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두드려 볼 가능과 권능 사이의 징검다리

 


1

 

괜찮은 서평을 쓰는 일은 애당초 포기하였으나, 요즘은 짧은 평이나 단순한 추천조차도 포기해야 하는지 심도 있는 고민에 빠져 있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syo에겐 거의 올해의 소설에 육박할 만큼 감명 깊었기에 어딘가에 추천하였는데, 별 세 개를 받고 장렬히 망하였다. 김불꽃의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려다 syo의 서재에 들어 온 어느 이웃님은, 그 책이 들어있는 페이퍼를 읽고 하하호호 웃으셨다지만 책에 막상 그 책에 대한 정보는 0.1도 못 얻고 발길을 돌리셨다.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셨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은 정말 좋은 책인데, 좋은 책이긴 좋은 책인데, 내 올챙잇적 그 책 읽으며 올챙올챙 울었던 생각을 못하고 부주의하게 좋다좋다 써놨다가 순진한 어느 이웃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대체 내 추천 센스는 어떻게 되어먹은 것이지?

 

과연 LG트윈스 팬답게, 타율이 형편없다......

 

 

 

2

 

문제는 비단 거기만이 아니다.

 

어제는 소소한 개인적 슬픔을 토로하는 페이퍼를 썼는데, 그게 의외로 빵 터졌다. 댓글을 분석한 결과 핫스팟은 아마도 <무르피평생아프디푸스>라는 요상망측한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저게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리라고는 1도 예측하지 못했다. 유치해서 뺄지 말지를 잠깐 고민했다가, 고민학가 귀찮아서 그냥 뒀을 뿐인데, 걔가 효자일 줄이야. 대체 내 개그 센스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이지?

 

과연 LG 트윈스 팬답게, 방어율도 형편없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의 한 가지 양상을 절제라고 불렀습니다절제란 모든 종류의 쾌락에 빠지려는 유혹을혹은 부와 유한정의 좋음을 우리에게 좋은 정도 이상으로 추구하려는 유혹을습관적으로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우리가 신체적 쾌락의 유혹을 받는 한 가지 이유는 대개 우리가 그것을 즉시로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절제할 줄 알게 되면 우리는 장기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좋은 것을 위해 단기적인 면에서 외견상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덕의 또 다른 양상을 용기라고 불렀습니다쾌락의 탐닉으로 방해받게 될 더 중요한 좋음의 획득을 위해 그 쾌락의 유혹을 이겨내는 습관적 기질이 절제라면용기는 우리가 좋은 삶을 위해 해야만 하는 어떤 것을 행할 때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해내는 습관적 기질입니다.

모티머 J. 애들러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할 수도 있는 것을 안 할 수 있는 사람을 모토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지, 혹은 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예를 들자면, 임산부 배려석이지만 차내에 임산부가 없으므로 나는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횡단보도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쨌든 파란불이라 도로에 달리는 차가 없으므로, 나는 무단횡단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병장권신수설에 따라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병장이고, 어차피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일이므로, 나는 세탁기를 돌리려는 후임병에게 내 빨래도 같이 해 놓으라고 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을 단호하게 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특히, 내가 앉지 않아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 앉을 게 뻔히 보일 때, 다른 이들이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을 때, 나도 이등병 일병 시절에 병장들의 빨래까지 해줘야 했던 경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syo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안 할 수 있는 능력을 탐낸다.

 

