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입니다.
철학자 최종덕씨와 물리학자 장회익씨가 만나서 대담한 것을 정리한 책인데요.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최종덕씨와 장회익씨가 2장에서 나오는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간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입니다..

장회익씨는 토마스 쿤처럼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패러다임의 전환과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를 강조하는 대신 각 이론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바라보는 시공간개념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보다 좀 더 예외적인 환경에만 적용되는 이론일 뿐이므로 양자사이의 관계는 불연속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다라는 시각이죠. 반면 상대성이론은 고전물리학처럼 3차원+1차원(공간과 시간을 독립적 변수로 다룰수 있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감각으로서는 이러한 분리는 자연스럽습니다. 고전역학은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독립성을 이론적 전재로 가정합니다.)을 가정하는 것이아니라 4차원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실재"를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차원을 경험적 차원에서 그치는 고전물리학에서 우주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킬수있는 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확장시킬수 있었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이 중요한 것으로 장회익씨는 강조합니다. 상대성이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고전물리학이 틀린 것으로 기각된다기보다는 상대성이론으로 고전역학을 실재의 예외적 케이스로서  메타적으로 다시 설명할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한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과의 충돌에 대해서도 이와같은 시각에서 설명가능하다고 합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가정하는 물리적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거부감을 자기고 있었습니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거부감을 표현하곤 했죠. 양자역학에 의하면 입자를 관측할 때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론화한 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이죠. 양자역학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입자의 운동을  확률론에 기반한 수학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장회익씨는 일견 큰 차이가 있는 듯한 이러한 양자역학과 기존의 물리학과의 관계도 불연속적인 성격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용해 봅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에서 출발하느게 좋다고 봅니다. 고전역학이든 양자역학이든 모든 동역학은 미래 어는 시점에서의 상태, 곧 어떤 물리적 대상에 어떤 관측이 수행될 경우 어떤 결과가 얻어질 것인가를 예측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이것을 하기 위해 몇가지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 우선 대상의 현재상태를 알아야 하고, 상태변화의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상태변화의 법칙에 현재의 상태를 넣어 미래 임의 시점에서의 미래상태를 계산해낼수가 있지요.
이러한 구조 자체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모두 같아요. 단 한가지 차이는 ‘상태’의 정의가 다른거에요. 고전역학에서는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을 ‘상태’라고 놓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을 관측해 낸 후 상태변화의 법칙(운동방정식)에 넣으면 미래 모든 시점에 이것이 가질 상태, 곧 미래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이 완벽하게 예측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상태’자체를 달리 정의해요. 대상에 대한 현재의 위치 또는 운동량의 값을 일단 관측하면 이것의 이른바 ‘고유함수’라는 수학적 함수를 결정하게 되는데, 곧 현재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일단 이것을 얻으면 이를 슈뢰딩거방정식이라 불리는 상태변화의 법칙에 넣어 미래 모든 시점에 가질 ‘상태’를 계산해내지요. 그런데 양자역학에서의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이 아니라 이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수학적 함수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위치와 운동량의 값 자체가 아니라 이들과 관괴를 맺고 있는 ‘상태함수’일 뿐이에요.“(이분법을 넘어서. 108~109쪽)

다시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실재’에 대한 ‘상태’라는 것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적 직관으로 알 수 있게 미래시점의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양자역학은 미래의 시점을 이처럼 알 수 없고 다만 ‘상태함수’라고 하는 수학적 값으로만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실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상태’의 차이일 뿐이지 양자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위치와 운동량도 일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양자역학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상태함수’도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를 표현하는 수학적 표현일 뿐이라는 겁니다. 상태함수라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려고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 한 “결정론적”인 것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장회익씨는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사이의 차이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일관된 설명하려고 합니다.

