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점에 갔다가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한 권 발견했다. 바로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라는 책이다. 데카르트는 생전에 공개한적이 없는 비밀리에 작성한 노트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대그리스로부터 내려오는 기하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대신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필사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다.그런데 그 비밀노트의 내용은 대단히 파격적이어서 오늘날의 물리학에도 영감을 불어넣어 줄 만한 신비스런 내용을 포함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데카르트와 관련된 여러 신비주의적 면모에 대해서 소상히 고찰해 놓은 책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보자마자 집어들었다. 읽어보니 마치 소설 『다빈치코드』를 읽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거기다가 책에서 다루는 사건이 대부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니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그 비밀노트의 내용에 대해선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고  지금은 그에 관한 음모론적 이야기보다는 그가 『방법서설』에서 논증했던 기하학에 대해서 간략히 적어 보겠다. 다음에 소개할 내용은  『데카르트의 비밀노트』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기원전 427년 아테네에서 전염병이 돌자 당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는 델로스섬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목적은 아폴론 신의 신탁을 받기 위해서 였다고. 결국 신탁이 내려졌는데, 내용인 즉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을 두 배 늘리라는 것이었다. 이 신탁을 받은 아테네 사람들은 신전의 길이와 폭 그리고 넓이를 두 배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공사를 완성한 사절단은 결과에 만족하여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런데 병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에 사절단은 다시금 신탁을 받았는데 그 결과를 듣고 깜짝 놀랐다. 신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당신네는 아폴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소. 신이 요구한 대로 신전의 크기를 정확히 두 배로 늘리지 않았단 말이오. 돌아가서 아폴론이 지시한 대로 따르시오.!"

그제서야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들은 신전의 길이, 폭, 높이를 각각 두배로 늘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전의 부피를 8배 (2×2×2 = 8)를 늘렸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리스 건축가들은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 크기를 작도를 하였는데 아무리 크기를 계산해봐도 그 크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신전의 크기를 2배로 키우지 못했을까? 신전과 같은 입체도형의 부피, 예컨대 정육면체의 부피를 2배 늘리려면 가로, 세로,높이 각각에 2의 세제곱근을 곱해야 한다. 세제곱근을 곱해야 필요한 수인 2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는 세제곱근만큼 늘어난 값을 계산할 수가 없었다. 이는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들은 오늘날과 같은 대수학 이론 그리고 데카르트에 의해 발견된 해석기하학을 몰랐고 단지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 작도를 했기 때문이다.이런 문제점에 때문에 다음과 같은 고대 그리스시대 기하학의 3대 난제가 탄생하게 된다: ①정육면체의 부피를 두배 늘리기 ②원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기 ③각을 3등분하기.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그리스 기하학의 난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인 해석기하학을 창시함으로써 그리스기하학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 기하학이 가진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했는데, 가령 위에서 이야기한 난제 중 2번의 경우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는 세제곱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편 그는 직선자와 컴파스로 제곱근은 작도 할수 있음을 대수적으로 "증명"하였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최초의 문제적 저서인 『방법서설』 속에 있는 기하학편에 나오는 증명이다. (아쉽게도 옆에 나와있는 해석본에 기하학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나머지 편들인 굴절광학 및 기상학도 하루빨리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위 그림는 직선자(직각자)와 컴파스만으로도 작도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제곱근을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 작도 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위 그림 속 세 직각삼각형으로부터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세 방정식이 나온다.

c^2 = a^2 + b^2 -------ⓐ

d^2 = 1^2 + b^2 -------ⓑ

(a+1)^2 = c^2 + d^2 ---ⓒ

우변을 전개하고 ⓑ를 ⓒ의 우변에 대입하면

a^2 + 2a + 1 = c^2 + 1^2 + b^2

그런데 ⓐ에서 c^2= a^2 + b^2 였으므로 이를 대입하면

a^2 + 2a + 1 = a^2 + b^2 + 1^2 + b^2

이를 다시 정리하면

2a = 2b^2

∴ b = √a

이처럼 데카르트는 직선자와 컴파스 만으로 √a 라는 제곱근을 작도할 수 있음을 대수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직선자와 컴파스만으로는 3차원공간상에서의 크기를 잴수 없기 때문에 정육면체를 2배만들기와 같은 계산은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논증기하로는 불가능함을 데카르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의 수학적 "증명"은 그로부터 약 200년 뒤 어이없는 결투로 아까운 목숨을 잃은 비운의 천재 갈루아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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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육면체 부풀리기
    from to be immortal 2007-06-28 16:29 
    아키타스와 라이프니츠 사이에 데카르트?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가 솔깃해진다  
 
