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상 20 - 한국 문학의 위선과 기만
강준만 엮음 / 개마고원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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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지식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항상 밝은 빛 속으로 꺼내기를 두려워하는 어두운 구석을 향하고 있다. 그 비판의 타당성도 충분하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 용기 자체만으로도 광휘를 발휘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자기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는 입 닫고 있는 게 옳다는 지식사회의 암묵적 동의를 강준만이 과감하게 깨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사회과학 전공자의 문학 개입은 속류사회학적 비판이라는 두려움을 안기 마련이라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는 그의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의 파생물이라고 하겠다. 언론의 대중 장악력에서 가장 미묘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분이 문화 쪽이고 보니, <조선일보>와 관계하며 ‘일등 신문’의 프리미엄을 얻고자 하는 속류 진보 지식인들이 행사하는 문화 권력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고, 전통적인 문인사대부적 전통의 끝자락을 움켜쥐며 권력의 단맛을 보는 문학지식인을 비판할 필요도 부가되었던 것으로 전후 사정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반강제적으로 半문학 텍스트인 문학평론들을 읽을 계기를 가졌던 것이 강준만 개인의 발전 측면에서는 오히려 유익한 경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과학 전공자의 문학 장에 대한 개입은 문학계에서는 그동안 이류 방법론으로 경시되었던 문학사회학의 구조, 제도적 측면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볼 때, 이는 논의가 오고가는 양측 모두에게 결국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문열에 대한 비판은 강준만이 예전부터 줄기차게 수행해온 작업이기 때문에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일반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꼭지는 남진우, 윤지관(그리고 이와 연결된 백낙청) 비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진우는 탁월한 미적 문체로 잘 알려진 시인이자 문학동네라는 문학 출판사(계간지)를 대표하는 비평가로 잘 알려져 있고, 소설가 신경숙과 결혼했다는 사실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한 인물인데, 강준만은 남진우의 서정주 옹호로 대표되는 예술과 삶의 분리주의 경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서정주의 시와 삶은 별개이며, 삶의 굴절은 시의 가치와는 무관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과거 서정주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사람조차 서정주 옹호로 돌아서고 있는 형편이지만 서정주의 시가 그의 행동과 과연 무관한 입지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간과될 수 없으며 그의 시와 행동은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는 방식보다는 그 두 가지가 하나로 수렴되는 특수한 미학의 견지에서 평가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지관을 통해서 강준만은 말로는 진보를 외치면서 생활 속에서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중적 분열을 보이는 일부 진보 지식인의 행태를 비판하고 윤지관의 아놀드 비평에 대한 찬사가 그의 스승이자 창작과비평이라는 문학권력의 대표자인 백낙청의 영향권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파생물임을 입증하고 있다.

강준만은 다양한 인물과 영역을 자기 담론의 대상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만 그의 작업은 궁극적으로 ‘자칭 자유주의자’의 기본 원칙인 언론의 진정한 자유로 귀착되고 있다. 문학 장에 대한 비판도 그 작업의 일환이라고 하겠는데, 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막연히 의식상으로 진보를 자임하는 것으로 지식인이라고 믿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다른 일이며, 오히려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우리에게 따끔하게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타 분야에 대해 전공자들이 부끄러워 할 정도로 성실하게 텍스트를 챙겨서 꼼꼼히 읽어나가는 그의 태도는 존경스럽기조차 하다. 그의 작업은 위선, 기만이 판치는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사를 삼는 이들의 자성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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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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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지식인의 언행 불일치, 좌파 지식인의 사이비성을 비판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투구하는 강준만에 대해 나는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동업자 의식으로 똘똘 뭉친 교수 사회, 지식인 사회에 대해 그만큼 솔직한 이야기를 쏟아낸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를 놀라게 하는 점은 그가 보여주는 엄청난 필력이다. 양도 양이거니와 그의 글이 보여주는 비판의 방식 즉 상대방의 장점을 사심없이 인정할줄 알면서도 때로는 인정하는 척 능청을 부리다가 그걸 빌미로 역전의 화살을 날리는 그의 방식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출세를 위해 유학까지 갔다 온 평범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솔직함은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까지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점수를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준만에 대한 나의 지지는 어디까지나 그가 수행하고 있는 작업 그 자체에 대한 지지일 뿐, 그의 인간됨됨이나 도덕성에 대한 지지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고약한 습관이 하나 있다. 지식인론만 하더라도 강준만의 지식인론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지식인론 못지않게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에 무의식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게 마련이다.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의 글은 원론이고 강준만의 글은 현상 분석론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데, 사르트르나 리오따르와 강준만을 겹쳐 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르트르나 리오따르만 읽고 강준만을 버리는 일은 적잖은 문제다. 이걸 지식 사대주의 현상이라고 하는 걸 게다. 여기에는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점잖게 학문적 용어를 쓰는 글을 적당히 구어체를 섞어가며 쓰는 글보다 우위에 두는 습성도 지식 사대주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강준만은 세인이 습관처럼 생각하는 것보다 새겨들을 구석이 많다. 물론 엄청나게 써대는 글을 따라가며 읽는 일이 버겁긴 하다. 그리고 내용 상 중복되는 이야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을 괄호 치고도 새로운 구석이 많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지식인 행세 하는 이들의 새로운 면도 알게 되고, 그것이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바쁜 탓에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지나친 사람들의 못된 행동, 비겁한 행동도 보게 된다.

