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fthansa, Boeing 747-400. D-ABVX 1:500 SCALE>
짐을 잘 꾸릴 것 깨어질 수 있는 물건은 굳게 다물고 열 몇 시간 동안은 모두와 끊어진다는 안도감을 넣을 것 10킬로그램짜리 핸드 캐리는 그것으로 끝. 짐을 잘 풀 것 낯선 호텔 낯익은 언제나 똑같은 침대 속 지문은 피부에 내 피부는 ICN에서 AMS까지 혹은 LHR, WAW. 프리데릭 쇼팽 공항에 닿았을 때에는 건조하고 기온 낮은 여름밤 길을 잃고 걸었던 밤 길을 찾은 한낮 23킬로그램짜리 위탁 수하물은 이것으로 끝. 바디스캔 입국심사 출국심사 낯선 외국어 그러다 보면 속삭이는 동체.
중력에 매달린 상상은 육중한 동체가 랜딩 기어를 올릴 때 살짝 따뜻해졌다. 건조하고 추운 밤에는 비행기 창을 들어올려도 감감무소식.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들리는 엔진 소리 항공성 치매 콕핏 턴오버 퀵턴 비상구 그러나 지금의 비상구 앞좌석의 다행 발에는 보드라운 슬리퍼 소리를 막는 귀마개 기억력을 되살리는 외교통상부 문자 런웨이의 불빛 쓸 일 없기를 바라는 슬라이딩 보드 그리고 먼 곳의 공기. 달의 언저리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던 긴 시간.
공기 속 여행의 실제는 사라짐이 아니라 돌아옴이었다.
34인치의 피치 안에 도사린 여행, 들뜨거나 가라앉은 하늘은 늘 그곳에 있었을 것이고 나는 잠시 스쳤을 뿐이다. 그때 내가 디뎠던 발밑의 내가 걸었던 구름 온도는 꽤 차갑거나 뜨거웠다. 사뿐히 들어 올리던 생각과 차분히 놓아두던 마음의 위치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반짝, 불빛을 보여주며 어두운 밤을 오르던 그 공간에 있었다.
잠시 이 육중하고 건조하고 오래된 미래의 공간을 그린 책을 들여다본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펼쳐보면 런던 히드로 공항의 풍경과 비행기의 모습이 데생이 아닌 스케치 밑그림으로 펼쳐진다.
터미널 옆의 관제실에는 위성들이 추적한, 영국항공의 모든 비행기들의 실시간 위치를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가 있다. 지구 전역에 약 180대의 비행기가 떠있으며, 이들은 약 10만 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다. 여남은 대는 북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있고, 다섯 대는 허리케인을 에둘러 버뮤다 서쪽으로 가고 있고, 한 대는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항로를 타고 가는 것이 보인다. 이 지도는 가슴 뭉클한 불침번을 상징한다. 각 비행기가 고향의 비행장에서 아무리 멀리 떠나 있다 해도, 아무리 속박에서 벗어나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런던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에서 결코 멀리 떠나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처럼 자신이 책임지는 비행기 한대 한대가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매일 밤 비행기 몇 대가 게이트에서 거대한 격납고로 끌려가곤 한다. 그곳에 가면 건널판과 크레인들이 일련의 수갑인 양 그 유기체처럼 생긴 몸을 둘러싼다. 항공기는 자신은 그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수줍어 하는 경향이 있다. 로스앤젤레스나 홍콩에서부터 먼 여행을 하고서도 자신에게 허용된 비행시간인 9000 시간의 끝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점검은 그들이 개별성을 드러낼 기회를 준다. 승객들에게는 747기가 모두 똑같아 서로 구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점검과정에서는 별도의 이름과 병력을 가진 하나의 기계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G-BNLH는 1990년부터 날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대서양 상공에서 유압장치가 세 번 샜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타이어가 한 번 터졌으며, 바로 지난주에는 케이프타운에서 날개의 중요해 보이지 않는 부품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 격납고에 들어온 이 비행기는 다른 병과 더불어 고장난 좌석 12 개, 벽 패널에 커다란 자주색 매니큐어 자국, 옆에 있는 세면대를 이용할 때마다 저절로 점화되는 뒤쪽 취사실의 고집 센 마이크로웨이브 오븐 등 다른 증상도 있었다.
30명이 밤새도록 이 비행기를 붙들고 일을 한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비행기는 대개의 경우 매우 관대하지만, 밸브 같은아주 작은 것에 생긴 고장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이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에 그때까지의 경력 전체가 박살나고, 직경이 1 밀리미터도 안되는 혈전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느 비행기의 몸통을 둘러싼 건널판을 따라 비행기 외부를 구경하다가 코의 원뿔에 손을 대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층층이 쌓여 꼼짝도 않는 적운을 가르고 길을 내던 코였다.
세 자리 코드와 두 자리 기호도, 위도와 경도도 달라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을 무엇. 바닥에 가라앉았다가도 또다시 떠오르는 마음. 때로 그것은 크게 보이거나 작게 보이곤 했다. 사람들은 작은 창문을 통해 구름과 바다와 하늘, 마을과 도시와 밤과 낮을 바라보고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 이동한다. 50톤의 747, 10킬로미터의 고도와 0.7기압 안에서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어 시간은 더해지거나 덜어진다. 이 덧셈과 뺄셈은 이전에는 오로지 새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쉬었다 갈 수 없는 고단함, 돌아가야 한다는 두고 온 가방.
떠남과 돌아옴은 완성하거나 끝내기에는 버거운 것이어서,
사람들은 이렇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몸을 실을 수 있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공항과 비행기 같은 것을.
알랭 드 보통은 공항과 항공기를 여행의 설렘과 작업의 고단함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생활로 바라본다. 공항 한구석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공항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며 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그는 이 책의 마지막을 여행자들을 생각하며 매듭짓는다. 여행자가, 그리고 우리가 곧 모든 것을 잊을 것임을. 이국의 모든 것. 보딩 전까지 서는 긴 줄. 대륙을 몇 개 문장으로 줄이고 다시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곧 다시 새로움을, '지금' 눈앞에 없는 무언가를 다시 찾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덧붙인다. 우리의 삶은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 사이를 오가는 추와도 같다.
쉬운 것은 앞에 있는 것을 떠올리는 일.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에는 작은 사람들. 그 먹색을, 무지갯빛을, 장미향과 카레의 냄새를 만지기 위해 가끔 사람들은 열 몇 시간을 그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는 곳에서 보낸 다음 다시 애써 닿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잊은 옛날 동전, 벼룩시장에서 산 레코드판, 약간 쌀쌀한 늦가을 목에 둘렀던 머플러. 그리고 그것을 둘러주었던 누군가 내쉬었던 반 박자 늦은 숨 같은 것을 찾으려고.
뒤에 있는 것은 보이지 않고 발밑의 중력이 사리지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떠올랐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잠시, 이 1:500 스케일의 정교한 수집가용 모델을 만져본다. 꼭 스르르 커진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다시 어디론가 가볍게 내가 되는 꿈을 꿀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가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아닐까? 내가 어느날 다시 무언가를 찾고 싶어 오백배 더 몸집을 부풀린 이 구조물에 몸을 싣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초여름 저녁. 돌아오거나 떠날 때, 내 손끝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대신 입술 끝에 조용히 닿아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선물해 주신 ㄱ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멀리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