 
로쟈 2007-06-28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라고 해서 제쳐놓았었는데 의외로(?) 재미있나 보군요.^^

yoonta 2007-06-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아닙니다. 비밀노트라는 제목때문에 소설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데 사실은 그의 전기더군요. 그리고 실제로 비밀노트도 존재했었고요. 당시 신비주의단체로 유명했던 장미십자회와도 직간접적인 교류가 있었더군요. 데카르트의 전기로는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

쿠자누스 2007-06-2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육면체를 두배로 만드는 방법은 아키타스(http://de.wikipedia.org/wiki/Archytas)
가 증명한 걸로 아는데요,(http://mathforum.org/dr.math/faq/davies/cubedbl.htm)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 비밀 노트>를 필사할 때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궁금하네요, 라이프니치가 장미십자회에 있었던 건 아는데 데카르트도 그랬다는 건 처음 듣네요

yoonta 2007-06-29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스의 증명은 논증기하의 방식이죠. 즉 해석기하학에 의한 대수적 증명이 아닌 직관적인 유클리드기하학을 사용한 논증입니다. 그러나 보다 완전한 증명을 하기위해서는 데카르트가 발명한 해석기하학적 방식으로 다시말해 대수적으로 정육면체를 두 배늘리는 방식을 "증명"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리수계수를 가진 3차방정식이 유리수근을 가질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갈루아의 군론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위에서 말한 각을 3등분하기 문제도 동일한 이유로 유클리드기하학으로는 완전히 증명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원과 면적과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기 문제도 19세기 린데만에 의해서 파이가 초월함수임을 보임으로써 그것이 작도불가능임을 증명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데카르트조차도 그것의 작도 불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하지는 못했다고 보는 것이죠.

yoonta 2007-06-29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위 책에 의하면 데카르트가 장미십자회원이었다는 확증은 없는 것으로 기술되어있습니다. 자신은 장미십자회원임을 강하게 부정했죠.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정통 카톨릭교인으로 행동했습니다.그러나 그가 교류했던 학자들중 요한 파울바허와 같은 장미십자회원이 있었던 것, 그리고 그의 수사법중 장미십자회원이 사용하는 특유의 수사법이 자주 동원 된다는 점, 그리고 그의 비밀노트에 적힌 G.F.R.C.라는 이니셜은 Fratenitas Roseae Crucis 즉 장미십자회를 의미한다는 등등의 단서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가 장미십자회원이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들과 밀접한 교류를 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고 보는 입장이더군요.

쿠자누스 2007-06-30 0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은 바로는 아키타스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불모성을 입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사위 두배 만드는 작법이 중요하다는 건데 이걸 이해하는 게 좀체 쉽지 않네요. 비밀노트는 라이프니츠가 필사한 게 사실인가요 ? 그렇다면 그의 저작 목록에 들어있음직한데요...

yoonta 2007-07-01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스 기하학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네요. 시간나는데로 한번 그 인물에 대해서 조사해봐야겠네요. 아키타스기하학이 유클리드기하학의 불모성을 입증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업적인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네요. 그리고 라이프니츠가 필사한 것이 맞습니다. 책을 보시면 필사본 사진이 나옵니다. 저작목록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의 비밀노트를 필사한 것이 발견된 것도 비교적 최근이라고 하네요.