불확정성원리에 대해서도 거시적 세계는 고전역학은 고전역학의 틀로 보면 되는 것이고 미시적 세계는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의 틀로보면 되는 것인데 양자역학을 고전역학의 실재를 보는 틀로 보려고 하다보니 오해와 왜곡이 생긴다고 합니다. 닐스보어의 ‘상보성 원리’도 양자역학적 틀로서 이해해야지 그것을 고전역학적 관점으로 보려고 하면, 즉 물리적 대상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가질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관점은 고전역학에 기반한 ‘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고 장회익씨는 말합니다.

“우리는 대상이 어떤 물리량을 가졌다고 보고, 이 물리량 자체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려는 형태의 사고에서 쉽게 벗어나지를 못해요. 이런 물리량의 실재성에 무게를 둔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관점을 (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 할때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실재론에서 벗어나야 해요....(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는 것은) 예컨대 대상 입자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다’고 하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전역학에서도 이 개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고전역학에서도 이런 물리량의 측정치들을 ‘상태’로 놓고 ‘상태’개념만을 바탕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충분해요.이렇게만 하면 고전역학에서조차 이드이 ‘실재한다’고 하는 가정이 별도로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긴 해도 고전역학에서는 이 들이 ‘실재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어요.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생각하기에 편리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편리성에 익숙한 나머지 우리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까지 생각을 가지고 가려니까 무리가 생기느 거에요. 그래서 보어를 중심으로 하는 ‘코펜하겐’에서느 상보성이론을 내세워 핵심을 비켜가려 했고, 고전적인 실재 개념에 충실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아예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이분법을 넘어서. 116~117쪽)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집착했던 ‘실재’라는 것은 사실 고전적 의미의 실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실재는 이러한 고전적인 의미의 다시말해 좁은 의미의 실재는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죠. 이런 실재개념으로 양자역학을 아인슈타인은 보았기 때문에 그는 불확정성 원리나 '코펜하겐 해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고전적 의미의 실재를 거부하는 양자역학은 실재가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실재론’인가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회익씨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대신 실재라는 개념자체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보통 대상이 실재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물리적 대상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전 역학에서는 가능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죠. 때문에 고전역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양자역학적 실재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러한 고전적 의미에서의 실재개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단순히 그것을 반실재론이나 관념론으로 치부할수는 없다는 것이죠. 때문에 장회익씨는..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둘 다 바탕은 여전히 실재론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과 실재 사이의 개념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지적한 것이고, 보어는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을 나름대로의 여러 방편을 써서 구제하려 했던 거지요. 실재성을 깨끗하게 접어버리면 문제도 안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이런 점에서 보어의 양자론 해석이 반실재론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힘들어요.”

이에 대해 최종덕씨도 동의하면서 자신의 독일유학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의 상태도 “넓은 의미의 실재론”이라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은 그러한 실재론은 “과학이론을 넘어선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가령 서양의학의 생리학으로는 설명불가능한 한의학이 과학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듯이 말이죠. 장회익씨는 결국 대상이 어떤 결정론적인 물리량을 가진다는 실재개념은 불필요하고 “오직 ‘상태’라는 개념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은 서로 대립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어떻게보면 장회익씨의 이런 관점은 일종의 '메타물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리적 대상과 실재에 대한 보다 보편적 관점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한편 이러한 서양에서의 실재개념은 플라톤적인 철학적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그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이러한 서구사상의 뿌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될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이부분에 대해서 즉 고전적 실재개념이 플라톤에 의해서 형성되었느냐는 사실 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형상이론에 기반한 플라톤적 의미의 실재는 시공간에서의 연장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런 관점에서 플라톤의 형상 혹은 이데아이론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정작 플라톤은 그러한 실재론을 이야기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최종덕씨의 수학을 보는 관점도 저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보입니다. 그는 수학을 대상을 기술하기 위한 기술적 언어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처럼 말이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기회에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3장에서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특히 장회익씨의 “온생명”개념을 주로 논하는데요. 제가보기에 장회익씨의 이 온생명개념은 그가 가진 독특한 실재개념(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닐스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비하여 "서울해석"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것 같더군요.)이 확대적용된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온생명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간주하는 개별 생물체를 ‘낱생명’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보완해주는 주변환경, 이를테면 지구와 태양등을 ‘보생명’이라고 규정합니다. 낱생명은 이러한 보생명의 뒷받침없이는 그 생명을 유지할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생명단위로 생명을 규정하는 낱생명으로 생명을 보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라고 할수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낱생명과 보생명을 포괄하는 통합적이면서도 자기완결적인 ‘온생명’으로 보았을 때에만 보다 완전한 생명개념을 가질 수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명개념은 오늘날처럼 생태와 환경보호가 이슈가 되는 시점에서 자연과 그 환경을 보다 통합적으로 볼수있다는 장점이 있어보입니다. 얼핏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보이는 개별 생명체가 사실은 그 생명체가 살고있는 주변환경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관점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처럼 장회익씨와 최종덕씨는 이 책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학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대담을 펼칩니다.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꼭 일독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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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님 2008-02-1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금 읽고있어요,, 이 책을 어떤 분의 소개로 접하고, 이제 3장에 접어들었는데요^^
이책을 통해 너무 부족한 제 배경지식을 깨닫고 더 공부해 보려구요~ 너무 깔끔하게 정리 하셨어요~

