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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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모티브로 하여 재창작한 소설이다. 작가는 그 사실을 대놓고 드러낸다. 이 소설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로빈슨 크루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방드르디 역시 알고보면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했던 프라이데이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작가는 자신이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이 소설에 대한 영감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자신이 재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원작과 투르니에의 소설이 다른 점은 방드르디의 중요성이다. 원작 '로빈슨 크루소'에선 영국인 로빈슨 크루소가 중심이 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프라이데이는 변두리로 물러서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선 방드르디가 사건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로빈슨은 그곳에 자신의 제국을 건설하려 한다. 현대 문명 속에서 자라난 그는 자신을 문명의 올가미에 속박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것이고 안정된 것이라 인지한다. 심지어 그는 섬에 자신 혼자 뿐임에도 불구하고 법을 만든다. 그는 자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규칙을 만들며 모든 것을 규정하고 정의하려 한다. 그런 그와 우연찮게 마주한 방드르디라는 인디언은 그에게는 사실 눈엣가시였다.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너무나도 다른 생활 속에 살아 왔으며,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만 벌인다. 홀로 섬에 고립되었을 동안 탐색했던 자신과 타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없었더라면 그는 방드르디를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방드르디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는 동굴의 폭약을 폭파시켜 지금껏 쌓아온 로빈슨의 모든 문명적 행위를 무로 만들어 버린다. 이와 동시에 로빈슨은 방드르디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 그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워나간다. 원작 소설이 '로빈슨 크루소'의 독자적 제국 건설에 촛점을 맞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투르니에의 소설 속 로빈슨은 심지어 자신의 과거, 이를테면 방드르디의 위에 군림하며 그를 노예처럼 부렸던 시절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자연과 벗삼아,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 아닌 조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방드르디의 인식론에 매력을 느낀다.


초기 로빈슨의 신앙은 오로지 성경을 향한다. 그는 항상 성경을 탐닉하며, 그 구절을 이정표 삼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은 그가 문명의 모든 것들을 버렸음에도 끝까지 지니고 있던 성질이었는데, 소설의 말미에 다다라서야 그는 성경을 버리고 태양이라는 자연개체를 숭배하기에 이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소설에서 심적 변화를 가지는 것은 로빈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빈슨은 방드르디에 의해 문명의 더러운 거풀을 벗어던지고 자연으로 귀의한다. 하지만 방드르디는 오히려 로빈슨에 의해 물들고, 문명의 것에 매력을 느낀다. 화이트버드 호에서의 사건이 둘을 극명히 가른다. 로빈슨은 섬에 남기를 희망한 반면에, 방드르디는 배에 올라타고 섬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섬에는 로빈슨과 함께 인간들 사이에서 힘겹게 부대끼던 소년 자안이 남는다.


타로 점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서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상징이나 신화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로빈슨의 철학적 고뇌나, 자연에 대한 외경이나 성적인 접근 등이 감각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사실 그것은 하나의 소설적 서사라기보다는 ‘림보’(번역가는 이것을 제목에서 그저 끝이라 명명하고 있다.)에 갇힌 한 인간의 환상적 체험에 가깝다. 문명적 인간과 자연 상태의 인간 사이에 존재하며 정의되지 않은 존재들을 관찰함으로써 좀 더 객관화된 시선으로 인간 자체에 대해 탐구해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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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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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적 요소를 본격문학에 도입하려고 했던 작가들은 많았다. 대표적으론 다방면의 장르를 넘나들면서 전방위적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규가 있다. 박민규는 SF뿐 아니라 무협지, 일본만화, 심지어 근래에는 서부극까지 자신의 소설에 차용해왔다. 근래에 김중혁은 장편 『좀비들』에서 서양의 좀비물을 활용해 이야기를 전개해 눈길을 끌었다. 기성작가들이 장르문학을 순수문학에 적용하는 사례들은 좀 더 신선한 소설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지만 아직까지 그 이종간 결합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준 작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타워』는 분명히 훌륭한 SF물이다. 박민규의 SF처럼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으며, 일반 장르문학서를 읽듯이 쉽게 읽힌다. SF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곤혹스럽게 느끼는 것은 세계관의 창조일 것이다. 어께에 힘을 넣고 무리해서 설정에 몰입하다보면 독자들은 이야기보다 세계관을 파악하느라 더 진이 빠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다고 세계관을 창조하지 않으면 기존의 SF물과 다를 바 없는 느낌에 왜 굳이 현대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SF에 손을 댄 것인지 의아함을 품게 된다. 배명훈은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그는 짧은 문장으로 간략하게 설명 가능하면서도 독창적인 세계관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빈스토크’. 높이 2,408m, 674층에 인구 50만이 거주하는 이 거대한 타워는 끝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바벨탑을 닮았다. 그는 이 기본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가지를 쳐 나간다. 소설집은 연작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 ‘빈스토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 전혀 새로운 세계를 읽어나가면 읽어나갈 수록, 그곳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시장선거를 앞둔 세력들의 권력관계라던가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들은 우리의 정치판과 흡사하다. 심지어는 ‘안 해본 것이 없는 시장’은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 서울의 시장이었던 모 정치인을 보는 듯한 착각도 든다.