할 수 없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역시 언젠가 꼭 되고 싶은 인간형이다. 인류는 늘 저런 이들의 무모한 도전이 낳은 부산물들을 먹고 앞으로 나아간다. 부서지고 깨진 인간들의 피딱지를 씹으며 지성과 정의의 몸피가 불어난다. 남들보다 먼저 나서서 첫 번째 촛불을 든 이가 있다. 그 한 송이 촛불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거센 파도가 되어 오물을 쓸어냈다. 그도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언정.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는 소극적 덕을 절제라 부르고,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타인을 배양하는 적극적 덕을 용기라 부른다면, 미덕들 앞세우는 사람들에게 역량의 여부는 오히려 덫에 가깝다. 할 수 있을수록 절제하기 어렵고, 할 수 없을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종종 역량에다 기준을 세운다. 내게 할 힘이 있는 일을 못하게 막는 것을 구속이라고 부르고, 내가 할 힘이 없는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을 강요라 부른다. 절제와 구속, 용기와 강요는 외부에서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위와 역량 가운데 무얼 먼저 챙기는 지에 따라 그저 달리 보이는 것일 수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어느 국면까지는, 우리가 하지 못할 말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처의 개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베트남에서 온 친구는 바나나잎에 생선을 자주 구워 먹었다고 했다어릴 때 마잎에 생선을 구워 먹던 기억이 났다마잎을 태운 향기가 생선살로 스며들어가 생선에서는 오래도록 한약을 달이는 듯한 깊은 맛이 났다바나나잎에 생선을 구우면 어떤 맛이 날까싶었다그리고 그 바나나잎에 누구도 화학 살충제를 뿌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허수경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강연 중에 '문학은 나태한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내용의 말을 하다가 잠시 주춤했다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현실인 '고문'을 비유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했다계속 공부해야 한다누군가의 터널 속 어둠의 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신형철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최태섭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 읽은 책들 --



모티머 J. 애들러,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가쿠타 미쓰요, 어느새 운동할 나이가 되었네요

최은미 지음, 최지욱 그림, 정선

전효진, 전효진의 독하게 합격하는 방법

 

 

 

-- 읽는 책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이아림,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허수경,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Dr. Nicholas Romanov , 러닝 레볼루션

황현진 지음, 신모래 그림, 부산 이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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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8-10-12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지 팬이셨군요...ㅎ

syo 2018-10-12 19:28   좋아요 0 | URL
네ㅠㅠㅠㅠㅠㅠ 제가 바로 뒤로 넘어져도 8이 다치고 앞으로 넘어져도 8이 다치는 8쥐팬입니다.....ㅠㅠㅠ

유부만두 2018-10-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LG 팬답게 거창했던 연초의 계획을 가을을 넘기지 않고 버렸.... 뻔뻔하게 버렸...

마지막 홈경기서 (그것도 졌죠. 역전패... )
정주현 사인볼 받은 게 위로고 오지환 사인 받은게 위안이었어요. 아... 지환이.... 만나서 반갑습니다..만.. ㅜ ㅜ

syo 2018-10-12 19:59   좋아요 0 | URL
지환이 단단하게 생겼어도 여린 아인데..... 올해도 역시 언제나처럼 ˝내년에는....˝ 하는 마음으로 한 해가 저무는군요.

stella.K 2018-10-1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불꽃의 『예의 없는 새끼들 때문에 열받아서 쓴 생활예절』이란 책이 정말 있습니까?
허 거 참...

오늘 뉴스를 보니 프로 야구 원년 우승 팀이 지금의 두산 전신인
OB베어스라고 하더군요.
저는 뭐 스포츠는 잼병이라 그런데 제가 만일 야구를 좋아했다면
두산을 응원했을 겁니다.ㅎㅎ

syo 2018-10-12 21:17   좋아요 0 | URL
두산은 너무 잘해서 미울 지경입니다. 어쩐지 저는 지나치게 잘하는 팀에는 정이 안가더라구요.

비로그인 2018-10-12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엘지 팬... 가족 모두 엘지를 응원합니다ㅠㅠㅠ 반가워요 syo님... syo님 글 늘 잘 보고 있어요! 독서량이 줄어든 요즘 syo님 글 보면서 나도 책 많이 읽어야겠다 다짐하곤 합니다. 항상 자극이 되는 글 써 주셔서 감사해요. :)

syo 2018-10-12 21:21   좋아요 0 | URL
deardeer님께 자극이 되었다니, 뜻밖의 선방이네요. 사실은 자극은 엘지 애들이 받아야 되는데 말이지요 ㅎㅎㅎㅎ 저도 deardeer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10-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러는 저도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요,
그의 책 읽으며 느낌은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은 그리고 않을 도덕 선생님이란 느낌입니다. ㅎㅎ

syo 2018-10-12 21:23   좋아요 0 | URL
뭔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지요. 둘다 ˝분류˝의 달인 ㅎㅎㅎㅎ

