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이분법을 넘어서"라는 책입니다.
철학자 최종덕씨와 물리학자 장회익씨가 만나서 대담한 것을 정리한 책인데요.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최종덕씨와 장회익씨가 2장에서 나오는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간의 관계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입니다..

장회익씨는 토마스 쿤처럼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패러다임의 전환과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를 강조하는 대신 각 이론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예컨대 뉴턴의 고전 물리학이 바라보는 시공간개념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보다 좀 더 예외적인 환경에만 적용되는 이론일 뿐이므로 양자사이의 관계는 불연속적이라기보다는 연속적이다라는 시각이죠. 반면 상대성이론은 고전물리학처럼 3차원+1차원(공간과 시간을 독립적 변수로 다룰수 있다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감각으로서는 이러한 분리는 자연스럽습니다. 고전역학은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독립성을 이론적 전재로 가정합니다.)을 가정하는 것이아니라 4차원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실재"를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의 차원을 경험적 차원에서 그치는 고전물리학에서 우주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시킬수있는 보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확장시킬수 있었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이 중요한 것으로 장회익씨는 강조합니다. 상대성이론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고전물리학이 틀린 것으로 기각된다기보다는 상대성이론으로 고전역학을 실재의 예외적 케이스로서  메타적으로 다시 설명할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한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과의 충돌에 대해서도 이와같은 시각에서 설명가능하다고 합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가정하는 물리적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거부감을 자기고 있었습니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로서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거부감을 표현하곤 했죠. 양자역학에 의하면 입자를 관측할 때 그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론화한 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이죠. 양자역학은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입자의 운동을  확률론에 기반한 수학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런데 장회익씨는 일견 큰 차이가 있는 듯한 이러한 양자역학과 기존의 물리학과의 관계도 불연속적인 성격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용해 봅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차이에서 출발하느게 좋다고 봅니다. 고전역학이든 양자역학이든 모든 동역학은 미래 어는 시점에서의 상태, 곧 어떤 물리적 대상에 어떤 관측이 수행될 경우 어떤 결과가 얻어질 것인가를 예측해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이것을 하기 위해 몇가지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 우선 대상의 현재상태를 알아야 하고, 상태변화의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상태변화의 법칙에 현재의 상태를 넣어 미래 임의 시점에서의 미래상태를 계산해낼수가 있지요.
이러한 구조 자체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모두 같아요. 단 한가지 차이는 ‘상태’의 정의가 다른거에요. 고전역학에서는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을 ‘상태’라고 놓기 때문에 현재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을 관측해 낸 후 상태변화의 법칙(운동방정식)에 넣으면 미래 모든 시점에 이것이 가질 상태, 곧 미래의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이 완벽하게 예측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상태’자체를 달리 정의해요. 대상에 대한 현재의 위치 또는 운동량의 값을 일단 관측하면 이것의 이른바 ‘고유함수’라는 수학적 함수를 결정하게 되는데, 곧 현재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일단 이것을 얻으면 이를 슈뢰딩거방정식이라 불리는 상태변화의 법칙에 넣어 미래 모든 시점에 가질 ‘상태’를 계산해내지요. 그런데 양자역학에서의 ‘상태’는 위치와 운동량의 값들이 아니라 이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수학적 함수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건 위치와 운동량의 값 자체가 아니라 이들과 관괴를 맺고 있는 ‘상태함수’일 뿐이에요.“(이분법을 넘어서. 108~109쪽)

다시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실재’에 대한 ‘상태’라는 것이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고전역학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적 직관으로 알 수 있게 미래시점의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양자역학은 미래의 시점을 이처럼 알 수 없고 다만 ‘상태함수’라고 하는 수학적 값으로만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실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상태’의 차이일 뿐이지 양자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위치와 운동량도 일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양자역학적으로 계산해 낼 수 있는 ‘상태함수’도 이와 마찬가지의 ‘상태’를 표현하는 수학적 표현일 뿐이라는 겁니다. 상태함수라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려고 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는 한 “결정론적”인 것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장회익씨는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사이의 차이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으로 일관된 설명하려고 합니다.

