빛 빗살무늬를 만들겠지요.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가듯 거꾸로 보는 그 빗방울은 하늘로 올라가는 듯 보일 거에요. 제이슨 브룩스는 종종 거리의 사람들, 가로등, 각종 현관문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얼굴은 늘 달라요. 그것은 가볍거나 무겁고, 담배 연기 같거나 구름 같고, 두부같은 질감으로 입안에 들어오다가도 마카롱처럼 녹아버려요. 입안에 가만히 당신을 품고 있으면 알 수 없게 녹아버리는데 그 맛을 사람들은 '파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잠시 제이슨 브룩스의 눈으로 마카롱을 한 번 볼까요. 똑같은 마카롱인데 그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마카롱. 먹기 전에 한번쯤은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걸까요? 원래 이 과자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과자였다지요. 설탕, 아몬드, 코코넛, 호두 등 분말을 메렝게로 섞고 구워 크림을 바른 과자. 밀가루를 쓰지 않아 쿠키와 질감이 달랐어요. 그런데 이 오랜 역사를 가진 과자가 지금 제가 있는 곳에서는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꽤 즐겨 먹는 과자가 되었지요. 그것은 초콜릿 볼케이노의 뒤를 잇는 사람들의 반응이었다는 마케터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초콜릿 볼케이노,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대충 오지요? 초콜릿 화산 케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득하고 진한 초콜릿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케잌이었습니다. 이 케잌이 파리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지요. 스펀지 케잌과 초콜릿 크림, 설탕 시럽, 커피 에센스가 주재료인데 마카롱의 담백한 재료와 꽤 많이 달랐습니다. 이 진한 케잌의 인기가 시들해진 다음 유행한 것이 마카롱이었어요.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폭발적인 인기 이후 슬그머니 눈을 돌리는 성향이 있나 봅니다. 강력한 엔진의 사륜구동을 팔고 하이브리드를 사듯 강한 맛의 초콜릿 볼케이노 다음에 가벼운 느낌의 마카롱을 찾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당신 얼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세기를 방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면, 당신을 보는 일은 곧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코르셋 다음의 샤넬이 그랬고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가 그랬습니다. 길을 걷다 들어가는 카페 드 플로르의 커피잔에는 헤밍웨이가 보았을 비슷한 디자인의 커피잔에 여전히 카페 드 플로르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의 당신은 참 달라요. 눈, 코, 입이 눈, 코, 잎으로 보인달까요. 자세히 보면 브룩스가 그린 당신의 모습은 꽤 여러 갈래입니다. 샹젤리제 거리의 일방통행로, 몽테뉴 거리의 명품 숍, 엘리제궁에서 시작해 브랜드의 끝장을 보여주는 포브르 생 토노레 거리, 주얼리 샵의 집대성인 방돔 광장까지,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자신의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런던 세인트 마틴 에술학교를 다닐 때부터 보그 주관의 Vogue Sotheby’s Cecil Beaton Award에서 패션 일러스트 부문 수상, 영국 보그의 패션 일러스트 담당. 영국왕립예술학교의 일러스트 석사 등의 학력과 경력을 뽐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저네어, 인디펜던트, 엘르를 오간 다음 칸디 음반사의 비주얼 작업,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광고를 맡았다니 이 작가는 필시 자신의 주력 무기를 당신의 가장 화려한 모습에서 찾은 것이 분명합니다. 거리, 미술관, 밤, 카페의 당신은 곧잘 민얼굴에 느슨한 셔츠를 입었지만, 패션 부분에서만큼은 샤넬의 검은색과 방돔 광장에서 구입한 듯한 보석, 빈티지를 적당히 섞기도 했지만 자신의 얼굴 개성을 그대로 드러낸 표정을 드러냈어요. 당신은 오 트 쿠튀르와 기성복, 스파 브랜드와 빈티지를 조화롭게 섞을 줄 알아요. 주목받는 패션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모습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에게 샤넬과 라거펠트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미 로트렉, 드가, 마티스, 모딜리아니가 있었지요. 지금 이곳에는 당신의 모습 중 인상파의 일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달라지는 빛의 움직임, 그 질감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중심을 둔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 후반부터 찰나의 순간을 관찰했고 그 거친 터치와 흐트러진 선이 고흐와 고갱, 쇠라와 세잔의 다른 화풍을 가진 후기 인상파로까지 남았더지요. 무엇인가를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개성을 입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접하는 전체 흐름 속에서 낙숫물처럼 똑똑 떨어지는 그 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당신은 회화에서 특히 잘 보여 주곤 했어요. 크고 도도한 흐름 속, 종종 사람들이 주목하는 지점도 또한 있겠지요.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작가주의 특성이 아주 강한 화가도 있을 것이고 마티스처럼 또렷한 지점을 드러낸 화가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로잉을 “특별한 손재주가 있어서 하는 활동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속 느낌과 기분을 표현하는 수단이다.”라고 말했다는데 마티스의 작품을 아마도 브룩스도 유심히 본 모양입니다. 마티스는 또한 “비평가들이나 동료들이 내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은 나를 이해시킬 만큼 내가 분명치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지요. 저는 마티스의 이 말을 실반 바넷의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읽었습니다. 이럴 때의 당신 목소리와 표정은 떨림이 없고 확신에 차 분명하다는 느낌입니다.











