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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 인간사랑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지젝의 이 책은 지젝의 라깡적 작업이 초기에 헤겔에 많이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후 저작에서 지젝이 칸트에 의존하여 작업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헤겔적이다. 따라서 이 책만을 본 사람은 지젝이 헤겔주의자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후 저작을 조금 읽어보면 그는 사실 헤겔이나 마르크스보다는 칸트나 키에르케고르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니체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독일보다는 프랑스내에서 니체가 이론적인 영감의 원천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데리다 류의 해체주의와는 달리 지젝은 하버마스의 근대성 비판에 더 많이 동조하는 듯한 입장을 보인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볼 때 이 책은 지젝의 초기 작업이 헤겔에 의존하고 있음을 뚜렷히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칸트적인 논점으로의 이동을 암시하는 일종의 징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알튀세르 류의 해석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론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주체로 호명되는 메커니즘의 문제, 그리고 그 제도화의 문제로 바라보고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과학의 의미를 중요시했다면, 지젝은 이데올로기/과학이라는 이분법을 아예 언급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는 실재적 중핵에 둘러싸인 상징적 질서가 유지되는 데 있어 필수적인 누빔점, 주인기표로 보고 있다. 흔히 기표를 기의를 가진 기호로 보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자체의 기의를 가지지 않았지만 기표로서 기능하며 이데올로기의 작용을 가능케 하는 주인기표의 존재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알튀세르와 지젝 사이의 구분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 책은 마르크스적 증상에서 시작해서 지젝이 여러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지젝의 이론은 이 책을 시작으로 산포되고 재응집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은 책임에 분명하다. 가물가물한 철학 개념을 재반추하고, 여러 가지 개념들을 넘나들며 문맥을 이해하는 일은 분명 특별한 노동에 속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이론이 알튀세르로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는 사람은 지젝의 이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정점을 맛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