쿠자누스 2007-07-02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scienceagogo.com/news/books-24-11-05.shtml 여기 보니까 비밀 노트는 16 쪽인데 데카르트 친구가 보관하고 있던 것을 라이프니츠가 일부 필사했다는 군요. 원본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말이 없네요. 필사본이 최근 발견되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되겠져. 라이프니츠 저작 가운데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게 많다고 하니까요.

yoonta 2007-07-02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전체를 필사할 필요가 없었다는 군요. 비밀노트의 핵심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라이프니츠의 필사본을 통해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을 이해하는데 또 오랜시간이 걸렸다고..원본은 현재 행방불명이랍니다.

람혼 2007-07-23 0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루아의 최후는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마치 저의 일인 것처럼 안타깝습니다...ㅡㅡ;

쿠자누스 2007-08-2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루아가 "21세가 채 안 된 1832년에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애정문제로 인한 권총결투에 유인되어 살해되었다." 는 건 그의 죽음에 얽힌 흑막을 숨기려고 꾸며낸 것이겠지요.
 

 



흄의 철학이 칸트에 의해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행한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기인한다.

"로크의 『인간오성론』과 라이프니츠 이래로, 아니 오히려 우리가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해 아는 한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태동 이후에, 이 학문의 운명에 관해서 데이비드 흄이 행했던 공격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었던 사건은 없었다." (임마누엘 칸트. 프롤레고메나 서문)

Since the Essays of Locke and Leibniz, or rather since the origin of metaphysics so far as we know its history, nothing has ever happened which was more decisive to its fate than the attack made upon it by David Hume.

이처럼 칸트가 높이 평가한 흄의 형이상학 비판중 하나가 그의 인과론에 대한 비판이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우주론적 신증명(Gottesbeweis)"에 의하면 "작용은 존재에 따른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에 닮은 작용을 한다. " 어떤 것도 자기의 종種을 넘어선 작용은 하지 않는다." "원인은 그 자체 안에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 "원인은 결과보다 중요하고 더한 존재를 가지고 있다."(요하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349쪽) 등등과 같이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과론적으로 세계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흄은 이러한 생각들은 증명해 낼수 없는 것들로 규정한다. 그는 개념적 증명은 사고내에서의 필연성은 증명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물들 혹은 실재들에 대한 증명일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상세계에서 우리가 알수있는 것은 단지 사물들 간의 근접성일 뿐이다. 사물들이 잇다라 근접하여 있음으로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생김으로해서 우리는 그것들간의 규칙성을 가정할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규칙성으로부터 인간의 사고에 내면화되는 일정한 습관에 의해서 기대되는 것, 그것이 인과관계의 전부이고 "그 배후에는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러한 실재 혹은 경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심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관념이란 실재와 관련하여 경험되는 감각들의 연합 혹은 집합일 뿐이다. 이와같은 관념의 연합이라는 생각은 로크에게도 있었지만 그는 실재론과 심리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흄은 좀더 철저한  심리주의로 이것을 해결한다. 사물들에 대한 관념의 연합 혹은 집합은 사물의 객관적 내용이나 형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심리적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심리주의적 설명방식이다. 한편 그는 관념들의 심리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것들 간의 인과성을 인접성만이 아닌 필연적 연관성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근접성과 연속성의 이 두 관계가 완벽한 인과 관념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대상은 다른 대상에 근접해 있고 선행해 있으면서도 그것의 원인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고찰되어야 할 것은 필연적 연관성necessary connexion이다. 이 관계는 앞서 언급한 두 관계의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다." (데이비드 흄. A Treatise of Human Nature)

Shall we then rest contented with these two relations of contiguity and succession, as affording a complete idea of causation? By, no means. An object may be contiguous and prior to another, without being considered as its cause. There is a NECESSARY CONNEXION t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and that relation is of much greater importance, than any of the other two above-mention'd.