위의 사진은 이 책이 아닌 인터넷을 검색하다 얻은 것입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디자인한 화려한 곡선이 제이슨 브룩스의 펜을 거치면서 좀 더 조용한 것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술품 분석과 서술의 기초에서 소개하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물 평가의 기준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고 합니다.

기능 Utilitas : 목적과 일치, 실용성
견고함 Firmitas : 구조적으로 단단함
아름다움 Venustas : 디자인

또한 존 러스킨은 “모든 건축은 인간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고자 하며 단순히 인간의 몸체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지요.

지하철은 당시 꽤 새로운 교통수단이었을 겁니다. 근대의 새로운 탈 것, 사람들의 움직임을 더 빠르게 해주는 기구. 새롭고 또 새로워야 했을 겁니다. 헥토르 기마르가 선택한 재료는 철과 유리이며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직선 사용을 거부하고 시대 감각을 나타내며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Jugendstill, Style Guimard, Stile Liberty,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Art Nouveau 라고 불렀지요. 저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이 메트로폴리탄을 보며 잠시 곡선으로 짜인 느린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엿보았습니다. 언뜻 보면 느슨한 스케치이지만, 아마 이 일러스트레이터도 그것을 포착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잠시 지하철이 아닌 차를 타고 어디론가 당신의 다른 구석을 떠올려 볼까요. ‘아주 쌩쌩 빠르게’가 아니라 ‘교통체증에 잠시 시달리며 느리게’여도 좋은 것은, 진 세버그가 나왔던 영화 'breathless'가 떠올라서일 겁니다. 제이슨 브룩스는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여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중심축에는 개선문이 보입니다.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 정식 명칭이며 에투알 개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샹젤리제 거리 서쪽, 샤를 드골 광장에 있지요.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개의 거리가 방사형으로 퍼져 있습니다. 잠시 위키 백과의 설명을 들여다보니, 이런 글귀가 보입니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개선문이라고 말하면, 파리의 이 개선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 세계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시작,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모양이 지도 위에서 빛나는 "성 = étoile"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은 "별의 광장 (la place de l' E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의 정식 명칭은 'Arc de triomphe de l' Etoile 이다. 그러나 현재 이 광장은 샤를 드골 광장(la place de Charles de Gaulle)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승리의 아치’(Arc de triomphe)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선문 자체는 전승 기념비이다. 따라서 개선문은 파리 시내에도 카르제르 문, 셍 드니 문, 셍 마땅 문 등 다수 존재한다.―위키 대백과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파리를 점령할 때 이곳에는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고 히틀러가 전차로 이곳을 지나기도 했다는군요. 당신은 당신 신체 곳곳에 얼굴 곳곳에 당신의 역사를 숨겨두었어요. 제이슨 브룩스가 스케치한 당신의 모습은 얼핏 보면 꽤 단선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이 책은 당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없습니다. 아주 자세한 설명도 없지요. 백과사전파의 지식은 전혀 없고 그림에 관한 글은 간단한 생각이나 느낌 한두 줄이 대신합니다. 140여 페이지가 조금 넘는 이 책은 패션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당신의 여러 측면을 쉬엄쉬엄, 짧은 시간 안에 쉬어가며 간단히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화려하거나 소박하고 똑같은 것은 없으며 개성이 강하면서도 맥락을 이어가고, 다른 무엇에 영향을 주는 살아있는 그 구석구석은 당신, 곧 ‘파리’라는 도시의 느낌을 살려줍니다. 보통 제가 당신에 대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도 당신의 역사, 문화, 사람들, 사건에 관해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저보다 많이 아는 사람도, 저보다 조금 아는 사람도 있겠지요. 제이슨 브룩스의 이 책으로 당신에 관한 모든 사실, 혹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일러스트레이터는 당신, 즉 ‘파리’의 일상과 거리, 느낌의 스케치를 보여주는 데 힘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스치는 시선은 어쩌면 당신을 동경하거나 혹은 당신을 만났던 많은 이들에게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내가 본 이 거리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내지는, ‘나는 이 부분이 궁금했는데 이 그림 속 장소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이것이 아마도 일러스트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요? 다른 이의 눈을 통해 같은 것을 체험하기. 다른 이의 개성을 필터 삼아 비슷한 감정을 확인하기. 패션 부분을 보면 아주 노련하고 개성 있는 패션 일러스트레이터의 손끝이 보입니다. 펜으로 한 거리 스케치는 그곳을 사랑하는 이의 애정이 보입니다. 일러스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P, Paris, 당신을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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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6-18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쟌님은 포토리뷰도 정말 근사하게 쓰네요.

