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누어 가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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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 다이어리는 여친, 피너츠 일력은 동생, 모비딕 머그는 엄마에게로 갔다. syo는 2018 서재의 달인이 되었고, syo가 가장 사랑하는 세 여자가 작지만 귀여운 것들을 나누어가졌다. 그렇게 박스를 비웠는데, 비었을 공간에 여러 색깔의 미소가 잔뜩 들어있었다. 세 여자가 던져 넣고 간 것 같아서, syo가 그걸 가지기로 했다.
아무래도 제일 큰 몫은 내가 가져간 것 같다.
2
이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받고 싶은 감정은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몹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성애의 대상으로서 자신도, 상대방도, 그리고 관계 자체도 상대평가를 통한 무한경쟁 분위기에서 예외가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안정과 신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이런 감정이나 관계의 특성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회학자들은 오늘날 사랑이 일종의 종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안정과 절대적 신뢰가 어렵다는 것을 알수록 더욱 바라게 되는 모순은 등장인물들이 만성적인 불만 상태에 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_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198-199쪽
모두들 저마다의 사랑을 한다. 간혹 닮았을 수 있지만 하나도 같은 게 없다. 내가 해도 누구랑 하는지에 따라 자꾸 달라지고, 내가 걔랑 해도 언제 했느냐에 따라 끝없이 달라지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형태나 특성이 아니다. 좌표다.
모두들 저마다의 사랑을 한다. 간혹 닮았을 수 있지만 하나도 같은 게 없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대체로 닮았고 간혹 같기도 하다. 왜일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 누가 그랬을까?
이데아는 이데올로기다. 지적/문화적/사회적/경제적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자기 입맛에 맞게 빚은 덩어리를 치켜들고,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이데아요! 하고 선포하는 순간, 수평적이고 스스로 빛을 내던 모든 사랑들이 이데아와 얼마나 닮았는가를 기준으로 줄 세워져 수직적 위계 속에 포획된다. 당신의 사랑에 점수가 매겨집니다.
이데아는 필요하다. 사랑하니까 목을 조르고 사랑하니까 배를 발로 차고 사랑하니까 원할 때 덮치는 형태의 것을 사랑의 범주에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도 사랑도 오염되고 말 것이므로, 사람과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해야할 무엇인가는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랑도 자체 독보적으로 위대하여 사랑의 이데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이데아로 탈바꿈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 우리가 사랑에 바라도 된다고, 혹은 바라야 한다고 믿고 있는 가치들, 다른 사랑들의 찬탄과 질시를 불러 모으는 크고 아름다운 사랑의 생김새 같은 것들을 정하는 이는 언제나 가치중립적이지도 않고 가치중립적일 생각도 없다.
언젠가 A가 술잔을 비우며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진짜 자신을 숨기고, 하고 싶지 않은 얼굴 표정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며, 하고 싶지 않은 일로 하루를 채워나가는데, 그러니까 정말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한테만큼은 그런 가면과 가식, 거추장스러운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진짜 나로, 오롯이 진짜 나로 있고 싶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우리 집에서만큼은, 마음의 부담을 다 내려놓고 싶어. 그러자 B가 말했다. 와, 나도. 나도 딱 그래. C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조차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못해?”라는 흔한 말을 포장하는 A도 무서웠지만, B와 C의 동의가 더 무서웠다. A와 B는 너무도 다른 성격 탓에, 자라며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포기하고 양해와 인정으로 우정을 쌓아올린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이제껏 해온 사랑들 역시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역시 너 답군, 하며 납득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에 요구하는 것은 기묘하게도 같았다. 심지어 C조차, 아직 한 번도 연애다운 연애를 해보지 못한 C조차, 해보지 못한 사랑에 같은 것을 요구할 태세였다. 나는 무서웠다. 저들에게 사랑을 가르친 누군가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가 숨은 곳이 높고, 접근할 수 없고, 낱개의 사랑들이 외치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엄혹한 곳일까 봐.
뭐 새로운 지혜라도 발견한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정도로 여기저기 깔렸다.
