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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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이후 지식계에 탈식민주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학계 일각에서는 해체주의의 뒤를 잇는 고급 수사의 일종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과연 그러하냐 여부를 떠냐 탈식민주의가 내세우는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권력 관계를 해체하려는 관심은 의사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지배와 연이은 미국의 신식민주의적 지배 경험을 가진 우리 상황에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이드를 필두로 한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제국주의 국가의 작가들이나 공문서 등을 통해 서사 담론의 권력성을 폭로함으로써 서구 정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현 시기 중동, 아시아 각국과 미국을 필두로한 유럽 사이의 갈등을 어떤 시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사이드 이후 세대의 사이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사이드 자신이 제국주의 서사의 권력 욕망을 비판하면서 미국 중심 학계에서 권력을 얻고 있는 상황은 일종의 모순이라는 점, 그리고 탈식민주의가 이론화되기 이전 제3세계에서 지속적으로 터져나온 탈식민주의적 목소리를 불가시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탈식민주의자의 원형이라할 프란츠 파농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미약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그의 저서가 출간되었는데,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그 첫 번째 번역서이다. 서인도 제도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다시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활동한 정신분석의인 파농은 백인의 아이덴티티를 욕망하지만 끝내 좌절될 수밖에 없는 시도를 끊임없이 지속하고, 결국에는 신경증과 정신병, 자살 충동에까지 이르는 흑인들을 지켜보며, 검은 피부라는 것을 천형이나 원죄로 내면화해 온 서구 백인들의 지배적 서사에서 벗어나는 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는 흑인근본주의자처럼 생물학적 요소를 본질화하는 우월주의는 경계한다. 말로는 쉽지만 이런 갈등과 불안을 극복하고 안정감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파농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검은 피부이고, 그 검은 피부는 서구 역사 속에서 열등함의 기표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인간 삶에 있어 이 검은 피부는 다양한 차별과 굴종, 노예의식의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역사에 있어 유태인에게도 다양한 비난과 모욕이 가해져왔고, 아시아인도 서구인의 의식 속에는 열등한 종족이라는 느낌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민족이나 종족, 인종, 성의 차이를 떠나 모든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지금 앞으로의 세계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중산층이나 지배자, 우월한 자에게 이런 문제의식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 언제나 결여나 결핍을 느끼는 쪽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함으로써 문제는 공론화되거나 해결의 과정을 밟아왔다. 그럴 때 어찌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노예라는 위치에 대해 비관하기보다는 그 위치가 오히려 떳떳하고 당당한 의식을 갖게 해준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리라. 그런 면에서 파농은 비단 흑인 중의 뛰어난 지식인이나 저항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의식을 가진, 우리가 지향해야 할 행복한 노예의 상징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길에는 적어도 그 이상의 고난과 불안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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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혐오자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4
에드 맥베인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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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등장하는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헐리우드 영화 초기 필름느와르라는 하나의 독특한 장르로 양식화되었고, 이후 끊임없이 재현의 소재가 되어왔다. 법의 정의로운 집행자를 지향하는 경찰 사회의 명분과는 달리 사람들은 경찰 사회가 그다지 정의롭지 못하다는 의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실정법들이 권력자들에 의해 쉽게 짓밟히는 경우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현대 사회에서 욕망은 점증하지만 그것들을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신문 지문을 통해 해외 토픽으로 종종 보도되는 증오범죄를 소재로 하고 있다. 특정한 계층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증오를 동기로 한 이 증오범죄는 현대 사회 그 자체를 타깃으로 삼기 때문에 그 어떤 범죄보다도 사람들을 패닉 상태에 빠뜨리기 쉽다. 87분서라는 가상의 경찰 조직의 형사들이 차례로 죽어나가지만, 경찰은 이 범죄가 형사를 상대로 한 증오 범죄라고 믿을 뿐, 범행의 동기나 범인의 신원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작품 중반 이후 범인의 시점으로 묘사되는 장면이 등장함으로써 곧 범죄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지만, 주인공 캐레라 형사는 갈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사건에 힘겨워한다. 이런 상황은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와 함께 더욱 곤혹스런 느낌을 준다. 더위에 어쩔줄 몰라 하듯 캐레라는 사건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결국 범죄의 전모는 밝혀지지만 그 해결의 과정은 의외로 단순하고 돌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전까지의 팽팽한 긴장, 미궁 속의 헤매는 듯한 느낌이 이 소설의 묘미라면 결말부의 해결 방식은 다소 안이하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이전에 제시되었더라면 느닷없다는 느낌은 덜 했을 것같다. 이런 약점을 제외한다면 이 소설은 경찰이 범죄를 대하는 방식이나 범인 유추 과정에서의 과학적 추리 등 재미있는 구석이 많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찰소설이나 필름느와르는 미국의 전형적인 대중 장르이다. 미국 외에는 이런 장르가 전형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장르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 미국적인 특수성이 놓여 있다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욕망의 강도는 더 강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욕망의 충족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욕망과 그 실현 사이의 갭이 큰 사회에서 욕망은 범죄를 낳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욕망은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된다. 그 욕망의 심연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서사가 바로 경찰소설이 근거하고 있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비교할 때 우리 소설에서 경찰이나 범죄를 다루는 경우가 없다. 영화에서는 간간이 이런 작품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냈다는 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공의 적>이 흉내 차원이라면 <복수는 나의 것>은 이 흉내 차원을 넘어 한국적 현실에 좀 더 다가간 측면이 많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경찰혐오자>는 형사를 감정과 생활이 있는 한 명의 현대인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투적인 경찰 영화의 전형화에서 벗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날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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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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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사가 홍성욱 씨의 책으로는 두 번째 접하는 책이다. 페미니스트 오조영란 씨의 남편이기도 한 저자는 90년대 초 학계에 경계 허물기 열풍이 불어닥쳤을 때 그 대표적인 본보기로 꼽힌 인물이다. 과학기술사라는 다분히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영역에 관심을 가진 그는 pc통신 문화에 대한 글을 많이 써 왔고, 특히 정보를 매개로 펼쳐지는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문제점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캐나다의 모 대학에서 종신교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국내 사정에도 밝다.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은 벤담의 파놉티콘 구상에서 근대 사회를 감시의 사회로 규정한 푸코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공장과 작업장에서의 감시, 그리고 전자 정보 매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감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의회나 언론을 넘어 파놉티콘적인 근대 기획을 넘어서는 역파놉티콘의 전망에 대한 논의로 귀결된다. 푸코식으로 현대 사회를 파놉티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패배주의적이고 비관주의적인 발상으로, 권력의 차원에서 주체의 행위성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는 저자의 말처럼 파놉티콘을 넘어 파놉티콘 그 자체를 역감시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특정한 방향으로 우리의 삶을 규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그 자체는 의도와 목적에 따라 우리의 삶을 짓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는 파놉티콘적인 시선을 거부하며 그 시선으로 다시 그 시선을 감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은 이런 가능성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푸코식의 비관을 내뱉기 쉽지만 말이다. 의정부 장갑차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이 백악관 홈페이지를 다운시키자는 운동을 펼쳤던 사실은 현대 사회에서 정보 파놉티콘이 응시의 대상에 의해 어떻게 저항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훌륭한 예일 것이다.