yoonta 2008-02-18 20:59   좋아요 0 | URL
5장도 흥미롭더군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의식과 물질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받으시더라고요. 철학자와 자연과학자간의 이러한 소통작업이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너무 이러한 인문학과 과학간의 소통작업을 소홀히 해왔던 면이 있었죠.

지제크 2008-02-2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대담집이 출판되었지만 과학과 철학이 이렇게 진지하게 만난적은 한국에서는 드문 일인거 같습니다. 저도 2장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님이 정리한 내용을 보니 다시 그 부분이 읽고 싶어지네요.실재론과 수학에 대한 님의 남다른 견해를 서둘러 듣고 싶어집니다.

yoonta 2008-03-01 00:26   좋아요 0 | URL
실재라는 것의 규정을 경험적 감각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저는 장회익씨의 실재개념을 이해합니다. 저도 이러한 관점에 동의합니다. 사실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이후 지속적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는 영역으로까지 확장해 왔습니다. 4차원을 뛰어넘어 초끈이론등에서는 11차원 이상의 물리적 세계가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실재의 본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수있는 영역너머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회익씨의 실재개념도 이러한 실재개념의 확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수학과 관련해서는 어느구절이었는지 책들 다시 찾아봐야하는데 최종덕씨의 경우 수학을 실재 그 자체를 내용으로 가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실재를 기술하기위한 방법으로만 규정했던 내용이 보이더군요. 저는 이보다는 수학이 대상적 실재를 가진다는 플라톤주의적 수학론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괴델이 그러한 실재론적 수학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준 케이스이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로 정리해서 올릴 생각입니다.
 

내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이천화재사건에 달린 네이버댓글들의 반응들의 배경에는 현상적으로 보이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단순한 혐오감이나 차별의식 그 이상의 것이 있지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나도 지금의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소위 '인권'을 강조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들의 인권도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은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의무'다. 때문에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동의하며 그들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 배타는 여러 지점에서 잘못된 것임을 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덕적 의무만으로 그들을 바라보기에는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이때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이 발동하게 된다. 즉 내국인들의 이러한 적개심의 이면에는 단순한 배타심을 넘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예컨대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의 배경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혹은 과거 LA에서 벌어졌던 흑인폭동 때 흑인들이 한인들을 혐오하여 한인가게들을 습격한 것의 배경에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중국에서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데에는 단순히 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해서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사회역사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과같은 문제의식같은 것 말이다.

이렇게 현상의 배후을 들춰봐야, 문제의 원인들 좀더 다양하게 들여다 봐야 문제를 좀 더 잘 해결할수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때문에 지금 점점 심화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거부감의 이면에는 단순히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만 지적해서는 해결될수 없는 보다 현실적인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가 가진 문제의식인 것이다.

