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방의 비밀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8
가스통 르루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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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전 추리소설을 읽어보는 것같다. 그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로 영화로 각색되어 그의 인지도는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에 힘입어 그의 원작 소설이 적극적인 마케팅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최고작이라고들 하는 <노란방의 비밀>은 18세 신문 기자 조셉 룰르타뷰의 천재적인 추리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프랑스적인 특성인지는 몰라도 호들갑이 대단하다. 노란방이라 불리는 고성의 작은 방에서 벌어진 괴사건을 둘러싼 추리가 주를 이루는데, 극적인 기교보다는 주인공 룰르탸뷰의 이성적인 장황한 추리가 이어진다. 특별히 가다듬어진 정교함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천재성은 인정해줄만 하다.

그런데 추리소설의 성격 탓이지만 추리 과정 그 자체에 너무 집중된 탓인지 그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고 있었던 내 기대는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추리 소설적 건조함이랄까. 그런 것을 벗고 추리의 묘미와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이나 그 사건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아우르는 것이 있다면 그게 진정한 추리'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기나긴 추리 여행의 테이프를 끊은 셈인데, <노란방의 비밀>은 아직까지 내 기대에 못미친다. 계속 여행을 떠난다면 내 기대를 충족시키는 작품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해문판은 편집 상태가 조악하고, 번역도 매끄럽지 못한 편이라 책 그 자체로는 큰 매력이 없지만 추리 소설을 펴내는 곳 중 그나마 읽을만한 책을 번역해내는 곳이 이곳뿐이라 달리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아쉽다. 현대적인 판형으로 새롭게 선보였으면 좋겠다는 게 독자로서의 내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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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7
주영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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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에서 '음식'은 점점 더 큰 의미를 띠어가고 있다. 설탕, 커피, 담배는 현대인의 주요 기호 식품이며, 하루라도 이것들 중 하나라도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변할 지 모를 지경이 이르렀다. 최근 이 기호 식품들의 의미를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이는 일상성 탐구가 전반적인 사회현상 탐구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주목받으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그동안 계급론적 관점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우리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주영하의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역시 이런 맥락에서 흥미롭게 읽어본 책이다. 중국음식하면 당장 짜장면, 짬뽕, 탕수육, 군만두 등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우리는 막연히 중국음식이라고 생각하며 먹어오기는 했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국 에 거주하며 그들의 문화를 연구한 주영하 선생의 재미있는 설명을 통해 우리는 한국화된 중국음식들의 후면에 놓은 역사와 중국음식을 통해 역추적된 중국식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즘 현대 중국에 대한 접근이 지나치게 상업적 관심 위주로 흘러가는 세태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외시한 채 이뤄지는 경향이 다분하다. 만약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그 노력만큼의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칫 섣부른 접근의 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 그 점을 저자인 주영하 선생은 무척 우려하고 있다. 나 역시 동감하는 편인데, 지금 현대 중국에 대한 관심이 일반 독자층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건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문화 자체가 그다지 아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에 대한 관심은 우선 국경을 초월하고 공유할 수 있는 대중문화 자체의 보편성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현대 중국의 대중과 우리 대중 사이에 공유의 접점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중국이 생산한 대중문화가 우리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공유되는 시점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런 책들은 대중문화 탐구의 시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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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 지음 / 풀빛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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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국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가야금과 거문고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그 악기들에서 나는 소리를 구별한다는 건 더 어림없다.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온 국악이 갈수록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더니, 오늘 황병기 선생의 <깊은밤 가야금 소리>를 접하고 나니 잃었던 친구를 되찾은 것마냥 정겹고도 새롭다.

황병기 선생은 누구나 알다시피 사라져 가는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누구보다 애쓴 분이다. 강제규의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본 사람이 많으니 그의 곡조 한 곡쯤은 누구나 들어본 셈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선생의 진가는 깊은 밤을 새어가며 뜯는 가야금 소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깊은 밤 선생의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 가슴이 시원스레 뚫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94년에 나온 이 책은 선생의 초창기부터 그 당시까지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선생의 성장담을 들려주는 1부 나와 우리집 사람들, 존 케이지나 백남준같은 전위예술가와의 만남 과정을 소개한 4부 동서음악 선책도 흥미롭지만, 국악에 대한 무지를 차근차근 해소해주는 2부 음악과 사색, 3부 국악이야기가 훨씬 깊이 다가왔다.

선생이 국악을 한다고 해서 국악 이외의 현대음악에 대해 무지하거나 국악에 대한 아집을 가지고 있을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퓨전재즈의 거장 칙 코리아의 음악을 들으면서 보여주는 사유는 감동적이었다.

