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 지음 / 풀빛 / 199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지금도 국악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가야금과 거문고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형편이니 그 악기들에서 나는 소리를 구별한다는 건 더 어림없다. 어느 순간 문득 찾아온 국악이 갈수록 내게서 멀어지는 느낌이더니, 오늘 황병기 선생의 <깊은밤 가야금 소리>를 접하고 나니 잃었던 친구를 되찾은 것마냥 정겹고도 새롭다.

황병기 선생은 누구나 알다시피 사라져 가는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누구보다 애쓴 분이다. 강제규의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본 사람이 많으니 그의 곡조 한 곡쯤은 누구나 들어본 셈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선생의 진가는 깊은 밤을 새어가며 뜯는 가야금 소리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깊은 밤 선생의 가야금이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찬 가슴이 시원스레 뚫리는 느낌을 갖게 된다.

94년에 나온 이 책은 선생의 초창기부터 그 당시까지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선생의 성장담을 들려주는 1부 나와 우리집 사람들, 존 케이지나 백남준같은 전위예술가와의 만남 과정을 소개한 4부 동서음악 선책도 흥미롭지만, 국악에 대한 무지를 차근차근 해소해주는 2부 음악과 사색, 3부 국악이야기가 훨씬 깊이 다가왔다.

선생이 국악을 한다고 해서 국악 이외의 현대음악에 대해 무지하거나 국악에 대한 아집을 가지고 있을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퓨전재즈의 거장 칙 코리아의 음악을 들으면서 보여주는 사유는 감동적이었다.

흔히 국악을 자신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소음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많은 것같다. 황병기 선생의 <미궁>을 3번 들으면 죽는다는 괴담이 나오는 것도 아마 이런 사정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미궁>을 들은 건 환하게 불 밝힌 밤이었는데, 홍신자 씨의 내레이션때문이었는지 상당히 소름끼쳤다. '이런 음악을 지리산 숲속에서 밤에 듣고 있게 된다면' 하고 상상할 때는 몸에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곡을 작곡한 선생의 의도를 설명한 부분(86-87쪽)을 읽고 나서는 <미궁>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미궁>에서 느꼈던 공포는 그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무지로 가득 찬 내 속에 존재해 있었던 셈이다. 음악을 접하는 주체의 무지에서 외면이나 공포는 싹트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국악에서 감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세상 많은 것들이 그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깊은밤 가야금소리>는 그 여정을 함께 할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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