불확정성원리에 대해서도 거시적 세계는 고전역학은 고전역학의 틀로 보면 되는 것이고 미시적 세계는 양자역학은 양자역학의 틀로보면 되는 것인데 양자역학을 고전역학의 실재를 보는 틀로 보려고 하다보니 오해와 왜곡이 생긴다고 합니다. 닐스보어의 ‘상보성 원리’도 양자역학적 틀로서 이해해야지 그것을 고전역학적 관점으로 보려고 하면, 즉 물리적 대상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가질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관점은 고전역학에 기반한 ‘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고 장회익씨는 말합니다.

“우리는 대상이 어떤 물리량을 가졌다고 보고, 이 물리량 자체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려는 형태의 사고에서 쉽게 벗어나지를 못해요. 이런 물리량의 실재성에 무게를 둔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관점을 (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 할때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실재론에서 벗어나야 해요....(좁은 의미의 실재론이라는 것은) 예컨대 대상 입자 자체의 존재성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다’고 하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전역학에서도 이 개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고전역학에서도 이런 물리량의 측정치들을 ‘상태’로 놓고 ‘상태’개념만을 바탕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충분해요.이렇게만 하면 고전역학에서조차 이드이 ‘실재한다’고 하는 가정이 별도로 더 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긴 해도 고전역학에서는 이 들이 ‘실재한다’고 해도 안 될 것은 없어요.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것이 생각하기에 편리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유의 편리성에 익숙한 나머지 우리는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까지 생각을 가지고 가려니까 무리가 생기느 거에요. 그래서 보어를 중심으로 하는 ‘코펜하겐’에서느 상보성이론을 내세워 핵심을 비켜가려 했고, 고전적인 실재 개념에 충실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아예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이분법을 넘어서. 116~117쪽)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집착했던 ‘실재’라는 것은 사실 고전적 의미의 실재라는 겁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실재는 이러한 고전적인 의미의 다시말해 좁은 의미의 실재는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었죠. 이런 실재개념으로 양자역학을 아인슈타인은 보았기 때문에 그는 불확정성 원리나 '코펜하겐 해석'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고전적 의미의 실재를 거부하는 양자역학은 실재가 의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실재론’인가가 문제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회익씨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대신 실재라는 개념자체를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보통 대상이 실재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물리적 대상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전 역학에서는 가능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죠. 때문에 고전역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양자역학적 실재는 실재하지 않는 대상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이러한 고전적 의미에서의 실재개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를 이론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단순히 그것을 반실재론이나 관념론으로 치부할수는 없다는 것이죠. 때문에 장회익씨는..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둘 다 바탕은 여전히 실재론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통해 드러나는 현상과 실재 사이의 개념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지적한 것이고, 보어는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을 나름대로의 여러 방편을 써서 구제하려 했던 거지요. 실재성을 깨끗하게 접어버리면 문제도 안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이런 점에서 보어의 양자론 해석이 반실재론이라는 관점에는 동의하기 힘들어요.”

