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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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 감은 눈을 더듬어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엔진 소리, 구름 밑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 소리, 길을 걷는 사람 목소리, 무언가를 옮기는 소리,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음악 소리.

 

 

 


 음량, 음정, 음색, 이 세 가지가 소리의 요소라면 음악의 세 가지 요소는 리듬(rhythm), 선율(melody), 화성(harmony)이다. 음과 음이 시작되어 부딪히고, 파생되거나 새로이 생겨난다. 이 때 생겨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우리가 듣는 무언가가 음악의 '계'를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는 필시 이 다양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드러나는 은유와 치환, 숨김과 드러냄, 작거나 큰 울림. 이를 만드는 연주자들 중에서도 알프레드 브렌델은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내는 겸손한 피아니스트였다.

 

 

 

 

 


 여든도 넘은 이 오스트리아 출신 피아니스트는(실제는 현재 체코 소도시인 모라비아 태생이나, 오스트리아로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됨) 2008년 '이제는 은퇴할 때가 되었다'며 조용히 피아노 앞에서 물러났다. 데카에서 그의 고별 연주회 실황을 출시했으며 최근 나는 그가 짧게, 조용히 갈무리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이란 책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어림잡아 단상마다 길어도 한 페이지 남짓한 생각 조각. 겸허하고 성실한 전달자.

 

 


 잠시, 브렌델이 평생토록 연주했던 악기인 피아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공간의 부분으로 있었던 악기. 반복을 기점으로 기초를 배우고 기교를 조금씩 내 것으로 익히는 재미. 뭔가 다른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마음이 딸꾹질 하던 때. 혼자 쇼팽과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들여다 보거나 포기하거나, 이 두 갈래를 오르락내리락하던 순간의 음악. 글렌 굴드는 오른손이 왼손에, 손가락 하나는 나머지 아홉 개에, 전체는 그 깊은 곳의 영혼에 답하는 것이 피아노 연주라 칭한 적이 있다. 브렌델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조용하고 간결하다. 다른 연주자와 비교하면 조금 그 개성이 덜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입자가 조밀한 성실한 대화.

 

 

 

 

텍스트에의 충실성


연주란, 과연 뭘까요? 가능한 다 보여 주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능한' 이란 말입니다.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이 지나칠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악을 악보로 옮기거나 악보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지요. 우리는 항상 '작곡가가 무엇을 기록하고자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또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의도했던 바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작품이 요구하는 대로 연주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필요하지요. 텍스트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은 텍스트, 원전에 충실할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악보의 엄격한 해석만을 강조하는 원전주의자라든가, 시대 악기만으로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정격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원래 있던 텍스트, 작곡가의 의도 위에 연주자의 지나치도록 강한 개성을 덧입혀 잘못된 엉터리 감동이나 해석이 퍼져 나가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닐까.

 

 

 

 

 객석을 지키는 이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작곡가에 관한 연주자의 의견이 궁금한데, 이 책에서 브렌델은 간결하게나마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등의 음악에 관한 그의 피아니즘을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에 관련하여 브렌델은 오히려 작곡가의 심경을 추측하여 더할 나위 없이 감성적인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이는 이 연주자가 원전주의자, 정격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슈베르트와 관련해서는 아래와 같은 단락이 눈에 들어온다.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흔히 순수한 서정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드라마틱한 음악 전개를 보면 이를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겁니다. <방랑자 환상곡>에서 피아노는 오케스트라로, 아니 그 이상으로 철저하게 변신합니다. 기교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아닌 작곡가 피아노의 소리, 형식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후기이 소나타들도 오케스트라풍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오케스트라처럼 울려야겠지요. 현악 5중주에 가까운 마지막 세 개의 소나타는 예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사실 피아노 음악에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는 않았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 이것이 그의 스타일이지요. 그의 피아노곡들은 페달을 섬세하게 써야 비로소 제 맛을 살릴 수 있습니다. 슈베르트의 기보는 적힌 그대로만 표현되거나 혹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책 속에서


 

 

 

 

 

 브렌델에게 있어 피아노란, 연주자가 전체를 지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악기.

 

 

 

 피아니스트는 다른 연주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으므로 즉, 자기 자신을 지휘하는 지휘자이자 가수인 셈이다. 그러나 음악 없는 피아노는 그에게는 악기가 아닌 검고 흰 조각이 맞물린 가구일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이 엇갈림으로 드러나는 음악의 조각이 꽤 날카롭다. 자신의 연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연주자가 보인다. 닫혀 있고 보이지 않는데 걸어야 하는 길이 나타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이러한 사진을 떠올려 본다. 연관되어 일순 정지하였으나 다시 이어질 찰나의 세계. 그 자락을 들여다보며 브렌델의 글과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란 가장 말이 없는 것, 가장 닫힌 것, 가장 논하기 어려운 분야로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감동이란 무엇일까?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음악이 있고, 얼마나 많은 갈래 속에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이 숨은 것일까?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이런 작곡가들이 이룬 작품을 접하며 우리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잠시 다른 분야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이 세상 누군가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에 감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비틀즈를 들을 수도, 베토벤을 들을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만이 정답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브렌델이 이야기하는 균형, 조화, 절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드러난다.


 

 

 

감동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음악가만이 다른 이들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디드로와 부소니는 반대 입장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싶은 배우나 음악가는 스스로 감동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자기 자신이 감정에 빠져 버리면 예술적 매체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두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책 속에서


 

 

 

 

 


 그의 글을 읽다 고개를 들면, 지금껏 여기까지 오면서 잃어버리거나 놓친 것이 있을 거란 생각이 뜬금없이 든다. 여러 가지 일, 사람, 상황, 사건, 바쁘거나 지치거나 적막한 극단 사이를 시소를 탄 마냥 하늘을 나는 비행기나 조용히 바닥에 깔리는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며 보낸 시간. 지금까지 감동한 부분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사람들.

 

 

 

 

 

 쓰고, 만들고, 듣는다. 다양한 연주와 해석, 갈래에 따른 생각과 느낌이 이루는 체계, 작은 오솔길. 크레센도, 레가토, 음향, 해석자, 맥박, 앙상블, 단순, 극단, 감동을 따라가면 어느새 이 연주자의 고요한 숨결이 옆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숨결은 귀를 기울이는 정도에 따라 달리 들린다는 내 느낌을 조용히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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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단수란걸명심해! 2013-06-23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에 대한
Jeanne_Hebuterne님의 아름다운 리뷰 잘 들었습니다.
마치 브렌델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알프레트 브렌델이 연주하는 베토벤, 모짜르트, 슈베르트,
하이든의 피아노소나타를 즐겨 듣습니다. 가끔 바흐의 피아노 연주곡도요.
최근에는 브렌델과 레파토리가 많이 겹치는 빌헬름 캠프의 연주를 더 자주 듣지만요.

덧)
그런데 올리신 글 가운데
"또한 같은 베토벤을 듣더라도 독일 출신의 파워풀한 연주자 길렐스를 떠올릴 수도, 정갈하고 간결한 연주자 브렌델을 떠올릴 수도 있다."에서
길렐스는 아마도 에밀 길렐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의 조국은 러시아 아닌가요.^^

Jeanne_Hebuterne 2013-06-23 00:4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인데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틀린 점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는 왜 길렐스가 독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재빨리 수정!!)!!

브렌델이 연주한 하이든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댓글을 보니 궁금해집니다.
빌헬름 캠프도! 찾아서 듣도록 해야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