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t repeat the past? 

Why, of course you can.

-the Great Gatsby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이 아니었다. 피츠제럴드가 그리고 바즈 루어만이 꿈꾸고 디카프리오가 발현하고 김영하가 옮기고 가장 잘된 오해를 근사하게 내놓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 사랑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였으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츠비의 이야기였으나 데이지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처음, 온전히 뻗어 나가는 야심이었으나 결국, 스스로 빈집에 갇히는 마음이었다. 




 그 빈집에 이르르기까지, 원하던 바를 얻으면 그다음의 선택이 도사리고 있다. 원하던 바를 얻지 못하면 원하던 것은 여전히 반짝거리며 손에 잡히지 않는 별빛처럼 남아있다. 그 별은 바즈 루어만의 '스타'라는 화려함으로 색색들이 윤색되고 오해되었다.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보다 장르적이었고 캐리 멀리건의 데이지는 피츠제럴드의 데이지보다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순수와 타락, 뉴 머니와 올드 머니, 바다와 맞닿은 대저택 등으로 서로 대립하던 모든 개념을 멜팅 팟에 섞어 만든 바즈 루어만의 개츠비를 구경하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필연적으로 눈이 어지럽고 귀가 쿵쾅거렸다. 완벽의 반대말은 과잉이다.




 넘쳐흐르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넘쳐흘러야 확신이 생기는 때도 있다. 물랑 루즈가 그랬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다. 아예 다른 감독의 영화, 블랙 스완이 그랬다. 그러나 버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는 재즈와 마천루의 공허함을 제거한 그랑 멜로 판타지가 되었다. 3D 입체 촬영과 비욘세, 제이 지, 티파니, 프라다, 브룩스 브루더스, 뷰익과 쿠페를 통해 감독이 뜻한 바는 개츠비의 이루지 못한 허망한 사랑이었다. 더군다나 화면을 떠돌아다니다 강력히 모습을 드러내는 활자는 닉 캐러웨이의 나래이션을 원치 않는 순간에 확성기로 외치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1920년대 흥청망청 타락한 밀주와 재즈의 시대, 파티 피플과 화려한 저택을 말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혼란을 보기 위해 꼭 그 안에 들어가야 할 필요는 없다. 재즈와 힙합, 1920년과 2013년은 다른 명제이다. 닉 캐러웨이의 출발과 결말은 개츠비에게 발이 묶였으며 개츠비의 위태로운 헛발질은 데이지의 손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점에서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릭터 이해가 가장 탁월하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를 놓지 못하고 집착하는 길잃은 캐릭터다. 이 작품은 기존의 러브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란 사랑의 대상이라기보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만 하는 물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녀를 소유하고 지워버려야만 자신의 가난하고 보잘것 없었던 과거도 깨끗이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디카프리오, 인터뷰에서 발췌




 

 

 버즈 루어만의 개츠비가 어느 한 부분에 과도하게 집중하여 이를 랑글랑 소매처럼 부풀린, 설명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감독 본인만의 생각을 보여준다면,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 개츠비는 훨씬 다채로운 측면을 보인다. 이것은 장르의 차이가 아닌 관점과 창작자 본연의 기본적인 자세의 다름에서 오는 차이로 보인다. 



 소설은 소설가가 허구의 인물을 필터 삼아 현실의 사건을 가상의 시나리오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피츠제럴드가 겪은 1920년대의 미국은 개츠비의 데이지였을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어떤 여자였을까. 배우 디카프리오가 말한 오래된 유적과 같은 신기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 소유해야 할 물건 같은 여자. 실제 사람의 모습은 여러 사건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의외로 그녀는 또렷하고 단층적인 인물이다. 데이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오히려 개츠비다. 그녀의 조각을 그녀의 전체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라 믿는 데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인물. 피츠제럴드는 이런 다층적인 단어의 구조, 이항대립과 양가적 특성을 통해 어떤 문제에 답을 하는 듯하면서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겉과 속이 같지 않고 그 안의 숨겨진 세계, 1920년의 뉴욕을 고스란히 겪은 인물로서의 개츠비를 보여줄 뿐이다.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개츠비의 불행한 청춘, 데이지의 파행적 결혼생활, 부부의 관계를 공고히 함에 필요한 노리개에 불과한 개츠비와 머틀의 죽음이 있을 뿐, 실제 데이지와 개츠비가 무엇을 느꼈든 둘 사이의 감정은 다른 이들이 겪어야 할 모든 상황에 있어야 할 수단의 톱니바퀴가 될 뿐이다. 불길이 타오르는데 불구경을 할 뿐 모인 이들의 머리가 텅 빈 상황이다. 또한, 생활을 관통하는 물질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온전치 못한 방법으로 막대한 부를 개츠비가 이루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서는 데이지가 그 모습을 증명한다. 저택과 셔츠에 감동하는 눈물이 또한 그렇다. 개츠비 역시 신분과 돈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고히 하고자 노르망디 신 시청의 철문을 떼어와 오래된 것 같이 보이는 저택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다른 관점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바라보면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갈망'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독자와 작가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원하고 갈망하며 만족과 충족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종이와 스크린의 주인공은 욕망과 갈망 그 자체이다. 개츠비는 범죄자이면서도 영웅이며 불사신이면서 인간이다. 공기를 채우는 모든 사건은 닉 캐러웨이라는 필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텍스트와 영상은 주관적인 경험의 해석을 거쳐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의미가 된다. 실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작품은,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위대한 개츠비는 상상 그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많은 경험, 해석, 환상을 거쳐 보편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 




