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이천화재사건에 달린 네이버댓글들의 반응들의 배경에는 현상적으로 보이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단순한 혐오감이나 차별의식 그 이상의 것이 있지않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나도 지금의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소위 '인권'을 강조하는 태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들의 인권도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은 칸트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의무'다. 때문에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동의하며 그들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 배타는 여러 지점에서 잘못된 것임을 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덕적 의무만으로 그들을 바라보기에는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이때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의식이 발동하게 된다. 즉 내국인들의 이러한 적개심의 이면에는 단순한 배타심을 넘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 예컨대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혐오의 배경에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혹은 과거 LA에서 벌어졌던 흑인폭동 때 흑인들이 한인들을 혐오하여 한인가게들을 습격한 것의 배경에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중국에서 인권이 보호받지 못하는 데에는 단순히 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해서라기보다는 뭔가 다른 사회역사적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과같은 문제의식같은 것 말이다.

이렇게 현상의 배후을 들춰봐야, 문제의 원인들 좀더 다양하게 들여다 봐야 문제를 좀 더 잘 해결할수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때문에 지금 점점 심화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거부감의 이면에는 단순히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만 지적해서는 해결될수 없는 보다 현실적인 지점들이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 내가 가진 문제의식인 것이다.

그래서 이문제에 대해 내가 나름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지금 현재 한국내의 외국인 노동자의 수가 그들에 대한 지나친 적개심을 불러올 만큼 너무 많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한가지 밖에 없지 않은가? 외국인 노동자의 수를 줄이거나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하는 것말이다.

외국인노동자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는 그들이 단순히 이질적인 인종 혹은 민족이고 한국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인의 '인권의식'을 지적하는 선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하지만 외국인노동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 동종업종에서 그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한국인들의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못하는 것과같은 문제가 있다면 단순히 그들의 인권의식의 부재만을 탓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 아닌가?

따라서 그 해결책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의 수를 조절할 필요성을 balmas님과의 대화중  이야기했던 것이고 그 논거로 유럽의 소위 복지국가들의 엄격한 외국인 노동자수의 관리 혹은 이민등의 예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상대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자유로운 미국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노동자들의 복지문제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같은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것이다. 

이 예를 통해 우리가 추론해 볼수 있는 것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이 자유로울 수록 그 나라의 노동유연성은 강화되고 또 노동유연성이 강화될수록 그 나라의 노동환경은 그만큼 악화될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사실 외국인노동자들을 '수요'하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다. 바로 그들의 저임금을 착취하려는 자본가 혹은 고용주들 아닌가? 동종업종에서 일하는 한국인노동자들이 좀더 낮은 임금으로 일할수있는 외국인노동자들과 일부러 경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그들 자본가나 고용주의 '수요'를 다시말해서 자본의 논리를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왜 그것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기치로 내거는 '진보'가 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지금처럼 외국인노동자을이 지속적으로 증대된다면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차별은 더욱 극심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닌가? 따라서 한국 노동환경이 좀더 보호되고 북유럽국가들처럼 "진보적인" 복지시스템을 정착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외국인노동자의 수는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잠정 결론이었다. 여기까지가 balmas님이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그리고 "진보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이다.

다시한번 지적하자면 위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차별과 무시가 올바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일단 한국에 정당한 방법으로 들어와 일한다면 당연 한국인과 동등한 권리와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불가피하게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조절할수밖에 없는 "경제"적 문제가 뒤섞여 있지 않은가 하는것이고 때문에 이것을 단순히 한국인들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의식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불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지금처럼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권의식의 취약만 지적하고 정작 사태를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주범들인 자본가들과 고용주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문제에 대한 해법은 존재할수 없다고 본다. 더 나은 해결책이 있으신 분들은 나에게 한수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이런 이야기를 balmas님과 했던 것인데 그분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단다. 그것이 "진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리고 이런 "경제학"은 재정경제부나 법무부 관리들이나 해야할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자신은 관심없는 일이니 그만 자기 블로그에 댓글 올리는 짓을 "자중'하란다.

이것이 발마스님의 진보적 "철학도"로서의 자세인가 보다.

여기까지가 balmas님과 있었던 해프닝의 전모이고 내가 댓글단 내용의 전부이다.

p.s. 사실 알라딘블로그에서는 이런 사회적 이슈들은 잘 토론하지 않는다.  블로그성격이 성격인 만큼 주로 책과 공부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믿기 힘든 분들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그동안 나름대로 이곳에서 "자중"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타인으로부터 "자중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듣기 매우 거북하더라. 기왕에 알아서 하던 "자중"을 "철학도"의 충고도 있고 한데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이것이 나의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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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01-16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마립간입니다. 영화 Cape fear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회색인입니다.)

yoonta 2008-01-16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님^^ 근데 그 영화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시는지요.