Jeanne_Hebuterne 2013-06-18 15:16   좋아요 0 | URL


포토 리뷰를 쓰려고 사진을 찍을 때 다시 한 번 그린 이가 파리의 구석구석을 자세히 관찰했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만 무언가를 그리는 이의 눈은 그러지 않는 이의 눈과 다르다는 생각도요.

칭찬 고맙습니다. 저도 다락방님의 근사한 리뷰 기대할게요 :)
 

 


<Lufthansa, Boeing 747-400. D-ABVX 1:500 SCALE>

 


 짐을 잘 꾸릴 것 깨어질 수 있는 물건은 굳게 다물고 열 몇 시간 동안은 모두와 끊어진다는 안도감을 넣을 것 10킬로그램짜리 핸드 캐리는 그것으로 끝. 짐을 잘 풀 것 낯선 호텔 낯익은 언제나 똑같은 침대 속 지문은 피부에 내 피부는 ICN에서 AMS까지 혹은 LHR, WAW. 프리데릭 쇼팽 공항에 닿았을 때에는 건조하고 기온 낮은 여름밤 길을 잃고 걸었던 밤 길을 찾은 한낮 23킬로그램짜리 위탁 수하물은 이것으로 끝. 바디스캔 입국심사 출국심사 낯선 외국어 그러다 보면 속삭이는 동체. 


 


 중력에 매달린 상상은 육중한 동체가 랜딩 기어를 올릴 때 살짝 따뜻해졌다. 건조하고 추운 밤에는 비행기 창을 들어올려도 감감무소식.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엔진 소리 항공성 치매 콕핏 턴오버 퀵턴 비상구 그러나 지금의 비상구 앞좌석의 다행 발에는 보드라운 슬리퍼 소리를 막는 귀마개 기억력을 되살리는 외교통상부 문자 런웨이의 불빛 쓸 일 없기를 바라는 슬라이딩 보드 그리고 먼 곳의 공기. 달의 언저리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긴 시간.


 


 공기 속 여행의 실제는 사라짐이 아니라 돌아옴이었다.




 34인치의 피치 안에 도사린 여행, 들뜨거나 가라앉은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때 내가 디뎠던 발밑의 내가 걸었던 구름 온도는 꽤 차갑거나 뜨거웠다. 사뿐히 들어 올리던 생각과 차분히 놓아두던 마음의 위치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반짝, 불빛을 보여주며 어두운 밤을 오르던 그 공간에 있었다.




 잠시 이 육중하고 건조하고 오래된 미래의 공간을 그린 책을 들여다본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펼쳐보면 런던 히드로 공항의 풍경과 비행기의 모습이 데생이 아닌 스케치 밑그림으로 펼쳐진다.




 




 터미널 옆의 관제실에는 위성들이 추적한, 영국항공의 모든 비행기들의 실시간 위치를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가 있다. 지구 전역에 약 180대의 비행기가 떠있으며, 이들은 약 10만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여남은 대는 북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고, 다섯 대는 허리케인을 에둘러 버뮤다 서쪽으로 가고 있고, 한 대는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항로를 타고 가는 것이 보인다. 이 지도는 가슴 뭉클한 불침번을 상징한다. 각 비행기가 고향의 비행장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 있다 해도, 아무리 속박에서 벗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런던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에서 결코 멀리 떠나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비행기 한대 한대가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매일 밤 비행기 몇 대가 게이트에서 거대한 격납고로 끌려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건널판과 크레인들이 일련의 수갑인 양 그 유기체처럼 생긴 몸을 둘러싼다. 항공기는 자신은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수줍어 하는 경향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나 홍콩에서부터 먼 여행을 하고서도 자신에게 허용된 비행시간인 9000 시간의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점검은 그들이 개별성을 드러낼 기회를 준다. 승객들에게는 747기가 모두 똑같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점검과정에서는 별도의 이름과 병력을 가진 하나의 기계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G-BNLH는 1990년부터 날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대서양 상공에서 유압장치가 세 번 샜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이어가 한 번 터졌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날개의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부품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 격납고에 들어온 이 비행기는 다른 병과 더불어 고장난 좌석 12 개, 벽 패널에 커다란 자주색 매니큐어 자국, 옆에 있는 세면대를 이용할 때마다 저절로 점화되는 뒤쪽 취사실의 고집 센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등 다른 증상도 있었다. 


