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글을 잘 쓴다는 고종석의 글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저널리스트 출신의 필자들을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언어가 모래처럼 성겨서 도대체 조금만 깊게 파고들어 갈라치면 여기저기 허점이 수두룩하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대개의 저널리스트들이란 이리저리 주워들은 지식의 겉껍질을 그럴듯한 외연으로 포장하는 일을 업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의 글은 그냥 한번 흘러 읽기에는 좋아도 그들의 글을 묶은 책을 사보는 건 돈 아까운 짓이기 십상이다.

저널리즘의 속성상 대중에게 뭔가 그럴듯한 지식의 세계를 소개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할 수 없다. 신문사 문화부를 한번 들러 보면 알겠지만 신간 소개 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책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그것들 중에서 신문에 싣기에 적당한 책을 고르고, 읽고 쓴다는 게 그리 쉽겠는가?

글을 잘 쓴다는 건 무얼까? 어법에 맞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꼭 필요한 말만 적재적소에 갖다 쓸 수 있는 재능일까? 그렇다면 고종석만큼 글을 잘 쓴다고 말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 출신 필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어문 규정을 숙지하고 교정 세례를 매일 같이 받아야 하는 직업적 속성상 그렇게 단련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종석 글의 매력은 다른 데 있는 것같다. 그 매력이란 그가 글을 통해 설파하는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이다. 언어학과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사전을 편찬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이런저런 언어들과 고투를 벌여온 그에게 언어는 그의 사유가 가장 튼튼히 자리잡고 있는 대지이다. 그 언어의 대지에서 그는 언어와 언어의 접변이 일어나는 지점을 포착하고 그 접변에 대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사유를 펼친다. 그 사유의 결과는 여러 권의 책으로 나왔지만 지금 내가 읽은 <감염된 언어>는 더 이상 그 위를 상상하기 힘든 절정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저널에 기고한 글들을 묶어놓았지만 대부분 그리 녹녹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영어 공용어화론'이 제기된 시점에 부쳐 쓰여진 [우리 모두 그리스인이다]같은 글은 원고지로 환산해도 500매 이상이 되는 긴 글이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이 글은 보통의 저널리스트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놀라운 언어학적 지식을 구사하며 세계의 언어들을 주무르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인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읽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리스'가 일종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고종석은 자신을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명명한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누구도 드러내놓고 자신을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라고 내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에 변동이 일어났음을 반증하는 예일텐데, 나는 어떤 의미에서 도저히 자유주의를 주장할 수 없지만 고종석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에는 그만큼의 의와 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민족주의가 더 이상 우리의 사유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준거가 될 수 없고, 그 해악마저 발견되는 요즘에 들어 자유주의는 모종의 성찰 계기를 마련해준다.

전통적으로 민족주의가 득세했던 나라뿐만 아니라 9.11테러 이후 미국에서도 민족주의의 변형인 국가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접변, '감염'으로 형성된 인류 문화의 자연스런 흐름을 제어하고 특별한 카테고리로 그 내부를 차단함으로써 고립된 순수를 지키려는 부자연스런 태도이다. 자유주의자 고종석에게 이와 같은 지역적, 인종적, 국가적 카테고리의 강화는 결코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전략을 통해 얻어진 이익이 개인의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지적이다.

설령 민족주의, 국가주의 의식이 쇠약해져 민족이나 국가 관념이 희미해진다고 해서 한 개인의 정체성이 망실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정체성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민족이나 국가만이 일 개인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준거틀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신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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