그래서 이문제에 대해 내가 나름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지금 현재 한국내의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그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을 불러올 만큼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한가지 밖에 없지 않은가? 외국인 노동자의 수를 줄이거나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는 것말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는 그들이 단순히 이질적인 인종 혹은 민족이고 한국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의 '인권의식'을 지적하는 선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하지만 외국인노동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 동종업종에서 그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인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못하는 것과같은 문제가 있다면 단순히 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아닌가?

따라서 그 해결책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의 수를 조절할 필요성을 balmas님과의 대화중  이야기했던 것이고 그 논거로 유럽의 소위 복지국가들의 엄격한 외국인 노동자수의 관리 혹은 이민등의 예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자유로운 미국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노동자들의 복지문제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같은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것이다. 

이 예를 통해 우리가 추론해 볼수 있는 것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이 자유로울 수록 그 나라의 노동유연성은 강화되고 또 노동유연성이 강화될수록 그 나라의 노동환경은 그만큼 악화될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외국인노동자들을 '수요'하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다. 바로 그들의 저임금을 착취하려는 자본가 혹은 고용주들 아닌가? 동종업종에서 일하는 한국인노동자들이 좀더 낮은 임금으로 일할수있는 외국인노동자들과 일부러 경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그들 자본가나 고용주의 '수요'를 다시말해서 자본의 논리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왜 그것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기치로 내거는 '진보'가 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처럼 외국인노동자을이 지속적으로 증대된다면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차별은 더욱 극심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닌가? 따라서 한국 노동환경이 좀더 보호되고 북유럽국가들처럼 "진보적인" 복지시스템을 정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외국인노동자의 수는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잠정 결론이었다. 여기까지가 balmas님이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그리고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다.

다시한번 지적하자면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차별과 무시가 올바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일단 한국에 정당한 방법으로 들어와 일한다면 당연 한국인과 동등한 권리와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불가피하게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조절할수밖에 없는 "경제"적 문제가 뒤섞여 있지 않은가 하는것이고 때문에 이것을 단순히 한국인들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의식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지금처럼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권의식의 취약만 지적하고 정작 사태를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주범들인 자본가들과 고용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문제에 대한 해법은 존재할수 없다고 본다. 더 나은 해결책이 있으신 분들은 나에게 한수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이런 이야기를 balmas님과 했던 것인데 그분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단다. 그것이 "진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이런 "경제학"은 재정경제부나 법무부 관리들이나 해야할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자신은 관심없는 일이니 그만 자기 블로그에 댓글 올리는 짓을 "자중'하란다.

이것이 발마스님의 진보적 "철학도"로서의 자세인가 보다.

여기까지가 balmas님과 있었던 해프닝의 전모이고 내가 댓글단 내용의 전부이다.

p.s. 사실 알라딘블로그에서는 이런 사회적 이슈들은 잘 토론하지 않는다.  블로그성격이 성격인 만큼 주로 책과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믿기 힘든 분들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동안 나름대로 이곳에서 "자중"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타인으로부터 "자중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듣기 매우 거북하더라. 기왕에 알아서 하던 "자중"을 "철학도"의 충고도 있고 한데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것이 나의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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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01-16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마립간입니다. 영화 Cape fear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회색인입니다.)

yoonta 2008-01-16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근데 그 영화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시는지요.