그런데 우리는 렌즈를 통해서 볼 분 아니라 렌즈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렌즈 없이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투명한 렌즈, 보편적 렌즈라는 게 다로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렌즈를 통해서 봅니다. 그리고 '어떤' 렌즈를 통해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은 볼 수 있지만 또 어떤 것은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잠자리의 눈과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게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렌즈를 통해 본다는 것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이상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우리의 시각에는 의지, 욕망, 충동 같은 게 개입합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인간이 아름다움에 대해 갖는 생각은 그의 몸단장에 속속들이 새겨져서 의복을 구기거나 빳빳하게 만들고, 그의 몸짓에 곡선 혹은 직선을 부여하고, 결국에는 교묘하게 그의 얼굴 표정에까지 침투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되고자 했던 모습과 흡사하게 되고 만다.
_ 샤를 보들레르, 『샤를 보들레르 :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몇 번씩 비슷한 이미지나 말을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반복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미디어'는 '정치'에서도 스테레오타입을 효과적으로 생산하며, 겐페이 전투(치열한 싸움을 빗대는 말)를 부채질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더구나 '미디어'를 매개로 한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당사자들이 지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의식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스테레오타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겐페이 전투에 열을 올린다고는 감히 생각도 못한다. 반면 자신의 '적'은 어리석기 때문에 스테레오타입에 흠뻑 젖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층 더 스테레오타입을 따라가는 발상에 빠지기 쉽다.
_ 나카마사 마사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3
대부분이 월세, 좀 나아봤자 겨우 전세로 계약기간마다 집을 옮겨 가며 사는 이들에게 무겁고 부피가 나가는 책은, 게다가 그 책을 수납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책장은 이사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부담이다. 부자들은 돈이 생기면 불패의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명품들을 사느라 바쁘고 가난한 사람들은 책을 사도 둘 공간이 없어서 책 사기를 망설인다. 책은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팔리지도 읽히지도 않고,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책을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책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방황한다. 책을 읽지 않는 국민이라고, 정신문화가 척박한 천민 자본주의 세상이라는 한탄에는 어쩐지 선민의식이 섞여 있는 것 같아 불만이다. 책을 두는 공간마저 아껴야 하는 삶의 기반 자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닐까?
_ 서영인,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76쪽
한국인의 평균 독서율은 OECD 평균에 가깝지만 연령대별로 분석해보면 매우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6~24세의 독서율은 87.4%로 조사국 중 1위다. 25~34세의 경우 85.1%로 5위로 떨어진다. 그러다 35~44세는 81.4%로 8위가 된다. 45~54세는 68.8%로 평균 이하로 떨어져 16위가 된다. 이제 문제의 55~65세가 된다. 이 나이 때의 한국인의 독서율은 몇 위일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다. 51.0%로 최하위다!
_ 김욱, 『책혐시대의 책읽기』, 47쪽
독서율 통계란 놈을 처음 만났을 때, syo가 놀랐던 대목은 ‘독서율’이라는 용어 자체였다. 그건 1년 동안 책을 ‘읽은’ 사람의 비율이라는 뜻인데,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 있긴 있겠지 싶긴 했지만, 그 ‘율’을 조사할 만큼 의미 있는 숫자로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정말, 사람들 정말 안 읽는구나, 우와,
이러고 띡 넘어 갔던 기억이다. 난 아님. 어차피 남이 안 읽는 거,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남 걱정 제일 쓸데없는 걱정.
그런데 여기 두 분은 그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회현상을 조망한다. 저런 눈을 갖자고 책을 읽는 것인데, 1년에 500권을 때려 읽어도 syo는 이러고 있으니, 독서의 효과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실질적’ 독서율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syo도 걔를 깎아 먹고야 말았을 것 같다......
현명한 생각들을 공부하고, 그 과정을 똑같이 밟아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정신의 미식가적 활동이다. 책을 읽는 것은 남의 뇌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읽은 것을 소화하는 과정은 우리 자신과의 지속적인 대화다. 여기서 예전보다 좀 더 현명하고 논리적으로 세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가능성이 생긴다.
