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연애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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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소설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주 보통의 연애」에는 잡지사 관리팀에서 영수증을 처리하는 업무를 하는 여자가, 「육백만원의 사나이」에는 모든 일들을 타인에게 맡긴 채 업무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남자가, 「청접장 살인사건」에는 고급 청첩장을 만드는 일을 하는 남자가, 「가족 드라마」에는 갈빗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잡지에 섹스 기사를 쓰는 ‘나’와 로또에 당첨됐음에도 도박으로 그 돈을 모조리 날려버린 삼촌이 등장한다. 「강묘희미용실」에는 원고를 교정하는 일을 하는 여자가, 「고양이 샨티」에는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이 등장한다.


소설 속엔 너무나도 다른 직업군들이 단편마다 등장하는데, 작가는 이들의 직업 속사정을 깊이 파고 들어간다. 백영옥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단지 그런 직업을 가진 캐릭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설 내내 자신의 일을 죽어라 수행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작가의 모든 이야기들은 등장인물들이 일을 하는 과정이다.


이들은 다들 자신의 직업으로 규정되는 인간들이다. 이들이 취하는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직업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은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그들이 가진 직업으로 규정된다. 작가는 소설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버무려 놓았다. 「아주 보통의 연애」에는 영수증을 통해 한 남자를 추적하며 사랑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청첩장 살인사건」의 남자는 청첩장을 의뢰한 사람들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하여 결혼식 사진에 얼굴을 남긴다. 이런 상상력이 발현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서에, 그들의 직업이 놓인다.


「고양이 샨티」에선 인간이 기계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고객님!을 하루에 백 번씩 외치는 것.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인간은 기계가 되어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렇게 점차 기계가 되어버린 인간들이다. 「강묘희미용실」에서 H는 주인공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책을 사랑했다고 이야기한다. 직업이 주는 굴레는 관계를 파멸로 몰고 간다.


사람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자면 그가 현재 처한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미라」에서 그녀는 피임에 대해 과할만큼의 집착을 보인다. 섹스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콘돔을 벗기고, 정액의 양을 확인하고 탄식하며 때로는 안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신병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녀가 HIV바이러스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 자신이 현재 규정되어진 것에 대한 공포는 강박을 만들어낸다. 주저흔 없이 손가락을 잘라버릴 정도의.


그렇게 파악하고 나면 이 소설집에서 등장하는 다소 상상력이 풍부한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행동양식의 근거가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벌인 것, 누군가의 영수증을 모으고, 신장을 팔아 안락사를 하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려 하는,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직업이 지어준 굴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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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 김경욱 소설집
김경욱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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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은 재미있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단편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스토리라인이 분명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이번 작품들은 주로 하층민이 소재가 되었다. 아니, 확실히 이야기하면 1%가 아닌 나머지 99%에 대한 소설을 썼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단편 ’99%’에서는 1%가 되지 못한 자들끼리의 다툼을 보여준다. 1%가 되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고 스스로 자책하며 자신감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99%에 속하는 사람들은 불이익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으며, 1%의 의도에 맞춰서 흘러가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선, 제도를 빌리기 보단 스스로의 힘을 통해야 한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바로 그러한 소설이다. 사내는 또래 아이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한 계집애를 키운다. 그 아이는 그 충격에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몸도 좋지 않아 시름시름 앓는다. 사내도 몸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힘의 앞에 무기력하게 희생된 계집애를 보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힘 없고 나이든 사내만이 계집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계집아이를 성폭행한 남자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차에 화염병을 집어던지는 모습은 그렇기에 통쾌하다기 보다는 가슴이 아프다. 더군다나 그의 방화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얼굴에 잿가루까지 묻히고 비장하게 작전을 수행했음에도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삶은 무한정 반복된다. ‘태양이 뜨지 않은 나라’에서 나타나는 삼대는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한다. 할아버지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TV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는 경비원이다. 나는 밤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들은 그러한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복하며 지내지만, 그의 집에 들어온 앵무새는 그 어둠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의 깃털을 뽑아대며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의 부엌’에는 누군가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미미의 부엌’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법대에 보낼 생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항상 공부를 붙들고 있어야 했으며, 그에게 부엌이란 넘어가서는 안될 장소였다. 영화 포스터를 붙이며 돈 벌이를 하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 남자는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불우한 환경은 불우한 관계만을 만들어낸다. 그가 원하던 것은 미미의 부엌과 같이 단란하고 아름다운 부엌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요리사였던 자신의 꿈을 억압당하고, 법대로의 길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 스스로 아버지에게 반항하에 그 길을 포기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저항한 존재인 아버지, 그의 부엌은 더럽고 냄새나고 음식물 찌꺼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사실 아버지의 꿈 또한 ‘미미의 부엌’이 아니었을까.

