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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ㅣ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랜섬 릭스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사진은 찍는 순간 과거나 미래와 단절된다.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의 매력은 그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사진 수집가들을 통해 몇 장의 사진을 구했다. 오랜 시간 동안 벼룩시장, 골동품 시장 등지에서 돌아다니던 사진 들이었다. 기괴하고 환상적인 사진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작가는 사진에서 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사진을 다시 시간의 흐름에 얹어 놓았다. 그곳이 원래 사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연관 없는 많은 사진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고, 그 결과는 이 책으로 나타났다.
이야기는 몇 장의 사진들로 시작된다. 목이 없는 어떤 남자의 사진. 공중에 떠 있는 한 소녀의 사진. 커다란 돌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 제이콥의 할아버지는 그 사진들을 보여주며 어린 시절의 제이콥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가 머물렀던 한 고아원의 이야기였다. 그곳의 아이들은 괴물들에게 쫓겼고, 서로를 지켜주었다. 제이콥은 언젠가 아이들이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게 되는 것 처럼 할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제이콥에게 할아버지가 보았던 괴물들은 2차대전 시기의 군인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은 진실이었다.
초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다.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떨어져 자신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그리고 그들을 쫓는 이들이 있어 그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설정은 익숙한 것이다. 그런 진부한 설정을 가져왔음에도 이 소설이 매력을 갖는 것은 역시 작가가 소설의 중간중간 배치해놓은 사진들 덕분이다. 물론 그 사진들이 소설의 사실성을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면 이 소설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 사진들이 수집가들을 통해 얻은 실제 사진들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의 내용과 긴밀히 연결되는 사진들을 보며 허벅지를 치게 되는 일이 잦다. '아! 이 사진을 여기에 연결시키다니!'하는 식이다. 이야기를 구성해놓고 거기에 알맞은 사진을 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일 정도였다. 사진을 이야기에 끼워 맞추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에 녹아내는 구성법이 일품이었다. 다음엔 어떤 사진들과 어떤 이야기들이 어울러질지를 상상하는 것, 그 재미가 이 소설을 읽는 맛이었다.
약간 아쉬웠던 것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이야기를 벌여놓고 제대로 마무리 짓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설명하는 데만 공을 쏟고, 세계에 대한 수수께끼가 모두 풀려버리니 이야기를 끝마치는 식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음에도 소설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이야기에 붙일 사진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에 뒷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건 사진이 없는 순수한 이야기가 되리라.
수많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었지만, 그럼에도 한 장의 스냅샷 같은 소설이었다. 석양을 받으며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마지막 한 장의 사진이 소설 전체를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설은 그 사진 앞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준 셈이다. 사진 뒤로 끝없이 이어질 이야기들은 독자들이 상상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찍는 순간 미래도 과거도 없어지므로. 그것은 온전히 사진을 감상하는 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