 그 '무언가'는 개츠비를 통해 만질 수 있는, 우리가 처한 삶의 비극과 허무함에 관한 이야기다. 어찌 되었든 결국, 호구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자신의 삶과 모든 노력을 다 바쳐 얻고자 한 것을 허망하게 잃고 마는 결말. 돌이킬 수 없다는 회한, 그에서 오는 무력감은 인간의 숙명으로 떠돌아다닌다. 이 작품이 멜로의 외피를 뒤집어썼을지언정 인간이 본디 지니고 태어나 어쩔 수 없는 시간과 삶의 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 닥칠 것을 알면서도 그 직전에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데에서 오는 인간의 무력감.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사실 자신의 손아귀에 든 것은 원하던 에메랄드빛의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그 순간 오는 허무함. 설령 거의 확신하게 된다 하여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느끼는 절망.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뻗어 나가려는, 그 길이 무엇이든 길의 끝까지 가고야 마는 힘. 




 피츠제럴드는 전혀 위대하지 않은 존재의 허망함을 역설적으로 설파하여 독자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을 쥐어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너지면서도 마천루처럼 위로, 위로, 계속해 나가는 개츠비는 인간 삶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앞으로도 다양한 각색으로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심각한 오독이 될 수는 있어도 지루한 도돌이표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지쳐도 계속되는 확신. 사랑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에 쓰러질 때에도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엔 이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다음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두었을 때 우리는 누구나 글자와 영상을 떠나 각자의 경험과 뒤섞인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와 영화감상을 넘어선 우리 각자의 삶의 방식이니까. 








Gatsby believed in the green light, the orgastic future that year by year recedes before us. It eluded us then, but that's no matter -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the Great Gat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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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3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05-24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프리오가 저런 인터뷰를 했어요? 와- 디카프리오가 좋았는데 저 발췌문 보고 더 좋아졌어요. 말씀하신대로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아요. 저 발췌문을 보니 저는 디카프리오가 읽는 책들이 궁금해졌어요. 어떤 책을 읽을까, 그는? 하고 말이죠. 전 아직 이 영화 보기전인데, 보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요, 쟌님.

Jeanne_Hebuterne 2013-05-24 13:40   좋아요 0 | URL
네, 다락방님! 저런 인터뷰를 보면 디카프리오는 참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전체를 보려고 하고 그것을 어떻게 반영할까를 많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보입니다. 원작과 영화 각색에서 강조한 개츠비에 관한 묘사를 때론 뒤로 넘김으로, 때론 정신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달라지는 머리 모양새, 입가에 머물거나 지팡이를 움켜쥔 손 매무새, 어깨를 펴거나 허리를 숙이는 등 자세를 활용해서까지 무척 섬세하게 표현해요. 활자가 영상으로 변할 때 새로이 추가하여 보여줄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디카프리오를 보노라면 비록 그 연기가 자연스러움과는 약간 거리를 둔 장르적이라는 특색이 있지만, 그 점까지도 버즈 루어만의 과장된 해석을 덮어주는 장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가 읽는 책은 알 수 없지만(검색해봤지요!)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작품의 배경까지 자세히 탐구하는 데에서 그 이해력의 힘이 나온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시들해지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제 경우엔, 버즈 루어만이야 원래 침소봉대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고 거기다 액자 구성, 그래픽, 화려한 음악 및 화면 구성을 십분 활용하려는 의지를 늘상 보여주었기에 영화를 보지 않고도 영화가 눈앞에서 이미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보고나니 제 예상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데이지를 좀 많이 다르게 그려버렸기에 아쉬웠더랍니다. 피츠제럴드의 원작으로 이 작품을 접할 때, 데이지가 셔츠를 보고 우는 대목에서 그녀의 인품을 추측할 수 있는데 버즈 루어만은 거기다 다른 설명을 집어넣어서 작품의 기본 얼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 버려요. 필요 이상으로 능력을 과시한 흔적 탓에 초반 한 시간은 정신이 없고 후반 한 시간은 집중력이 확 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한 알라딘 서재의 반응이 뜨거워서,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화제성과 대중성의 힘을 느끼는 중입니다. 만약 다락방님이 이 영화를 보시면 어떤 리뷰가 나올지 몹시 궁금해요. 요즘 이 작품만큼 알라딘 서재 분들이 많이 이야기하는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엿보이기도 해서요.

2013-05-2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4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5 0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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