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같은 침묵 속의 언어.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쓰인 글과 하는 말에서 보고 듣는 늘 똑같은 언어 때문에-어법이든 말장난이든은유든-혐오감과 구역질을 자주 느끼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면 나 역시 끊임없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며, 수백만 번 사용하여 닳고 닳은 것들이다. 이런 말들에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물론 말은 나누는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 말에 따라 행동하고 웃고 울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고, 종업원은 커피나 차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이런 말이란 그저 쓸데없는 수다가 새겨진 흔적으로써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효과음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어느 시를 읽다가 '이 시가 슬픕니다. 느껴지세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와 소설, 희곡과 수필, 영화와 음악이 이렇게 묻습니다. 단어와 문장, 목소리와 노래가 묻습니다. 많은 영화와 책을 차고 넘치게 보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저 역시 종종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는 것이 도움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말할 때, 상대방이 진심으로 이해하는 걸까 갑갑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의 수많은 감상과 기록은 그저 365일의 한 줄 감상인데 그것이 늘 새롭다 착각하는 건 아닐는지요. 사람을 둘러싼 울타리와 테두리, 그것을 넘어서고 싶을 때면 이 작품의 주요 인물 아마데우는 낡은 표현을 씻어주고 새로운 원형으로 존재하는 포르투갈어를 꿈꾼다고 합니다. 그 아마데우의 흔적을 되짚는 인물은 그레고리우스, 라틴어와 그리스어, 헤브라이어에 해박한 지식을 겸비했으나 지루하다는 말을 듣는 인물입니다. 늘 같은 시각 강의 자료를 들고 학교로 가서 강의하고, 집안은 책으로 가득 차있으나 변화를 싫어하고 아내로부터는 지루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이 계획 없이 갑자기 포르투갈로 떠나서 어쩌다 손에 넣은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행적을 훑게 됩니다. 바로 아래와 같은 문장에 이끌려서.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경우 600여 쪽에 달하는 원작을 1시간 40분 남짓의 영화로 옮겼다는 점입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영화로 만들 때에는 아마 이것보다 더 쉬웠을 겁니다. 원작의 분량과는 별개로 영화가 원작에서 지켜야 할 것과 생략해선 안 될 것이 더욱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지켜야 할 것이 명확한 작품의 경우에도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막상 완성 후에는 전혀 다른 작품이 되는 경우도 많지요.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꼭 큰 개가 나와야 하며, 배경은 국적을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도시여야 한다는 원작자와의 약속을 지키고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남고 말았으며 향수의 경우 모든 것을 넣었으되 그 고유의 향기는 사라진 영화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경우, 오히려 활자로 된 원작을 영상으로 옮길 때 어쩔 수 없이 겪는 시간의 함축이 오히려 도움되는 듯합니다. 버리고 취하여 운율을 넣고 빛을 만들어내는 공동 작업이 작가가 홀로 이루는 개인 작업과 다르다는 것을 장점으로 취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에서도, 그리고 책에서도 침묵과 언어, 기억과 꿈은 조용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떤 면에서 아마데우와 정반대에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었으며 조용한 현실 속에서 쥐죽은 듯 사는 나이 든 남자와 자신의 한계를 모든 면에서 시험하며 경험할 수 있는 꿈의 극단을 겪다가 요절한 남자는 다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 길 때,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어디선가 싱긋 웃는듯합니다. 





 


파리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식당 차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지는 환한 초봄을 내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자신이 진짜로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잠들지 못하는 밤에 생각해낸, 있을 법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이 자각이 커질수록 가능성과 실제와의 관계가 자꾸만 거꾸로 느껴졌다. 캐기와 학교와 수첩에 적힌 학생들은 현실이기는 했지만, 원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우연히 현실로 나타났을 뿐...... 그런 반면 그가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들, 즉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 약한 기적 소리, 옆의 식탁에서 컵들이 열차의 진동에 따라 떨리는 리, 부엌에서 나는 오래된 기름 냄새, 요리사가 이따금 뿜어내는 담배 냄새, 이것들은 모호한 가능성이라거나 현실화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였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단어를 하나하나 쌓아 증축한 이 세계가 영화 속에서는 하나의 컷, 하나의 씬, 불규칙한 회색 소음을 뚫고 들리는 핸드폰 벨소리와 잿빛 옷을 입은 그레고리우스가 들고 있는 비에 젖은 붉은색 외로 드러납니다. 

 언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영상의 영역. 

 게다가 독백을 피아니시모로 읊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가 스크린을 덮을 때, 관객은 조금 더 주의해서 영화를 읽어야 할 겁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어떠한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헤어짐이나 영속이 남는다는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어떤 사건은 다른 사건보다 지루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요. 








 생각과 생각이 쌓여 검은 바다가 되는 순간이 있고 감정과 감정이 깎여 사람이 바위가 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건은 실은 짐작하기도 힘든 역사적 이유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무척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결정이라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별 의미를 담지 않을 때도 있을 테니까요. 자신이 모른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것은 결과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폭력을 저지른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것이야말로 오만하며 방종한 것임을 파스칼 메르시어는 아마데우의 연설, 인간 백정 멩지스를 살려내고 가난한 여인이 뱉는 침을 얼굴에 맞은 일, 레지스탕스에 들어가는 일 등으로 보여줍니다. 즉, 어떤 사람이 특정한 행동을 하게 될 때에, 그 연관성은 타인이 보지 못하는 고리에서 비롯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고리에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목합니다. 



