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흑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8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쥘리앵 소렐은 목수의 아들이지만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그는 몽상가이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정상에 서기를 갈망한다. 그가 나폴레옹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나폴레옹의 시대란 용기와 능력을 지녔다면 하층민이라도 군대에 들어가 성공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시대는 갔다.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체계를 되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쥘리앵 소렐이 군인으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성직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쥘리앵은 자신의 입장에서 가장 성공하는 인물이 되는 길은 성직의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연애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레날 부인 그리고 라 몰 양과의 사랑이 소설의 기본 골격이다. 작가는 쥘리앵 소렐과 두 여인간의 사랑을 굉장히 세밀한 필치로 담아냈다. 각 등장인물들간의 감정 변화 선의 치밀함이 놀라웠다. 레날 부인과 쥘리앵 소렐 사이의 사랑은 서로간의 호의에서 시작 되었지만, 두 인물의 계급차 그리고 이미 남편을 가지고 있는 소렐 부인의 입장 차이로 쉽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또한 라 몰 양과 쥘리앵 사이의 사랑은 두 사람의 성격차에서 비롯된 갈등이 주가 된다. 작가는 인물들의 사랑이 발달되어 나가는 엎지락뒤치락 하는 감정의 기복을 정밀하게 묘사해내었다.


적과 흑은 이러한 놀라운 연애소설이면서도, 한 편으론 당대 사회를 폭로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엔 살롱의 권태라던가 하층민임에도 놀라운 능력을 지닌 쥘리앵을 질시하는 귀족층들 부르주아들의 세태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위선으로 똘똘 뭉친 상류층들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러한 세태는 쥘리앵의 죽음을 통해 극명하게 강조된다.


쥘리앵은 자칫 물욕을 쫓아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거리낌없이 해치우는 냉혈한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태생적 그림자를 떨쳐낼 수 없는 시대의 제약이 엿보이기도 한다. 쥘리앵은 야심가이면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고 자신의 몽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물이었다. 성서를 라틴어로 모조리 암기할 정도의 노력을 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행위는 기독교적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위선을 통해 자신의 본래 감정마저도 감추는 그 지독함으로, 결국 그는 라 몰 양과의 관계를 성사시키고 귀족의 지위까지 손에 넣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결국 그를 추락시킨 것은 그 사회가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기본적인 한계였다.


1830년에 쓰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180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현대에서도 효용성을 지녔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출세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스러져간다. 대부분의 아이들의 장래희망에서 대통령, 의사, 과학자는 사라지고 공무원, 교직원 등이 남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보다는 대학을 졸업하여 스펙에 맞는 직장에 취직해 월급을 받으며 사는 것을 최선의 삶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개척하는 삶이 아니라 삶에 끌려가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쥘리앵의 행동, 야욕은 일종의 본이 된다. 나도 저처럼 의욕에 불타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쥘리앵의 죽음, 명예로운 처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의 마지막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거리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고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엄청난 다작가다. 서점가엔 쉬지 않고 그의 소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의 이름을 잊을 새도 없이 새 작품이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작가 이름이 아니라 무슨 모임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게다가 그 작품들이 대부분 중박 이상을 치는 걸 보면, 놀라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영화화 되거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사실 그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지만, 그는 소설가라기 보다는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그의 소설은 마치 시나리오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써놓은 것 같다. 꼭 필요한 행동묘사나 심리묘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스토리는 대사로 처리된다. 그리고 그의 소설의 장면들은 쉽게 상상 가능하고, 쉽게 현실화 가능한 장면들이다. 복잡한 상징성, 이미지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게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 독자들에게 그가 어필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그의 장기인 ‘이야기만들기’를 정면에 부각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다.

그의 소설은 조금 특이한 경향성을 띤다. 그의 소설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소설에선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미스터리가 발생하며, 그것이 해결된다. 정통적인 방식의 범인찾기가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의 기본 골자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순한 미스터리물이 아니고, 거기에 사랑과 같은 인간적 감정을 담아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것에 주력한다. 그의 이런 스타일을 가장 단정적으로 볼 수 있는 소설이 그 유명한 ‘용의자 X의 헌신’이다.