 30명이 밤새도록 이 비행기를 붙들고 일을 한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비행기는 대개의 경우 매우 관대하지만, 밸브 같은아주 작은 것에 생긴 고장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그때까지의 경력 전체가 박살나고, 직경이 1 밀리미터도 안되는 혈전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느 비행기의 몸통을 둘러싼 건널판을 따라 비행기 외부를 구경하다가 코의 원뿔에 손을 대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층층이 쌓여 꼼짝도 않는 적운을 가르고 길을 내던 코였다. 






 세 자리 코드와 두 자리 기호도, 위도와 경도도 달라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을 무엇. 바닥에 가라앉았다가도 또다시 떠오르는 마음. 때로 그것은 크게 보이거나 작게 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작은 창문을 통해 구름과 바다와 하늘, 마을과 도시와 밤과 낮을 바라보고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 이동한다. 50톤의 747, 10킬로미터의 고도와 0.7기압 안에서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어 시간은 더해지거나 덜어진다. 이 덧셈과 뺄셈은 이전에는 오로지 새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쉬었다 갈 수 없는 고단함, 돌아가야 한다는 두고 온 가방.

 떠남과 돌아옴은 완성하거나 끝내기에는 버거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몸을 실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공항과 비행기 같은 것을.





 알랭 드 보통은 공항과 항공기를 여행의 설렘과 작업의 고단함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활로 바라본다. 공항 한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공항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는 이 책의 마지막을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매듭짓는다. 여행자가, 그리고 우리가 곧 모든 것을 잊을 것임을. 이국의 모든 것. 보딩 전까지 서는 긴 줄. 대륙을 몇 개 문장으로 줄이고 다시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곧 다시 새로움을, '지금' 눈앞에 없는 무언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덧붙인다. 우리의 삶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사이를 오가는 추와도 같다.




쉬운 것은 앞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에는 작은 사람들. 그 먹색을, 무지갯빛을, 장미향과 카레의 냄새를 만지기 위해 가끔 사람들은 열 몇 시간을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보낸 다음 다시 애써 닿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은 옛날 동전, 벼룩시장에서 산 레코드판, 약간 쌀쌀한 늦가을 목에 둘렀던 머플러. 그리고 그것을 둘러주었던 누군가 내쉬었던 반 박자 늦은 숨 같은 것을 찾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발밑의 중력이 사리지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떠올랐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잠시, 이 1:500 스케일의 정교한 수집가용 모델을 만져본다. 꼭 스르르 커진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다시 어디론가 가볍게 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내가 어느날 다시 무언가를 찾고 싶어 오백배 더 몸집을 부풀린 이 구조물에 몸을 싣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초여름 저녁. 돌아오거나 떠날 때, 내 손끝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대신 입술 끝에 조용히 닿아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선물해 주신 ㄱ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멀리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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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3-06-0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밤. 7분여 동안 잠시 떠날 수 있었어요. 덕분에.

Jeanne_Hebuterne 2013-06-02 00:38   좋아요 0 | URL


dreamout 님께서 떠나셨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dreamout 님의 말씀에 생각하니 드뷔쉬의 음악과 항공기 안에서의 일들, 어디론가 잠시라도 떠나는 일은 밤에 생각하면 더 조용하고 넓게 머릿속에서 퍼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고단한 일상과 누군가의 설렘이 만나는데 그 범위가 우리에게 일상의 영역을 벗어난 경험을 안겨주는 것 같습니다. 이 저녁과 밤에 생각하니 더 떠나고 싶어지기도 해요. 당장 그러지 못할 때의 이러한 글과 음악이 진통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 반가워요.

덧-오랜만이에요, dreamout 님. 잘 지내셨지요? 곧 무덥고 습한 계절이 닥치면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보아야겠지요? 그러지 않는다면 책과 음악으로 적당히 잠시 떠났다 돌아오기도 하겠지요.
 
카라얀 60 [1960년대 DG 관현악 녹음집- 82CD/320p 해설지 포함] - 1960년대 전성기 녹음, 오리지널 LP 재현! 카라얀 2
모차르트 (Leopold Mozart) 외 작곡, 카라얀 (Herbert Von Karaj / DG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과분한 선물을 받았으니, 바로 카라얀 60 박스셋.
국내 수입사와 도이치 그라모폰 본사 협력으로 만든 박스반인데, 베를린 필 종신 지휘자 카라얀의 1960년대 도이치 그라모폰 관현악 전집이다.











