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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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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K는 토요일7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다. 토요일은 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고, 그러므로 자명종도 울릴 리가 없을 터인데, 누구도 맞춰놓지 않는 자명종 소리는 평소와 다를 주말을 암시하듯 K를 요란스럽게 깨웠다.

K는 이상함을 느낀다. 잘 때 항상 잠옷을 입고 자는 그는 벌거벗은 채였고, 씻고난 뒤에 바른 스킨은 평소 자신이 쓰던 것이 아니었다. 잠옷은 이상하게도 아내가 입고 있고, 딸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것 같다. 개는 으르렁거리며 주인을 못 알아보다가 기어이 그의 발목을 물어 뜯고 만다. 분명히 자신의 가족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익숙지 않은 느낌은 표현해내지 못할 낯설음이었다.

때문에 K는 누군가가 자신을 모형의 세계에 가둬 두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트루먼쇼 처럼. 그의 가족은 몽땅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당한 배우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비밀은, 어젯 밤 술을 마신 후 날아가버린 몇 시간 사이에 존재할거라 확신한다. 이 의심은 처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 H를 만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갈수록 더욱 짙어진다.

추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진행. 그러니까 사건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식의 서사 구조는 흡사 스릴러나, 추리소설 같다. 소설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평소에 익숙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증상들을 늘어놓듯 서술하고 있음에도 이야기가 지루해지지 않고 흡입력을 가지는 까닭이다. 때문에 리뷰를 쓰면서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반전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종교를 드나들며 긴 호흡의 대중소설을 써오던 최인호의 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그의 현대문학 복귀작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이 시작되었던 ‘타인의 방’으로 회귀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는 복귀작으로 다시 ‘도시’라는 주제를 꺼내들었다. 그의 도시 안에서 K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반복되는 일상의 이지러짐을 체험한다. 5일간의 회사 업무와, 주말을 앞둔 아내와의 ‘전야제’ 그리고 다시 맞는 월요일, 이 반복되는 삶을 계속해서 누려온 남자다. 하지만 이 삶은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낯설게 비쳐진다.

내가 나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스스로 증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임을 알기 위해선 주위를 먼저 둘러봐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증명되고, 아빠로서 증명되고, 혹은 선생이나 학생으로서 증명되며, 혹은 자식으로서 증명된다. 주변의 것들이 모두 낯설게 느껴지던 K는 결국엔 자신이 진정 자신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종교적 색채 또한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급기야는 K가 자신의 다른 모습인 K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선, 원죄에 대한 성찰마저 느껴진다.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선과 악이 구분되어 완전체인 K가 아닌 K1과 K2, 두 인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발상이다. 이야기의 전반부 부터 흐르는 논조와, 중심을 흐르는 발상은 현대인이 맞닥뜨린 익숙함의 낯섦에 닿아 있지만, 이야기가 흐를 수록 가톨릭적 색이 묻어나오는 경향을 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몸을 팔아 낯선 남자와 키스하고 포옹하던 ‘세일러 문’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현신하며, 그를 돕기 위해 나선 K1과 또 갑자기 나타난 K2의 결합으로 완전한 합일에 이르른다.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낯선 이들의 사이에 껴 있는 것인지 찾기 위해 낯익은 도시를 방황하는 도시인 K의 모습이 훌륭히 묘사되어 환상적 색체의 소설임에도 흥미롭게 읽힐 수 있었던 것은 강점이었지만, 분명한 논조를 지니지 못한채 결국 종교에로 귀의한 듯한 모습에 과연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종교적 접근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현대문학으로 귀의한다는 작가의 서문, 그리고 최인호의 초기작 ‘타인의 방’의 도시성과 연결해서 보는 김연수 작가가 쓴 발문, 오정희 작가가 쓴 추천사에 기댄 해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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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라트비아인 매그레 시리즈 1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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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추리문학에서 흔히 묻는 '어떻게?'가 아닌 '왜?'를 묻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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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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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편혜영의 소설집 '사육장쪽으로'등을 살펴보면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이 기괴하게 표현된다. 무시로 마주치는 평범한 삶의 장면이 편혜영의 손길을 거치면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작위적인 표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현상 그 자체를 날것 그대로 둠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가던 것들을 수사와 묘사가 증발된 객관화된 문장으로 늘어놓았을 뿐인데 소름이 오소소 돋는 끔찍한 형태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편혜영의 문장은 더욱 건조해졌다. 이젠 이전 그녀의 소설을 수놓던 많은 단어들, 이를테면 끈적이고, 더럽고, 불쾌한, 찐득찐득한 것들이 사라졌다. 등장인물들의 행보는 더욱 평범해졌고,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던 (이를테면 '밤의 공사'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의 소설들은 편혜영의 전작들보다 더욱 무섭다. 이전 그녀의 작품에서의 공포가 일상을 비틀어 보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포는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한 공포이기에 그렇다.