"맨 처음 어떤 남자가 두 당구공의 충돌에 의한 것 같은 충격에 의해 운동의 상호작용이 일어남을 보았을 때는 그는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는 말할 수 없고 단지 연접해 있다(conjoined)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본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실례를 관찰한 연후에 비로소 그는 그것들이 연관되어 있다(connected)고 말한다.(...)우리가 한 대상이 다른  한 대상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하는 경우, 우리가 뜻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의 생각 속에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서로의 존재를 보증하게 해 주는 그런 추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 (데이비드 흄. 인간 오성의 탐구. 고려원 112,3 쪽

이는 이중적인 태도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흄은 "필연성은 대상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에 있는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인과의 관념은...대상들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흄은 필연성으로서의 인과성은 주관에서 비롯되지만 그것들은 대상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므로 그렇게 적용된 대상들은 인과적이라고 한다. 그런 대상들 간의 관계는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말할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물들 간의 인과적 관계는 현실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우리에게 필연적 연관이라는 "관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흄의 설명은 칸트에게 "명민한"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흄이 만약 이러한 필연적 연관성으로서의 인과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은 필연적 연관이 없게 되고 사물들 간의 시공간적 근접성만 주어지면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에게서의 필연적 인과성은 비록 주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흄처럼 사물들에 대한 경험에 의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관념의 연합이라기보다는 "감각경험 저편에 있는" 것, 즉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칸트에서의 선험적 관념은 흄처럼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지각들이 다발 (a bundle of perceptions in a perpetual flux and movement)과 같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을 이처럼 유동적인 심리상태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으로만 규정하고 필연적 연관성과 같은 인과성을 동일한 사건에 대한 반복적 경험에 의한 습관의 결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마음의 고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특정 경험의 반복"자체도 불가능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경험의 반복"은 마음의 고정성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동일한 경험은 두번 다시 반복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인상" 혹은 "느낌"을 안정적으로 교정해주는 그 마음의 고정성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칸트에게서는 의식의 선험성이다. 경험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가능근거로서의 선험성. 이것이 칸트가 흄으로부터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려고하는 선험적 심리의 원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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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6-2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본격적인 서재인 생활을 시작하시는 건가요? 흄-들뢰즈의 경험론이 곧 이어질 거란 기대도 갖게 됩니다.^^

yoonta 2007-06-2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요.^^ 뭔가 쓰고 싶은게 있으면 또 적게 되겠죠. 흄-들뢰즈에 대해서도 시간되면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주제네요. 이 글쓰면서도 들뢰즈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려다가 말았답니다. ^^
 

 

 

 

 

최근 <초끈이론> 이라는 살림지식총서를 읽고 있다. 그런데 마침 로쟈님이 쓰신 지젝의 블랙홀 http://blog.aladin.co.kr/mramor/1310499 을 읽고 갑자기 물리학의 '블랙홀'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따라서 이 페이퍼를 쓰게된 동기의 절반은 로쟈님에게 있다. ^^;

블랙홀은 특정 천체가 핵분열 에너지 등을 모두 소모하여 중력과의 평형상태를 잃고 천채 내부로 중력붕괴가 일어날 때 발생한다.
이 때 블랙홀 주변의 시공간은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장에 의해 심하게 휘어지고 빛조차도 블랙홀이 형성하는 중력장 외부로 탈출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블랙홀로부터 나오는 가시광선을 포함한 어떠한 종류의 광선도 관측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러한 천체를 블랙홀black hole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런데 어떤 천체가 블랙홀이 되려면 그 물체는 그 질량에 비례하는 슈바르츠실트Schwarzschild 반지름을 가져야 한다. (자세한 설명은http://en.wikipedia.org/wiki/Schwarzschild_radius 을 참조할 것) 물체가 이 반경 이내로 압축이 되면 그 물체는 (회전하지 않는)블랙홀이 된다고 한다. 지구의 경우 그것은 1cm 이고 태양의 경우 3km 이다. 즉 지구나 태양의 반지름이 이 정도의 크기로 압축이 된다면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것. 또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안쪽으로 빛이 들어가면 빠져나올수 없으므로 이 때의 구면을 '사건의 지평선'으로 부르고 그것이 블랙홀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슈바르츠실트 공식을 한번 유도해 보자. (공식유도는이 곳 http://blog.naver.com/sky_kingdomg?Redirect=Log&logNo=110017872884 참조)

만유인력 공식은 다음과 같다.

Fg = GMm/r^2

다음은 구심력 공식.