<한국 지식인의 주류 콤플렉스>는 미디어 행위에 참가하는 지식인들의 위선, 허위, 무지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흔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지식인도 강준만에게 걸리면 한 소리 먹기 마련인데 임지현, 박노해, 손호철같은 이들이 그 예이다. 꼴보수, 극우적 논리를 가진 이들이야 새삼 더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위에 언급한 세 명의 지식인들은 평소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더욱 흥미롭다.

강준만의 이야기 중 제일 귀에 아프게 들려오는 건 실명비판 공포증 이야기이다. 사이버공간 상의 커뮤니티에서 가끔 논쟁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여기엔 실명(사이버 공간에서는 아이디) 비판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실명비판이나 적어도 지명비판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 네티즌은 무덤덤하다. 그건 다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동업자들끼리의 실명비판은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니다. 특히 종종 얼굴을 마주치는 사이라면 실명비판은 인간 말종이나 할 법한 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명비판의 부재는 진정한 비판, 책임지는 비판의 부재로 이어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 동업자 사회를 말아먹는 일로 발전하기도 한다. 문학계에서 한때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었을 때 그 위기는 솔직히 말하자면 위기와 동근원인 비평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근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등장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일 텐데, 적어도 문학과 관련해서 이제 진정한 비평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같다. 해마다 이런 저런 비평가들의 탄생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들의 명은 짧아서 결혼도 하기 전에 주례사나 써대는 노년의 냄새를 풍길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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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대하여 동문선 현대신서 9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현택수 옮김 / 동문선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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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지성의 천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가 인문학의 가치가 대중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과 평가를 받으며 그것을 자기네의 문화적 자존심으로 삼는 정신적 풍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매스미디어에 기생하는 우리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네들의 풍경은 부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이 저자 부르디외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이다. 꼴레쥬 드 프랑스는 학생은 없고 교수만 있는 학교로 유명하다. 교수는 일 년에 몇 번 대중 강의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가 완수되고, 나머지 시간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에 맡겨진다. <텔레비전에 대하여>도 부르디외가 지식 대중을 향해서 행한 강연을 묶어놓은 책인데, 학문적 장에서 맺어진 성과를 대중을 향해 개방한다는 측면에서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들은 최고의 권위와 찬사를 얻게 마련이다.

매스미디어에 대한 원칙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이용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노골적으로 매스미디어에 아부하거나 친화적인 자세를 보이는 지식인들이 많은 한국사회에서 부르디외의 텔레비전론은 경청할 만한 구석이 많다. 아니 참조나 타산지석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착각을 준다.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하는 강준만 교수는 지식인과 교수가 우리 사회를 망친 일 주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수 사회에도 엄밀한 차이가 있다. 매스미디어를 청중과 대화자로 삼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학생과 동료 학자를 그 상대로 삼는 교수도 있다. 매스미디어 친화적인 교수들은 학문적 장 안에서의 경쟁보다는 대중사회 안에서의 지지와 찬사에 더 연연한다. 이런 모습은 부르디외적 기준에서 볼 때 교수 일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갈수록 다른 장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매스미디어, 특히 텔레비전의 강제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대개의 교수들은 매스미디어에 대해 강할 수 없다. 학문적 권위를 갖는 한 분야의 석학이라 할지라도 매스미디어 앞에서는 한없이 따분하고 평균화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애써서 그런 기회를 포착하려는 노골성마저 드러내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학문, 예술, 정치, 경제는 그 장의 법칙에 따르는 자율성이 있다고 얘기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가 못하다. 모든 장이 다른 장에 의해 침식되어 타율적이고 종속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스미디어는 다른 장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주체처럼 보이지만 매스미디어 역시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문제가 있다. 즉 매스미디어의 순화, 개혁이 해결책으로 나설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부르디외는 매스미디어와 지식인 사회가 힘을 합쳐 해결책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썩 내키지 않는 현상유지론 내지 무책임론의 변종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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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6
박애경 지음 / 책세상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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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박애경씨는 국문학자인데, 대중음악에 대한 식견은 전문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연대 출신으로 신촌의 언더그라운 문화를 생활 수준에서 체험했다는 사실은 일 개인의 취미나 관심이 그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케 한다. 현역 국문학자로서 음악 비평 활동을 전문가 수준으로 하는 박애경씨를 대하고 있으니 과 선배 한 분이 생각난다. 나보다 십여 년 윗 학번인 그 사람은 비평과는 거리가 멀었던 대중음악계에서 비평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직접 만나서 얘기해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의 행적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치고는 꽤나 튀는 행보였다.