마립간 2008-01-17 10:15   좋아요 0 | URL
Cape fear에서 닉 놀테가 변호사로 나오는데, 악당(로버트 드니로)에 대해 최선의 변호의 당위성에 대한 부분있습니다. 한편 악당에게 최선의 변호로 법망을 피하게 되는 것(대개 돈만 아는 변호사로 비판받게 되는데)도 정의로운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안한 것 어떤 사항이 이런 저런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니 저의 주의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는 부작용은 생각하지 않고 인권만 생각하면 된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여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위 논의와 관련하여 연민을 느낄 사건에서 그 것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종합적으로 생각할 것인가로 귀결됩니다./2005년 12월 20일자 '동전의 앞면 뒤면' 제목의 페이퍼가 있습니다. (http://blog.aladdin.co.kr/maripkahn/787511) 시간이 있을 때 읽고 의견주십시오.

yoonta 2008-01-1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그런 맥락이셨군요.^^ 악당에게 최선의 변호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것 참 고민되죠. 도덕적 딜레마상황이라고나 할까? 님 블로그에서 본 기숙사문제도 어느것이 맞다고 딱 꼬집어 말할수 없는 경우고..이런 경우 윤리나 도덕의 선차성문제가 걸리므로 쉽사리 단언할수없는 경우죠. 전 이런 경우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간의 관계 즉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절대적 윤리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상대적 다수가 납득할 수있는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실 오늘날 우리가 다수결에 의해 정치지도자를 뽑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타협의 결과물이죠. 고대그리스와 같은 추첨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가 아무리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요 윤리적인 정치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현실에서는 사실상 작동불가능하므로 대신 실행가능한 선에서 절충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는것인데..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괴리를 일으킬때 어떻게 하면 그것들간의 합의와 타협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실을 규제하고 보다 나은 이상을 제기하는 행위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그것이 정치라고하는 당면한 현실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갈등해야 하는 공간에서는 더욱 긴급한 과제가 될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사실 위에서 언급한 외국인 노동자수문제는 케이프피어의 변호사나 기숙사상황보다는 그래도 도덕적 딜레마가 덜한 상황인것 같아 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문제와 그들의 수를 조절하는 문제는 꼭 전자가 후자를 침해한다고 볼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무한대로 늘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국내 노동환경이 악화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선에서 '조절'할까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사항인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침해'가 되는 것인지 납득할수 없단 것입니다. 도리어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향상을 위해서라도 그것은 조절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만약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보호?라는 명분으로 그들이 보다 자유롭게 한국에 입국하게 되면 넘쳐날정도로 많아진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그들끼리 또다시 경쟁할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한국에서의 임금도 더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종업종에서 일하는 한국인노동자의 상황도 덩달아 악화되고 이에따라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예상은 사실 불을 보듯 뻔한것 아닙니까?

이처럼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면으로 보나 저런 면으로 보나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그것을 이야기하면 '인권침해'로 연결하는 것인지 전 그것을 납득할수 없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문제는 사실 딜레마라고 말할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어느 수준의 외국인노동자의 수가 적정한가에는 이견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지금수준이 적정한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적거나 많을 수도 있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수를 조절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balmas라는 분은 이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듣기조차 싫어하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혼자서 책만 잘 파면 그럴듯한 도덕이나 윤리이론으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말해 현실의 문제해결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탁상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나 스피노자나 니체 철학 혹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의 위대성은 그 이론체계의 뛰어남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현실과 만났을때 보다 풍부한 고민의 지점 그리고 해결의 대안들을 내올수 있어서 아닌가요? 그렇지 못한 뛰어난 이론이나 사상은 이론이나 체계로서는 뛰어날수있을지언정 현실과는 괴리를 일으키므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칭송받는 이야기가 될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진보를 추구하는 모든 담론들과 실천들은 이런 문제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고 또 그것자체가 일종의 도덕이요 '의무'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립간 2008-01-18 17:47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지제크 2008-01-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문제제기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내용인건 분명한 듯 합니다. 인권은 사회와 불가분의 개념이고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사회와 연결되는 개념임에야 당연히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죠.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지 않는 공부는 개인적 삶의 쾌락으로서 배제해서는 안되겠지만 대체로 자기도취나 자기기만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론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올때 예상할 수 있는(물론 없는것까지 뚫어보신다면 더더욱 좋겠지만)난점들을 제기하는데 님이 자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현실과 맞닥뜨리지 않는 이론은 탄탄해질법이 없을테니까요.