배명훈은 이 세계의 주요 교통수단인 엘리베이터를 아이디어로 삼아,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수직주의와 수평주의로 나눴다. 수직주의는 엘리베이터와 관련된 직종을 하는, 고소득업자들의 삶을 대변하고 수평주의는 저소득업자들의 삶을 대변한다. 이는 현 세계의 가치체계와 비슷하면서도 작가 자신의 창조한 세계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다.


이처럼 배명훈은 SF의 색으로 우리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들어냈지만 그 안에서 지금의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조소한다. 풍자적 요소는 이 소설의 주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인데. 독자들은 빈스토크에서 보이는 인물들 간의 권력에 대한 우스운 행동에 조소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짓게 되고 만다.


한편 이 소설에서 정치 문제와 함께 주요하게 다루는 요소는 바로 인간성이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단편은 「타클라마티칸 배달 사고」와 「샤리아에 부합하는」이 있다. 이 단편들엔 ‘파란우편함’과 같은 빈스토크에서 볼 수 있는 유대적 행위들을 기술해 놓았다. 빈스토크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빈스토크를 ‘바벨탑’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 타워에 사는 인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바벨탑이라 여기지 않는다. 전쟁의 위기가 감돌고, 빈부격차로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곳도 사람이 사는, 삶의 터전이란 점에서 빈스토크의 밖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자연을 그리워하는 한 편, 지상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것은 생명체로서 자연을 향하려 하는 기본적인 욕구의 발현이기도 하면서, 태어날 적부터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살아온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언제나 타워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그들이 그곳에서 머무는 것은 결국 그곳도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놓고 그곳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심었다. 그것은 결국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 소설의 주체는 어느 시대의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배명훈은 그 접점을 노골적으로 합치시켜 전혀 다른 세계를 통해 독자가 꿈을 꾸고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 성찰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장르문학을 본격 문학에 도입해 그 효과를 훌륭히 이끌어낸 모범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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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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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강력한 소설적 특성은 2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2인칭 시점의 사용, 그리고 시점의 변화이다. 2인칭 시점은 흔히 사용되는 서술방식이 아니다. ‘너’라고 하는 화자는 ‘나’보단 화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멀고 ‘그’보단 장면을 객관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독자는 화자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에 묘한 거부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신경숙은 과감히 2인칭 시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선택은 소설의 목적에 부합하여 훌륭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너’라는 주어로 독자를 직접 지칭하여, 독자가 화자의 뒤에 숨는 것을 금지한다. 독자는 어떠한 보호구 없이 작가 앞에 맨몸으로 서서 그녀의 비난을 오롯이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피해갈 수 없을 원죄이다.


