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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설정이 대단히 흥미롭다. 1854년, 미 북부 샤이엔 족의 족장은 미국 군 당국에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신부는 가톨릭의 신부(神父)가 아니라 신부(新婦)를 말한다. 인디언들이 미국에 천 명의 백인 여자를 선물로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들은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을 통해 자신이 백인 사회에 자연히 섞여 들어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인디언에게 그것은 곧 평화를 위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들의 요구는 무시되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가정에서 출발한다. 만약 여자들이 정말로 인디언에게 신부로 보내졌다면?
이 흥미로운 설정을 소설에선 그리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미국은 인디언들에게 신부를 보낼 것을 결정하고, 신부들은 이 요구를 제안한 샤이엔 족이 머무는 거처로 출발한다. 그 과정은 모두 간단히 기술된다. 어쩌면 흥미진진한 팩션이 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작가는 과감히 포기했다. 작가는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백인 여자를 인디언 사회에 집어 던진다. 이로써 저 흥미로운 설정은 서사의 근간이 되기 보다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하게 된다.
저 설정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천 명의 백인 신부가 인디언 사회로 가게 되는 과정에서의 정치적인 문제 라던가,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익관계, 혹은 인디언에게 시집을 가면서까지 자신의 삶을 찾아야만 했던 어떤 여자들의 이야기 등등. 하지만 작가는 그 모든 가능성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백인 여자를 인디언 사회에 집어 넣어야 했을까. 그저 인디언의 시각에서 인디언의 이야기를 그려도 이 소설의 기본적인 서사는 그리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인디언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백인 여자가 인디언 사회에 끌려 들어가 혹독하게 적응하는 과정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은 인디언의 사회에 너무나도 쉽게 녹아들어간다. 그녀들은 인디언들의 건강한 야외생활, 자연과 벗하는 생활에 매혹된다.
그럼에도 이 설정은 의미를 가진다. 인디언을 그리는 시각이 인디언이 아니고 백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 백인은 사실 백인도 아니고 인디언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여태껏 인디언을 보아왔던 관점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인디언은 적이었다. 서부극에서 용감한 백인 총잡이는 미개하고 흉학한 인디언들을 멋지게 처단했다. 백인들은 문명화된 존재였고, 그들에게 인디언은 교화의 대상, 가르침의 대상이었다. 이후에 인디언은 거대 권력에 억압당하고 폭력에 노출된 희생자들로 그려진다. 힘이 없었던 존재들. 침략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추방된 자들. 그런 인디언들을 이 소설에선 백인과 똑같은 존재로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메이 도드라는 이름을 가진 백인 여자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그와 동거를 했다는 이유로, 정확히는 문란하고 더러운 여자라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인디언과 결혼해 그의 자식을 낳아 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갇힌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개한 자들, 야만인의 땅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그려진 인디언들은 미개하다기 보다는 단순하고, 야만적이라기 보다는 순수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고 그것은 어찌 보면 백인들 사회의 것보다도 우월했다. 백인과는 다르게 그들은 여성과 평등했다. 성별보다는 각자가 지닌 개성들을 이해하고 인정했다. 이를테면 티미와 같은 흑인 여성은, 그 육체적인 강함을 인정받아 여전사가 되었다.
백인이지만 인디언의 아내가 되어 결국엔 인디언이 되어버린 여자의 눈을 통해 그려진 인디언은, 미개인도 혹은 폭력의 희생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디언이었기에 미국인들의 총탄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눈엣가시였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눠준 땅이 금광으로 발전된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구역에 밀어넣고 치워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희생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시집간 백인 신부들이 백인들의 총탄에 똑같이 희생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작가는 인디언에게 시집간 백인 여성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디언과 백인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렸다. 샤이엔 족의 족장은 자신들과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둘을 이어줄 가교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상 둘을 이어 준 진정한 존재는 인디언과 결혼한 백인 여성들이었다. 백인도 아니고 인디언도 아닌 여성들. 그들은 인디언과 백인을 구분하는 시선을 무너뜨렸다. 작가는 이 장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미국사를 재해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