그 소설은 흔한 추리물의 성격을 가졌다. 살인사건이 생기고, 그것을 숨기려는 알리바이가 동원된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치는 형사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 수수께끼 풀이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도, 한 남성의 헌신적 사랑에 촛점을 맞췄다. 덕분에 독자들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와 반전이 일으키는 카타르시스를 넘어서 인간적인 감동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 ‘새벽거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소설은 추리보다는 드라마에 더 무게를 두었다. 사실 내용은 별볼일 없다. 불륜을 하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가 사랑에 빠진 여자는 과거에 어떤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소설은 불륜을 하는 남자의 고뇌, 그것이 인륜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욕망적 속삭임에 굴복해버린 인간의 좌절을 그리면서도 한 편으론 확실히 드러나지 않은 살인사건의 전모를 드러날듯 드러나지 않게 감추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남자가 불륜을 하는 상대도 그녀의 아버지가 불륜을 해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다거나, 때문에 남자의 딸도 같은 상처를 공유하진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라던가. 남자의 아내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의심을 억누르고 그를 평소와 다름 없이 맞아들이는 장면 등에선 흔한 불륜의 소제에서 신선함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섬세함이 잘 드러났다.

소재가 소재다보니, 왠만한 실력을 가진 이야기꾼이 아니고서야 이 소재를 재미나게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그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듯 싶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나 로멘스라고 보기에도 어설프고, 추리소설이라고 보기에도 반전의 묘미가 없는 싱거운 작품이었다. 다만, 결혼을 한 남자의 입장에선 이 소설이 얼마나 달콤하게 읽힐지 모르는 일이다.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독자적인 경향성을 가진 작가의 특색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작품이라 이전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던, 너무도 재미나고 놀라웠던 작품들에 비해 실망스럽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하는 말’이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거짓말은 좋지 않은 거라고 교육받는다.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을 훔치는 것은 용서될 지 모르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말은 용서되지 못한다. 누구든 소년기에 이런 따끔한 호통을 한 번은 들었을 것이다. “잘못은 해도 괜찮아! 하지만 거짓말은 안 돼!”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도덕적 자질의 문제로 치부된다. 선거철에 정치인들의 ‘거짓말’을 자질의 문제로 들고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 모든 거짓말들은 고의성이 바탕이 된다. 누구든 거짓말을 하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거짓말 탐지기가 그런 것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던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신체언어를 읽음으로써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은, 거짓말이 고의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초로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거짓말도 존재할까.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는 이와같은 고의적이지 않은 거짓말을 다룬다. 소설을 서술하는 자는 한 기자이다. 소설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인터뷰의 주제는 베란다에서 자살한 한 아르헨티나의 작가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에 대한 것이다. 그가 죽은 지 30년 후에, 한 프랑스인 기자의 그의 죽음에 관해 그의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기자의 인터뷰 대상이 된 네명의 인물들은 저마다 기억하는 베빌라쿠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선 30년이란 세월 동안 흐려지긴 했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그것은 소설이 진행될수록 미묘해진다.

한 사건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시각차를 다루는 가장 유명한 소설은 ‘라쇼몽’이다. 한 사건을 가지고 여러 인물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통해 소설은 진실은 사건이 일어난 직후 소멸되며, 남은 것은 목격자의 기억 속의 조작된 편린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물론 그것은 목격자의 이익을 위해 고의적으로 편집된 기억일 수도 있다. 편집된 과거라는 복잡한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기억은 어찌됐든 부분적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진실과 유리된다.

베빌라쿠아는 자살했다. 그리고 그와 가까웠던 네 명의 인물이 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던 베빌라쿠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베빌라쿠아의 이야기들은 전혀 다르다. 소설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차 새로운 인물에 의해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 전 인물들이 했던 이야기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진실이야 여겼던, 기억했던 사실들을 말했을 뿐이므로. 하지만 전체를 알지 못하는, 부분은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면, 결국 소설 속의 모든 인물은 거짓말쟁이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들이 말한 이야기들은 진실이면서도, 또한 온전한 진실은 아니므로.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소설의 인문들 뿐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모두 거짓말쟁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체호프는 근대 단편 문학의 완성자라고들 한다. 모파상과 더불어 단편 작가로는 세계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써 낸 단편의 역사적 의미들을 모른다면, 독자는 그의 소설들이 왜 위대한지 알아채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단편들은 현대문학에서의 단편과 느낌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밀도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지나치게 현학적이 되어버린, 상징과 은유가 난무하는 요즘의 단편들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체호프의 단편은 심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런 점이 체호프 단편의 매력이라 생각했다. ‘이야기’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결국 소설가는 이야기꾼임을 감안해 보았을 때, 체호프의 단편들은 그것에 아주 충실하다.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명확한 모티프를 가지고 있으며, 분명한 스토리 라인을 가진다. 독자에게 메세지를 던지는 건 화려한 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겪으며 내면적 갈등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 과정이 던지는 시사점은 숨겨진 화두를 찾기에 바쁜 요즘 소설들과 대비된다.

