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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쉬러 나가다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글쎄, 요즘 사람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소설의 주인공 조지 볼링처럼 의식의 심연에 잔잔히 물결치는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너무도 따뜻하고, 말랑말랑하며 포근한 것이다. 그래도 마을에 논과 밭이, 한적한 숲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고 아이들끼리 공놀이를 하거나 팽이를 돌리거나 딱지를 치던 시절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뀌어 왔을 거짓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에 나는 꽤나 즐거웠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숨막히는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동네에 찾아가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너무도 아련한 공간이기에, 다시 그 곳을 당면한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궁금한 기분도 든다.

내가 어릴 적에 살던 곳은 의정부 306보충대 근처였는데, 운명의 이끌림이었는지 306보충대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24살의 어느 추운 겨울날 10대 이전의 유년기를 보냈던 마을에 머리를 빡빡 민채로 방문했다. 기억에 남는 몇개의 랜드마크는 그대로였지만, 너무도 변한 마을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꼈었다. 분명 내가 항상 걷던 길임에도 생소한 그 느낌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기억 속 잔상들이 깡그리 허물어져 내리는 경험이었다. 세계의 붕괴였다. 그 마을을 떠나온 뒤로 나 홀로 상상속에 건축했던 한 마을이, 현실과 모순되며 무너져내렸다.

조지 볼링은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소년 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p.311  
   

물론 조지 볼링이 유년기를 보냈던 마을은 내가 경험했던 것보다 더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의 주 무대였던 마을은 어느새 구시장이 되어버렸고, 근처엔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었다. 마을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넘쳤다. 그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지금 유령처럼 누구의 삶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의 연인이었던 여자는 추한 중년여자가 되어 있었고,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가 낚시를 즐기던 강은 물놀이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그가 남몰래 간직해두었던 거대한 잉어들이 가득한 저수지는 쓰래기 매립지가 되어버렸다.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나 ‘동물농장’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정치적 색채가 가득한 소설로 읽힐 글이다. 오웰은 소설 내내 전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파괴력, 전쟁 후의 참혹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유년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그저 아름다웠던 과거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전쟁 전, 삶의 모습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전쟁으로 어쩌다 죽지 않은 사람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난리를 겪고 난 뒤, 사회를 피라미드처럼 영원하고 의심할 나위 없는 무엇으로 여기는 건 불가능해졌다. p.177  
   

그럼에도 많은 젊은 이들이들은 조지 볼링의 젊었던 때처럼 전쟁이 나기를 기대하며, 피끓는 젊음을 전쟁에 바치길 고대하며, 전쟁을 언젠가는 일어날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들과 같은 길을 밟아 전쟁을 치른 뒤, 그 끔찍한 참극을 목격한 주인공은 젊은이들의 치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성찰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그런 정치적 문제와는 조금 떨어져서 읽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유년기의 공간이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아니, 지금 태어난 아이들에겐 우리와 같은 유년기의 공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유년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은 그 시절이 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가득하고, 아이들과 뛰어 놀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먼 옛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물감으로 덧칠하고 덧칠해져 더더욱 화사해지고 아름다워 지는 법이다. 지금 태어난 아이들도 우리와 같은 유년기의 공간을 가지진 못했지만, 그들이 성장했을 때 분명히 그들은 자신의 유년기를 반짝거리는 무언가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건, 공간 그러니까 물리적인 부분을 넘어선 것이다.

조지 볼링의 유년기도 그렇다. 그 이미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조지 볼링의 회상에 의한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조지 볼링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당시가 그렇게 행복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추한 몰골로 변해버린 그의 옛 연인이, 과거엔 정말로 예쁜 소녀였을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겐 일종의 이상향이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 하지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공간을 찾아가 본들 어릴 적 우리가 보았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숨을 쉬러 그곳에 찾아가 본들, 공기 없는 진공만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은 그 기억 자체가 우리에게 공기임을 모르고. 숨 쉬기 힘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그 기억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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