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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일기 시작한 박정희 신드롬은 기회주의적이고 병적인 양상을 지닌 것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실정이 가속화되면서 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을 등에 업고 과거 반동세력으로서 매장된 박정희주의 세력이 등장했고 미처 박정희 정권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그를 마치 강대국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려 한 위대한 민족주의자로, 우리 경제 부흥의 선구자로 떠받드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조갑제, 이인화같은 보수주의 세력은 박정희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이런 흐름의 심각성을 우려한 진보주의자들이 개입하여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형국으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여 가장 우려되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 전염된 민족주의 열풍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런 흐름은 그칠줄 모르는 듯하다.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이인화의 <초원의 향기>, 가깝게는 김훈의 <칼의 노래>같은 소설이 등장했고, 영화 쪽에서도 <쉬리>, <유령>처럼 민족주의 담론을 영화적 소재로 차용하는 경우가 등장했다. 특히 영화는 문학에 비해 민족주의를 단순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 파급력이 크다는 사실 때문에 잠재적 파괴력면에서 소설을 능가한다. 젊은이들은 무분별하고 비성찰적인 민족주의 담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됨으로 해서 정작 민족주의 그 자체가 의도하는 긍정성보다는 무차별적 배타주의를 심어놓음으로써 정작 왜 민족주의가 요구되는지, 민족주의가 어떤 측면에서 긍정성을 가지는지, 따라서 왜 일본이 우리의 적인지를 심각하게 사고하기 전에, 왜 북한과 통일되어야 하는지를 따져보기도 전에 민족주의의 옹호자로 전락한다.
이런 흐름은 민족주의를 절대 불변의 가치체계, 진정한 이데올로기로 신화화하는 우리들 저변의 선입관을 강화시켜, 민족주의의 부정적 양태, 즉 타자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결국에는 새로운 정체성 형성을 요구하는 요즘의 흐름에도 배척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만든 장본인이 박정희 정권임은 뚜렷하며 이 우려스런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의 성격, 행적을 꼼꼼이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다.
전재호의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는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한 개입의 의미를 담고 있다.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핵심은 2장 '박정희 정권의 반동적 근대화'이다. 박정권의 성격을 정치, 경제, 역사 세 부분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정치, 경제적 측면은 익숙한 논의를 담고 있는데 반하여 박정희정권의 역사관을 다룬 부분은 흥미롭다. 박정권에게 있어 역사 복원과 전통문화 복원이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지, 왜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1, 2위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결국 이 부분을 통해 명확해지는 것은 박정희정권이 자신의 정권의 취약성을 감추기 위해 역사를 선별적으로 부활시켜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박정희 자신의 언설을 논의의 중요 제재로 삼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이를 통해 박정희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그가 한국의 근대화의 중요한 지점에 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근대화가 순전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우국적 근심에서 비롯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저자는 답한다. 그가 추진한 근대화의 상당 부분은 결코 민족 성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의 취약성을 포장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박정희정권에 의해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은 민족주의 담론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 해체의 흐름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민족, 국가는 더 이상 우리의 지고의 가치는 아니다. 그런 가치들의 억압적 성격, 배타적 성격이 우리의 의식에 끼친 심각한 해악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느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