박스의 뚜껑을 열었을 때 나오는 319 페이지에 달하는 부클릿. 수록곡 목차, 60년대 카라얀 레코딩에 관한 설명, 카라얀 연표, 오리지널 LP 라이너 노트 등이 있다.














몰랐던 음악. 알아도 몰랐고 몰라도 들었던 음악들. 클래식은 유일하게 오리지널을 복제 생산하면서도 수많은 여러 갈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악단에 따라, 지휘자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리 들린다. 그리고 같은 곡, 같은 지휘자라 하여도 60년대가 다르고 70년대가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많은 이들이 클래식 음악을 듣고 같은 음악도 지휘자나 악단별로 몇 장씩 구입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어떤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한다면, 60년대 베를린필과 카라얀의 대화는 이제 막 친밀해지기 시작하는 시기의 긴장감이 엿보인다. 십여 년이 흐른 1970년대에는 긴장감이 떨어지고, 80년대에는 관계가 악화되는 시기였다고 전한다. 이 박스반의 친절한 안내서에는 이 박스반의 기획자 이일호 씨의 이러한 글이 있다.


"내가 카라얀 연주 중 1960년대를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카라얀이라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지휘자와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세계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만나서 보냈던 30여 년의 세월 중 가장 서로를 신뢰하며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에 다른 기간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긴장감과 성실함이다. ... 하나의 예로 10년 마다 한 번씩 녹음했던 베토벤의 교향곡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도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1962년 버전의 9번 교향곡 연주의 긴장감과 열기는 그 후 1975-1977 버전이나 1983 버전에서는 아쉽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연주자들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즐거움을 조금씩 잃어버린 것 같다. 특히 스케르초 악장을 비교해 보면 더 그러할 것이다."
-속지 부분발췌









물론 저런 차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무언가 어렵고 어지럽게 느껴진다면 내가 걸친 얇은 지식과 나의 감각을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를 모르면 시를 많이 읽어야 할 것이고 인간을 모를 것 같으면 인문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음악을 모른다면 마찬가지로 많이 들어야 하겠으나, 나에게 이 음반을 선물해준 이는 몇 가지 원칙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많이 듣고, 많이 사고, 많이 기록할 것. 듣되 그냥 들어서는 안 되고 사되 그냥 사서도 안 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어떤 한 곡이 좋다 하여 그 곡만 십여 장의 음반으로 사는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돈 낭비 시간 낭비를 피하려면 먼저 다양한 음악을 듣고, 레파토리를 넓혀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최소한 내가 무엇을 듣는지는 파악해야 하니 음반 부클릿과 자켓을 참조할 것. 특히 이런 박스반의 경우, 다양한 레파토리가 있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 적합할 듯하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 조금씩 순간과 순간을 모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상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때의 친근한 벗은 역시 부클릿일 것이다. 음반을 사면 으레 자켓 속에 들어있는 이 간단한 설명서는 현직 음악 평론가, 음악을 일평생 공부하거나 일로 삼아 단련된 귀를 가진 이들의 친절한 설명이 들어있다. 카라얀 60 역시 마찬가지다.








카라얀의 연주는 무엇이 다른 것들과 그렇게 다른가 생각해보면, 먼저 뇌리에 스치는 것은 카라얀이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였다는 사실일 것이다. 카라얀이 처음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객원 연주한 것은 1938년, 물론 푸르트뱅글러의 시대였다. 당시의 카라얀은 30세로, 네덜란드와의 국경에 가까운 아헨시의 음악총감독이라는 포스트에는 있었지만 아직 독일에서의 평가도 확실하지 않은 신인이었다. 그러나 이때 카라얀은 이례적으로 리허설 시간을 요구하여 오케스트라 측을 놀라게 하였고, 파트연습까지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처음부터 타협을 모르고 무서움을 모르는 완고한 무사였던 것이다.
또한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하자,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후임을 맡았으나,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의 의욕없는 모습에 놀라고는 "너희들의 연주는 패배한 복서 같다"고 오케스트라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표명하고는 기초부터 다시 연습하도록 만들었기에 대단하다.
-속지에 있는 모로시 사치오의 글, 서상희 번역, 부분발췌