그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이야기의 결말이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끝이 두루뭉실하다. 사건은 제대로 끝나지 않고 무책임하게 버려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삶은 끝이란 게 없을 것이다. ‘혁명기념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만년 같이 느껴지는 하루도, ‘러닝맨’에서 오리배를 타고 열심히 페달을 밟는 남주인공의 고생도 소설 안에서 끝나고 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 끝나고도 무한히 이어지며 그들의 생이 끝날때까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김경욱의 소설들엔 마땅한 이야기의 결말이 없다. 물론 그것이 ‘연애의 여왕’에서처럼 독자의 상상에 뒷 이야기를 맡기는 형식으로 쓰여지기도 했지만, 하층민이 소재가 되는 그의 대부분의 단편에선 그것이 종결되지 않는 삶의 치열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듯 했다.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에 등장하는 대필 작가나 왕년의 권투선수부터 ‘하인리히의 심장’에 등장하는 형사들까지 수많은 인간상과 다양한 직종이 등장하는 작가의 단편들은 한 작가가 썼다곤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다. 물론 그 단편들이 보여주는 주제의식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다양한 케릭터들을 훌륭하게 주조해내는 작가의 능력, 그리고 그 케릭터들로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돋보였던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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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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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첫 장편을 다 읽은 후, 처음 든 느낌은 낯섦이었다. 그것은 규정되지 않은 모호함을 접했을 때의 낯섦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소설은 여지껏 읽어온 장편소설들과 달랐다. 읽는 내내 느껴졌던 허전하고 어색한 느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책을 덮은 후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녀의 소설에서 서사는 슬그머니 후경으로 물러나 있었다. 일반적인 장편 소설을 추동해 나가는 것은 서사의 힘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격동하는 중간. 하지만 이 소설에선 서사가 사라지고 에피소드만 남아 있었다.

물론 이 소설에도 이야기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서 이야기는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줄거리는 편린으로 나뉘고 그 사이를 수 많은 에피소드들이 메꾼다. 아름과 아버지의 대화, 아름과 어머니의 대화. 아름과 장씨 할아버지의 대화. 그리고 수 많은 과거의 기억들. 어찌보면 이야기라고 존재하는 소설의 장치는, 그저 장면 하나하나를 불러내기 위한 가지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주가 되는 것은 그 가지보다는 가지를 빽빽하게 뒤덮고 있는 색색의 꽃들이었다.

작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언뜻 이해가 되었다. 아름이는 결국엔 어떻게 될까. 그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소년이다. 아버지의 늙은 모습을 미리 살고 있는 아들이다. 그는 결국엔 죽을 것이다. 그의 삶은 그러니까 그저 버팀일 뿐이다.  하염없이 버티고만 있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작가는 거기서 선택을 한 것이다. 그저 버틸 수 밖에 없는 인물이 겪을,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이야기를 들려주느니,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자고.

그녀의 필치는 너무나도 해맑고 유머러스하다. 장난끼가 다분한 그녀의 문체는 올망졸망하고 발랄하다. 그러한 희극성은 불치병에 걸린 아이의 목소리와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킨다. 죽음 앞의 인간이 보여주는 희극성은 눈물로의 호소보다 훨씬 진폭이 큰 법이다. 작가는 그 희극성을 보여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짧고 다양하게 구성하여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잽을 날린다. 큰 한 방은 없지만, 그 축적되는 데미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를 무렵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게 만들어 버리는 힘을 지녔다. 서사성이 부족한 소설이 어찌 장편 소설일 수 있겠느냐며 회의를 가지기도 했지만, 제한된 소품으로 그처럼 폭넓은 변주를 보여주는 작가의 필력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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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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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는 이제 서점가에서 서가의 한 부분을 확실히 점유하고 있는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녀가 그 자리까지 오르는 시간은 독자 입장에선 굉장히 짧았다. 첫 작품 ‘위저드 베이커리’로 청소년 문학의 미래를, 두 번째 작품 ‘아가미’로 문학에 동화적 상상력을 접목시키는 기법을 훌륭하게 보여주며 그녀는 단 두 작품 만에 유명 작가의 대열에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단 시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쳤음에도 그녀에겐 단편집이 없었다. 물론 모든 작가가 단편을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한 작가의 문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하기 위해선 단편집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단편집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주제 사라마구 같기도 하다. 베르베르가 단편집 ‘나무’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그녀 또한 문학적 효용 안에서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상상력을 문학적 촉매제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중지’나 ‘눈 먼 자들의 도시’처럼 원인을 불문하는 사건에 소설 속 인물을 던져 놓고 그곳에서 태동하는 서사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녀의 소설이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는 그것을 통해 국내 본격 문학들이 닿아 있는 주제의식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마치…같은 이야기’는 그녀의 색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폐혀가 되어버린 S시는 새로 취임한 시장에 의해 비유가 금지된다. ‘비유의 금지’라는 모티프는 SF적 상상력인 베르나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언어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소설집 내내 이어지는 만연체는 조금 거슬리기도 하면서, 그녀의 소설 속에 드러나는 사건들을 비틀고 조소하는 풍자 문학으로서의 요소로 다가오기도 한다. 만연체의 문장이 가장 강조되는 작품은 ‘타자의 탄생’일 것이다. 이 단편에선 어느 구멍에 빠져서 상반신만 밖에 내놓은 채 갇혀버린 한 인물이 갑자기 등장한다. 어떤 전문가도 그를 그 구멍에서 뺄 수 없었고, 그는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시선에서 점점 벗어나 무형화 되어간다. 그의 ‘구멍은 어디에나 있어요’라는 외침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진다.

