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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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롤로그를 넘기기가 힘들어서 세 달 동안 읽지 못한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은 '진시황 프로젝트' 다음으로 올해 유치한 문장 때문에 사두고 못 읽을 책이 되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본편으로 넘어가자 선 굵은 서사의 기둥이 내용을 지탱했다.

인물들의 대화는 신윤복의 그림처럼 유려하게 지분거렸으며, 지문은 김홍도의 붓처럼 일필휘지로 뻗어나갔다. (바로 이런, 이런 비유 천지였다!) 하지만 가끔 가독을 방해하는 몇몇의 문장들을 포함하더라도, 그것을 만회하고도 남는(나중에는 뒷얘기가 궁금해서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컸다.

이 책은 역사를 비틀어 자신만의 눈으로 다시 짜맞춘 이야기의 재미가 가장 큰데, 스포일러의 위험 때문에 그것을 얘기하지 못하므로, 별로 할 얘기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걸출한 입담을 가진 대중작가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대중문학을 고를 때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정명이라는 작가가 재미를 보증할 것이다. 예전 '인간시장'의 김홍신이나 '야인'의 홍재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김진명처럼, 이정명은 확실한 대중문학의 아이콘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남성 중심의 호쾌함에 여성적인 섬세함을 더했으니, 그들의 업그레이드판이라 할 만하다.

다시 통속을 응원할 수 있게 되어서 좋다. 난 재미있는 문학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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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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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분석하고, 사랑의 의미를 찾아내서 사랑을 객관화하고, 사랑의 감정들을 구체화하여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잘' 사랑하게 될까?

여기 태고적부터 존재하던 앞의 의문에 대한 기발한 대답 중 하나가 있다.

젊은 건축가인 '나'는 런던발 비행기에서 동승한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한다. 비행기에서 눈이 맞은 둘은 서둘러 데이트를 하고, 어른다운 행동으로 스피디하게 연애의 방정식으로 빠져들어간다. 서로의 패턴을 발견하고, 생활을 공유하며 친밀해지던 그들은 어느 날 각각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사랑에 회의를 품게 되는데... 과연 이 둘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뻔한 스토리가 이 책의 전부다.

알랭 드 보통은 똑똑한 작가다. 그는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던 평범한 연애의 과정을 비범하게 해체했고, 그것을 기호화하고 구체화하여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사랑의 과정이 당신 사랑의 과정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사랑은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나에게 이 책은 충격이었다. 나의 사랑은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은 일반화되었고, 적어도 어떤 범주에 속했다. 그것은 나를 대단히 실망시켰으며, 반대로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어쩌면 '더 잘'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의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사랑의 해체 작업을 통해 사랑에 대한 명제를 많이 얻어냈다면, 그 위에 다양한 경험의 지층이 쌓였다면, 우리는 '더 잘'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사실 모르겠다. 나는 사랑에 대해선 어떠한 대답도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소의 위안이 되는 것은 아마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공유하리란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마지막을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보니 재미있지 않은가? 하하하."

그렇다. 처음과는 전혀 반대의 의미로 나의 사랑은 특별했다. 알랭 드 보통은 특별한 나의 사랑의 심장을 관통하여 나를 아프게 했고, 그것을 다시 꿰메주었다. 한 번의 수술을 거쳤지만 나의 사랑은 전혀 자라지 않았고, 그렇기에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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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 김용택
김훈 외 엮음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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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가도 퍼가도 마르지 않는 전라도 실핏줄 같은 '섬진강',

늘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가 있는 '그 여자네 집',

불쌍하게 쥐구멍으로 숨어버린 '콩, 너는 죽었다'

해가 질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산그늘처럼 걸어가는 '연애'...


나는 김용택을 잘 모른다.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꽤 많은 시가 그의 것이다.
그런 이들이 한 둘일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김용택은 모르고 그의 시는 많이 알 것이다.
네이버에 '김용택'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에 '프로게이머 김택용'이 나오는 슬픈 현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를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순수한 마음, 그 마음에 물들어 늘그막에 '순수병', '동심병'을 앓고 있는 49명을 바라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어릴 적의 눈망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김용택바이러스, 즉 '동심바이러스'에 감염된 작가가 이리도 많기 때문이다.

 
'용택 형'을 험담하며, 그리워하며, 질투하며 멀리 도회지에서 쓴 49통의 편지는 따뜻한 바이러스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글을 모아 재빨리 책으로 엮어버리는 <어른아이 김용택 간행위원회-김훈, 도종환, 안도현, 이병천, 이해인, 최열>은 풋풋하다. 그 노년들이 아이들로 돌아가는 모습이 파릇파릇하다. 그래서 자꾸 웃음이 난다. 오늘은 박장대소보다 이런 은근한 미소가 더 푸근해지는 저녁이다. 나도 '동심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일까. 얼른 퍼트리지 않으면 계속 실없이 피식피식 웃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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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의 바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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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후속편이 필요해요.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음산한 분위기로 시작했다가,
금세 끝나버리거든요. 공포영화의 예고편처럼.
분위기는 늘 같아요.
어떤 조짐, 불온한 분위기, 거대한 이야기의 시작.

마치 '모티브' 같아요.
아직 태어나지 않고 꼬물꼬물하고 있는 알의 껍질 같은 느낌.
이야기들이 폭발할 것처럼 끓어오르고 있어요.
근데 비등점엔 이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읽은 온다 리쿠의 첫 책이에요.
실망하긴 이르겠죠?
 

다른 팬들과 좋아하는 작가를 얘기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좋아하지 않는 장르와 친해지는 것도,
어떤 작가의 책을 처음 읽는 것도.
 
동네 공터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그렇게 설레이고 싶어요.
다음 책에선 그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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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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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도시에서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어. 나는 그곳 사람들을 하나도 알지 못해.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거야."

이야기의 마지막, 상도르는 자신이 (어쩌면 마음 속에서만)기르는 작은 새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모욕당한 친구들이 더이상 돌아오지 않는 도시에서, 저녁이면 문을 이중으로 걸어잠그고 인생이 흘러가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에 섞여 산다. 그는 공장노동자지만 또 슬픈 항해자이며, 그의 유일한 낙은 가끔 적는 항해일지다. 우리는 언젠가 그 항해일지를 꺼내어 들춰보며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이야기라고 부를 것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 작품 <어제>에서 사랑에 심장을 만들었다. 그가 심장을 만들자 그것은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도로. 뛰는 것을 멈추면 심장은 멎을 것이다. 그는 사랑의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작가다.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모든 사랑은 어제가 되어, 죽음과 동시에 아름다움이 된다.
내가 너를 증오하고 너도, 아무도, 아무것도, 인생도 증오할지라도, 인생은 결국 시간의 단호함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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