Fg = mv^2/r

블랙홀에 빛이 빨려들어갈 때 원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만유인력과 구심력이 평형을 이룬다고 다음과 같이 가정할 수 있다.

GMm/r^2 = mv^2/r

이 식을 v에 관해 정리해 보자.

v = √ GM/r

이 때 v는 빛이 빨려들어가는 속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때의 속도는 탈출속력과 같다. 탈출속력(Vesc)은 이 식에서의 2배이다. 즉.

Vesc = √ 2GM/r

그런데 탈출최대한계속도는 광속도 이상을 넘을수 없다. 그 이상의 속도는 자연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곧 최대탈출속도가 된다.

c = √ 2GM/r

이를 다시 반지름인 r 로 정리하면

r = 2GM/c^2  (r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G는 중력상수, M은 물체의 질량, c는 빛의 속도이다.)

 이것이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이다.

r_s = \frac{2Gm}{c^2},


그런데 슈바르츠실트의 반지름에 의해 계산되는 사건의 지평선의 구면은 블랙홀의 질량의 제곱에 비례한다. 호킹은 이로부터 사건의 지평선은 항상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한편 베켄슈타인은 호킹의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블랙홀의 엔트로피적 특성을 제안하였다.  블랙홀은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 다는 것이다. 그런데 블랙홀로부터는 어떠한 열도 방출되지 않으므로 일반상대성이론에 모순이 된다. 때문에 우리는 블랙홀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역학과 같은 통계적 물리량과 양자물리학이 필요하게 된다. 엔트로피는 "특정 물리계를 구성하는 미시적 자유도가 그 계에 주어진 거시적 물리량을 유지하면서 가질 수 있는 가능한 상태들의 가짓수에 의해 결정"됨을 알려준다. 블랙홀의 열역학도 이러한 미시적 자유도를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미시적 자유도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초끈이론이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 내의 물리계 즉 사건의 지평선 내부의 미시적 설명은 중력에 대한 일반상대성이론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것을 양자적으로 통합해 내는 양자중력이론 예컨대 초끈이론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설명될수 있다는 것이다.

초끈이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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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6-15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임'의 절반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yoonta 2007-06-1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책임'이 저에게 블랙홀이 되어도 전 '책임' 못집니다.^^
 

인터넷에서의 댓글들 때문에 참 여러가지 말들이 많다.  특히 네이버와 같은 포털싸이트들에 올라오는 악성댓글들은 그 관련자들에게 막대한 심적 물적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의 댓글들에 대해서 더이상 가치를 두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같다. 예컨대 글 잘쓰기로 소문난 좌파논객?인 김규항씨 같은 경우 인터넷댓글들은 좌파적 경향성을 표현해 내기에는 부족한 그릇이고 우파적인 폭력적 언어로 쉽사리 오용된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곳 알라딘의 어느 유저분은 이런 편견(나는 편견이라고 생각한다.)때문에 아예 서재에서의 댓글기능을 차단하기도 했고.

김규항씨 관련글: http://blog.aladin.co.kr/mramor/1120409

댓글기능을 차단한 알라딘의 어느 서재와 그 블로거의 변: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763772143&PCID=749138&CType=1&PaperId=1260711&IsListView=true

반대로 댓글기능을 통한 서로간의 소통을 즐기시는 분의 글: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CNO=780166123&PCID=3163520&CType=1&PaperId=1261019

 