여하튼 이런 전망에서 본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프라이버시, 즉 정보 파놉티콘 세상에서의 프라이버시는 이제 소극적으로 방기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이 주목하면서 빼앗기지 않아야 할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푸코를 비롯해 파놉티콘과 연관된 여러 논의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논의의 기반을 정교화하고, 신문이나 잡지 보도 내용을 현장감을 부각시키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파놉티콘과 연관된 벤담의 생각이나 도안을 삽입한 것은 적절했다고 본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은 사람조차도 파놉티콘 구상의 배경이나 현실화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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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신분석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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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호학의 국제적 권위자이자 문학 비평가, 정신분석의로 잘 알려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강연록이다. 프랑스 모 여고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종교와 정신분석을 주제로 펼친 강의록인 이 책은 고등학생을 청자로 한 탓인지 무척이나 정교하고 명료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고등학생들이 이 정도의 강의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강의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어 있다는 것 그 자체는 프랑스적인 힘과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결여된 이 정신의 힘을 느끼면서 읽어 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신선한 자극이다.

이 책의 주제는 종교와 정신분석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관찰을 주제로 하고 있는 셈이다. 프로이트 역시 기독교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 바 있지만, 우리에겐 별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지 못하다. 크리스테바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이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사랑의 전이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펼치는 욕망의 담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브라이언 드 팔머의 <드레스드 투 킬>, 우디 앨런의 <젤리그>는 크리스테바의 이와 같은 주장을 명징하게 드러내준다. 특히 <젤리그>에서 사회적 편견과 의심, 좌절에도 불구하고 환자 젤리그의 정신병적 발언을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들어주는 정신분석의의 모습은 크리스테바적인 정신분석의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결국 치료자와 환자가 결혼 관계를 형성할 때, 환자 젤리그는 치유 단계로 접어든다. 따라서 정신분석이 사랑의 담론이라 할 때,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대죄와 부활의 관념은 동정녀 마리아라는 순결한 어머니의 표상을 등장시킴으로써 우회적인 구원을 희구하는 서구적 자아의 욕망의 표현이다.

크리스테바의 책들이 계속해서 번역되고 있다. 물론 모든 책들이 번역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저작들 상당수가 번역되었다고 보아도 좋겠다. 따라서 이제 크리스테바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달려 들어보는 일은 더 이상 차후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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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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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이 책은 지젝의 라깡적 작업이 초기에 헤겔에 많이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후 저작에서 지젝이 칸트에 의존하여 작업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헤겔적이다. 따라서 이 책만을 본 사람은 지젝이 헤겔주의자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후 저작을 조금 읽어보면 그는 사실 헤겔이나 마르크스보다는 칸트나 키에르케고르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니체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독일보다는 프랑스내에서 니체가 이론적인 영감의 원천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데리다 류의 해체주의와는 달리 지젝은 하버마스의 근대성 비판에 더 많이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지젝의 초기 작업이 헤겔에 의존하고 있음을 뚜렷히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칸트적인 논점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일종의 징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알튀세르 류의 해석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론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주체로 호명되는 메커니즘의 문제, 그리고 그 제도화의 문제로 바라보고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과학의 의미를 중요시했다면, 지젝은 이데올로기/과학이라는 이분법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는 실재적 중핵에 둘러싸인 상징적 질서가 유지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누빔점, 주인기표로 보고 있다. 흔히 기표를 기의를 가진 기호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자체의 기의를 가지지 않았지만 기표로서 기능하며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가능케 하는 주인기표의 존재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알튀세르와 지젝 사이의 구분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적 증상에서 시작해서 지젝이 여러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 책을 시작으로 산포되고 재응집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임에 분명하다. 가물가물한 철학 개념을 재반추하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넘나들며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분명 특별한 노동에 속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이론이 알튀세르로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는 사람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정점을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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