_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세상을 알라』
4
흄은 이 논고의 신판에서 기후가 국민성에 미칠 법한 영향을 논의하는 대목 중 악명을 얻어도 싼 각주를 달았다. 그는 여기서 자신이 "흑인이 백인보다 선천적으로 열등하지 않을까 곧잘 의심하게" 된다면서 "지금껏 그런 피부색을 한 문명국가는 없었고, 행동이든 사유든 한 방면에서 걸출한 개인도 단 한 명 없었다"고 언급한다-실제 경험보다는 개인적 의획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험주의자 한 명의 펜에서 직접 나온 것이다. 스미스의 경우는 이런 실수를 피했다. 가령 그는 "아프리카 해안 출신 흑인 중 추악한 주인의 영혼으로는 도저히 품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관대함을 소유하지......않은 이는 단 한명도 없다. 운명이 그런 영웅의 나라들로 하여금 유럽 감옥의 쓰레기를 겪게 한 때보다 인류에 대한 자신의 위력을 더욱 잔인하게 행사한 적은 없었다"고 썼다. 인종이라는 주제를 놓고 흄과 스미스 사이에 어떤 토론이나 공개적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 각주는 흄의 인격과 관련해 진정한 오점 중 하나를 보여준다.
_ 데니스 C. 라스무센, 『무신론자와 교수』, 58-59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자 열등론, 데카르트의 동물 기계론, 그리고 흄의 흑인 미개(의심)론. 쟤네들 전부 철학사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거대한 기둥들인데, 그래서인지 이런 대목을 만날 때마다 안심과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쟤네들도 별 수 없군, 쟤네들 책이라고 너무 숙이지 말고 보자 이거야! 하는 안심. 쟤네들도 별 수 없군, 쟤네들조차 별 수 없는데 나는 어떡해..... 하는 불안.
뭐 어쨌든 재미는 있다.
스미스의 발언도, 완전히 문제가 없는 것 같지는 않다. 관대함을 흑인의 특성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는 발언이고, 그렇게 되면 흑인의 특성과는 또 다른 백인의 특성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즉시 흄의 말과 스미스의 말은 같은 말(같지만 조금 더 고운 말, 그래서 더 영리한 말)이 된다.
그나저나 이 책은 진짜 안 넘어간다.......
5
2019년에는 정말 독서량을 줄이고야 말 생각이다(고 말하면서 아래쪽에 저런 목록을 게시하다니 부끄럽다). 그 대신 한 달 내내 반복해서 읽을 책 두세 권씩을 골라 꼼꼼하게 읽는, 그야말로 ‘과업’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다. 서친님들 정리 포스트에 올라오는 책들에 비해 syo가 읽은 책이 좀 가벼운 것 같아서 속상했다. 다들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 먹었다고 뿌듯해하는데, syo만 난 그런 거 모르겠고 일단 배터지게 먹었음, 꺼억, 이러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1월 내내 읽을 세 권의 책은
무질서의 효용 / 리처드 세넷 지음 / 유강은 옮김 / 다시봄 / 2014
동무론 / 김영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8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
되겠습니다. 짝짝짝.
--- 읽은 ---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12월)
서영인, 보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12월)
브루스 손턴, 『고전학 공부의 기초』
나카네 하지메, 『어쩐지 더 피곤한 것 같더라니』
오선영, 『모두의 내력』
--- 읽는 느낌 ---
1. 정석, 『도시의 발견』: 넓고 얕다는 느낌
2. 고종석, 황인숙, 『황인숙이 끄집어낸 고종석의 속엣말』: 내가 골라놓고 이러는 게 좀 웃기지만 어쨌든 안물안궁이라는 느낌
3. 김한민, 『아무튼, 비건』: 내가 돼지인 것이 돼지들한테 죄스러운 느낌
4. 다쿠미 슈사쿠, 『최고의 엔지니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난 왜 자꾸 이런 책을 읽느냐는 느낌
5. 김욱, 『책혐시대의 책읽기』: 고수는 과연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법이라는 느낌
6. 김금희,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숭배의 기로에 서 있는 느낌
7. 데니스 C. 라스무센, 『무신론자와 교수』: 꾹꾹 눌러 담아 몇 숟가락 못 먹고 배불러서 눕고 싶은 느낌
8.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목욕재계하고 정좌하고 앉아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할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