이에 대해 최종덕씨도 동의하면서 자신의 독일유학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의 상태도 “넓은 의미의 실재론”이라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독일학자들은 그러한 실재론은 “과학이론을 넘어선 지나친 확대해석”이라는 평가를 들었다고 하더군요. 가령 서양의학의 생리학으로는 설명불가능한 한의학이 과학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듯이 말이죠. 장회익씨는 결국 대상이 어떤 결정론적인 물리량을 가진다는 실재개념은 불필요하고 “오직 ‘상태’라는 개념만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역학과 고전역학은 서로 대립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죠. 어떻게보면 장회익씨의 이런 관점은 일종의 '메타물리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리적 대상과 실재에 대한 보다 보편적 관점을 승인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한편 이러한 서양에서의 실재개념은 플라톤적인 철학적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그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이러한 서구사상의 뿌리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될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이부분에 대해서 즉 고전적 실재개념이 플라톤에 의해서 형성되었느냐는 사실 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형상이론에 기반한 플라톤적 의미의 실재는 시공간에서의 연장을 반드시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런 관점에서 플라톤의 형상 혹은 이데아이론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정작 플라톤은 그러한 실재론을 이야기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최종덕씨의 수학을 보는 관점도 저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보입니다. 그는 수학을 대상을 기술하기 위한 기술적 언어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비트겐슈타인이나 러셀처럼 말이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른 기회에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3장에서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특히 장회익씨의 “온생명”개념을 주로 논하는데요. 제가보기에 장회익씨의 이 온생명개념은 그가 가진 독특한 실재개념(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닐스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비하여 "서울해석"이라고 말하기도 하는것 같더군요.)이 확대적용된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온생명개념은 우리가 흔히 생명이라고 간주하는 개별 생물체를 ‘낱생명’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보완해주는 주변환경, 이를테면 지구와 태양등을 ‘보생명’이라고 규정합니다. 낱생명은 이러한 보생명의 뒷받침없이는 그 생명을 유지할수 없죠.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생명단위로 생명을 규정하는 낱생명으로 생명을 보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라고 할수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러한 낱생명과 보생명을 포괄하는 통합적이면서도 자기완결적인 ‘온생명’으로 보았을 때에만 보다 완전한 생명개념을 가질 수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명개념은 오늘날처럼 생태와 환경보호가 이슈가 되는 시점에서 자연과 그 환경을 보다 통합적으로 볼수있다는 장점이 있어보입니다. 얼핏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보이는 개별 생명체가 사실은 그 생명체가 살고있는 주변환경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관점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처럼 장회익씨와 최종덕씨는 이 책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학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대담을 펼칩니다.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꼭 일독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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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님 2008-02-1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금 읽고있어요,, 이 책을 어떤 분의 소개로 접하고, 이제 3장에 접어들었는데요^^
이책을 통해 너무 부족한 제 배경지식을 깨닫고 더 공부해 보려구요~ 너무 깔끔하게 정리 하셨어요~

yoonta 2008-02-18 20:59   좋아요 0 | URL
5장도 흥미롭더군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의식과 물질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서로 주고받으시더라고요. 철학자와 자연과학자간의 이러한 소통작업이 앞으로 더 많이 이루어졌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너무 이러한 인문학과 과학간의 소통작업을 소홀히 해왔던 면이 있었죠.

지제크 2008-02-2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대담집이 출판되었지만 과학과 철학이 이렇게 진지하게 만난적은 한국에서는 드문 일인거 같습니다. 저도 2장을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님이 정리한 내용을 보니 다시 그 부분이 읽고 싶어지네요.실재론과 수학에 대한 님의 남다른 견해를 서둘러 듣고 싶어집니다.

yoonta 2008-03-01 00:26   좋아요 0 | URL
실재라는 것의 규정을 경험적 감각에 국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저는 장회익씨의 실재개념을 이해합니다. 저도 이러한 관점에 동의합니다. 사실 현대물리학은 양자역학이후 지속적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는 영역으로까지 확장해 왔습니다. 4차원을 뛰어넘어 초끈이론등에서는 11차원 이상의 물리적 세계가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죠. 그런 점에서 실재의 본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수있는 영역너머에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회익씨의 실재개념도 이러한 실재개념의 확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수학과 관련해서는 어느구절이었는지 책들 다시 찾아봐야하는데 최종덕씨의 경우 수학을 실재 그 자체를 내용으로 가지는 지식이라기보다는 실재를 기술하기위한 방법으로만 규정했던 내용이 보이더군요. 저는 이보다는 수학이 대상적 실재를 가진다는 플라톤주의적 수학론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괴델이 그러한 실재론적 수학의 가능성을 가장 잘 보여준 케이스이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로 정리해서 올릴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