마립간 2008-01-17 10:15   좋아요 0 | URL
Cape fear에서 닉 놀테가 변호사로 나오는데, 악당(로버트 드니로)에 대해 최선의 변호의 당위성에 대한 부분있습니다. 한편 악당에게 최선의 변호로 법망을 피하게 되는 것(대개 돈만 아는 변호사로 비판받게 되는데)도 정의로운 것이지 모르겠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안한 것 어떤 사항이 이런 저런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니 저의 주의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는 부작용은 생각하지 않고 인권만 생각하면 된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여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위 논의와 관련하여 연민을 느낄 사건에서 그 것만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종합적으로 생각할 것인가로 귀결됩니다./2005년 12월 20일자 '동전의 앞면 뒤면' 제목의 페이퍼가 있습니다. (http://blog.aladdin.co.kr/maripkahn/787511) 시간이 있을 때 읽고 의견주십시오.

yoonta 2008-01-18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그런 맥락이셨군요.^^ 악당에게 최선의 변호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것 참 고민되죠. 도덕적 딜레마상황이라고나 할까? 님 블로그에서 본 기숙사문제도 어느것이 맞다고 딱 꼬집어 말할수 없는 경우고..이런 경우 윤리나 도덕의 선차성문제가 걸리므로 쉽사리 단언할수없는 경우죠. 전 이런 경우 종합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간의 관계 즉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절대적 윤리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보다는 상대적 다수가 납득할 수있는 타협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실 오늘날 우리가 다수결에 의해 정치지도자를 뽑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것도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타협의 결과물이죠. 고대그리스와 같은 추첨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가 아무리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요 윤리적인 정치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현실에서는 사실상 작동불가능하므로 대신 실행가능한 선에서 절충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는것인데..그 결과가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이 괴리를 일으킬때 어떻게 하면 그것들간의 합의와 타협을 이룰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실을 규제하고 보다 나은 이상을 제기하는 행위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그것이 정치라고하는 당면한 현실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갈등해야 하는 공간에서는 더욱 긴급한 과제가 될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사실 위에서 언급한 외국인 노동자수문제는 케이프피어의 변호사나 기숙사상황보다는 그래도 도덕적 딜레마가 덜한 상황인것 같아 보입니다.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문제와 그들의 수를 조절하는 문제는 꼭 전자가 후자를 침해한다고 볼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무한대로 늘릴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국내 노동환경이 악화되거나 왜곡되지 않는 선에서 '조절'할까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사항인데 왜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외국인노동자의 '인권침해'가 되는 것인지 납득할수 없단 것입니다. 도리어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향상을 위해서라도 그것은 조절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만약 외국인노동자의 인권보호?라는 명분으로 그들이 보다 자유롭게 한국에 입국하게 되면 넘쳐날정도로 많아진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그들끼리 또다시 경쟁할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의 한국에서의 임금도 더 낮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종업종에서 일하는 한국인노동자의 상황도 덩달아 악화되고 이에따라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예상은 사실 불을 보듯 뻔한것 아닙니까?

이처럼 외국인노동자의 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면으로 보나 저런 면으로 보나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그것을 이야기하면 '인권침해'로 연결하는 것인지 전 그것을 납득할수 없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문제는 사실 딜레마라고 말할 만큼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은 문제라는 것이죠. 물론 어느 수준의 외국인노동자의 수가 적정한가에는 이견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지금수준이 적정한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적거나 많을 수도 있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의 수를 조절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balmas라는 분은 이런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를 듣기조차 싫어하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혼자서 책만 잘 파면 그럴듯한 도덕이나 윤리이론으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다면 다시말해 현실의 문제해결능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탁상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나 스피노자나 니체 철학 혹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의 위대성은 그 이론체계의 뛰어남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이 현실과 만났을때 보다 풍부한 고민의 지점 그리고 해결의 대안들을 내올수 있어서 아닌가요? 그렇지 못한 뛰어난 이론이나 사상은 이론이나 체계로서는 뛰어날수있을지언정 현실과는 괴리를 일으키므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칭송받는 이야기가 될수밖에 없는 것이죠. 따라서 진보를 추구하는 모든 담론들과 실천들은 이런 문제들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고 또 그것자체가 일종의 도덕이요 '의무'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립간 2008-01-18 17:47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지제크 2008-01-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문제제기는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내용인건 분명한 듯 합니다. 인권은 사회와 불가분의 개념이고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더라도 사회와 연결되는 개념임에야 당연히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하겠죠.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지 않는 공부는 개인적 삶의 쾌락으로서 배제해서는 안되겠지만 대체로 자기도취나 자기기만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라 생각하는 저로서는 앞으로 이론이 현실의 영역으로 들어올때 예상할 수 있는(물론 없는것까지 뚫어보신다면 더더욱 좋겠지만)난점들을 제기하는데 님이 자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현실과 맞닥뜨리지 않는 이론은 탄탄해질법이 없을테니까요.

yoonta 2008-01-26 20:02   좋아요 0 | URL
인권에 대한 철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인 접근도 물론 필요합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한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올바른 '규제적 이념'을 제공하는 것이 철학과 윤리학의 존재의의겠죠.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라도 철학이나 윤리학은 항상 그 이념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부조리한 현실이 이상적 현실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념들 자체도 변화된 현실에 맞춰 새롭게 정초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오늘날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속에서 어떠한 윤리가 요청되어야 하는가하는 문제는 단순히 이념의 차원에서만 고려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윤리나 이념이 한 사회의 현실에 제기되었을때 양자간에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보아야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더우기 그런 일들은 현실의 공간속에서 실천적으로 검증되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되도록 서로간의 활발한 토론과 의견교환이 요청됨은 물론이겠지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 balmas님처럼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와 같은 윤리학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 왜 자신의 블로그까지 방문해서 댓글 단 사람에게 이와 관련된 토론을 하려고 하지 않은지 참 의아하더군요. 만약 제 의견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러이러해서 그런 생각에는 문제가 있지않느냐라고 비판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데요. 암만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네요.

chomskyy님의 격려, 감사히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