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머거리 너구리와 백석 동화나라 -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빛나는 어린이 문학 2
백석 지음 / 웅진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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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백석을 공부하면서 백석 문학은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비해 세상에 덜 알려진 것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논문의 테마로 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글이나마 백석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였다. 이후 수년간 백석을 놓고 살았지만 그에 관한 서지는 종종 확인해본다. 그의 문학이 가진 아름다움을 누군가가 새로이 밝혀놓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백석은 처음에는 시인으로 알려져, 나중에는 동화 작가로 더 유명해졌다. 반가운 일이다. 한창 백석을 들여다볼 때는 그의 동화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 그의 동화가 세상에 소개되었다.

유아용을 골랐다. 도판이 위주가 된, 어린 시절 봤던 디즈니 동화 풍의 책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디즈니 동화처럼 도판이 현란하지 않아서 좋다. 백석의 동화에 원색 위주의 유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의 도판처럼 초록색을 많이 쓴 수채화 풍의 도판이 배석에겐 잘 어울린다.

좋은 세상이다. 물질적인 풍요 덕택에 아이들이 마음껏 동화를 읽으며 커갈 수 있고, 또 백석 동화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은 창작 동화를 읽으며 자랄 수 있으므로. 아이에게 선물할 기회가 생긴다면 백석 동화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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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 - 여자들에 대한 글쓰기
캐롤린 하일브런 지음, 김희정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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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결혼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종착역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예전에 비해 결혼의 가치는 상대적인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특히 여자들에게 결혼은 중요한 관심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일 결혼이 우리 사회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은 파편적이다.

결혼을 가장 큰 테마로 다루는 tv 드라마에서는 남녀의 결혼을 하나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하나의 신화를 시청자에게 남기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을 통해 맺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그리고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무참히 깨질 때 급속도로 무너진 남녀 관계는 행복한 프라임타임을 훌쩍 지난 밤 시간 인생의 공허감을 부추긴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결혼의 환상과 맞바꿔버린 여자에게 남는 건 절망이다.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은 그 절망적인 공허감을 넘어 자신의 분노와 절망을 제압하는 희망의 언어를 갖기를 꿈꾸었던 여성 작가들에 관한 책이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재능을 억압당하며 착취당해야 했던 클라라 슈만같은 이들의 얘기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것은 역사가 통념과는 달리 사실성과 허구성이 교묘하게 조합되는 하나의 픽션일지도 모른다는 역사 음모론의 실례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 역사가 엄연히 진실로 가정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부장들의 이야기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지배한 남자들의 권력에 맞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여자들을 추동한 것은 명예욕보다는 절실한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다.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이라는 제목은 번역할 때 새로 붙인 이름인데,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셰익스피어 당대에 만약 그의 누이 주디스가 똑같은 재능을 타고났다면 그녀는 미쳐 죽었을 것이라고 한 유명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여성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부족한 우리에겐 훌륭한 참고가 될 것같다.

우리 문학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쓰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 작가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간혹 자기 성에 갇힌 글쓰기를 하는 여성작가들도 있는데, 그만의 절실함이야 있겠지만 성에 갇힌 글쓰기는 타자를 수용하는 능력이 약하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가 힘들다. 훌륭한 글쓰기란 아마 남과 여라는 귀속된 성을 뛰어 넘어선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귀속된 성을 넘어선 또 다른 성에 갇히는 건 더욱 보기 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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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욕망하는 것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0
김영진 지음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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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영화비평을 하는 사람들 중에 지식과 수사 사이의 긴장을 가장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는 이를 김영진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 <씨네21>을 구독할 때 가장 눈에 띠는 글을 쓰는 이가 김영진이었는데, 그의 글은 세련된 수사와 이론적 바탕이 조화된, 문장력과 사유가 조화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간지 영화기사의 수사와 <키노>의 현학이라는 편향을 벗어난 중도파적 글이라고 할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게 된 것같다. 지금은 <필름2.0>을 적을 걸어두고 이런저런 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육중한 몸매와 훤한 이마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할리우드의 꿈>, <미지의 명감독>에 이은 그의 세 번째 책이다. <할리우드의 꿈>은 생소한 책이고, <미지의 명감독>은 예전에 <씨네21>에서 연재한 기사들을 묶은 책인데, 마침 <씨네21>을 구독하고 있을 즈음 연재된 기사들이어서 책으로 묶이기 이전에 다 읽었고 책으로도 다시 한번 훑어본 책이다. 한창 외국 영화 감독들에 대한 궁금증이 풍만했던 터여서 광범위한 정보로 가득한 그의 기사는 유용한 참고서가 되었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된 영화들의 태반은 접할 수 없는 영화들이어서 아쉬움만 남겨주기도 했다.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날렵한 책이다. 150쪽 분량, 원고지 매수로 따져도 800매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저널리즘적 수사가 적절히 가미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영화 전문 서적들의 경우 우리의 언어로 채 순화되지 않는 말들의 전시장처럼 생소한데 비해 이 책은 외국 서적을 인용하는 경우에도 잘 걸러져 있다.