책읽는나무 2018-10-13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 수도 있는 것을 안 할 수 있는 사람,
할 수 없는 일을 할 줄 아는 사람!!
음.....멋진 말이라,
이 사람은 어쩌면 멋진 사람이겠군!!
하며 미뤄 짐작해도 되나요?~^^
이게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어떤 문구가 떠올라요.
요즘 팟캐스트 요조,장강명의 ‘이게 뭐라고?‘를 듣고 있는데 소개란에 늘 이런얘기로 시작하더군요.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궁금한 것이 궁금한 요조입니다.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궁금하지 않은 것이 궁금한 장강명입니다.‘
라던데~~저는 늘 이 멘트가 와 닿더라구요.
같은 맥락도 아닐진대....syo님의 문장을 읽으니 왜 요멘트가 생각난건지???ㅋㅋ
참고로....야구에 대해서 잘모르지만 우리가족들 때문에 저는 롯데팬입니다.^^
뭐..그렇단...겁니다.

syo 2018-10-13 08:56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이제껏 무심히 들었지만 그 멘트는 절묘하네요. 나는 어느 쪽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제 멘트는 그냥 멘트 차원일 뿐이고, 아직 멋진 사람은 되지를 못했습니다.^-^

롯데팬이시라면 우리는 형제자매입니다. 야구에는 ‘엘롯기‘라는 말이 있거든요.

단발머리 2018-10-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르피평생아프디푸스>와 <모두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환상조합은 syo님의 글에서만 가능하죠^^
제 평생 목표로는 마르크스 관련서 15권이상 읽는건데 그게 이뤄진다면 다 syo님 덕분!!! 미리감사땡큐🤣

syo 2018-10-13 10:36   좋아요 0 | URL
평생 15권이라니, 통 크게 매년 1권씩 읽는 걸로 하시죠? ㅎㅎㅎㅎㅎ
제가 따라다니면서 뽐뿌해드릴게요 ㅎ

단발머리 2018-10-13 10:39   좋아요 1 | URL
막~~~~~ 믿고 의지하고 싶당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8-10-14 01:18   좋아요 0 | URL
너무 낭만적이다.....따라다니면서 뽐뿌라니.....😍

단발머리 2018-10-14 09:34   좋아요 0 | URL
뽐뿌하는 대상이 또.... 마르크스라서요. 멋짐이 두 배, 네 배, 아니 여덟배로 폭발합니다....😍

AgalmA 2018-10-1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포스트 보면 부담감이 심하신 거 같은데요. 남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은 일이지만 그거 때문에 여기서 글을 쓰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알라딘 월급쟁이 서평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의무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서 읽는 책, 내 감상이 1순위이고 그에 따른 평가도 전적으로 제 자유로 두는 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건 차후의 문제고요.
아무튼 syo님 글은 언제나 영양가 많다고요ㅎ!

syo 2018-10-16 17:16   좋아요 1 | URL
그래 보이시나요? ㅎㅎㅎㅎ

제 생각에는 부담감보다는 쪽팔림이 큰 것 같아요. 얘가 추천한 건 다 이러네, 안목이 뭐 이래- 랄지, 얘는 뭐가 웃긴 건지 뭐가 안 웃긴 건지도 잘 모르네, 센스가 뭐 이래- 랄지 하는 말들에 대한 것이랄까요?

제가 쓰는 건 뭐 사실 서평도 뭣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남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텐데- 하는 부담은 거의 없는 편이에요. 전 그것보다 훨씬 더 작은 인간이거든요.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려나, 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ㅎㅎㅎ

그리고 실은, 책 추천이야 망해도 푸념하고 말 뿐이지만, 개그센스에 대한 탐욕이 거대합니다...... 뭐가 웃긴 거고 뭐가 안 웃긴 건지 제대로 알고 싶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