작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장마다 시점을 변화한다. 1장은 큰 딸인 ‘너’가 화자가 되며, 2장은 큰 아들인 ‘그’가 화자가 된다. 그리고 3장에선 엄마의 남편인 ‘당신’이 화자가 되고, 4장에선 엄마 그 자신이 화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선 다시 ‘나’의 화자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독자에게 던지는 그물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일 것이다. 독자는 어떻게든 작가가 쏜 화살에서 피해가려 발버둥 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1,2장에서 독자의 심장을 뒤흔든 작가는 3,4장을 통해 아내로서의 엄마, 여자로서의 엄마에 대해 조명한다.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 엄마로 존재했다.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치 않다. 엄마는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여자이길 포기하며 엄마라는 새로운 성별을 얻는다. 우리들은 엄마를 나 자신이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며, 엄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꿈 많은 여성이었으며 사랑스러운 아내였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쏟아지게 될 죄책감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가 그렇게 피해가려 했던 엄마의 진실을 들춰내었다. 그렇게 희생적이고, 인간이기보다는 우리를 키워내는 기계에 가까웠던 어머니가 언젠가의 나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닿게 되는 것이다.


2인칭 시점의 사용, 변화하는 시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엄마를 추억시키며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먹먹함을 주기 위해 씌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엄마라는 존재는 현재의 20대라면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대부분이다. 소설 속의 엄마는 과하게 헌신적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병의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내하는 부분도 젊은 독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일 것이다. 요즘의 엄마는 소설 속의 엄마보다는 좀 더 인간같고 친구같다. 소설의 평가를 요구했던 많은 동기 후배들이 이 소설은 엄청난 히트와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는 평을 한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엄마에 대한 묘한 가슴 떨림이 이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소설 속의 엄마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재의 엄마가 조금 다르다 할 지라도,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아련함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해외에 수출되어 좋은 평가를 받은 점 에서도 알 수 있다. 비록 엄마와 내가 가졌던 경험은 보편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엄마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찌르면 언제나 흘러나오는 눈물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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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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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소설이다. 웬만하면 소설 감상엔 이해가 안 된다느니, 복잡하다느니, 추상적이라느니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느낌은 쓰지 않으려 했다. 소설을 최대한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 읽었음에도 머리가 텅 빈 것처럼 소설의 흔적이 남아 있질 않았다. 아는 단어들의 조합임에도 문장이 이해가 되질 않았고, 상황은 뜬구름을 잡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문맥을 쫓아가지 못하고, 논리성이 확립되지 않아서 책을 읽는 내내 그냥 활자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건 우선 나의 독서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두께를 보곤 이삼 일 빨리 읽어치우면 되리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만만한 소설은 아니었다. 시간의 촉박함으로 평소 책을 읽는 속도로 읽어나갔는데, 그건 읽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책을 감상하고, 즐기기 보다는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책 떼기’를 하려 했던 나의 태도가 첫 번째 문제였다면 두 번째 문제는 소설의 스타일에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가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소설은 스티븐이 위주가 되어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특히나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주인공의 내면적 성장이다. 그가 어떤 갈등을 겪고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며 성장해 나가는지가 이 소설의 포인트가 된다. 때문에 이 소설은 스티븐의 의식의 흐름이 주요 서사 방법으로 동원된다. 이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면 금세 표류하고 만다.


또한 스티븐의 의식적 성장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철학적, 문학적, 정치적 요소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하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초반부엔 스티븐의 가정환경을 중심으로 가족 간의 정치적 대립이 나타난다. 그리고 중반부엔 스티븐이 신학교에 다녔으므로 종교적인문제, 성경구절, 교리에 대한 문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르면 온갖 시인들과 작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역자가 달아놓은 주석만 가지고는 파악하기 힘든 부분이다. 게다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스티븐의 태생도, 그가 예술가로서 성장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역시 이 또한 역사적 환경을 알지 못하면 알 수가 없다.