'토끼의 묘'에서 주인공은 파견을 나간다. 그리고 공원에 유기된 토끼를 집으로 데려와 키운다. 자신을 소개한 선배는 어느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려봐도 대답이 없다. 업무는 단조롭고 반복된다. 자신이 실수를 하더라도 어떠한 조치도 내려지지 않는다. 그저 자리에 앉아있음으로 충족되는 업무일 뿐이다. 모두가 파견자인 회사. 개인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직책만이 존재하는 공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고 수정가능한 공간 속에 주인공이 서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후배에게 파견을 권유하고, 자신은 자신의 집에 잠적한다. 그 절차는 마치 주인공과 선배와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는 '통조림 공장'에서도 나타난다. 실종된 공장장을 대신해 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공장장과 똑같은 '수위'라는 별명을 얻는다. 통조림을 먹지 않던 박은, 실종된 공장장처럼 통조림으로 끼니를 처리하고 누구보다 빨리 공장에 출근해 누구보다도 늦게 퇴근한다.

 '동일한 점심'에서의 주인공은 이 굴레에 익숙해진 인물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복사실에서 일하는 남성으로, 항상 같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언제나 정식 A세트였다.

   
  기억 속에 떠오른 반찬이 오늘 먹은 것인지 어제 먹은 것인지 헛갈렸다. 어쩌면 구내식당 게시판에 적혀 있는, 내일의 반찬일지도 몰랐다. p.65

그렇게 늘 똑같은 한 끼 밥을 먹는 것으로 그는 어제의 낮과 오늘의 낮이 같음을 실감하고 오늘 밤과 내일 밤이 다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런 실감과 확신을 통해 자신이 지하 복사실에 있는 동안 매일 낮과 매일 밤이 각각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잊었다. p.66
 
   

이 남성은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8시 38분에 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서, 9시 30분에 복사실 문을 여는 삶. 어떤 사내와 2번 차량 3번 칸에 나란히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제본된 책을 읽는 삶이다. 어느날 그 사내가 지하철에 뛰어들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남자는 그 사내가 죽었다고 인지하지 못한다. 남자는 그 사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선로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환상을 본다. 매일 같은 삶을 사는 것에 길들여져서 스스로 그 제약에 속박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숨이 허망하게 끊어졌고 몸이 잘게 바스러져 한낱 얼룩으로 스몄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남은 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열 시간 이십 분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음에도. p.84
 
   

'산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심지어 전원의 삶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나무로 가득 찬 숲과 그 숲을 품은 소도시가 싫어졌다. 모든 길을 감추는 숲에 비하면 한눈에 모든 길이 훤하게 들어오는 도시는 그야말로  천국에 가까웠다. p.147
 
   

인공에 길들여진 주인공에게 자연은 너무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하루살이들은 자연의 포식자와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는 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글짐'에서 주인공은 해외로 출장을 나간다. 처음에는 상사인 백의 그림자를 쫓았다. 그가 추천한 곳에서 밥을 먹고, 그가 샀던 물건을 샀다. 그가 준 가이드북을 따라서 행동했다. 그는 소설의 말미에서 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혼자 도시를 걷는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시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크림색 소파의 방'에서 주인공은 서울로 이사를 가는 길이었다. 이삿짐 트럭을 앞질러 가기 위해 국도로 들어선 그는 국도변에서 원치않은 일들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테면, 와이퍼가 고장나고 와이퍼를 고쳐준 청년은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에게 돈을 뜯긴 주인공은 청년이 대마를 피웠다고 확신하곤 경찰에 신고하고, 국도를 달리다 차가 멈춰서 보험회사에 연락해 조치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것은 보험회사 직원이 아니라 그에게 돈을 뜯은 청년이었다. 그에게 폭력을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주인공은 저 멀리 보이는 서울의 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이처럼 편혜영의 소설에 나타난 주인공들은 도시의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며 영위하고 있다. 이제는 자연의 삶을 두려워할 정도다. 누구나 도시에서의 이탈을 꿈꾸며,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기계의 부품과 같은 대체가능한 삶, 객채는 사라지고 존재만이 남은 삶. 모두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도시에 막연한 꿈을 품고 있다. 이미 너무도 깊이 소속되어 벗어날 수 없는 도시에서의 삶. 그 벗어날수 없음은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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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위의 딸 - 열린책들 세계문학 012 열린책들 세계문학 4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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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쉬낀은 러시아의 소설가이다. 책 날개에 붙어 있는 작가 소개를 읽어보면, 러시아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이라고 부르는 작가라고 한다. 작가를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니. 나로선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셰익스피어는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다.'는 영국인들도 있으니 한 작가가 어떤 집단 전체에 특별한 무엇이 될 수도 있나보지만, 우리나라엔 아직까진 그렇게까지 불리우는 작가는 없는 듯하니 도대체 어떤 글을 써야 그정도로 추앙받을 수 있는 것일까 궁금증이 인다.