yoonta 2008-01-26 20:02   좋아요 0 | URL
인권에 대한 철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접근도 물론 필요합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올바른 '규제적 이념'을 제공하는 것이 철학과 윤리학의 존재의의겠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철학이나 윤리학은 항상 그 이념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부조리한 현실이 이상적 현실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념들 자체도 변화된 현실에 맞춰 새롭게 정초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속에서 어떠한 윤리가 요청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단순히 이념의 차원에서만 고려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윤리나 이념이 한 사회의 현실에 제기되었을때 양자간에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더우기 그런 일들은 현실의 공간속에서 실천적으로 검증되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되도록 서로간의 활발한 토론과 의견교환이 요청됨은 물론이겠지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balmas님처럼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와 같은 윤리학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 왜 자신의 블로그까지 방문해서 댓글 단 사람에게 이와 관련된 토론을 하려고 하지 않은지 참 의아하더군요. 만약 제 의견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러이러해서 그런 생각에는 문제가 있지않느냐라고 비판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데요. 암만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네요.

chomskyy님의 격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http://blog.aladin.co.kr/balmas/1828689

 "윤타님/ 참 철없는 철학도에게 이렇게 경제정책의 어려움에 대해 훈계해주시는 건 감사한데, 제 얘기는 간단합니다. 윤타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 저는 별 관심이 없고, 다만 윤타님 얘기는 "진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윤타님은 집권할지도 모를 민노당="진보 진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는 진보는 그것과는 좀 다르니까 그만 자중하시죠."

 

이 분과의 대화?(이분에게는 대화가 아니었나보다.) 중 들은 이야기다.

과연 내가 "자중"해야 할 일인가?

또 무엇을 "자중"하라는 것인가?

설령 자신과 전혀 견해와 주장이 다른 이야기를 할지라도

어떻게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을지 정말 신기하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황당무계한 억지주장을 펼친 것도 아니요..

모욕적인 언사를 발설한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나름 이 분이 하는 철학공부에도 관심이 있고 정치적 성향도 비슷한 것 같아

가끔씩 들러서 댓글도 달고 문의도 하고 하던 블로그인데..

느닷없이 이런 반응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면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이런 식의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알라딘에 블로그를 만든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이번처럼 모욕감을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야 되나?

아니면 사과를 요구해야 할까?

 

정말  "자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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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이 2008-01-1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신의 댓글은 삭제한 채 이런 식의 글을 올리는 건 보기 좋지 않군요.

yoonta 2008-01-14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그런 면이 있네요. 그분에겐 제 댓글이 헛소리일뿐이므로 삭제한 것이니 오해는 없으시기바랍니다. 전후 사정은 당사자인 balmas님이 가장 잘 알겠죠. 지나가다 그 내용을 보신 분들도 있으실텐데 도발적 표현을 사용한적은 없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저도 좀 뜻밖의 반응이라 좀 당황스러운데요.

저렇게 상대방 의견을 존중할 줄도 대화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소위 인권보호를 이야기한다는게 참 어이없게 느껴지네요.
 

프레시안에 기고한 진중권씨의 글이다.

이곳 알라딘에서 바람구두님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댓글로 이야기한 바 있지만( http://blog.aladin.co.kr/windshoes/1786530)개인적으로는 진중권씨나 아니면 홍세화씨(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447) 혹은 조승수나 이광일씨가 주장하는 보다 적극적인 해법에 동의한다. 최악의 경우 분당하고 당명도 개정하여 신당창당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민노당내의 다수파는 대선의 실패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결코 그들의 핵심인 종북노선의 폐기를 수용할 것 같지는 않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8461) 민노당의 자주파 중앙위원들이 종북주의노선의 폐기를 결국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인데 이에 대해서 평등파 내부에서도 신당창당을 해야되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 민노당 아니 한국진보세력들은 자주파와 어설픈 연합을 해왔다. 그러나 자주파가 계속해서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 노선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좌파진영은 더 이상 이들을 진보세력의 동지로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추종하는 친북노선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한국자본주의가 차지하는 세계적 위상을 고려했을 때 진보적인 좌파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데 민노당은 과거 이들의 입당을 당원늘리기 차원에서 그동안 무분별하게 수용해 왔던 것이다. 