흔히 국악을 자신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소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많은 것같다. 황병기 선생의 <미궁>을 3번 들으면 죽는다는 괴담이 나오는 것도 아마 이런 사정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미궁>을 들은 건 환하게 불 밝힌 밤이었는데, 홍신자 씨의 내레이션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소름끼쳤다. '이런 음악을 지리산 숲속에서 밤에 듣고 있게 된다면' 하고 상상할 때는 몸에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곡을 작곡한 선생의 의도를 설명한 부분(86-87쪽)을 읽고 나서는 <미궁>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미궁>에서 느꼈던 공포는 그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무지로 가득 찬 내 속에 존재해 있었던 셈이다. 음악을 접하는 주체의 무지에서 외면이나 공포는 싹트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국악에서 감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세상 많은 것들이 그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깊은밤 가야금소리>는 그 여정을 함께 할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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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 클럽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시공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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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은 우리 독서계의 변방 스페인 문학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독서, 출판 시장이 미국이나 일본 등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뒤마클럽>과 같은 책이 발간되고 우리 독서계에 무시 못할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반가운 일이다.

문화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편식은 우리의 건강에 해롭다. 이런 상투적인 얘기를 경청해야 할 쪽은 소비자층이라기보다는 공급자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수효가 없다고 괜찮은 작품들을 외면한다면 그보다 무책임하고 근시안적인 행동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독서층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최근 일고 있는 추리문학 붐은 <뒤마클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같다. 우리의 추리 문학은 독자의 외면을 받고 있고, 향유할 수 있는 추리문학은 아가사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등 외국 고전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처럼 추리문학에 목말라 있는 독자에게 <뒤마클럽>같은 작품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최근의 우리 소설들이 갈수록 왜소화되고 단편화된 경향이다.

이런 상황은 지식욕에 불타는 독서층의 확대 상황에서 광대한 지식과 교양의 세계로 인도하는 <뒤마클럽>은 지식욕에 불타는 독자층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사회적으로 확산되는 독서열기이다. 과거 몇 년간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독서층의 상당수가 인터넷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 사실이지만, 깊이 없는 정보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종이'와 '지식'의 결합체인 책에 다시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붙은 200여개 남짓의 각주가 증명하듯 이 책의 출판 과정 그 자체는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명성만을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는 난해한 지식의 세계를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요소때문에 <뒤마클럽>은 독서출판계의 화제가 됨직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을 접한 독자층의 반응은 이런 열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것같다. 추리문학으로서의 플롯 구성과 서스펜스가 약하다는 게 불만의 주요인인데, 나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은 있다. 과연 이 책의 미덕과 가치를 추리문학적인 기교에서만 찾는 태도가 좋은가 하는 점이다. 1시간 30여분 남짓의 영화 감상으로 배양된 세련됨이나 즉물성과 같은 선입견에 우리가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책은 감각에 대한 순간 순간의 향수가 아니라 좀 더 느슨한 이완과 지각을 요구하는 존재는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가진 약점이 감춰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뒤마클럽>은 지식의 세계에서 지식을 먹고 꿈꾸고 그 때문에 쓰러지는 인간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욕을 표현하기 위해 그 매개로 알렉상드르 뒤마를 채택하고, 뒤마클럽이라는 동호회까지 결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욕을 표현하기 위해 현실의 세계를 지식의 세계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은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역을 맡아 펼치는 일종의 연극이 된다. 그 과정에서 정통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뭔가를 기대한 주인공 코르소와 그를 따라 여행을 떠난 독자들은 결말에 가서 한없이 맥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뒤마클럽>은 물론 정통 추리소설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어 정통 추리소설을 기대한 독자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관점과 흥미에 따라선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소설의 하나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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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4대 비극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 3-1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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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만큼 우리에게 친근한 문학가는 없다. 그의 등장 인물이 뿜어내는 대사 하나하나는 가장 섬세한 언어적 세공품이며, 셰익스피어 극의 설정은 인간의 운명, 갈등, 감정의 가장 정화된 형태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극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들인 본질을 꿰뚫는 듯한 통찰력과 이를 펼쳐 보이는 언어적 기교 면에서 그의 앞도 그의 뒤도 없는 듯한 형국이다.

그런 탓일까. 셰익스피어의 작품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탕으로 재연된 영화를 통해서 그를 접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햄릿],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리어왕]같은 작품들은 세계의 명감독들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했고, 책 읽기가 번거로운 현대인들은 그런 영상물들을 통해 셰익스피어 극의 매력을 간접적으로만 맛보고 있는 형편이다. 극은 연극을 위한 서브텍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셰익스피어 극은 텍스트 그 자체로서 읽어보아도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과장된 듯한 표현도 상당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는 극 자체가 가진 특징으로서 크게 흠잡을 만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잘 알려진 비극 4편을 싣고 있는데, [햄릿]을 비롯한 이 4편의 비극은 궁정 주변의 상류 사회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그 갈등은 한 인간의 성격적 결함, 마녀의 신탁이라는 운명적 계시, 인간의 탐욕, 연약한 인간적 약점 등에서 비롯되고,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망쳐놓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는 고귀한 궁정 인사들의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시정배들의 그것과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궁정극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극을 읽는 일은 행복했다. 브레히트, 몰리에르도 괜찮고, 아서 밀러, 테내시 윌리엄스, 버나드 쇼같은 현대 작가의 작품도 다시 한번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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