이러한 만화적 상상력은 ‘상상력을 보여주기 위한 상상력’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그게 구병모 작가의 매력이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조장기'는 히치콕의 ‘새’를 연상시키는 첫 장면으로 서두를 연다.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새들이 사람을 공격한다는 모티프를 사용한다. 또한 ‘재봉틀 여인’에선 무엇이든 꿰멜 수 있는 (설령 그것이 감정적 아픔이라 할 지라도) 여자가 등장한다. ‘곤충 도감’에는 전자팔찌를 넘어선, 범법자의 성적 흥분 수치가 올라가면 그 호르몬을 감지해 숙주를 먹어 치우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공적인 생물이 등장한다. ‘어떤 자장가’에선 자신의 자식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오븐에 구워 버리고, 냉장고에 집어 넣는 여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매력적인 모티프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심화하기 위한 아이템으로 사용된다.

구병모는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단순히 서사적인 방법 뿐 아니라, 현실에선 불가능한, 허구성을 극대화시킨 만약(if)을 주요한 서사 기법으로 차용했다. 그녀의 소설은 딱딱하지않고, 가능성에 대한 매력이 가득하다. 그녀의 단편들을 읽으며 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대중에게 사랑받을 작가가 될 것이란 확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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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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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읽히는 소설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편견의 눈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글을 쓰는 사람의 소양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들이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마치 사전에서 수집한 듯한 어휘들이 등장해야 비로소 독자들은 작가로부터 이른바 지식인의 풍모를 찾아낸다. 하지만 우리들이 관념적인 언어들을 쓰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우리가 그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선을 우선으로 놓고 기고만장해진 우리 앞에서, 작가는 놀라운 필력을 보여줬다. 화자가 어린 아이가 아닌 소설을 통해, 작가를 한 번쯤은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소녀는 이름이 없다. 언나라고 불리기도 하고 간나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때는 드드덕이라 불리길 원하기도 했다. 이름 없는 소녀는 소설 안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론 우리의 바로 곁에 존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기도 하면서 언젠가 나의 곁을 스쳐갔던 어떤 소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관계의 형성은 소설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독자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허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 곁을 스쳐갔던 누군가의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며 집중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다. 이름 없는 소녀는 그저 소설 속의 한 캐릭터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형체를 띤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곁을 스쳐 갔음에도 그녀에게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우리가 그녀에게 내민 것은 동정이었다. 서울에서 어떤 여자가 그녀에게 내밀었던 천원짜리 지폐와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정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던 사람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녀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러므로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는(p. 223)’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독자들은 그들의 아픔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죄책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사실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낄 감정은 공감이 아닌 동정이 분명할 것이기에 그렇다. 이런 소설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과 같은 결핍된 사람들을 위함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힘을 낼 수 있을까. 세상 앞에서 맥을 쓰지 못하고 한없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이 소설은 결핍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위선적 만족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 그 사람들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동정을 느끼고 아픔을 느끼고,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결핍되어 절망하는 사람들에겐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결핍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고, 마음이 절였다. 길거리를 걷다가 내 옆을 스쳐간 소녀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이런 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름 없는 소녀를 값싼 동정의 눈들 사이에 정육처럼 세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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