처음 ‘관리의 죽음’을 읽을 때는 다소 싱거운 그의 이야기가 복잡다단한 플롯에 익숙해진 나의 입맛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소설 ‘공포’, ‘베짱이’를 읽어 나갈수록 조미료가 빠져나간 건강한 음식이 주는 즐거움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소설을 남긴 지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그의 소설은 아직도 생명력을 가지는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즐거움을 가졌다. 그의 소설이 왜 고전으로 남아 오래도록 사랑받는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설정이 대단히 흥미롭다. 1854년, 미 북부 샤이엔 족의 족장은 미국 군 당국에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신부는 가톨릭의 신부(神父)가 아니라 신부(新婦)를 말한다. 인디언들이 미국에 천 명의 백인 여자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들은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을 통해 자신이 백인 사회에 자연히 섞여 들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인디언에게 그것은 곧 평화를 위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들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여자들이 정말로 인디언에게 신부로 보내졌다면?

이 흥미로운 설정을 소설에선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신부를 보낼 것을 결정하고, 신부들은 이 요구를 제안한 샤이엔 족이 머무는 거처로 출발한다. 그 과정은 모두 간단히 기술된다. 어쩌면 흥미진진한 팩션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작가는 과감히 포기했다. 작가는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백인 여자를 인디언 사회에 집어 던진다. 이로써 저 흥미로운 설정은 서사의 근간이 되기 보다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

저 설정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천 명의 백인 신부가 인디언 사회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의 정치적인 문제 라던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익관계, 혹은 인디언에게 시집을 가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찾아야만 했던 어떤 여자들의 이야기 등등.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가능성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백인 여자를 인디언 사회에 집어 넣어야 했을까. 그저 인디언의 시각에서 인디언의 이야기를 그려도 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는 그리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인디언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백인 여자가 인디언 사회에 끌려 들어가 혹독하게 적응하는 과정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은 인디언의 사회에 너무나도 쉽게 녹아들어간다. 그녀들은 인디언들의 건강한 야외생활, 자연과 벗하는 생활에 매혹된다.

그럼에도 이 설정은 의미를 가진다. 인디언을 그리는 시각이 인디언이 아니고 백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백인은 사실 백인도 아니고 인디언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여태껏 인디언을 보아왔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디언은 적이었다. 서부극에서 용감한 백인 총잡이는 미개하고 흉학한 인디언들을 멋지게 처단했다. 백인들은 문명화된 존재였고, 그들에게 인디언은 교화의 대상, 가르침의 대상이었다. 이후에 인디언은 거대 권력에 억압당하고 폭력에 노출된 희생자들로 그려진다. 힘이 없었던 존재들. 침략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 그런 인디언들을 이 소설에선 백인과 똑같은 존재로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메이 도드라는 이름을 가진 백인 여자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그와 동거를 했다는 이유로, 정확히는 문란하고 더러운 여자라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인디언과 결혼해 그의 자식을 낳아 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갇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개한 자들, 야만인의 땅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그려진 인디언들은 미개하다기 보다는 단순하고, 야만적이라기 보다는 순수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고 그것은 어찌 보면 백인들 사회의 것보다도 우월했다. 백인과는 다르게 그들은 여성과 평등했다. 성별보다는 각자가 지닌 개성들을 이해하고 인정했다. 이를테면 티미와 같은 흑인 여성은, 그 육체적인 강함을 인정받아 여전사가 되었다.

백인이지만 인디언의 아내가 되어 결국엔 인디언이 되어버린 여자의 눈을 통해 그려진 인디언은, 미개인도 혹은 폭력의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디언이었기에 미국인들의 총탄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눠준 땅이 금광으로 발전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구역에 밀어넣고 치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시집간 백인 신부들이 백인들의 총탄에 똑같이 희생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작가는 인디언에게 시집간 백인 여성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렸다. 샤이엔 족의 족장은 자신들과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둘을 이어줄 가교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상 둘을 이어 준 진정한 존재는 인디언과 결혼한 백인 여성들이었다. 백인도 아니고 인디언도 아닌 여성들. 그들은 인디언과 백인을 구분하는 시선을 무너뜨렸다. 작가는 이 장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미국사를 재해석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