한국에서  좌파가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려면 자주파의 종북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해야만 한다 .  민노당의 쇄신에서부터 그 잘못된 운동관행과는 이제 그만 결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좌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노당 쇄신, '새 진보정당' 건설이 답이다
[기고] '자주' 앞세운 당내 '종북파'와 결별하라

2007-12-30 오후 1:40:54





4년 전이던가? 언론에 '자주파'로 소개되는 종북주의자가 대거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여 조직의 신경망을 장악해 가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이들을 무차별 입당시키는 데에 개인적으로 항의하기 위해 '탈당'을 했었다. 곪은 상처는 결국 골아터질 수밖에 없는 것. 그때 내가 탈당으로 경고, 혹은 경계했던 사태가 이제 현실로 나타난 모양이다.

종북파는 진보정당의 당원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섬기는 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고, 그들에게 민주노동당은 그저 북한 정권을 보위하는 활동의 수단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당직자 명단을 북한의 정보부에 넘겨주었다가 구속된 간첩이 아직도 당에서 생활보조금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다.

김창현 사무총장이 당에 종북파는 없다고 우기는 모양이다. 왜 그는 유권자 앞에서 거짓말을 할까? 유권자들을 향해 내가 명예를 걸고 분명히 말하는데, 민주노동당 안에 종북파는 존재하고, 그것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그들의 영향력은 최소한 전직 의원의 입에서 '차라리 분당을 하자'는 주장이 나올 정도는 된다.

민노총 위원장이 당을 찾아와 조승수 전 의원을 징계하라고 요구했단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에 대해 갖는 영향력을 통해 내부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모양인데, 입은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종북은 종북이라 불러야지, 왜 호부호형조차 못하게 막으려는 걸까? 위원장님, 민주노동당 상황 전혀 모르세요? 민주노동당에 종북파 아주 많습니다.

아직도 저런 식의 거짓말이 통할 거라 믿는 모양이다. 여기서 이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드러난다. 진보는 대중 앞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에 분명히 종북파들이 있는데, 어떻게 대중 앞에 나가서 없다고 거짓말을 하란 말인가. 그런 것은 진보가 아니라 정치적 사기일 뿐이다.

국가보안법 핑계 대지 말라. 과거에 사회주의자들은 법정에서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당당히 구속됐었다. 자신이 가진 이념이 그렇게 밖으로 드러내기에 부끄러운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도대체 왜 하는가?

당에 종북파를 받아들인 것은 아마 그들과 '공생'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 판단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내가 읽고 보고 들어서 아는 한, 종북파는 진보가 아니라 수구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어서,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의 형식에 '기생'하여 종파적, 패권적 행태를 계속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생의 꿈은 결국 기생의 현실로 나타났다. 원래 기생충은 독자적으로는 생존하지 못하는 법.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어디 봉건 사회주의 따위가 정치이념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종북파들은 기생할 숙주로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던 것이다.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 떠들던 이들이 왜 갑자기 진보정당으로 몰려왔겠는가?

선거에 대패하고도 벌써 비례대표에 눈독 들였던 것을 생각해 보라. 국회에서 남한의 유권자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북한의 정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하는 것. 그리고 후자가 곧 전자라고 우기는 것이 그들이다. 북한 정보부에 당직자 명단도 넘겨주는 판에, 그들이 아예 국회의원이 되어 봐라.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안 봐도 비디오다.