그런데 소위 온라인에서의 댓글 혹은 꼬릿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부정적인 성격만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댓글로 달린 글을  애써 무시하고 댓글 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게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 김규항씨는 문제를 전도시키는 전형적인 예로 보인다. 그는 우파들의 폭력적이고 무개념적인 온라인 공간상에서의 언어들의 문제를 갑자기 온라인 공간자체의 문제점으로 확대 혹은 전도시킨다. 그래서 결국 그는 댓글을 보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아래 링크한 나귀님의 경우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댓글을 무가치한 헛소리쯤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은 하고싶은 일을 할뿐이니 댓글기능을 차단하건 말건 온라인에 글을 올리건 말건 신경끄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태도들이 보여주는 윤리는 과연 무엇일까? 물론 댓글 혹은 온라인 글쓰기의 부정적 오용의 예는 주변에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사용의 경우가 다수를 차지한다고 해서 댓글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답변하지 않거나 온라인에서의 소통자체를 의문시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 공간에서의 댓글들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그 익명성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실제 공간에서 와는 달리 온라인 공간속에서는 자신의 실제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말할수있게 됨으로써 다시 말해 익명성을 보장받을수있게 됨으로써 평소에는 남에게 쉽사리 할수 없는 표현들도 너무나 쉽게 사용한다. 이런 익명성을 이용해 사람들은 부주의한 댓글들과 말장난 그리고 언어폭력으로 쉽사리 유인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온라인 공간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쉽사리 오염될 수있는 댓글같은 공간속에서도 모범적인 글쓰기를 하기도 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의 소통을 오용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댓글등과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사소통의 잘못된 사용이 문제인 것이시 댓글 자체가 문제가 아니란 이야기다.

설령 댓글등의 사용을 바람직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용인하고 관용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성향과 놀이 스타일 그리고 취향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 혹은 다원주의사회는 이러한 저마다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에서라면  아무리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댓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방적인 기준으로 판단할 권리를 특정인이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것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파시즘로 가는 길일 따름이다.  비록 자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유치해보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타인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권리가 없다. 타인의 그런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길이 된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내가 곧 타인이 되므로.

물론 나도 이곳 알라딘 서재가 네이버와 같은 포털싸이트처럼 악성댓글이 난무하는 곳으로 방치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이곳에 와서 지금과 같은 서재질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악성 댓글을 지양하고 바람직? 한 것으로 보이는 생산적? 대화가 좀더 활성화 되길 희망하긴 한다. 특히 이곳처럼 책과 관련된 싸이트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은 책과 지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좀더 많이 소통되는 그런 곳으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이지 내 선택의 기준을 타인에게 적용시킬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알라딘이 네이버화 되면 나는 이곳을 자주 찾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나의 선택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할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댓글이라는 것이 그렇잖은가. 비록 악성댓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게시물에 대한 의식/무의식적인 관심의 표명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다할 의무를 가지게 된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대꾸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어렸을때부터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예의없는 혹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아주 좋은 하나의 관습니다. 상대방의 말 건냄에 대해서 대답함을 의무로 함으로 해서 서로간에 있을 불일치와 오해를 최소화 할수있고 또 서로간의 이해를 최대화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론 저마다가 때로는 '섬'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바다 위에 띄엄 띄엄 보이는 고독한 무인도 같은 섬. 하지만 사실은 그 섬들은 표면적으로는 바다로 인해 서로 구분되어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바다 밑으로 들어가보면 똑같은 지각으로 서로간에 연결되어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각자는 혼자있을 때에는 매우 독립적으로 보이는 존재이다. 하지만 사람은 로빈슨크루소처럼 혼자서 살아갈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건냄에 대해서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자율성 혹은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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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0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6-1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과 관련한 각자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귀님의 댓글 차단 같은 것도 마찬가지인데, '손님'은 집안으로는 들여놓지 않겠다는 원칙은 가타부타할 것 없이 '주인'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죠. 그 경우에 더 일관적인 건 모든 글을 비공개로 하는 것이겠지만, 역시나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겠습니다. 나귀님의 경우에도 '주마'관'산'이나 요코 이야기 건 등을 제외하면 특별히 댓글이 문제됐던 것 같지 않고 일반적인 댓글에 무반응이셨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가 필요했던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알라딘에서는 많은 경우에 댓글은 사교적/친교적인 기능을 갖고 있는지라 좀 '수다스럽긴' 하지만 '악플'의 문제와 동일선상에서 얘기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싶네요. 다만 우리에겐 이러저런 참견들에 대꾸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는 것뿐이지요...

yoonta 2007-06-1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님/ 네. 사실은 저도 말씀하신 그분에 대해서 비슷한 느낌을 자기고 있었답니다. 저 사람은 왜 불러도 대답이 없을까? 결국 이유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려면 입닥치고 조용히 있어라. 내 독서에 방해된다. 씨잘때기없는 댓글달려면 그시간에 책이라도 한줄, 글이라도 한줄 더 써라라는 훈계였다는. 그제서야 비밀이 풀리더군요.