 


 지나온 특정 장소를 지나올 때 비로소 자신을 찾는 여행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왜 종종 익숙한 삶과 결별하려는 사람들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는지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고리로 상황과 생각을 지니지는 않습니다. 이제껏 정돈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 해서 결별에의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레고리우스를 보노라면 가장 규칙적이고 정돈된 삶을 사는 인물이야말로 마음 깊숙한 곳에는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을 들여 찾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예상하지 못했으나 갑자기 떠나고, 급박히 사랑에 빠지고, 서둘러 도망치게 되는 사람들은 사실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아왔던 것을 드러내는 것일 겁니다. 





 주의 깊게 보면 그레고리우스가 교단에서 갑자기 떠나 리스본행 기차를 타고 떠난 다음 하는 모든 행동은 그가 이전에는 하지 않던 무엇입니다. 반대로 아마데우가 기차를 그렇게도 마음에 그리며 떠난 곳은 자신의 사유 깊은 곳입니다. 케케묵은 결론이며 동시에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요. 그러나 종종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은 뜻밖에 단순하며, 때로는 모든 인과를 건너뛸 정도로 간단합니다. 영화를 보노라면 모든 것이 '갑자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수많은 인과 통해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고 모든 일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고집과는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는 부사어들이 아닐까요.





 영화와 소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묻는 것은 '과거와 현재, 떠남과 남겨짐, 생각의 깊이와 남아있는 진실, 그리고 타인이 되어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비밀스러운 아마데우의 삶을 뒤쫓습니다. 그가 남긴 글을 읽고 그가 다녔던 학교, 신부님과 친구, 여동생과 사랑했던 여자를 찾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형태를 쫓으면서도 그것을 손으로 만지려는 열망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실존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삶이라면, 파스칼 메르시어의 질문은 보다 명확합니다. 지금 삶에 만족하십니까?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경험하지 못했던, 자기 삶과 완전히 다른 삶에의 열망은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그 삶을 쫓아가거나 쫓아가지 않을 때, 경우의 수는 어떻게 되지요? 





 그것은 대안이나 대책일 수도, 판타지일 수도 있습니다. 겪어보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분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를 대안으로,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를 판타지라고 부른다면. 그러나 파스칼 메르시어는 모든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려는 아마데우와, 그와 정반대인 그레고리우스를 통해 말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한다는 건, 결국은 지금껏 표현 못 했던 마음속 한 자락이 아닌지. 혹은 시간과 공간을 가장 광범위하게 사는 한 방편이 아닌지.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어쩌면 그레고리우스가 서둘러 탄 열차는 그가 원해서 탄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목적지도 모르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떠나 아마데우의 삶의 자취를 밟는 일은, 아마데우의 글을 빌려 말하자면 과거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 하나 정해지지 않고 불확실성의 무거움을 느끼며 가벼운 방해가 가져오는, 언젠가는 잊을 사건. 삶이라는 거대하고 투명한 대전제 앞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삶을 무엇인가에 비유하게 됩니다. 아마데우가 기차를 좋아했고 그레고리우스가 기차로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레고리우스가 읽는 아마데우의 글 속에서 그는, 인간은 시간상으로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눈에 보이는 것을 훨씬 넘어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장소를 떠나면서 일부분을 남겨두고, 떠나도 그곳에 남는다고 말하지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남아있는 무엇도 있고 그곳에서는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그가 닿는 곳은 자기 자신의 내면입니다. 마음속 먼 곳, 그 어느 곳 보다도 먼 곳. 외딴 구석, 평소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어느 곳. 그곳이 판사 아버지를 두고 유복하게 자랐으나 일평생 신과도, 아버지와도 손을 잡을 수 없었고 거침없는 자신감으로 자신의 생을 조율하려 했던 아마데우의 이상향이었다니, 인간이 결국 가서 닿는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닐까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기에 이토록 과거와 현재, 미래의 대화와 변화와 고통, 걱정과 불안, 혹은 신뢰 등을 내비치는 것 또한 인간이라면, 아마데우는 좀 더 높은 어느 곳에서 이 모든 감정을 조용히 바라보고 싶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종종 우리가 바라보는 것과 상대방이 말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넓게 느껴져 오히 그 사이에 발을 디딜 틈조차 없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싶을 때 아마도 이 책과 영화의 한 자락이 떠오를 겁니다. 경험하지 못한 무언가, 감당해야 했던 소망의 무게, 자기 앞에 놓인 생이 정말 자기가 원했던 것인지를 물어야 할 때를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랄까요. 영화의 마지막에 가방을 손에 든 그레고리우스의 얼굴을 보거나 소설 마지막에서 그레고리우스의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대목에 이르면, 꼭 오래 보아 익숙한 친구를 떠나 보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런 느낌 때문일 겁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곰스크로 가는 지도가,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보았던 소년의 그림자가, 사르트르가 피우던 담배 연기가 배어 있습니다. 





-소설 속, 에사가 좋아하던 피레스의 슈베르트 연주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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