심상정 의원 내세워 대충 봉합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다. 위를 가득 채운 기생충들에게 잠시 대장 쪽으로 내려가 있으라 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기생충의 수가 너무 많아 숙주의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다시 신뢰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당 내부에 종북파가 많다는 사실을 유권자들 앞에 솔직히 고백해야 한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유권자들을 속일 작정인가? 둘째, 그 동안 종북파들이 했던 온갖 해당행위에 대해 출당을 비롯한 엄중한 처벌조치가 있어야 한다. 셋째, 앞으로 당이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제도적 보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불행히도 그런 '혁신'은 불가능해 보인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그들이 과연 이깟 일로 자신들의 목표를 포기하겠는가?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이제 진지하게 분당의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라 부르든, '민주사회주의'라 부르든, '사회국가'의 실현을 이념으로 하는 현대적 좌파정당을 건설해야 한다.

종북파와는 애초에 만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민족자주당 만들어서 열심히 '조국통일사업'에 매진하게 내버려 두라. 이들과 정치적 목표가 다른 이들은 현대성에 부합하는 새로운 좌파정당을 건설하여, 그 길로 나아가면 된다. 뭐 하러 전혀 다른 정치적 목표를 가진 두 세력이 하나의 당에서 계파싸움이나 하면서 정력을 낭비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말대로 "래디컬하다는 것은 사물의 뿌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태의 급진적 해결이 필요하다. 신뢰의 추락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앞길이 아득하기도 하다. 하지만 더뎌 보여도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혁신적 좌파정당을 원하는 대중의 욕망은 아직도 이 사회에 충분히 뜨겁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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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문학은 글쓰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글을 쓰는지 50%정도만 알고 쓴 행위의 결과물이다. 글쓴이도 모르는 절반에 대해서는 제3자가 아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철학: 철학은 글쓰는 사람이 자신이 무슨 글을 쓰는지 70%정도만 알고 쓴 행위의 결과물이다. 글쓴이도 모르는 30%는 제3자가 아는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가 틀렸다고 말 할 수 있다.

 

 

 

 

 

p.s. 나도  이 글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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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0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렵군요. -_-a

yoonta 2007-12-11 01:48   좋아요 0 | URL
제가 써놓고도 맞는 말인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람혼 2007-12-11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이 글은 문학일까요 철학일까요? ^^ 어쨌든 삼자인 저로서는 아는 척은 할 수 있겠군요!ㅎㅎ^^;;

yoonta 2007-12-11 01:52   좋아요 0 | URL
(50+70)/2, 즉 60%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이야 2007-12-2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어느 글(대부분이었지만)이 철학적이라는 말로 비평을 한 사람이 있어요.
그분이 뭘 알고 그런 말을 한 건지, 그땐 속으로 발끈했지요.
문학과 철학, 철학적인 글, 문학적인 철학?, 어느 쪽이든
글에는, 그것이 문학이든, 자신만의 철학이 담겨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저로선
'철학적'이라는 말로 까려는 그분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지요. 저만의 철학이 읽혔다는
증거니까요. 나쁘지 않아요. 문학이든 철학이든 그 '과정'에 의미가 있으니 당연히
100%도 아닐테고 100%일 수도 없겠지요. 공감하거나 안 하거나 그것으로 소통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어야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100%이어서도 안 된다는
는 말이 되나요.^^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네요.
윤타님이 쓰신 글에 98% 공감합니다. 나머지 2%는 그냥 남겨두기로 해요^^
남은 12월 차분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yoonta 2007-12-21 01:05   좋아요 0 | URL
98%나 공감해주신다니..^^ 철학이라는게 원래 하나의 체계적 논리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개인의 판단일 가능성이 높죠. 때문에 서로가 그 개인적 판단의 가능성을 인정할 필요가 요청되고 그래서 칸트가 철학에 윤리를 도입하기도 했던 것이죠..그런데 그 윤리를 종종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쓰잘데기없이 말이 또 길어지려고 하네요. 저도 이만 줄이겠습니다. 새해에도 항상 좋은 일만 생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