일반 적인 소설이라면 주요한 등장인물들은 하나하나 세밀하게 확인해주고, 독자가 그 인물을 소설의 세계관에 서서히 녹여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반면에 이 소설에선 등장인물을 아무 예고도 없이 대량으로 등장시키고, 사건도 갑작스럽게 전개가 되고 마무리가 되는 경향을 보인다. 역자의 문제인지 원본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알 수 없는 대명사가 튀어나온다거나 논리의 전개가 파괴되는 스타일도 눈에 띄는 듯 했다. 이는 좀 더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학교에 다녔음에도 신에게 귀의하지 못하고 어딘가 벗어난, 이단적 사고를 가졌던 주인공 스티븐이 결국엔 삶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본성을 찾아 예술가로서의 고행을 떠나는 이야기는 어찌 보면 단순해보이지만 소설 자체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웠다. 특히나 그 심리의 변화나 흐름이 세부적이어서 따라가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수업 시간에 맞춰 읽어야 해서 이해의 속도보다 읽는 속도가 빨라 아쉬움이 남는다. 한 문장씩 꼽아가며 천천히 이해해가며 읽어가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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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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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은 어릴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언제나 소설과 같은 삶이 자신의 것이 되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과 달랐다. 그녀에게 있어서 결혼이랑 낭만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의 결혼생활은 삭막하고 권태롭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 샤를르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헌신적이었지만 매력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였고, 모험이었다. 그녀의 첫 남자는 로돌프였다. 사실 그와의 관계는 엠마에게 많은 것을 안겨준다. 불륜의 짜릿함은 그녀에게 스릴을 안겼고, 그와의 달콤한 사랑은 설렘을 안겼다. 그리고 그로인한 권태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불륜이 가져오는 남편에 대한 죄의식은 오히려 남편과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었다. 샤를르는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엠마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엠마는 로돌프와의 단순한 불륜관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일상으로부터 잠시간의 해방을 넘어서, 그녀는 그 꿈같은 시간을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한 욕심은 첫 번째 파국을 만들어낸다.


그녀의 두 번째 연인은 레옹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엠마와 연인의 관계로 발전할 뻔 했으나, 그 당시 그는 너무 어렸기에 관계는 성사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파리로 떠나버리고 만다. 다시 만난 레옹에게 엠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헌신적인 사랑을 베푼다. 로돌프와의 관계가 깨지고 종교적인 귀의에 이를 정도로 상처받았던 그녀였기 때문인지 레옹과의 사랑은 좀 더 정렬적이고 적극적이었으며, 한편으론 필사적이었다. 로돌프와의 밀회는 그저 남편의 눈을 피하여 이루어질 뿐이었지만 레옹과의 밀회는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속인다. 그리고 뢰르에게 계속해서 돈을 빌린다. 거짓말은 계속해서 부풀어지고, 빌린 돈은 계속되는 어음 발행으로 불어난다. 엠마의 욕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밀어닥칠 파도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결국 그녀가 욕망에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모든 것은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고, 그녀는 그 무지막지한 사태에서 벗어나올 방도를 찾아내지 못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음독자살이었다.


엠마의 이상향은 현실의 밖에 있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므로 현실이 되지 못한다. 그녀의 꿈은 잠시간 이루어지기에 아름다운 꿈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결코 꿈일 수 없다. 로돌프는 다른 곳으로 도망쳐 함께 살 것을 제안하는 엠마를 가차 없이 버린다. 그리고 레옹은 자신의 빚을 메꿔줄 것을 요구하는 엠마에게서 도망친다. 그것은 환상으로 꿈으로 존재하던 현실너머의 것을 현실로 가져오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꿈이 현실의 세계로 넘어오면 그것은 결국 현실일 수밖에 없으므로, 현실에 대해 권태를 느끼는 엠마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 다른 권태를 낳는 씨앗이 될 따름이다. 결국 그녀는 비극적인 말로를 맞을 수밖에 없도록 운명되어진 여자였다. 샤를르가 자신의 부인의 정부였던 로돌프를 찾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상징적이다. “이게 다 운명 탓이지요!”


엠마의 비도덕적 행위를 지켜보며 퇴폐적인 그녀의 만행에 분노하는 남성 독자들도 분명히 있겠지만, 그녀가 결국 음독자살로 밖에는 규정되어진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이상향에 대한 집착은 안타깝기만 하다.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오메의 방식이 그저 옳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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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이 너무 딱딱 붙어있어서 읽느라 혼났어요..글좀 뛰어주심 안될까요???

백운호 2011-12-19 22:57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다른 곳에 쓴 다음에 복사 붙이기 했더니 행간이 다 저리 붙어버리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나머지 글들도 다 수정해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