이 책은 2001년 2월에 출간되었다. <JSA>로 한창 떠들썩하던 시점인데, 이 책이 토픽으로 삼는 것들은 90년대 이후 우리가 미디어와 비평을 통해 가장 많이 들었고, 한국영화로서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들이다. 에로티시즘, 포르노, 예술영화, B급영화, 블록버스터 등. 오해와 시비로 점철된 최근 몇 년 간 한국영화를 둘러싸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쏟아졌다. 이 책은 이것들을 한층 가다듬어진 호흡으로 바라보기 위해 각 토픽과 연관된 서구 영화 역사를 정리하고 논란이 된 한국영화를 이런 문맥에서 읽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김영진은 특별히 한쪽에 무게를 싣지 않고 논란이 되는 양 지점을 균형감각을 갖고 제시하고 있다. 그는 미쳐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거나 생략하고 넘어선 지점으로 되돌아가 영화 보기가 생각만큼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난 이런 방식에 대해 긍정적이고 그의 논점에도 대체로 동감하는 편이다. 영화는 사회의 여러 가지 요소가 응축된 현대의 상징적 문화 형식이다. 영화를 단지 일회적 유희거리로 여기고 무비판적으로 소비하는 태도 자체도 그리 생산적이지 않지만, 영화를 그 자체로 고립된 장르로 특화시켜 바라보거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관짓는 태도도 그리 생산적이지 못
하다.

일회적 유희거리도 아니지만 현실에 대한 단순한 재현도 아닌 영화, 그 영화를 현대의 가장 역동적인 문화 생산물로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태도는 항상 요청되지만, 영화가 놓여 있는 그 경계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대부분의 영화 서적은 지나치게 이론적이거나 실용적이어서 그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책이 많지 않다. 김영진의 <영화가 욕망하는 것들>은 한국 영화를 진지하게 읽어내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이만큼 정보와 사실, 의견이 조화를 이루며
한국영화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진작시키는 책도 드물 것같다.(단숨에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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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옛날이야기집 1 - 동물민담편
츠보타 죠우지 지음, 박소현 옮김 / 제이앤씨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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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 얘기할 때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론적 차원의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런 물음에는 일본인은 한국인, 미국인과도 다른 고유한 인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 역시 한국인은 일본인, 미국인과도 다른 고유한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민족에 대한 관념은 미국이나 호주같은 나라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공유하는 믿음일 텐데, 그것은 신에 의해 선택된 존재라는 신화적 믿음에서 기인한다. 개개 민족이 자기 고유의 신화를 윤색하여 성원들에게 이를 부지중에 믿게 하는 것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런 신화적 믿음에 기대는 민족일수록 타자를 경시하거나 오도된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본 역시 아마테라스의 후신인 천황의 자손이라는 믿음은 서구에 대항하는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의 장으로 몰아넣는 구실을 만들어주었다.

윤색된 신화를 들먹이는 이들은 정치가이고, 그들은 이렇게 윤색된 신화를 가지고 민중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고 민중의 사회역사적 상상을 가로막는다. 패전 직후 천황도 한 명의 인간임을 선언했을 때 그때에서야 일본의 신화는 무참히 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화에 기대어 이어져온 나라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계몽의 단계였다.