로쟈님/ 맞습니다. 나귀님의 경우 댓글을 차단하는 것은 그분의 자유이자 권리이죠. 제가 위에서 이야기하고 싶은것도 결국은 다양성의 존중이기 때문에 그분처럼 하신다고 그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좀 독특한 취향을 가지신 분이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단거죠. 특히 이곳은 체셔고양2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플레전트빌"같은 커뮤니티임에도 말이죠.

2007-06-10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6-1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님/ 아 그러셨군요..^^ 사람들은 다 각자의 스타일들이 있는 법이지요. 똑같은 일을 가지고도 대응하는 방식이 다 틀리니 무엇이 꼭 최선이다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그래서 님 말씀처럼 예의라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선별적으로 행해 질때 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을 때에만 의미있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결국 위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도 내가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는 만큼 상대방도 나에게 예의를 지켜줄것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구요.

paviana 2007-06-11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yoonta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나귀님도 처음에는 다른 분들 서재에 댓글 남기시고 했는데 일련의 사건들때문에 상처받으셨나봅니다. 저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로쟈님이나 yoonta님 ,바람구두님 같은 서재를 기웃거리며 좋은 말들에 도움 많이 받지만 댓글 남기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다 가끔 댓글 남겼을때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면 속으로 얼마나 좋은지..그런 맘을 나귀님도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yoonta 2007-06-11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paviana님^^ 나귀님같으신 분들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 의견이 그렇다면 그것도 존중해야겠죠. 다만 저는 그런 태도가 꼭 바람직한가라는데 의문을 제기한것일 뿐입니다. 아 그리고 저도 님처럼 평범한 사람입니다. 가끔씩 책들여다보면서 몇마디 수다떠는 사람일 뿐이에요. 서재도 둘러보시면 아시겠지만 글들도 썰렁하고..-_- 앞으로 자주 뵙고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

EroticTerraN 2007-06-28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yoonta 님께서 펑크로커님이신가요? 소개받고 좋은글읽고가려 왔습니다. 앞으로도 자주들리겠습니다. 근데 이곳에오니 그곳에 올리신글보다 너무 어려운거같아 ㅠㅠ

yoonta 2007-06-29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테란님 방가^^ 이곳에서 불펜분을 뵈니 느낌이 색다르네요 ^^ 아무래도 블로그라 좀더 개인적 관심영역에 국한되서 글을 올리게 되네요. 테란님도 어서 블로그하나 만드세요^^
 

라캉은 무의식을 의식의 배후에 자리잡은 실체적 근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무의식은 의식에 선행하는 것이라가기보다는 의식과 같은 차원에서 나란히 그리고 상호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순환적'인 동시에 '비대칭적'인 형태로. 또한 무의식은 현실 속에서 지식이 가진 균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지식과 행위사이의 균열을 지시한다. 불가능한 지식, 불쾌한 체험 등으로 그것은 주체의 내부적 균열을 '은유'하는 것이다.  때문에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사후적으로만 재구성될 수 있는 '의식의 선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보기엔 칸트의 초월철학의 구도와 비교적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헤겔철학에서 라캉과의 동형성을 발견하지만 나는 그것을 칸트에게서 보고자 한다.  

칸트에게서 의식의 선험적 가능 조건은 의식의 초월적transzendental인 구조와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감각의 내용이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형식들 예컨대 시간, 공간, 양, 질, 과 같은 선험적 범주들을 통해 자신은 경험의 질료가 아님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칸트적 의미의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도 라캉이 무의식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의식의 근원에 자리잡고 그것을 배후에서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차원의 실체적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과 그 질료들과 항상 '나란히' 있으면서 그것들과 상관적으로 상호제약하면서 기능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만 승인되고 재구성되는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인 것이다. 하이데거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의식의 초월적 가능조건은 '존재자의 존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칸트에게서의 초월이 하이데거식의 존재와 다른 점은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라캉이 그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지식에 항상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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