우려와는 다르게 뿌쉬낀의 소설 '대위의 딸'은 지리멸렬한 구닥다리 소설은 아니었다. 위대한 작가라 하면 시적 수사와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언어들을 자유롭게(우리들의 입장에선 복잡하게) 사용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기에, 고전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도입부부터 지레 겁을 먹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소설이 쓰인 1836년과 현대의 시간적 차이, 그리고 그당시 러시아와 현대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본다면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 일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뿌쉬낀의 소설은 쉬웠다. 러시아 이름에 익숙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 부분만 잘 소화해낸다면 '대위의 딸'은 재미있게, 심지어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1773년부터 75년까지 이어진 푸가쵸프의 반란을 전후로 한다. 푸가쵸프의 난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농민 반란이다. 이 반란의 수장인 푸가쵸프는 자신이 황제라고 주장하면서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소설은 살육이 자행되는 이 반란의 중심을 흐르지만,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반란 자체보단 그 역동하는 세월에 놓인 한 남녀의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놀라운 점이 많은 소설이다. 우선 서사방식이 대단히 능수능란하다.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질듯 말듯 애간장을 녹이며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뿌가초프와 주인공과의 관계라던가, 연적 쉬바브린과 주인공과의 관계들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톱니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뿌쉬낀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소설을 살펴보면 현대문학에서 봄직한 요소들이 대거 등장했다. 자연스런 1인칭 시점은 소설 속에 독자가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고, 사벨리치와 같은 소설 속 조연인물들은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 살아있는 인물로서의 생명력을 획득한다. 픽션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분명한 역사 속에 편입시켜 무엇보다 진짜같은 픽션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하고 있다.


대단히 쉽게 읽힌 소설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매력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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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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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요즘 사람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소설의 주인공 조지 볼링처럼 의식의 심연에 잔잔히 물결치는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너무도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며 포근한 것이다. 그래도 마을에 논과 밭이, 한적한 숲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고 아이들끼리 공놀이를 하거나 팽이를 돌리거나 딱지를 치던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뀌어 왔을 거짓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에 나는 꽤나 즐거웠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숨막히는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동네에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도 아련한 공간이기에, 다시 그 곳을 당면한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궁금한 기분도 든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곳은 의정부 306보충대 근처였는데, 운명의 이끌림이었는지 306보충대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24살의 어느 추운 겨울날 10대 이전의 유년기를 보냈던 마을에 머리를 빡빡 민채로 방문했다. 기억에 남는 몇개의 랜드마크는 그대로였지만, 너무도 변한 마을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꼈었다. 분명 내가 항상 걷던 길임에도 생소한 그 느낌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기억 속 잔상들이 깡그리 허물어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세계의 붕괴였다. 그 마을을 떠나온 뒤로 나 홀로 상상속에 건축했던 한 마을이, 현실과 모순되며 무너져내렸다.

조지 볼링은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소년 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p.311  
   

물론 조지 볼링이 유년기를 보냈던 마을은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의 주 무대였던 마을은 어느새 구시장이 되어버렸고, 근처엔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었다. 마을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넘쳤다. 그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유령처럼 누구의 삶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의 연인이었던 여자는 추한 중년여자가 되어 있었고,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가 낚시를 즐기던 강은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그가 남몰래 간직해두었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한 저수지는 쓰래기 매립지가 되어버렸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나 ‘동물농장’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정치적 색채가 가득한 소설로 읽힐 글이다. 오웰은 소설 내내 전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파괴력, 전쟁 후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그저 아름다웠던 과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전쟁 전, 삶의 모습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전쟁으로 어쩌다 죽지 않은 사람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난리를 겪고 난 뒤, 사회를 피라미드처럼 영원하고 의심할 나위 없는 무엇으로 여기는 건 불가능해졌다. p.177  
   

그럼에도 많은 젊은 이들이들은 조지 볼링의 젊었던 때처럼 전쟁이 나기를 기대하며, 피끓는 젊음을 전쟁에 바치길 고대하며, 전쟁을 언젠가는 일어날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들과 같은 길을 밟아 전쟁을 치른 뒤, 그 끔찍한 참극을 목격한 주인공은 젊은이들의 치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성찰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그런 정치적 문제와는 조금 떨어져서 읽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유년기의 공간이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아니, 지금 태어난 아이들에겐 우리와 같은 유년기의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유년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그 시절이 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가득하고, 아이들과 뛰어 놀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먼 옛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물감으로 덧칠하고 덧칠해져 더더욱 화사해지고 아름다워 지는 법이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도 우리와 같은 유년기의 공간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들이 성장했을 때 분명히 그들은 자신의 유년기를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건, 공간 그러니까 물리적인 부분을 넘어선 것이다.

조지 볼링의 유년기도 그렇다. 그 이미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조지 볼링의 회상에 의한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조지 볼링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당시가 그렇게 행복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추한 몰골로 변해버린 그의 옛 연인이, 과거엔 정말로 예쁜 소녀였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겐 일종의 이상향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공간을 찾아가 본들 어릴 적 우리가 보았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숨을 쉬러 그곳에 찾아가 본들, 공기 없는 진공만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은 그 기억 자체가 우리에게 공기임을 모르고. 숨 쉬기 힘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그 기억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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