푸르트벵글러는 결말 부분의 화음에 리타르단도를 강조해준다. 곡에 묵직한 무게가 실리는 효과를 빚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는 지휘자의 간섭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다. 반대로 카라얀은 같은 부분을 부드럽게 끌어올렸다가 놓아버린다. 음의 파동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하는 효과를 빚기에 사람들은 이것을 지휘자의 해석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해서 카라얀의 연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곡이 가볍고 경쾌하게 들리는 것이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부분발췌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으면서도 그와는 확연히 다른 연주를 선보인 카라얀은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프루트벵글러의 정당한 계승자이다"라고도 말했다는데, 이것은 자신만의 지휘에 관한 철학을 확고히 하여 푸르트벵글러가 다졌던 미학에의 관점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카라얀에게 지휘란 작곡자가 뜻한바, 작품에 명시된 바를 명확히 표현하여 가장 충직한 전달자, 재현자가 하는 미학의 작업이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카라얀의 음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다른 지휘자, 다른 오케스트라와의 비교가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완전히 틀린 해석도, 완전한 하나의 해석도 없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어떤 음악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이 완전한 것이라고 말하며 어떤 한 연주만이 완벽하다고 말하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 위해 또 한 차례 선물을 준 이를 귀찮게 하여 알아낸 방법은(물론 그 전에 여러 차례 친절히 강조해 주었던 사실이었다), 가이드를 참조해야 한다는 것. 펭귄 가이드, 러프 가이드, 그라모폰 가이드 등 고전음악의 신보와 구보를 아우르는 많은 가이드에는 각자의 균형 잡힌 평가가 있다. 물론 어느 한 가이드에서는 명반이라 칭송하는 음반을 다른 한 가이드에서는 그에 못 미치게 다루는 일도 있으니, 가이드를 비교해 보면 차이점과 각자의 관점이 보이게 되는데, 이를테면 베토벤 교향곡 3번을 펭귄 가이드에서는 이렇게 평가한다.



Of Karajan's four recorded cycles, the 1961-2 set(DG 463088-2) is the most compelling, combining high polish with a biting sense of urgency and spontaneity. There is one major disappointment, the over-taut reading of the Pastoral, which in addition omits a vital repeat in the Scherzo. Otherwise there are incandescent performances, superbly played. On CD the sound is still excellent.


잠시 고개를 돌려 부클릿을 보면, LP Liner note가 친절한 한글 번역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사건은 베를린 필하모닉과 남긴 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 녹음이다. 그 가운데서도 <에로이카>는 그 자체로 대단히 존경받을 만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의심할 나위 없이 카라얀의 오케스트라다. 1956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한 뒤, 카라얀은 탁월한 감각으로 미국 순회 연주를 이끌었고, 오케스트라는 만장일치로 그를 종신 음악감독에 선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오케스트라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고, 베를린과 세계 도처의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 <에로이카>오 다른 베토벤의 교향곡이 특히 큰 역할을 했음은 자명하다.



이제 또 눈을 돌려 또 다른 가이드, 러프 가이드를 참조하면 그 구성이 약간 다르지만, 초심자에게 더 적합한 설명이 더 친절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eethoven's Symphony No.3 is better known as the Eroica, a title thoroughly befitting what many people consider the greatest symphony ever written. Completed in the spring of 1804, this amazing score contains the very foundations of Romanticism in its gestures and burgeoning themes, and in its unprecedented scale-the outer movements are enormous structures that virtually ignore the accepted conventions of sonata form.


최대한 많은 음반을 소개하여 그 핵심을 파악하려 한 펭귄 가이드, 음반 발매 당시의 느낌까지 생생히 전달해 주는 박스반 속의 부클릿, 그리고 초심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곡 설명에 무게를 두는 러프 가이드, 이들 각각의 역할은 분명 조금씩 다르며, 모두 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도움이 될 듯하다.












모든 것이 간편해지고 형태가 사라지는 즈음, 클래식 음반을 CD로 사서 듣는다는 것은 좀 거추장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레이저 디스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mp, wav 형태의 음원으로 존재하는 음악을 대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방송이나 매체에서 자주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음반을 구입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음반은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질 수 없는 파일보다 음반이 더 좋은 까닭은, 고전음악은 생각보다 그 안에 담긴 정보, 즉 음악을 들을 때 보아야 할 정보가 많기 때문이다. 녹음 시기, 지휘자, 악단 등, 곡 제목만 보아도 얼마나 긴가. 아니,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그저 지나간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라고 하기에는 고전음악을 좋아하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음반을 구입하여 듣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제 막 발을 디딘 나의 경우 궁금해져서 음반을 구입하게까지 되는 음반은 방송에 틀어주는 음악도,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 잡지나 신문에 나와 추천하는 음반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종종 서재나 동호회의 나와 비슷한, 혹은 나보다 음악에 대한 사랑이 더 뜨거운 분들의 추천, 알라딘과 같은 곳의 서재, 혹은 음악 관련 칼럼에서 이야기하는 음반이었다. 새롭게 나온 음반도 좋지만 많은 이들이 듣고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곤 하는 오래된 음반이 더 궁금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카라얀 60을 듣는다. 만듦새가 훌륭하고 퀄리티도 높으며 가격도 적당한, 소중한 음반을, 내게 과분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물론 자주 열심히, 위에서 들은 원칙을 지켜가며 들어야 겠다.







