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은 무의식을 의식의 배후에 자리잡은 실체적 근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에게 무의식은 의식에 선행하는 것이라가기보다는 의식과 같은 차원에서 나란히 그리고 상호자율적으로 존재한다. '순환적'인 동시에 '비대칭적'인 형태로. 또한 무의식은 현실 속에서 지식이 가진 균열 속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지식과 행위사이의 균열을 지시한다. 불가능한 지식, 불쾌한 체험 등으로 그것은 주체의 내부적 균열을 '은유'하는 것이다.  때문에 라캉에게서 무의식은 사후적으로만 재구성될 수 있는 '의식의 선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보기엔 칸트의 초월철학의 구도와 비교적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헤겔철학에서 라캉과의 동형성을 발견하지만 나는 그것을 칸트에게서 보고자 한다.  

칸트에게서 의식의 선험적 가능 조건은 의식의 초월적transzendental인 구조와 형식을 가진다. 그것은 감각의 내용이나 지식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형식들 예컨대 시간, 공간, 양, 질, 과 같은 선험적 범주들을 통해 자신은 경험의 질료가 아님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칸트적 의미의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도 라캉이 무의식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의식의 근원에 자리잡고 그것을 배후에서 가능하게 하는 숨겨진 차원의 실체적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경험'과 그 질료들과 항상 '나란히' 있으면서 그것들과 상관적으로 상호제약하면서 기능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만 승인되고 재구성되는 의식의 선험적 가능조건인 것이다. 하이데거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러한 의식의 초월적 가능조건은 '존재자의 존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지만 칸트에게서의 초월이 하이데거식의 존재와 다른 점은 존재자의 배후에 존재하는 근원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즉 그것은 라캉이 그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지식에 항상 나란히 붙어다니면서 그것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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