<일본의 옛날이야기집-동물민담편>는 일본에서 구전되어온 민담 중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우리 민담과 거의 흡사한 이야기 구조를 가진 민담이 상당수 등장하는데, 대체로 타자에 대한 베품이 결국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는 우리 민담과 큰 차이가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는 이 민담들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부분이다. 이 민담들 속에서 동물들은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과 동물은 서로 말을 나누고 서로가 처한 곤경을 도와주며 공생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 민담에서 동물은 인간의 선행에 보답하기 위해 변신한 인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비하면 일본 민담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애초부터 경계가 없다. 이것은 만물신 사상이 강한 일본의 전통과 맥이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거칠게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 즉 <이웃의 토토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 매력적으로 펼쳐지는 에콜로지와 판타지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유구하게 내려온 민담의 세계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신화는 항상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면서 타자를 누르는 무기로 사용된다. 그러나 민담은 작위적으로 차이를 만들지 않으며 차이를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며 그 차이는 순수한 차이로 남는다. 그 차이는 타자에 대한 우월성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 차이는 생활 습속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차이로, 현대로 넘어와서 새로운 상상력의 기반이 된다. 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도 여
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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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 한국형 블록버스터
김소영 기획 / 현실문화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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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왔다. 둘이 잘 살라고 남녀를 축복해주는 말이 주례사일텐데, 주례사는 점쟁이의 말처럼 듣기는 좋지만 따지고 들면 들으나 마나한 얘기일 뿐이다. 그걸 굳이 듣는 이유는 들으면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런 걸 두고 말의 마력이라고 하는 걸까. 여하튼 이 책은 식장의 주례사처럼 되어버린 문학비평가들의 비평 관행을 개개 비평가들을 각개 격파하고 있는데, 예전 문학권력 논쟁처럼 벌써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다. 곧 읽어볼 참이다.

문학마저 사정이 이런데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총화라고 하는 영화비평도 이런 비판에서 무관하다고 발뺌하기는 힘들 것같다. 다만 영화비평은 문학비평에 비해 동업자 의식이 강하고 비평이 취약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내가 정기 구독하는 모 시사주간지의 영화평을 보면 그 영화가 어떻다는 건지 비평가의 논점이 정확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막 개봉한 영화의 앞길을 막아서는 훼방꾼 역할을 하기 싫은 탓인지는 몰라도 영화얘기를 하다가 비평가 자신의 사적인 얘기가 끼여들면서 글의 논점이 흐려지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런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한국 영화를 좀 더 깊이 읽어내고자 하는 축들에게 한국영화론으로 접근할 만한 책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어도 저널리즘에 몸담고 있는 비평가가 아니라면 대부분 학교에 적을 둔 비평가들일텐데, 활동 인구에 비해 성과물로 내놓는 건 매우 빈약하다. 몇몇 보이는 책들도 대체로 여성학자들의 책이다.(남성학자(좀 이상한데...)들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 활발히 연구 업적을 내놓고 있는 사람들 중 단연 그 앞자리는 김소영 교수가 차지하고 있다. 저서의 수도 많을뿐더러 한국영화 역사의 계보를 세우는 작업에 있어 가장 열성적인 것같다. 다만 그녀의 문장이 매끄러운 언어가 아니라 번역식의 순화되지 못한 언어라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한국영화론은 없다라고 생각하던 중 김소영 교수가 기획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를 접하게 되었다. 하나의 에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이력과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필자 중에는 영화기획사 출신도 있고 외국인도 끼여 있는데, 영화기획사에 이런 글을 써낼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다.

이 책은 <용가리>, <쉬리>를 원점으로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을 점검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말은 이제 흔한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다.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닮되 거기에 한국적인 뭔가를 덧붙여 세계적이면서도 지역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이 전략을 이 책의 필자들은 이 전략이 한국적인 것으로 끌어오는 민족주의적 상상력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접근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이 공히 탈민식민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 필자들이 느슨한 하나의 에콜임을 반증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접근의 필연성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략이 취하는 전형적인 탈식민주의적 기획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접근 방법이 유사하기 때문에 간혹 겹치는 얘기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개별 필자마다 자기만의 성찰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한 편은 아니다.

영화를 그냥 보는 게 좋은 사람도 있고, 단순한 보기가 아닌 깊이 꼼꼼히 시간을 들여 읽어내기가 좋은사람도 있다. 이런 차이는 취향과 관심과 목표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하지 않는 관용이 필요할뿐이다. 나는 읽어내는 쪽을 선호하는 편인데, 영화를 읽어내는 것과 문학을 읽어내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은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만큼 보기와 읽(어내)기의 무게가 다른 경우도 없을 것이다. 한국영화는 보기보다 읽어내기가 훨씬 고통스런 작업이다. 특히 요즘의 한국영화들은 더 그런데, 그건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깔고 있는 한국적인 것이 보수적인 상상력에서 기인하는 것들이고, 이것에 비판의 매스를 한층 치밀하게 가져다 댈수록 비평과 관객의 괴리는 한층 깊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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