하기야, 카라얀이 죽던 해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었던 새로움의 추구와 희망도 이제 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정밀함과 엄격함이라는 미학을 끝까지 밀고 나간 사람이 남긴 필생의 업적을 재발견해서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토론할 때가 말이다.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에서 부분발췌






THANKS TO.

저돌적이고 패기가 넘친다고 말했던 이 82장의 음반. 잘 들을게요.


직접 그림을 그려 안에 글을 써서 보내주신 고마운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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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8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나네요!

Jeanne_Hebuterne 2013-05-28 09:00   좋아요 0 | URL
:)

레와 2013-05-2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다! 부럽.

Jeanne_Hebuterne 2013-05-28 14:25   좋아요 0 | URL

레와님 :)
제가 지금은 아는 것이 없지만, 열심히 들어서 선물해준 이의 정성에 보답하렵니다!

2013-06-14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14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an't repeat the past? 

Why, of course you can.

-the Great Gatsby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아니었다. 피츠제럴드가 그리고 바즈 루어만이 꿈꾸고 디카프리오가 발현하고 김영하가 옮기고 가장 잘된 오해를 근사하게 내놓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으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츠비의 이야기였으나 데이지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온전히 뻗어 나가는 야심이었으나 결국, 스스로 빈집에 갇히는 마음이었다. 




 그 빈집에 이르르기까지, 원하던 바를 얻으면 그다음의 선택이 도사리고 있다.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면 원하던 것은 여전히 반짝거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별빛처럼 남아있다. 그 별은 바즈 루어만의 '스타'라는 화려함으로 색색들이 윤색되고 오해되었다.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보다 장르적이었고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피츠제럴드의 데이지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순수와 타락, 뉴 머니와 올드 머니, 바다와 맞닿은 대저택 등으로 서로 대립하던 모든 개념을 멜팅 팟에 섞어 만든 바즈 루어만의 개츠비를 구경하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필연적으로 눈이 어지럽고 귀가 쿵쾅거렸다. 완벽의 반대말은 과잉이다.




 넘쳐흐르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넘쳐흘러야 확신이 생기는 때도 있다. 물랑 루즈가 그랬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다. 아예 다른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이 그랬다. 그러나 버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마천루의 공허함을 제거한 그랑 멜로 판타지가 되었다. 3D 입체 촬영과 비욘세, 제이 지, 티파니, 프라다, 브룩스 브루더스, 뷰익과 쿠페를 통해 감독이 뜻한 바는 개츠비의 이루지 못한 허망한 사랑이었다. 더군다나 화면을 떠돌아다니다 강력히 모습을 드러내는 활자는 닉 캐러웨이의 나래이션을 원치 않는 순간에 확성기로 외치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 흥청망청 타락한 밀주와 재즈의 시대, 파티 피플과 화려한 저택을 말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혼란을 보기 위해 꼭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재즈와 힙합, 1920년과 2013년은 다른 명제이다. 닉 캐러웨이의 출발과 결말은 개츠비에게 발이 묶였으며 개츠비의 위태로운 헛발질은 데이지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점에서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릭터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버즈 루어만의 개츠비가 어느 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이를 랑글랑 소매처럼 부풀린, 설명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감독 본인만의 생각을 보여준다면,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 개츠비는 훨씬 다채로운 측면을 보인다. 이것은 장르의 차이가 아닌 관점과 창작자 본연의 기본적인 자세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소설은 소설가가 허구의 인물을 필터 삼아 현실의 사건을 가상의 시나리오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츠제럴드가 겪은 1920년대의 미국은 개츠비의 데이지였을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어떤 여자였을까. 배우 디카프리오가 말한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 할 물건 같은 여자. 실제 사람의 모습은 여러 사건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또렷하고 단층적인 인물이다. 데이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오히려 개츠비다. 그녀의 조각을 그녀의 전체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는 데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피츠제럴드는 이런 다층적인 단어의 구조, 이항대립과 양가적 특성을 통해 어떤 문제에 답을 하는 듯하면서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겉과 속이 같지 않고 그 안의 숨겨진 세계, 1920년의 뉴욕을 고스란히 겪은 인물로서의 개츠비를 보여줄 뿐이다.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개츠비의 불행한 청춘, 데이지의 파행적 결혼생활, 부부의 관계를 공고히 함에 필요한 노리개에 불과한 개츠비와 머틀의 죽음이 있을 뿐, 실제 데이지와 개츠비가 무엇을 느꼈든 둘 사이의 감정은 다른 이들이 겪어야 할 모든 상황에 있어야 할 수단의 톱니바퀴가 될 뿐이다. 불길이 타오르는데 불구경을 할 뿐 모인 이들의 머리가 텅 빈 상황이다. 또한, 생활을 관통하는 물질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개츠비가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서는 데이지가 그 모습을 증명한다. 저택과 셔츠에 감동하는 눈물이 또한 그렇다. 개츠비 역시 신분과 돈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자 노르망디 신 시청의 철문을 떼어와 오래된 것 같이 보이는 저택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바라보면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갈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독자와 작가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며 만족과 충족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종이와 스크린의 주인공은 욕망과 갈망 그 자체이다. 개츠비는 범죄자이면서도 영웅이며 불사신이면서 인간이다. 공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은 닉 캐러웨이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텍스트와 영상은 주관적인 경험의 해석을 거쳐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의미가 된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작품은,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는 상상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은 경험, 해석, 환상을 거쳐 보편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 