90년대 초반 대학에 입학한 나에게 음악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인 존재였다. 어떤 모임에서도 민중가요는 절대시되었고 대중가요는 쉽게 불려지지 않았다. 뒤풀이 자리에서 대중가요를 부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대중가요에 대한 취향은 검열의 공포로 일그러지곤 했다. 대학문화가 좀 더 개방적이고 순화되었을 때 록의 열풍이 몰아쳤고 미디어와 언론은 록의 저항성을 화두로 삼아 말의 성찬을 벌였다. 록이 과도하게 소비된다는 인상마저 주었는데, 록의 열기가 빠져나간 자리는 펑크와 힙합이 점령했다.

90년대 대중문화의 첨병처럼 여겨진 대중음악에 대한 열기가 지금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그 이유를 따져보자면 대형 기획사들이 만들어낸 기획상품같은 음악들이 대중이 요구하는 음악적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제일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고만고만한 10대 그룹 스타 중심의 대중음악은 음악을 향유할 잠재적인 광범위한 소비자들로부터 그 자신을 고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탓에 지금 대중음악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폭락 시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대중음악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중음악 장 폭락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면 대중음악은 대중문화 시장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다.

여하튼 들을만한 대중음악의 빈곤에 허덕이면서도 사람들은 음악을 버리지 않는데, 그것은 음악이 단자로 고립된 개인들의 소통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롭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불안할 때 음악은 나의 문지방을 넘는 친구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요/대중음악, 가수/뮤지션, 상품/예술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음악의 지형을 저자의 전공인 고전문학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정리하고, 말미에 추천 음반과 사이트까지 소개해놓고 있다. 음악은 그냥 듣는 것이지 비평이나 지식은 불필요하다는 편견이 완강한 게 사실이지만, 텍스트에 대한 이해는 컨텍스트에 대한 식견에 기초할 때 한층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여러 모로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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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 개정신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김용준 옮김 / 지식산업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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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는 독일 원자핵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학문과 정치, 역사, 언어, 대학 등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어떻게 보면 극소의 입자를 다루는 학문에 종사하는 물리학자가 그의 영역을 벗어난 듯한 주제들에 대해 논한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극소와 극대는 궁극적으로 상통한다는 논리에 따른다면 하등 이상할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양차 대전과 조국 독일의 패망을 지켜보며 어렵사리 학문에 매진하면서도 한결같이 진지한 태도로 사물을 성찰하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뽑아놓은 성찰은 물리학의 차원을 벗어나 지금도 화제가 될 법한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동료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며 재구성하고 있어 책 속의 대화가 당시의 내용에 그대로 부합되지는 않겠지만 최대한의 성실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고립된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타자와의 만남을 욕망하는 하이젠베르크의 태도이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은 고독한 개인의 독백같은 내밀함을 풍기면서도 타자와의 대화가 주는 생동감을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독일 지성 특유의 사유의 엄격함은 프랑스 지성과는 사뭇 다른 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처럼 이 책이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요인 중 큰 부분은 번역의 세련됨이라고 생각된다. 외서의 경우 번역은 그 책의 가치를 50% 정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외국에서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은 책이라도 그 책을 쓰레기로 바꿔놓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책은 원서의 가치를 충분히 살려놓은 번역의 명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언어의 질감과 명료함을 따지는 나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번역이 훌륭하다.

각기 다른 주제를 가진 스무 편의 에세이 묶음 형식이라 어느 편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지만 하이젠베르크 사유의 전후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읽는 방법이 적절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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