 그 '무언가'는 개츠비를 통해 만질 수 있는, 우리가 처한 삶의 비극과 허무함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결국, 호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모든 노력을 다 바쳐 얻고자 한 것을 허망하게 잃고 마는 결말.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 그에서 오는 무력감은 인간의 숙명으로 떠돌아다닌다. 이 작품이 멜로의 외피를 뒤집어썼을지언정 인간이 본디 지니고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삶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직전에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서 오는 인간의 무력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사실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은 원하던 에메랄드빛의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 오는 허무함. 설령 거의 확신하게 된다 하여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느끼는 절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려는, 그 길이 무엇이든 길의 끝까지 가고야 마는 힘. 




 피츠제럴드는 전혀 위대하지 않은 존재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설파하여 독자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쥐어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너지면서도 마천루처럼 위로, 위로, 계속해 나가는 개츠비는 인간 삶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앞으로도 다양한 각색으로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심각한 오독이 될 수는 있어도 지루한 도돌이표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지쳐도 계속되는 확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에 쓰러질 때에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엔 이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다음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두었을 때 우리는 누구나 글자와 영상을 떠나 각자의 경험과 뒤섞인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와 영화감상을 넘어선 우리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까.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 -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the Great Gat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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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2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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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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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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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가 저런 인터뷰를 했어요? 와- 디카프리오가 좋았는데 저 발췌문 보고 더 좋아졌어요. 말씀하신대로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요. 저 발췌문을 보니 저는 디카프리오가 읽는 책들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책을 읽을까, 그는? 하고 말이죠. 전 아직 이 영화 보기전인데, 보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요, 쟌님.

Jeanne_Hebuterne 2013-05-24 13:40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저런 인터뷰를 보면 디카프리오는 참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전체를 보려고 하고 그것을 어떻게 반영할까를 많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원작과 영화 각색에서 강조한 개츠비에 관한 묘사를 때론 뒤로 넘김으로, 때론 정신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달라지는 머리 모양새, 입가에 머물거나 지팡이를 움켜쥔 손 매무새, 어깨를 펴거나 허리를 숙이는 등 자세를 활용해서까지 무척 섬세하게 표현해요. 활자가 영상으로 변할 때 새로이 추가하여 보여줄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디카프리오를 보노라면 비록 그 연기가 자연스러움과는 약간 거리를 둔 장르적이라는 특색이 있지만, 그 점까지도 버즈 루어만의 과장된 해석을 덮어주는 장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가 읽는 책은 알 수 없지만(검색해봤지요!)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작품의 배경까지 자세히 탐구하는 데에서 그 이해력의 힘이 나온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시들해지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경우엔, 버즈 루어만이야 원래 침소봉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고 거기다 액자 구성, 그래픽, 화려한 음악 및 화면 구성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지를 늘상 보여주었기에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가 눈앞에서 이미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보고나니 제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데이지를 좀 많이 다르게 그려버렸기에 아쉬웠더랍니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으로 이 작품을 접할 때, 데이지가 셔츠를 보고 우는 대목에서 그녀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는데 버즈 루어만은 거기다 다른 설명을 집어넣어서 작품의 기본 얼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 버려요. 필요 이상으로 능력을 과시한 흔적 탓에 초반 한 시간은 정신이 없고 후반 한 시간은 집중력이 확 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한 알라딘 서재의 반응이 뜨거워서,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화제성과 대중성의 힘을 느끼는 중입니다. 만약 다락방님이 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해요. 요즘 이 작품만큼 알라딘 서재 분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엿보이기도 해서요.

2013-05-2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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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4 2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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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5 0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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